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을 총으로 쏴 죽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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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단풍
작품등록일 :
2024.08.2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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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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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정상화의 길(1)

DUMMY

19화 정상화의 길(1)



“이판과 도승지에게 맡겼을 때는 일이 전혀 진행되는 것 같지 않았는데.”


모기장의 도면을 본 왕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했기에 한확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주재료는 갈포라고 하였나?”

“그러하옵니다. 칡으로 만들 수 있기에 백성들과도 가깝습니다.”

“참으로 훌륭하군. 그렇다면 백성들이 모기장을 쉽게 만들 수 있는가? 확인은 다 해 봤는가?”

“아직 반포한 것은 아니기에 손재주가 서툰 백성이 어찌 접근할 수 있을지는 모르옵니다.”


한확이 챙겨온 모기장을 대충 펼쳐 보였다.


“장인이 만든 것인지라 유독 섬세하긴 하지만 백성들도 갈포를 마련할 수 있다면 적당하게는 꾸릴 수 있을 것이옵니다.”


모기장의 실물을 본 용안에 흡족함이 가득했다. 고개도 쉬지 않고 계속 끄덕이고 있었다.


‘되었다. 이제 모기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겠지. 아니지. 방심할 수 없다. 마지막까지 신중해야 한다.’


사실 모기장의 일을 맡게 된 것 자체가 내키지 않았던 한확이었다. 그러나 왕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다.


“그나저나 도승지 신숙주가 가져온 도면도 나쁘지는 않았는데 이건 정말 놀랍군. 사람의 솜씨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가 아닌가. 대체 이건 누구의 솜씨인가.”

“집현전의 강희안이옵니다.”

“강희안이라.”

“조선 최고의 명필로 유명하옵니다. 가까이 두고 쓰신다면 어심이 흡족하실 것이옵니다.”

“오. 그렇다면 갈포도 그의 생각인가.”


분명 최항은 자기 이름이 언급되는 걸 꺼렸고 약조도 했었다.


한확은 이 점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했다.


“집현전의 최항이옵니다.”

“최항?”

“그러하옵니다. 말수가 끔찍할 정도로 적어서 불편하긴 하지만 가진 능력이 참으로 뛰어난 학사이옵니다. 가까이 두고 쓰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그런가? 최항이라.”

“예. 실은 이번 일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바로 그였사옵니다. 신은 그저 취합하여 고할 뿐이옵니다.”

“오. 그런가? 그처럼 뛰어난 인재라니. 내가 살피겠노라.”


모기장의 주역이 누구인지 들은 왕은 기뻐하며 고개를 두 번이나 끄덕였다.


‘그나저나 왕이 기뻐하는 일을 했는데 부하 직원에게 공을 넘기다니. 한확, 이 사람 갈수록 호감이네?’


그래서인지 한확을 쳐다보는 왕의 눈동자에는 신뢰라는 게 담기고 있었다.


“전하. 최항이 참으로 다재다능하옵니다. 모기장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잡다한 일은 그에게 맡기시면 빠르고 조속하게 훌륭한 성과를 내실 수 있사옵니다.”

“하하하. 알겠으니 그만하라. 내가 살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옵고 전하.”

“말하라.”

“그들은 원래 중책을 맡고 있었는데 얼마 전 영의정 성삼문이 집현전으로 다 보냈사옵니다.”

“기억나는군.”

“그렇게 세월만 보내기에는 아까운 이들이옵니다. 이참에 다시 중책을 맡기는 건 어떠하옵니까.”

“우상? 그런 건 왕이 알아서 할 텐데?”

“화, 황공하옵니다.”


왕의 권한에 관여할 의도는 전혀 없었으나 그리 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확은 흠칫했다.


‘그래. 그간의 일을 되새기면 금상께서 인사권에 예민하실 수밖에 없지.’


한확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더 할 말이 있나?”

“하교하신다면 그들을 당장 데려오겠사옵니다.”

“잠시 미루지. 내가 지금은 따로 공부하는 게 있어서.”

“음? 전하. 신이 부족하나마 보탤 수 있사옵니다. 무엇이옵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네. 더 할 말이 있는가?”

“아니옵니다.”

“물러가도록.”

“예. 전하.”


미련 없이 퇴궐하기로 했다. 해야 할 말은 했고, 하고 싶은 말도 했고, 집현전도 치웠고.


