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을 총으로 쏴 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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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단풍
작품등록일 :
2024.08.2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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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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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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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흑화

DUMMY

17화 흑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회귀를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귀신에게 영혼을 저당 잡히더라도 그러고 싶었다.


그리할 수만 있다면 무조건 할 것이다.


이미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다른 준비도 완벽했다.


이제 기어이 돌아가는 것만 남았다.


가면 된다. 이제 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모든 준비가 다 되었는데 오직 한 가지, 과거로 갈 방법이 없었다.


간단한 문제가 발목을 잡고 말았다.


그래서 신숙주는 절규했다.


“!!!!!!!!!!!!!!!!!!!!”


이불을 머리에 칭칭 감은 상태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시전했다.


세상아, 이대로 떠나가라며 고함을 지르고 싶었으나 그건 도저히 어려운 것이었기에 마음의 비명으로 타협했다.

이는 승정원의 수장인 도승지로서 수치스럽고, 진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


진실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을까?


얼굴은 터질 듯이 빨개졌고 이마에는 힘줄이 솟구쳤다.


촉촉해졌던 눈가는 기어이 즙을 만들어 볼을 타고 내려 입도 적당히 적셔 주고 목까지 타고 내렸다.


“!!!!!!!!!!!!!!!!!!!!”


눈물은 흘렀으나 울지는 않았다. 누군가 눈물이 흘렀으니 운 것이라고 따진다면 참으로 우매한 것이다.


‘나도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실이었다. 신숙주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고하려고 했다.’


진실이었다. 하위지가 나타나면서 조금 더 고민의 시간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영의정을 하위지가 차지하고 말았다.


눈앞에 다가왔던 이조판서도 한명회가 채가더니 이제는 영의정까지 딴 놈이 낚아채고 말았다.


심지어 모기장이라는 어심에 가장 부합하는 정책도 집현전이 홀라당 가져가 버렸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거 없었다.


“!!!!!!!!!!!!!!!!!!!!”


이것은 오열이 아니다. 조선의 선비로서 위정자로서 양반으로서 당연히 표출해야 할 소리 없는 아우성이기에 신숙주는 더 최선을 다했다.


“!!!!!!!!!!!!!!!!!!!!”


입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생각보다 아팠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영의정을 도둑질당했는데도 나는 오열하지 않았다. 이런 절제력이 조선에 나 말고 누가 있다고 전하께서는 이토록 야박하시단 말인가.’


실제로 오열하지 않았다. 눈물이 흘렀을 뿐이다.


정말 슬프지 않았다. 그저 후회할 뿐이었다.


신숙주는 강인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숙주는 결국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조판서를 빼앗겼을 때도, 영의정을 도둑질당했을 때도 이토록 곤혹스럽지는 않았다.


인간의 육신이란 어찌 이리도 간사하며 보잘것없을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필생의 공력을 담은 소리 없는 사자후를 쉬지도 않고 펼쳤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꼬르륵


신숙주가 공복을 느낀 건 말이다.


“내가 끼니를 챙기는 건 배가 고프기 때문이 아니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 나를 챙기는 것이다.”


단호했다.


신숙주, 그의 관직 생활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


조정의 분위기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했다.


시작은 누가 뭐라고 해도 계유정난보다 충격의 강도가 컸던 수양대군의 급사였다.


거대한 권력이 중심부가 사라진 뒤 문무백관은 하늘의 태양이 어디로 향할지 지켜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허수아비에게 형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던 왕이 전권을 행사했다.


성삼문을 영의정에 올렸다가 파직했고 이제는 하위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금상의 정적이나 다름이 없는 한명회가 이조판서의 자리에 오른 것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데 어쩌면 본질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가 막힌 최근의 사건들은 문무백관의 머릿속에 딱 네 글자로 정리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벼락출세’였다.


성삼문, 하위지, 한명회.

생긴 것도 성향도 능력도 다른, 그냥 전부 다른 세 사람의 행적을 바라보면 나올 수밖에 없는 넉 자였다.


그리하여 갈대처럼 흔들리고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것만 같은 어심의 추이를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그리하여 문무백관은 어심의 흐름에 목숨을 걸었다.


