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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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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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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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다

DUMMY

두 무인과 말 한 마리가 점창산의 산길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운남 양식이 아닌 무복을 입고 있는 것 외에, 무인들의 행색은 그리 이상할 게 없었지만 말은 달랐다. 일단 덩치가 보통 말의 십오할 쯤은 될 듯하여, 어깨까지의 높이만 해도 7척에 육박했다. 온몸을 덮은 털이 칠흑같이 검었고, 윤이 나서 반짝였다.


말 스스로도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만한 용모였다. 그 안에 들어있는 의식이 사람만 아니었더라면.


‘이게···이게 무슨 꼴이야! 이 놈들은 사문과 친우의 원수인데!’


마교 좀도둑 두 놈이, 어기적거리며 도망치는 주옥을 기어이 잡아 이끌고 점창의 본산을 떠나는 광경이었다. 조씨 도둑의 허리춤에 매어진 합명의 한청검이 주옥의 원통함을 갑절 증폭시켰다. 조씨 도둑은 기분이 좋은지 동료인 둥근 얼굴 도둑을 돌아보며 유쾌하게 말했다.


“따라오길 잘 했지? 이 멍청한 짐승도 이제 잘 걸으니, 제 값에 팔 수 있겠어.”


“그래.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병신 말일까 걱정했는데.”


둥근 얼굴 도둑이 말을 받았다. 다행인 점이라면, 이들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동안 주옥이 네 발 걸음걸이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있었다. 발전은 발전이었지만 물론 위로는 전혀 되지 않았다. 흡족해 하는 두 무인 사이에서 말 한 마리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도망쳐야 해! 끌려갔다간 자칫하면 신강(新疆) 천산에 박혀서 여생을 보내야 할 지도 몰라!’


둥근 얼굴 도둑은 한청검보다 다섯 배 높은 값에 흑마를 팔아치울 생각이었다. 이 마교 놈들이 실컷 떠드는 이야기를 주옥이 엿들은 바, 이들의 인맥 중 그렇게 큰 돈을 지불할 수 있는 고객은 마교 본산인 천산에나 가야 있었다.


천산이라는 단어가 불안감을 자극했다. 운남은커녕 점창산 밖으로도 나가본 일이 많지 않은 주옥에게, 신강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천산 산맥은 상상할 수도 없는 오지(奧地)였다. 거기다 마교를 유독 배척하는 명문정파 무인들은 대개 천산의 이름 자체에서도 막연한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었으니, 그런 마귀 소굴에 끌려가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탈출해야 했다.


‘다행히 구속은 그리 심하지 않아. 대충 묶어둔 게 전부군.’


도둑들은 새끼줄로 대충 주옥의 목과 가슴을 한 바퀴 두르고, 그 끝을 잡은 채 이동중이었다. 구속이 이렇게 느슨한 것은 그들이 마구(馬句)를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는 몇 대 얻어맞은 말이 처음과 달리 아주 고분고분해졌기 때문이었다.


매 앞에 장사 없다고, 죽일 듯 난폭하게 굴던 흑마는 가벼운 탄지와 권장을 몇 대 얻어맞고는 두 인간에게 완전히 굴복했다. 적어도 도둑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편 그 흑마의 몸속에 갇힌 주옥의 머리는 쉬지 않고 탈출 계획을 세웠다.


‘내가 고분고분하게 굴수록 더 마음을 놓겠지. 적당한 때를 봐서 달려나가면 따돌릴 수 있을 거야. 점창산의 산세라면 내가 훨씬 더 잘 알 테니까.’


그 적당한 때를 고르는 것이 관건이었다.


일다경이 지나자, 이 일행 아닌 일행은 경사가 급하고 좁은 산길을 내려가게 됐다. 무인들에게야 어려운 길이 아니었지만 산만한 덩치의 말을 끌고 내려가려니 두 사람은 약간의 실랑이를 벌였다.


“짐승을 앞에 세워야지, 멍청한 놈아! 뒤에 세웠다가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너야말로 왜 이리 생각이 짧냐. 이 놈은 이제 겨우 제대로 걷고 있다고. 앞에 세웠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산기슭까지 굴러 내려갈 거다, 이 아둔한 놈아!”


그래서, 말이 가운데 섰다. 혹시 말이 미끄러져 굴러 떨어질까, 뒤에 선 둥근 얼굴 도둑이 새끼줄을 단단히 잡고 주옥 뒤를 따라 내려왔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주옥은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킨 채 천천히 두 도둑놈을 따라 길을 내려갔다. 말이 늑장을 부리자, 뒤에 선 둥근 얼굴 도둑이 짐승을 노려보며 욕을 시작했다.


