어떤 무림인의 미궁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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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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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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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1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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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반항

DUMMY

츠즈즈즛···


하유성의 살기에, 운동장 안에 있는 모든 토끼가 얼어붙었다.


사방에서 죄어오는 살기에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몰라 그들은 주춤주춤 서로 뭉치기 시작했다.


3레벨이 뿜어냈다고 보기에도, 절정 고수의 기준으로 봐도 말도 안 되는 살기의 양.


하유성도 사실 자신이 어떻게 이만큼의 살기를 내뿜을 수 있는지는 몰랐다.


천부적인 재능과, 세계를 넘어오면서 체험한 유사 죽음, 그리고 이 세계에서 개척자로 지내며 끊임없이 살생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경지니, 사실 그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가능할 것 같았기에 시도했을 뿐.


자신과 로엘리아가 구경거리가 된 게 화가 났고,

같은 낙오자 출신이면서 계속해서 노예로 남기 바라는 것처럼 구는 홍매와 랜든에게도 화가 났다.


동물원 안의 동물이나 할 법한 대회가 열린 것도 싫었고,

심지어 베르트랑 백작이라는 자가 그걸 선심이라도 쓰듯이 말한 것도 화가 났다.


무엇보다도 용서할 수 없는 건, 강해졌다고 희희낙락한 주제에 이딴 대우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


마치 광대처럼 원래 세계의 옷을 입고 뭐라도 된 양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신이었다.


이 자리에 어쩔 수 없다며 나와있는 것도 마찬가지.


“그래. 당신들이 바라는 구경거리를 보여주지.”


하유성의 살기는 이미 후원을 채우는 것도 모자라서 관객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물론 영향력 있는 권력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호위에게 지켜지고 있기에 별다른 걸 느끼지 못했지만, 호위가 없는 일반인이나 레벨이 낮은 이들은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고 숨이 가쁘게 쉬어지는 걸 느꼈다.


베르트랑 백작의 호위 기사들이 하유성을 제지하려고 하려던 찰나, 백작이 손을 들어 그들을 막았다.


하유성은 여전히 굳어있는 마물 토끼 한 마리를 집어 들어, 단검을 아주 천천히 쑤셔 넣은 다음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마리, 또 한 마리.


마침내 그는 열 마리의 토끼를 전부 관객들이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치켜든 상태로 참살(慘殺)했다.


관객들 중에선 비명을 지르는 이들도 있었고, 여전히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알랭은 화가 단단히 났는지 아예 학센을 두고 떠나버렸다.


하지만 그들 모두 같은 걸 느꼈다.

하유성이 그들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


나는 죽이는 쪽이다.

결코 이렇게 죽지 않겠다.

당신들의 놀음에 어울려주지 않겠다.


심신이 유한 이들은 그런 하유성을 보고 끔찍하고 잔인하다 여겼고, 그보다 강한 이들은 그런 하유성을 건방지고 불쾌하게 여겼다.


어느 쪽이든 그들이 기대한 방향은 아니었다.


“기록···! 3분 14초···!”


하유성이 경기장을 나가자, 진행을 맡은 베르트랑 백작의 수하가 말했다.


대회는 이어졌지만, 흥은 모두 떨어진 채 진행됐다.

하유성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보다 빨리 모든 토끼를 죽인 이도 없었다.


로엘리아는 아예 토끼를 한 마리 한 마리 정화 마법으로 마력을 태워 평범한 토끼로 돌려놓기까지 했다.


하유성이 자리로 돌아가자 학센이 귀신같은 얼굴을 하며 말했다.


“너, 미친거냐? 이 자리가 어떤 자린 줄 알고.”


“어떤 자리긴, 권력자들이 개척자를 발아래 깔고 있다는 걸 확인하려는 자리 아니오?”


“······.”


하유성의 말은 정곡을 짚었다.


애초에 이 연회에 온 것은 개척자들을 후원하는 권력자들뿐.


순수 개척자의 힘으로 권력을 얻은 시프노스와 같은 인물은 애초에 초대받지도 않았다.


무력은 권력의 도구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모임.


그게 이번 연회의 목적이었다.


“당신도 한 때 개척자였던 것 아니오? 이렇게까지 무시당하는 걸 참을 수 있소?”


“나랑 네 처지가 같다고 생각하지 마라. 알랭 님이 네게 벌을 내리실 거다.”


학센은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그도 내심 하유성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때 주변이 갈라지고, 한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 짝. 짝. 짝.


박수 소리의 정체는 바로 베르트랑 백작.


“인상 깊은 퍼포먼스였네. 알랭 상단주는 가신 모양이니 내가 대신 치하하지.”


그는 한 마디로 하유성의 행동을 하나의 연극으로 만들어버리고, 알랭 대신 자신을 하유성의 윗사람으로 만들어버리며 위계를 잡았다.


가히 정치적인 한 마디.


“딱히 그쪽에게 감사나 칭찬을 받을 일을 하진 않았소.”