바로 이러한 사상 초유의 혼란을 감지하고 드디어 몸을 움직인 거물이 있었다.


바로 우의정이자 명나라 황실의 외척인 한확이었다.


그는 마음이 무거웠다. 급변하는 조정에서 되도록 몸을 낮추고 있을 생각이었다.


물론 조선 정계의 최대 거물 중 한 명이었기에 편히 방귀를 뀌고 다녀도 누가 감히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용상의 주인을 갈아치우는 일에 양팔 걷어 올리고 나섰다는 ‘원죄’는 한확이라는 초유의 거물에게도 약간의 움츠림을 가지게 했다.


물론 한명회나 신숙주 혹은 정인지가 발 빠르게 움직이긴 했으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그들은 한확처럼 한 걸음, 한 마디가 무겁지 않았기에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는 곤란했다.


게다가 주변의 말들이 너무 많이 들어왔다.


-대감이 나선다면 전하께서도 못 이기는 척 물러설 겁니다.

-이 혼란을 잠재울 사람은 오직 대감이십니다.

-오. 위대하십니다.


그들의 간곡한 요청에 과거 세종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태산보다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거물이 칩거를 깨고 움직였다.


그 걸음의 목적지인 침전에 기거하는 왕의 목소리는 다소 까칠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하위지의 임명을 철회하라?”

“그러하옵니다. 적합하지 않사옵니다.”


성삼문이 영의정에 오른 것도 불편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같은’ 정난공신이라는 점은 그에게 약간의 안도감도 줬다.


하지만 하위지는 아니었다. 애매했고 찝찝했다.


이를 바로 잡지 못한다는 건 왕의 폭주를 방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하. 하위지는······.”

“내가 왜 그래야 하나?”

“전하. 하위지는······예?”


하위지의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할 때 왕이 말을 자르고 이상한 반문을 했다.


거물로 등극한 이후 잘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빠른 판단력이 생기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판단할 일이 너무 오래전이라서 자연스레 도태되었을지도 모른다.


왕은 들고 있던 붓을 벼루에 툭 던지듯 내려놓고 정색했다.


“하위지는 계유년에 흉모한 일이 발생했을 때 사직했고 나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왕의 입에서는 한확이 하위지를 불편해하는 본질이 나왔다.


계유년에 사직했기에 판의금부사 하위지는 강력했다. 그러면 영의정 하위지는 어떠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왕은 말했다.

[흉모한 일]

이미 공공연하게 언급된 표현이지만 금상의 발언 이전에 계유년의 일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언급한 바는 없었다.


그만큼 그 일에 대한 불쾌감이 크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확은 불길한 징조를 느끼게 되었다.


“이 사실만 해도 내가 그를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지 않나? 우의정 한확. 내 말에 어폐가 있는가.”


왕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담겨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별 시답지 않은 소리나 하고 있어. 미친놈인가?’


심지어 별로 깨끗하지도 않게 생긴 양반이 이러니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귀찮았다.


“우상. 내가 정난공신이라고 불리는 무리를 왜 그대로 뒀는지 아나?”

“예?”

“이럴 생각이다. 우상. 선택하라. 하위지를 영의정으로 인정하든지. 아니면 정난공신들 모두 목을 내놓든지.”

“예?

“왜 놀라지? 설마 모두 없었던 일이 될 줄 알았나? 나를 폐위하려고 한 무리를?”


한확의 얼굴이 빨개졌다.


“당초 그들을 온전히 용서할 생각이었다면 패물을 가져오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즉 정난공신이라는 자체가 법도에 어긋난다는 걸 한 차례 언급한 것이다. 내 말을 이해했나?”

“만일 전하께서 벌하신다면 어찌 막겠사옵니까. 신은 겸허하게 수용할 것이옵니다.”

“······.”


왕은 한확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대충 나를 벌할 수 있겠나? 나는 명나라 황실의 외척인데? 이 말이네?’


붓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말했다.


“경은 멀쩡할 것 같나? 내가 경을 벌하면 명나라에서 백만 대군이라도 보낸다던가?”

“······.”


한확의 얼굴이 거대하게 팽창했다. 이 기세로라면 궐보다 커질지도 모른다.


‘뭐, 뭐 이런.’