무엇보다 지긋지긋한 모기장 제작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되었으니 마음도 홀가분하고.


그러니 이대로 집에 가면 된다. 하지만 왕이 또 말을 걸었다. 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음. 그런데 오늘 보니 우상의 관복이 참으로 빛나는군? 다른 관리보다 유독 좋은 옷감을 사용하나 보군.”

“······그것이.”

“됐네. 탓하려는 게 아니야. 여유가 있으면 좋은 거 입을 수도 있지. 눈에 보여서 한 말에 불과하니 괘념치 말라.”

“황공하옵니다.”


관복 이야기가 나오자, 한확은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기로 했다.


이건 길어질수록 좋은 말을 들을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


몇 차례 경험했어도 대전에서 대신들과 말을 주고받는 건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고 어려웠다.


침전에 찾아오는 관리들과 말을 주고받는 건 나름대로 선택과 집중이 이뤄지는데 대전은······아오. 상소도 많고, 대신들은 더 많고, 말은 더 많은데 나는 할 말이 없고, 시선 처리도 어렵고.


자고로 뭘 어쩌려고 해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으면 말이 줄어든다. 심지어 상대가 난다 긴다 하는 석학들이면 침묵의 시간은 길어지고 강도는 강해진다. 마치 교수실로 끌려가서 교수님의 쏼라쏼라를 듣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 인간관계를 쌓아야 하는 위기의 순간이면 더 말이 줄어든다. 마치 막 제대하고 동아리나 학과 생활에 다시 적응하려면 전과는 달리 말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과도 같다고 할까? 막 눈치나 살피고 어색하고 웃고 끼어들 타이밍도 찾지 못하는 예비역의 신세란 참으로 처량한 법이다.


한국에서야 전문가는 피하면 되고, 말수를 줄이는 뻘쭘함은 시간이 해결하겠지만 지금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데 내 신분이 왕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일이 진행되더라는 건 아주 슬픈 사실이었다.


그동안 나는 말했다.


‘그리하라.’

‘뜻대로 하라.’


정말 특별한 사정이 없을 때 내가 한 말이라고는 고작 이런 거였다.


물론 단종처럼 떠넘기면 되겠지만 그건 영 별로였다.


노력하고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해야 하는 게 세상살이였지만 잘하기 어렵다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노력이라도 하는 게 맞지 않겠나 싶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했다.


느리지만 천천히 한 걸음씩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공부도 부지런히 했고 하나씩 묻고 답하면서 좋은 회의도 해볼 생각이었다.


아니, 그냥 말로만 한 게 아니라 진짜로 할 수 있는 범주에서 정말로 열심히 했다.


독학하고, 신숙주에게 과외도 받고, 복습도 하고, 숙제 검사 받듯이 또 물어보고.


암기하고 다시 읽고, 또 암기하고 자기 전에 되새기고.


비록 광범위한 국정을 다 소화할 수는 없기에 고개나 끄덕이고 ‘경의 말이 어심이니라!’라는 말을 지껄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말이라도 제대로 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이러다 보면 아는 게 나올 것이며 제대로 된 물음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며 올바른 답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재능이 없을지라도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가 선택한 왕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그리고 오늘은 그동안 공부하며 알게 된 문제를 논의하고 물어보며 해결하려고 마음먹은 날이었다.


산적한 과제들, 아직은 잘 모르는 각종 상소의 내용들이 바람처럼 불타듯 지나간 뒤 나는 나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간다.’


이렇게 오늘 나는 왕의 길을 걷는다.


“영상에게 묻겠다. 일찍이 나는 과전법의 지엄한 법도를 어긴 농장의 경영을 논하였다.”

“그러하옵니다.”

“더불어 영상에게 병작제와 농장을 통하여 법도를 어긴 사례와 무리를 모두 색출하라고 명하였다. 한데, 어찌하여 구체적인 성과가 없는가.”

“전하. 시일이 걸리는 일이옵니다. 신을 믿어주신다면 성과를 낼 것입니다.”


하위지의 답변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감이 충만했다. 정말 시간만 있다면 훌륭한 실적을 챙겨올 것만 같을 정도로 신뢰가 가는 언행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묻고 논의하고 따질 게 있다.


