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정의가 있다면
27화 정의가 있다면
“전하. 좌의정 정인지가 취중에 실언하는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옵니다.”
떨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권람이었다.
“부디 그를 엄히 벌하시어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못하게 하시옵고 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싸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 권람이 의리있게 모든 걸 정인지의 주사로 규정했다.
“무슨 말을 할지라도 금수로 박제하는 건 철회하지 않을 것이니라. 나는 반드시 오충도감을 설치할 것이고 서책을 편찬하여 모두가 볼 수 있게 할 것이며.”
다시 금수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훈민정음으로도 만들어 아니 인쇄하여 만백성이 보도록 할 것이다. 이는 정사에 남을 것이니 후대가 조선의 금수에 대하여 참으로 자세히 알 것이다. 그러니 어찌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아. 이판.”
“이, 이르시옵소서. 전하.”
“그 가장 위에는 이유가 있어야겠지. 이유가 없으면 아니 될 일. 내 말이 맞는가?”
“지당하신 하교이옵니다.”
정사에 금수로 박제하겠다는 선언에 당사자들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최항은 울먹거렸고.
금수들이 틈나는 대로 정인지를 노려보는 건 그냥 뒀다. 저 정도는 마음대로 해주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니 말이다.
“응당 그리하는 게 옳사옵니다. 누가 감히 하교에 반대하겠사옵니까.”
금수가 아닌 권람은 이성을 유지하며 말했다.
“전하. 솔직히 고하겠사옵니다. 노비세전법의 철폐는 참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반발이 거세기에 백성을 살피시는 어심이 펼쳐지기에는 시간이 소요되는 게 사실이옵니다.”
제발 협상에 임해달라는 말이었다.
나도 생각이라는 걸 하는 사람이라서 여기서 더 압박하면 전선이 고착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협상도 협상 나름이었다. 상대와 동등하게 앉아 있는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무조건적인 항복 선언을 원했다. 그 대가로 무언가를 내줄 의향이 있을 뿐이다.
물론 정인지의 자살골로 협상 아닌 협상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긴 했다.
참 우습다. 시작은 상식을 세우는 것이었고 흑과 백을 잣대로는 잡는 것이었는데 뭐 하나 건드리면 폭탄이 터지듯 난리가 아니었다.
나는 범인이기에 꾸준히 쉬지 않고 공부라는 걸 하였고 모르는 건 최항에게 물었으며 알고 있는 역사에 대입하여 답을 찾았다.
“이리하지.”
권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패전(賜牌田).”
세습할 수 있는 토지를 사패전이라고 부른다. 가장 대표적인 유형은 공신전이었다. 모든 공신전이 세습되는 건 아니었지만.
사패전의 언급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조선은 고려의 농장을 경멸했으나 공신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공신전이 하사되었고 이 중 세습이 가능한 사패전도 있었다.
농장이라는 건 토지의 불법적인 침탈로 만들어진다. 행위의 전제는 세습할 수 있는 사패전의 유무였다.
이를 사전이라고 불렀고 이 폐단에 나라가 무너졌다.
하지만 조선이라고 하여 공신에게 사패전을 나누지 않을 방법은 없다.
충심은 곳간에서 나오는 법이다.
“사패전. 그래. 사패전.”
현재진행형인 조선의 모순은 역시 만악의 근원 과전법에서 시작되었다.
이를 해결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모순을 억제하는 것과 미쳐 날뛰게 두는 건 다른 영역의 일이다.
그 기준은 역시 사패전이었다.
“세습만 했다면 어찌 탓하겠는가. 조상이 공을 세워 후손이 편히 사는 세상을 욕한다면 그것이 어찌 바른 세상이겠는가.”
생각을 정리하며 계속 말했다.
“사패전을 세습하는 이는 반드시 민호의 토지를 겸병하여 소유권을 가졌다.”
이를 농장이라고 한다.
농장은 과전과 사패전이 경기에 국한되었을 때는 경기에 확장되었다.
