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상한 천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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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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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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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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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DUMMY

점창 칠대장로의 말석을 차지하던 주옥은 강호행을 잘 나가지 못했다. 모든 제자들의 교육을 맡는 그의 중요성은 아주 높았으나, 본신의 무공이 없어 몸을 지키지 못했으니 문파의 수뇌부는 그의 출타를 반기지 않았다. 주옥 역시 무공 없는 몸으로 굳이 점창산을 나서야 할 필요가 없었으니, 점창산 밖의 세상은 거의 알지 못했다.


그랬던 사문이 사라졌다. 이상하게도 마교를 향한 복수심은 크게 일지 않았다. 평생 자신을 품어주었지만, 결코 모든 것을 주지는 않았던 사문의 태도 때문일까, 혹은 말이 되어버린 두뇌 때문일까, 어쩌면 그런 감정을 느끼기에 그저 너무 피곤하고 복잡할 뿐일지도 몰랐다.


그런 주옥이라도, 이제는 점창산을 떠나야 할 시간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동쪽 하늘에서 새로운 해가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떠나자. 여기엔 사문도, 인연도 없어.’


멍하니 서 있는 동안 하룻밤이 지나갔다. 그의 커다란 눈을 가득 채운 오늘의 햇빛이 아니었다면, 아마 언제까지고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을 것이다. 흑마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발걸음을 반복했다.


잠시 후, 길이 눈에 띄게 평탄해졌다. 좌우로 빼곡하게 보이던 나무들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하산했나?’


인간의 몸이었다면 아직 한참 산 속을 헤치고 있었을 것이다. 인간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보폭도 넓은 말의 몸이었으니, 걷는 속도도 빠른 게 당연했다. 점창산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약간은 앞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당황스럽네. 이제 어디로 간담.’


주옥이 자조 섞인 푸념을 읊었다. 자신이 그려 본 어떤 미래에도, 사문 점창파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 갑작스럽게 내던져졌으니, 앞길이 막막했다. 그렇게 꽉 막힌 말 머릿속에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히, 히익!”


누군가 놀라 기겁하는 소리였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열 장 정도 앞에 평범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괭이를 들쳐멘 채 한 쪽 발을 뒤로 뺀 모습이 그의 신분과 심리 상태를 짐작케 했다.


‘인근의 농민인가. 무공은 없군. 왜 저리 놀라는 거지?’


남자의 모습을 보고 주옥도 걸음을 멈췄다. 주옥의 의아한 말 눈빛과 남자의 겁먹은 사람 눈빛이 허공 어딘가에서 마주쳤다. 그 기묘한 대치 상태가 잠깐 이어지자,곧 자신의 의문이 얼마나 터무니 없었는지 깨달았다.


‘이 멍청한 놈아, 당연히 날 보고 놀랐겠지! 이렇게 산만한 짐승을 갑자기 마주쳤는데!’


본인이 짐승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아직도 익숙치 않았다. 그런 몸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마주쳤으니, 말도 할 수 없고 몸짓으로도 의사를 표할 자신이 없어 크게 곤혹스러웠다.


그 때 농부가 양손을 들어올리더니,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말이 놀라지 않도록 주의하는 모습이었다. 의문과 당황에 빠져, 주옥은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이윽고 바로 앞까지 다가온 농부는 흑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얼굴을 향하는 농부의 손에 주옥이 약간 놀라 움찔했지만, 농부는 아랑곳 않고 그의 볼과 콧잔등 따위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민망하네. 얼굴을 쓰다듬어?’


평생 누군가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은 일이 있던가. 기억을 되짚어 봤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농부의 몸짓과 표정이 진지해 왠지 그 손길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말이 몸을 빼지 않자, 농부가 천천히 말했다.


“옳지, 옳지··· 내 평생 네 발 짐승 눈이 이렇게 슬픈 건 처음 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덩치는 산만한 녀석이.”


그 말을 듣자, 새로 얻은 심장이 찌르르 울려 와, 그 위치를 확실히 알게 되었따. 지금껏 자신의 얼굴을 확인해 볼 생각도, 방법도 없었지만, 방금 무공 없는 농부는 자신의 얼굴을 말로나마 설명해 주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나,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 농부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아이고, 내 말을 알아듣나 보구나. 같이 가자. 억울했던 일은 다 잊고.”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또, 억울했던 일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곧 스스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이미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 * *


지학(志學,15세)이 될 무렵, 주옥은 사형 중 한 명인 위성(魏成)이 철응검(鐵鷹劍)을 연마하는 모습을 보고, 무심히 조언을 건넸다.