이런 정치 문법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생각조차 해 본 적도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리는 것만 같았다.


“명나라 황실의 외척이니 뭐니 그러는데 명나라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역도도 살려야 하나? 뭐. 그래. 세상일은 모르니 살려 줄 수는 있지. 멀리 좀 가야 할 수는 있겠지만. 이 정도만 해 줘도 억지를 부리지 않을 거 같은데. 사실 그냥 죽여도 아무 말 안 할 거 같긴 하다만.”


한확은 큰 위기를 느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개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에서 태동한 본질적이고 실로 두려운 위기감이었다.


명나라 황실의 외척을 죽여도 된다는 마음가짐 자체가 불경한 것이었다.


‘이건 바로 잡아야 한다.’


자신이 있었다. 한확은 조선의 누구보다도 타협점을 찾는데 능했다. 혈기로 가득한 왕을 잘 다독이면서 일을 도모할 생각이었다.


“전하께서 백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모기의 방비책을 나누고자 하신다고 들었사옵니다. 비록 집현전에 명하셨으나 신이 어찌 지켜만 보겠사옵니까. 믿고 맡겨주신다면 능히 감당할 것이옵니다.”


모기든 파리든 어차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수령을 통해야 한다.


그런데 가뜩이나 할 일이 많아서 입이 튀어나온 그들이 살기 바쁜 백성을 붙잡고 모기장이나 만들자고 말하겠는가.


그러니 어차피 보급할 수 없다.


‘하지만 금상이 주력하는 정책이니 우의정이자 명 황실의 대리인으로서 조선 조정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내가 나선다고 하면 어찌 감격하지 않으시겠는가. 바로 그때 하위지를 끌어내린다.’


최고의 묘안이었다.


“그리하도록.”


역시.

이제 호랑이 등에 올라탈 시간이었다.


“전하께 한 가지 더 고하자면 음. 신이 명나라 황실의 외척으로서······.”

“어서 오라.”

“신은 원래 있었사옵니다. 응? 도승지? 언제 왔나?”


상황은 한확의 생각과 달리 흘러갔다.


갑자기 신숙주가 오더니 왕의 시선이 옮겨졌고 한확은 말할 기회를 계속 놓치게 되었다.


그리고


“······.”


한확은 멍하게 궐 앞에 서 있었다.


‘이럴 수가.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다니. 필생의 공력을 다했거늘.’


왕은 보통이 아니었다. 한확은 거물이 된 이후 처음으로 좌절감을 맛보았다.


*****


한확이 오기 전부터 짜증이 좀 났었다.


진짜 하마터면 붓과 벼루를 다 집어 던질 뻔했다.


너무 열받아서.


공부하는 것도 힘든데 붓은 정말 나의 인내를 시험했다.


아니, 내가 말이다. 보고 외울 수는 없어서 적으면서 외운다. 그게 전형적인 대한민국 입시 공부의 정석이다.


그런데 이 썩을 붓이라는 건 너무 불편했다.


계속 구부러지고 글자는 마음대로 써지고 하. 진짜 연필 만들 방법이 없나. 이러고 있을 때 한확이 와서 떠들어 대니 좋은 말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처리해야 할 일이라서 겨우 요약 정리라는 걸 해 봤다.


이번에 나를 괴롭히는 건 노비였다. 노비종모법과 같은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 지금 발생하는 근본적인 문제였다.


“도승지.”

“예.전.하.”

“현재 선상노비의 수가······.”


말하다 보니 뭔가 좀 이상해서 신숙주를 쳐다봤다.


사람이 다 죽어가고 있었는데 어디 아픈가 싶다.


그래도 꺾이지는 않는 사람이라서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도승지. 그러니까 이 문제가 좀 복잡해서 묻겠네.”

“그.렇.사.옵.니.까.”

“······오늘따라 말투가 아주 경직되고 형식적인 거 같은 건 나의 착각인가?”

“그.렇.다.면.오.해.이.실.수.도.있.고.뭐.그.럴.수.도.있.고.모.르.겠.사.옵.니.다.”


이 인간이 미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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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3화 이조판서 수정(9월 13일/오후 1시43분) +45 24.09.05 7,547 29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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