“이 모자란 짐승이, 덜 맞았냐? 빨리빨리 안 따라내려···”


기다렸던 순간.


퍼억!


둥근 얼굴 도둑이 뒤로 날아가듯 쓰러져, 흙길에 처박혔다. 주옥이 다시 한 번 뒷발차기를 날린 것이다. 아까보다도 더 기습적인 일격이었지만, 이번에도 부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얼기설기 주옥의 몸을 묶고 있던 새끼줄이 뚝 끊어졌다. 도둑이 뒷발차기에 맞고 날아가며 새끼줄을 당기는 바람에,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끊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가장 당황한 것은 말 앞에 서 있던 조씨 도둑이었다.


“뭐, 뭐야?! 줄이 왜 끊겨?!”


당연히 그냥 끊긴 게 아니었다. 이렇게 어이없이 새끼줄이 끊긴 것은, 하산길에 몰래 해 둔 작업 덕분이었다. 순간 자유의 몸이 된 주옥은 곧장 몸을 돌려 내려오던 길을 다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흙길에 널브러져 아직 일어나지 못한 둥근 얼굴 도둑의 몸을 뛰어넘고, 주옥은 계속해서 위로, 위로 치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네 발로 걷지도 못하던 말이, 이제는 온 힘을 다해 경사로를 올랐다. 말의 뒤로는 성난 두 도둑의 외침이 흩어졌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뜀박질을 멈추지 않은 채 주옥이 생각했다. 새끼줄 작업을 해 두며, 그는 아주 이상한 경험을 한 뒤였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 * *


일다경 전,


‘새끼줄로 대충 묶여 있어. 이걸 끊을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한 주옥은, 두 무인의 시선을 피해 길게 늘어진 새끼줄을 한 번씩 어금니로 씹어 두었다. 결코 가는 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짚을 꼬아 만들어진지라, 말의 턱힘을 버티지 못하고 새끼줄이 점점 갉아먹혔다. 그런데, 새끼줄을 씹을 때마다 입 속에서 퍼지는 이상한 만족감.


‘···맛이 있어?’


한 번 새끼줄을 씹을 때마다 구수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지는 게, 몇 번이고 씹고 싶을 만큼 맛이 좋았다.


‘이게 대체 왜? 왜 맛있는 거지?’


경악스러운 일이다. 새끼줄을 씹는 게 맛있다니? 흙먼지가 조금 쌓인 게 좀 텁텁하긴 해도, 씹다 보면 그 밑에 숨어있던 깨 볶는 듯 고소한 향이 올라오면서 달큰하게··· 아니, 왜 맛 평가를 해? 짚으로 꼰 새끼줄 따위를 씹으면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주옥은 이따금씩 새끼줄을 씹어가며 맛을 음미, 아니, 탈출 계획을 수행했다. 새끼줄의 복잡미묘한 풍미를 즐기면서, 아니, 탈출을 위해 새끼줄을 점점 갉아 가면서, 주옥은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설마 말이 돼 버려서 이런 건가? 짚을 꼬아 만든 줄이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이것뿐이었다. 식성마저 말이 되어 버린 게 아니라면, 새끼줄 모양으로 꼬인 짚뭉치를 씹으면서 오는 만족감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말이 돼 버린 걸 이런 식으로 체감하게 되다니, 비참함이 한결 증폭됐다.


이후, 그렇게 탈출한 주옥은 요리조리 산길을 헤치며 도둑들의 추적을 따돌렸다. 인간 시절보다 키가 1.5배 이상, 몸무게는 열 배도 넘게 늘었지만 산길에는 워낙 훤했으니, 곧 어렵잖게 도둑들의 기척이 들리지 않는 곳까지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된 주옥이 갈 곳은 하나뿐이었다.


‘일단은 돌아가자. 사문의 상태를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겠어.’


확인 결과, 간단히 말하자면 점창이 당한 건 확실한 멸문지화였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 때쯤 점창의 장원에 들어선 주옥은 아까 미처 수습하지 못한 합명의 떨어져 나간 팔과 다시 조우했다. 한청검을 빼앗긴 팔은 아까보다도 더욱 끔찍해 보였다.