“사부님과 발의 방향이 다릅니다. 6초에서 검을 회수할 때 사부님은 두 발이 동북동과 정남을 향해 있지만, 사형은 동북과 남남서입니다.”


당시 주옥이 무공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사문 내에 익히 알려져 있었다. 위성 역시 그 사실을 알고 가시 돋친 말로 그를 무시했다.


“흥, 평생 무공이라고는 쓰지도 못할 놈이 입만 살았구나.”


그랬던 위성은, 며칠 뒤 마당을 쓸고 있는 주옥에게 찾아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하다. 사부님께서 진심을 다해 사과하고 오라고 하셨다. 나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덕분에 무공에 새롭게 눈을 떴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혼자 철응검을 연습하던 위성은 도저히 진전이 없자 시험 삼아 주옥의 조언을 따라 봤다. 그러자 문제의 동작이 거짓말처럼 풀려나와 단번에 다음 초식과 이어졌다.


그 변화를 알아차린 사부가, 갑자기 무공이 발전한 경위를 물었다. 위성은 잠시 고민하다,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주옥과의 일을 이실직고 했다. 크게 노한 사부가 위성에게 당장 사과를 하고 오라 명해, 직접 주옥을 찾아온 것이었따. 사과를 들은 주옥은 이렇게 답했다.


“아닙니다. 사형께서 정진하신 덕이겠지요.”


위성과 그의 사부가 도리를 아는 자라 다행이었지만, 당시 주옥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대신, 무공을 쓸 수 없다는 제약이 사문 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곱씹었다.


면박을 당한 순간, 그는 당황하여 얼굴을 붉힌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 순간을 되짚을 때마다, 외려 위성의 입장이 이해가 됐다. 평생 내력 한 올 일으킬 수 없을 자신에게 훈수를 듣다니,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큰 모멸감을 느꼈을 것 같았다.


더욱이, 자신은 언제까지나 무공을 쓰지 못할 것이므로, 그렇게 면박 당하는 일에 익숙해져야 할 운명이었다. 무학을 연구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 연구 성과를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몸임을 깨달은 주옥의 나이는, 고작 15세였다.


‘하산해야 해. 여기선 아무 것도 될 수 없어. 민초로 돌아가서 나무를 베고, 농사를 짓자.’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위성 사건 이후, 주옥의 능력이 본파 내에 널리 알려져, 처음에는 동기와 사제들이 찾아와 조언을 구했고, 이후에는 사형들도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당대의 장로들이 찾아와 그의 능력을 검증했고, 이렇게 결론내렸다.


‘본파 제자 주옥은 비록 무공이 없으나 능력이 특별하므로, 그 능력으로 본파의 발전에 기여하게 함이 옳다.’


그렇게 문파에 남아 장로까지 오른 주옥이었다. 그랬던 주옥은 지금 이런 생각을 하며 허름한 초가집 한 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그 때 하산했으면 지금쯤 이런 집에서 살고 있었겠군.’


자신을 데려온 농부의 집이었다. 문 앞에서 기척이 느껴지자, 집 문이 열리며 여인 한 명이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누가 봐도 집에 돌아온 가장을 반기는 안주인의 모습이었다.


“어쩐 일로 벌써 오셨어요? 에그머니.”


농부의 부인은 흑마를 보고 약간 놀랐는지 감탄사를 내뱉었다. 농부는 씩 웃으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아, 뜻밖에 길에서 이 놈을 발견했어. 이렇게 덩치가 크고 튼실하니,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거 같아 데려왔어. 주인 없는 말 같아서.”


“잘 하셨네요. 이렇게 큰 말은 처음 봐요. 새까만 게 멋도 있으니, 관이나 무인들에게 팔아도 값을 잘 받겠어요.”


“뭐, 어떻게 할 지는 차차 생각해 보자고.”


농부는 부인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뒤, 창고로 보이는 건물로 들어가 마구(馬具)와 건초 더미를 가져왔다. 농부는 익숙한 손길로 주옥을 기둥에 묶고는, 앞에 건초 더미를 쌓아 주며 말했다.


“자, 맘껏 먹어라. 내일은 마구간을 만들어 주마. 우리 집에 말을 들인 게 벌써 이 년쯤 전이라, 지금은 네 잠자리가 없구나.”