그쪽이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백작의 호위가 자신을 죽일 듯한 기세를 내뿜었지만, 하유성은 꿋꿋하게 반존칭을 유지했다.


그는 자기 행동이 베르트랑 백작에게 칭찬 받을 일은 아니란 것을 주장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백작은 노련하게 피해갔다.


“내가 준비한 무대에서 보여준 일이니 치하할 수밖에. 애초에 상품도 걸지 않았나? 자 어서 받아 가게.”


백작이 신호하자 옆에서 하인 한 명이 고급스러운 붉은색 쿠션으로 이루어진 진열장 위, 비단처럼 생긴 원단을 가지고 왔다.


마더 아라크네의 실로 만든 원단.


실을 가져온 고용인은 단순 하인이 아니었는지, 원단을 하유성에게 수여하기 전에, 정해진 법식대로 물건의 내력을 한 번 읊었다.


“존귀하신 백작의 은혜로 주어지는 이 원단은 무려 6층 최상위에 해당하는 마물인 마더 아라크네의 실을 모아 짜낸 것으로······. 도검과 몇몇 속성 마법을 막아주고······ 하여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영웅의 길을 지켜주고 빛내는 상징과도 같은 역할을 ······.”


기나긴 설명에 하유성이 정신을 팔렸을 때, 원단은 이미 하유성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옆에서 학센이 무형의 기세를 발산하며, 어서 감사를 표하라며 눈치를 줬다.


하유성은 무릎을 꿇거나 하진 않고, 원래 세계에서처럼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귀물을 주어 감사드리오.”


“하하, 낙오자 출신이라고 했지? 무려 석 달 만에 3레벨을 달았다고. 그야말로 엄청난 기세로구먼. 그쪽 세계의 예법도 독특하지만 멋이 있군. 그렇지 않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건방지긴 하지만, 그래도 독특한 매력이 있네요.”


백작이 구태여 하유성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고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다른 이들도 맞장구쳤다.


“언제 한 번 손님으로 내 저택에 다시 오게. 그때는 좀 더 건설적인 대화를 해볼 수도 있음이야.”


베르트랑 백작은 그렇게만 말하고 등을 돌렸다.


중간에 홍매와 랜든이 그에게 달라붙어 기억하시냐는 둥, 아부성 말들을 내뱉었지만 백작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면서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쉽지 않은 인물이군.”


“당연하지. 베르트랑 백작은 귀족파의 거물이거든.”

하유성의 넋두리에 학센이 대답해줬다.


“귀족파?”


“그래. 너는 아는 게 없어서 끝까지 건방질 수 있어서 좋겠다. 지금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네 놈을 이용할 수 있어서 참는 거지, 원래 저 사람 눈 밖에 나면 우리 정도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알랭 님도 그걸 아니 일단 자리를 피하고 본 거지.”


“흠···.”


확실히 범상치 않은 자였다.

특히나 정치적인 역량은 거의 없다시피 한 하유성에게는 더욱 불가해한 인물처럼 느껴졌다.


연회는 계속됐지만, 주인이 사라진 하유성과 학센은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알랭은 학센을 따로 부를 뿐, 하유성이 호출되는 일은 없었다.


이로써 자신의 적의(敵意)를 명백히 드러낸 하유성.

이번 일로 분명 알랭은 어떤 조치를 할 테지만, 그걸 하유성이 알게 하지는 않았다.


학센도 알려주지 않았고, 다만 이전과 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그래도 이제 그런 자리에 데리고 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득인가.’


알랭은 같은 일이 벌어질 걸 걱정했는지, 이제는 홍보용으로 하유성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궁으로 임무를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하유성은 하릴없이 검술을 수련하며 처분을 기다리다가, 좀이 쑤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그가 고른 건 세이지 모르디엔.


다른 사람들은 만나기가 여의찮은 것도 있었고, 그녀에게 상담할 것도 있었다.

추가로 뒷말이 없는 걸로 봐선 잘 해결 됐겠지 싶어 신경쓰지 않고 있던 기사단과의 일이 잘 마무리됐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그는 미리 받아둔 연락 수단으로 연락을 취하고, 세이지의 거처 중 한 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오 유성 오라버니가 절 먼저 찾아주시다니.”


“···그 오라버니라는 호칭 좀 어떻게 안 되겠소?”


“뭐야, 역시 오빠가 좋은 거예요? 남자 아니랄까봐.”


“아니···. 아니오.”


대뜸 기선제압을 당한 하유성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최근 날이 선 상태로 있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니 조금 편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어쩐 일이에요? 요즘 오라버니 소식에 저 레벨 개척자들이 난린 건 알죠?”


“그 정도인가?”


“그럼요.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고. 물론 욕하는 사람들은 다 어디에 후원받으며 개척자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신념에 따른 단체 소속이거나 혼자 행동하는 프리랜서들이죠.”


“그런 걸 의도한 건 아니었다만···.”


“하지만 그만큼 의미 있는 행동이었죠.”