태종 시절 경기의 토지가 부족하여 하삼도까지 확장했을 때는 하삼도에 농장이 생겼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거대해지는 것이 토지 겸병을 통한 농장이었다.
“농장이 확장되면 농장의 주인들은 더는 뺏을 땅이 없어진다. 하면, 말할 것이다. 관리와 백성에게. ‘개간하라, 경작하라. 그리하면 전조와 요역을 면제해 줄 것이니 서둘러 달려가라.’ 이렇게. 개혁이라며. 그리고 새롭게 개간된 땅도 침탈하여 농장에 속하게 할 것이다.”
고려 말의 폐단을 극복하지 못한 조선의 역사는 이를 끝없이 반복했다.
종묘사직의 마지막 날까지.
“그런데 어찌 농장의 확장을 정직하게만 하겠는가. 과전법이 세습을 금할지라도 수신전과 휼양전이 있으니 불편할 것이다. 그 또한 철폐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관리에게는 수조권을 주지 말자고 할 것이다. 그 땅조차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패전의 확장으로 모순이 극대화된 조선은 결국 과전법을 포기한다.
원래 한계가 있던 제도였기에 극복하는 건 당연하지만 문제는 본질에 칼을 대는 게 아니라 욕망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니.
“관리로서 전보다 불이익을 받는 것이나 농장의 주인들은 이미 세습하는 사패전을 가졌고 더 많은 땅을 확보할 기회를 노릴 수 있으며, 어리석은 관리들은 그때도 개간과 경작하라는 말에 달리고 있으니 멍하게 고개나 끄덕였을 것이다.”
농장 확대의 열망에 사로잡힌 조선은 직전법이라는 토지 제도의 변혁을 아무런 진통도 없이 진행하게 된다.
“그리고 더 집요하게 백성에게 징수하였겠지.”
모순의 끝에서 죽어가는 건 결국 백성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사패전의 확장은 큰 부담이었기에 태종 대왕께서 과감하게 칼을 휘두르셨다.”
태종 2년에 31,240결이었던 공신전이 태종 3년에 이르러 10,000결이나 줄어 21,200결이 되었다는 건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할바마마께서는 이를 경계하셨기에 공신 책봉을 하지 않으셨고 사패전의 분급도 하지 않으셨다.”
만악의 근원 과전법이 버젓이 존재하는데도 조선의 토지 제도가 아직 숨을 쉴 수 있는 건 태종과 세종이라는 희대의 명군이 뛰어난 개인기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종의 뜻을 어기며 사패전을 확장하고자 한 금수들이 있다.”
바로
“계유년에 튀어나와 날뛴 금수들이다.”
너희다.
“정난 공신이 되었으며 이유를 용상의 주인으로 만들었다면 또 공신이 되어 광범위한 사패전을 분급 받았을 것이다.”
한확, 정인지, 최항, 한명회, 권람은 1등 공신이었고 신숙주는 2등 공신이었다.
“혼란한 세상을 바로 잡아 나라를 세운 개국 공신도 아니다. 역모를 일으킨 적을 제압한 좌명공신도 아니다. 어떤 말을 보태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이유조차 없을 반역이었다. 너희와 이유만 있는 찬탈이었다.”
잔잔하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으나 이들의 표정은 참담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몇 번을 들어도 피할 수 없는 족쇄라고 느껴질 것이다.
“정당하지 않은 찬탈이다. 그 나라에서 공신이 된 너희는 과연 사람이었겠느냐? 너희가 욕망을 억제하였겠느냐? 아니다. 너희는 참지 않고 날뛰었을 것이다. 왜? 이유가 있으니까.”
너희가 바라던 세상.
“상상으로도 참담한 금수가 뛰어다니는 조선, 이 세상을 너희가 바라지 않았느냐?”
너희는 진심으로 원했을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농장의 나라가 된다면 백성에게 이는 금수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 세상에서 오직 이자들만 웃었을 것이니 어찌 금수가 아니겠는가.
“조선은 너희에게 가치가 아니라 먹어야 할 먹이에 불과하니.”