반면 팔을 제외한 합명의 유해는 연무장 한쪽 구석에서 발견됐다. 살아있을 거란 희망은 진작에 버렸지만, 그럼에도 팔이 떨어져 나간 친우의 사체를 직접 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잘려나간 부위가 피로 푹 젖었다 말라 시커멓게 보였다. 그 처참한 꼴을 보자, 주옥은 이루 말하기 어려운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일단 해야 할 일부터.’


주옥은 다시 쑥대밭이 된 연무장으로 돌아와 합명의 팔을 조심스럽게 입으로 물어 들고는, 그 팔의 주인이 잠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굽이 연무장 돌 바닥에 닿아 도각거렸다.


‘말이 됐건 소가 됐건, 친구로서.’


주옥은 친구의 죽은 몸 위에 물고 온 팔을 올려 주었다. 말이 돼 버린 자신에게, 더 이상 조의를 표할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흑마는 착잡한 심정으로 연무장을 한 바퀴 돌아본 뒤, 장원 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장경각, 점창파 내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다고 자부하는 곳은 마교에게 완전히 털려, 모든 서가가 텅 비어 있었다. 본파의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의사대당 내부는 차라리 연무장이 깔끔해 보일 정도로 엉망이었으며, 곤옥(崑玉)으로 만들어진 점창의 상징, 응두상(鷹頭像)은 박살나 뒷머리만 보였다.


어느 곳 하나 폐허가 아닌 곳이 없었다. 게다가, 들른 모든 곳에 문파인들의 시체가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육대 장로는 장원 내 곳곳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다 사망했고, 장문 어른의 주검은 완전히 폐허가 된 강당의 잔해 밑에 깔려 있었다. 누구보다도 강해 보였던 장문 어른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천하에 한 명 뿐일 것이다. 자신을 죽였던 그 자, 천마 곽처하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이토록 황폐했다.


하지만, 장로와 장문어른보다도 훨씬 주옥을 괴롭힌 것은 어린 제자들의 시체였다.


주옥은 생전 문파의 방침에 의해 직전 제자를 거두지 않았다. 대신, 배분에 관계없이 무공 지도 및 교정을 할 권한이 있었다. 스승이 아니라 사범, 그것도 전문 분야가 없는 보결 사범 대우였다. 장로라는 직위는 타 장로의 제자들을 가르칠 권위가 필요하니 명분상 부여된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유달리 각별한 제자들이 있었다. 가령 장경각 앞에서, 가슴에 깊은 예(乂)자 흉터를 입은 채 숨을 거둔 장요(張遙)가 있었다. 3년째 내문제자 생활중인 장요는 그 소질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주옥을 진심으로 따랐다.


‘주 장로님! 어제 일러주신 대로 기의 혈행을 바꿔 보니 훨씬 몸놀림이 가벼워졌습니다! 감사합니다!’


환히 웃으며 이런 말을 하던 장요의 입에는, 지금 커다란 핏덩이 하나가 엉겨붙어 있었다. 깊은 내상을 입고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했다는 방증이었다. 의사대당 앞에서 발견된 주검 공손정(公孫靖)은, 장요와 반대로 재능이 뛰어나고, 말수가 적었다.


곧 육대 장로중 한 명, 염화진인(拈華眞人)의 직전제자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였다. 그도 이따금씩 주옥을 찾아와 조언을 구하곤 했다. 하루는 주옥이 그의 나찰무(羅刹舞) 3초 무우각(無憂脚)을 봐 준 일이 있었다. 다음날, 공손정은 아기 주먹만한 유자 세 알을 조용히 들고 주옥을 찾아왔다.


“이소관(離巢館) 뒤편에 유자가 탐스럽게 열렸기에, 맛이나 보시라고 따 왔습니다.”


그리고는, 유자를 받아든 주옥 앞에서 어제보다 훨씬 나아진 무우각을 펼쳐 보였다. 하늘에 닿을 듯 힘차게 뻗어 나가던 그의 오른 다리는, 지금 어디론가 달아나 보이지 않았다. 말이 아닌 무로써 존중을 표하던 공손정은, 이제 다시는 어떤 것도, 어떤 방식으로도 표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망연했다. 이제 자신의 감정이 일시적으로 흐려졌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죽는 그 순간부터, 점창이 이렇게 되리란 것을 짐작했던 것 같다. 감정이 풍부했다면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주옥은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느 새 주변은 완전히 암흑에 빠졌다. 그 변화마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우두커니, 모든 것을 잃은 흑마는 곧 시커먼 밤에 완전히 삼켜졌다. 빛이 사라진 검은 세상에 검은 말 한 마리가 우뚝 서 있었으니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아니라, 세상 전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은 지독한 공허함이 흑마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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