세이지가 금발 머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뭐 그건 됐고, 일은 잘 처리됐소?”


“아, 기사단 일 말하는 것 맞죠? 그럼요. 그 플로베라는 아저씨, 생각보다 유능하더라고요. 자신할 만했어. 뒤끝도 없고, 오히려 우리를 ‘언젠가 기사단에 보탬이 되고 싶어 하는 개척자들’로 포장해서 기사단 내부 여론까지 잠재운 모양이에요. 아니면 뭐 좀 더 윗선을 설득했거나···.”


플로베의 목걸이는 이미 해제를 한 상태였다.


아무리 목숨을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도시 내에서 기사단 사람에게 마냥 협박을 가하면서 일을 진행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해제한 다음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뒤끝이 없어서 다행이군. 네 일엔 지장이 없나?”


“어머, 저까지 걱정해 주는 거예요? 걱정 마세요. 저 생각보다 유능하니까!”


사실 세이지의 상황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다.

하유성의 임무를 맡았을 땐 파티가 전원 4층에 빠져버렸고, 이번 마검 사건에서도 불의의 사태로 파티가 전멸했으니, 사실상 커리어에 큰 오점을 두 번이나 남겼기 때문.


그러나 그녀는 하유성의 걱정이면 충분하다는 듯, 그에게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문제는 오라버니예요. 생각보다 양쪽 여론이 거세다니깐? 권력자들 입장에선 본보기로 쳐 죽이자는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안 그래도 앞으로 어떤 행보를 취할지 의견을 묻고 싶소.”


“그럼 그렇지. 치, 제가 마냥 보고 싶었던 게 아니군요? 로엘리아 언니를 이겼다고 기뻐했더니···.”


“그건···.”


“킥킥 농담이에요. 당장 꽤 중요한 문제긴 하죠. 실은 저도 좀 생각해봤구요. 알랭 상단주가 취할 수 있는 경우는 몇 가지가 있더라고요? 하나는 그냥 좀 폭탄 같은 오라버닐 감당하면서 계속 상단의 이름값을 올리는 것, 다음은 아직 영향력이나 힘이 그렇게까지 세지 않을 때 그냥 처리해 버리는 것, 아니면 지금이라도 오라버닐 회유해서 제 편으로 만들어 보는 것, 마지막으론 그냥 팔아치우는 거죠.”


“팔아치운다?”


“위험부담 없이, 오라버닐 원하는 다른 단체에 팔아버리면 알랭은 돈도 벌고 골칫거리도 해결할 수 있잖아요? 기사단도 그런 제의를 했었고. 아예 오라버니의 목줄을 더 꽉 쥘 수 있는 곳으로 팔아버린다면 그에겐 남는 장사겠죠.”


하유성은 플로베가 빚을 다 갚아주고 대우해 줄 테니 기사단으로 오라고 권유했던 걸 생각했다.


그래도 자신의 의사가 없으면 가지 않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듣고 보니 알랭이 목걸이 채로 팔아버린다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그럼 나는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하고 팔려 나가는 건가?”


“뭐, 당장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예요. 이미 거센 여론 때문에 오라버니를 원할 만한 단체가 그리 많진 않거든요.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도 대충 알 테고. 기사단이나 순찰대 같은 곳은 개인의 신념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진 않기도 하죠.”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후후 오라버니가 제게 의존하는 모습··· 아주 좋아요···. 짜릿해.”

세이지는 마치 새로운 것?에 눈을 뜬 듯 하유성의 질문을 만끽하다가 대답했다.


“알랭 상단주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건 오라버니를 회유해서 말 잘 듣는 노예로 지내게 하다가, 나중에는 상단의 프랜차이즈로 써먹는 거예요. 당분간 그런 척을 한다면 당장 팔릴 일은 없겠죠.”


“먼저 기어들어가란 말이군···.”


“그렇죠. 그런 연회 같은 델 몇 번 잠자코 참석하기만 해도 상황이 꽤 괜찮을 거예요.”


“···조언 고맙소.”


몇 마디 얘기를 더 나누다가 돌아간 하유성은 세이지의 계책을 받아들일지 고민했지만,

그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바로 다음날, 기사단에서 하유성을 사러 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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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8화 하피 24.09.06 57 4 13쪽
37 37화 사무소 24.09.05 68 4 13쪽
36 36화 심부름 24.09.04 68 3 12쪽
35 35화 가치 24.09.03 77 5 13쪽
34 34화 결투 (2) 24.09.02 72 5 12쪽
33 33화 결투 (1) 24.09.01 80 5 13쪽
» 32화 반항 24.08.31 82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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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9화 추격(2) 24.08.28 97 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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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화 마검(3) 24.08.25 98 3 12쪽
25 25화 마검(2) 24.08.24 100 4 13쪽
24 24화 마검(1) 24.08.23 112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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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2화 횡재 24.08.21 111 4 14쪽
21 21화 토벌(2) 24.08.20 112 4 14쪽
20 20화 토벌(1) 24.08.19 130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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