태종 이방원은 차례의 난을 통하여 왕이 되었다.
공신이 있었기에 공신전이 필요했고 태조 시절의 공신 등을 견제하고자 친왕 세력을 구축하여 사패전을 분급했다.
그는 분명 명군이었으나 불안한 조선을 반석 위에 올리기 위한 최선의 수로 사패전의 완급을 조율하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는 아니다.
감히 나를 이방원에 빗대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용상을 지켰기에 공신이 없다.
이방원처럼 왕권을 강화하고자 친왕 세력을 육성할 정치적 상황도 아니다.
나는 절정의 왕권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기에 친왕 세력이 불필요하다.
이방원처럼 조선을 반석 위에 올리는 게 아니라 이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건 바로 모순의 제압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모순을 방관하며 피를 빨아 먹고 있었다.
그 피를 빨아 먹은 그들은 농장의 주인이 되어 조선을 갉아먹을 것이며 조선은 더 팽창하지 못하고 유지와 쇠퇴만을 반복하며 서서히 침강한다.
나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금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자는 나의 처결이 가혹하다고 한다. 또는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단종을 향한 그들의 감정을 아예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여, 내가 틀렸는가. 아니다. 결단코 틀리지 않았다.”
그래. 예외를 둘 수도 있다. 배제할 수도 있다.
“예외를 둔다면 다시 농장은 살아서 숨을 쉴 것이며 확장될 것이니.”
그들의 농장은 정당하고 저들의 농장은 적폐인가.
“너희도 기회를 엿볼 것이다.”
그냥 다 적폐다.
흑과 백을 나눠서 몰수하였으나 어느덧 행위의 정당성은 통치의 영역으로 진행된 것이다.
“나는 이를 용납할 수 없다.”
역사는 분명히 말할 것이다.
하여 나는 바란다.
“살아서 정의를 무너뜨리고 세상을 어지럽히려고 한 너희의 죄를 감내해야 할 것이다. 봐야 할 것이며 느껴라.”
나는 부당함이 호의호식하는 역사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죽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기지 말라. 살아 있는 게 아니라 형벌이라고 생각하라.”
이유 없는 조선은 너희에게 지옥일 것이니.
“너희의 참담한 행위를 씻는 방법은 없다. 그저 묵묵히 버티며 일하라. 내가 너희에게 내릴 최고의 치하는 부관참시의 면제다.”
이제 묻겠다.
아니, 요구하겠다.
아니, 결정했다.
“노비세전법.”
그래. 어렵다는 건 알고 있다. 노비의 세습을 차단하는 건 노비제도의 폐지다.
“물리겠다.”
타협은 아니다. 나는 아직 살아갈 시간이 많다. 그리고 나는 하루가 갈수록 강해진다.
“그러나 종부법의 시행으로 종모법상 양인이었던 자를 노비로 신분을 격하시킬 수는 없다. 오직 노비를 양인으로 변정시킬 수 있다.”
하나씩 해내면 된다.
그러나 상응하는 대가는 받을 것이다.
“그 어떤 세습도 허용하지 않는 직전법을 시행할 것이다.”
나의 직전법은 수양대군의 직전법과는 이유부터 다르다.
수양대군의 직전법은 저들에게 천국의 계단이었으나 나의 직전법은 형벌이다.
“수조권도 주지 않을 것이다. 사패전이 없고 토지가 없는 너희는 전호를 괴롭혀서 더 많은 수확량을 가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답도 듣지 않았다. 이건 어명이기에.
“믿어달라는 말을 한다면 벌할 것이다. 왕위를 찬탈하려고 한 무리를 믿으라는 건 어불성설이니 말이다. 답할 기회도 바라지 말라.”
물론 지나친 채찍질은 마음을 상하게 하는 법이다. 심지어 핵심은 건드리지도 않았으니.
그래서 좋은 말도 했다.
“관리의 반발을 모두 무마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간절한 염원을 어명으로 윤허해 줄 것이다.”
그리고 염원이 무엇인지는 그때 말해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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