농부는 건초 더미를 내려놓고, 말의 콧잔등을 두어 번 쓰다듬은 뒤, 그를 남겨둔 채 괭이를 들쳐메고 혼자 집 밖으로 나섰다. 사립문을 열고 나가는 농부에게, 부인이 물었다.


“다시 일 나가시게요? 운 좋게 얻은 말인데, 쟁기를 채워서 같이 일하지 그래요?”


그러자 농부는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됐어. 아까 보니까 그 놈이 눈물을 펑펑 쏟더라고. 어디가 아픈 걸지도 몰라. 아픈 게 아니라도 혼자 떠돌고 있었으니 기력이 떨어졌겠지. 하루이틀 쯤은 쉬게 두는 게 더 나아.”


그리고는, 휘적휘적 다시 걸음을 재촉해 일터로 나갔다. 농부가 떠나간 뒤로도 농부의 말은 여전히 주옥의 가슴을 울렸다.


‘한낱 낯선 짐승을 저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세상엔 저런 사람도 있구나.’


마교의 2인조 도둑과는 너무나 다른 마음씨였다. 마흔 가까운 나이에 죽었다 깨어나서 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처지가 되었건만, 아직 천하 사람들 중 저 농부처럼 조건 없는 호의를 베푸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조금이나마 힘이 났다. 그 때, 집 쪽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잉, 저 사람도 참. 이렇게 크고 튼튼한 말이 어디가 아프다고.”


농부의 부인이 작게 한탄하는 목소리였다. 어느새 그녀도 쪽마루에 나와 방금 데려온 말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투는 단순한 타박이 아니라, 진심으로 남편을 아끼고 안타까워 하기에 배어나오는 탄식에 가까웠다. 너무나 충격적인 일을 연속으로 겪어 경황이 없는 주옥에게도 그녀의 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곧, 농부의 아내가 마당으로 나와 흑마에게 손을 뻗었다. 주옥은 그 손길에 놀라 순간 움찔했지만, 곧 목 뒤에서 전해져 오는 시원한 느낌에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빗으로 자신의 갈기를 빗겨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주옥이 알아듣기를 바라듯, 이렇게 말했다.


“말아, 흑마야. 밥 많이 먹고 건강해져서 그이를 도와 주렴. 저는 하나도 모르고 가족만 생각하는 아둔한 사람이란다.”


독백을 듣는 동안 오만 생각이 찾아왔다. 만약 열다섯 살에 점창산을 내려왔다면 나도 이런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렸을까. 그런 삶도 퍽 나쁘지 않았을 터였다. 그 때, 집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얘야! 무슨 일이니?”


주옥의 갈기를 빗겨주던 농부의 부인은 얼른 손을 거두고 다시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다시 혼자가 되자, 눈앞 바닥에 놓여진 건초 더미가 눈에 띄었다. 짐승까지 생각해 주는 농부의 배려심에, 그를 묵묵히 응원하는 아내의 마음까지 더해진 양식이었다. 주옥 본인이 사람만 아니었다면 망설임 없이 이 건초들을 씹어 삼켰겠지만, 체면이 있지, 사람이 건초더미를 씹어삼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만이라면 모를까.


‘조, 조금만이라니! 정신 차려! 너는 사람이야, 사람!’


불쑥 찾아든 생각을 황급히 억눌렀다. 조금만 먹겠다니? 저 건초가 비록 맛있어 보이기는 해도··· 아니, 맛있어 보이면 안 되잖아! 짚신이나 짜고 새끼줄이나 꼬는 저런 지푸라기가 대체 뭐가 맛있다고···응? 새끼줄?


아까 새끼줄을 씹을 때 들었던 묘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눈앞에 놓인 건초 더미를 보지 않으려 해도, 누군가 억지로 시선을 잡아끄는 듯 계속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뱃속에서도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연신 울려댔다. 온몸이 원하고 있는 먹음직스러운 건초 더미를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이 닥쳐왔다.


‘그래도 저걸 씹어먹을 순 없어! 몸과 함께 식성이 바뀌었다 해도! 인간으로서 나는 절대!’


자기가 어디까지 인간이고 어디까지 말인가, 스스로도 헷갈리고 있었지만 지금만은 억지로 자존심을 다졌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포기하는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곧바로, 한 가지 결정적인 의문이 찾아들었다.


‘···그런데, 그럼 앞으로 난 뭘 먹어야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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