자고로 준비해 온 건 해야 하는 법이다. 암기한 거 까먹을 수도 있고, 시기를 놓칠 수도 있으니까.


“늘 의아하였다. 어찌하여 조정은 이토록 느린가. 무엇을 하나 말해도 논의와 결정 그리고 집행에 한 세월이 걸리니 그래. 내가 죽으면 할 건가?”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전하.”

“우의정 한확과 집현전에 이르니 강희안과 최항이 단번에 모기장의 신묘한 묘리를 깨우친 대안을 만들어온 것을 보라.”

“황공하옵니다. 전하. 신 우의정 한확은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 최항과 강희안이 다 했사옵니다.”

“옳다. 반면, 이조판서 한명회와 도승지 신숙주에게 맡겼더니 뜨거운 우애를 나누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영상은 결과를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러하옵니다.”

“그렇겠지. 엄중한 사안이기에 생각이 많을 것이다.”


인간 세상은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다. 더불어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건드리자니 지인일 것이며, 탄핵하자니 사돈의 팔촌이었을 것이다. 그래. 고민되었겠지. 거론하자니 영의정의 임기는 짧고 그들과의 사적 친분은 영원히 필요하였을 것이니 말이다.”

“전하. 결단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면 뭐라도 보였던가? 보였다면 말하라. 경은 무엇을 보았나.”

“시일이 더 필요하옵니다.”

“또?”

“······.”


정말 시간이 필요한 걸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나는 정말 이렇게 생각했다.


“경의 말대로 능히 시일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본 부정을 기어이 언급할 것이다. 그러니 허튼 말은 멈추고 들어야 할 것이다.”


부정.

성삼문을 영의정에게 탄핵했고 단종의 측근이자 호위무사였던 금성대군과 경혜공주에게 철퇴를 내린 이유였다.


그런 내가 오늘 다시 부정을 언급하자 대신들은 움츠렸다.


과연 이번에는 어떤 부정이 조정을 흔들 것인가.


“좌의정 정인지.”

“······예, 예? 이르시옵소서. 전하.”

“경은 또 술을 마셨나? 지독하군.”

“아, 아니옵니다. 전하. 오해이시옵니다.”

“되었다. 고민이 많을 건데 술이라도 마셔야지. 내가 다 이해하느니라. 그래도 어전인데 집중이라는 걸 해보겠나?”

“성은이 망극······전하. 신은 정말 멀쩡하옵니다.”


혀가 꼬이잖아.

성질 같아서는 나를 필름 끊기게 만든 죄로 패버리고 싶다만 나는 술부심이나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참아준다.


“알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경은 일전에 노비의 일을 언급했다.”

“과연 그러하옵니다. 신이 고하겠사옵니다!”

“듣지 않겠다. 그저 묻겠다. 선상노비는 4만 4천여 명이며 봉족은 2명씩 배치되었다. 하여 13만 2천여 명이다. 맞는가.”

“그러하옵니다.”


조선은 봉족이라는 게 있었다.


공노비가 나랏일을 하는 건 당연한데 무상노동을 강요하면 굶어 죽는다. 노비도 본질은 사람이었으니 생존을 위한 방편을 마련해줘야 한다. 그렇다고 나라에서 월급을 줄 이유도 없고 형편도 안 되는지라 봉족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선상노비)는 일할 테니, 너(봉족)는 나를 먹여 살려!]


즉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나라 대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월급을 지급하는 사람들을 봉족이라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공무원의 월급을 식당 주인이 밥도 팔고 술도 팔아서 매달 200만 원씩 쏴주는 개념이었다.


“그들과 관노비 각사노비까지 모두 더하면 공노비가 얼마나 되는가.”

“30명······만 명입니다.”


아직 알코올이 남은 혀가 예술적으로 꼬이길래 지그시 쳐다봐 줬다.


“30만 명이옵니다.”

“선상노비 1명이 6개월 도성에서 일할 때 대가를 어찌 받는지 아는가.”

“어음. 그것은 아······면포 예. 면포 12필이옵니다.”

“답답하군. 쉬도록. 영상.”

“저, 전하. 신은 멀쩡하옵니다.”

“시끄럽다. 영상.”

“아니······.”

“예. 전하. 신 영의정 하위지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이르십시오.”

“선상노비의 일이 고되기에 그들은 남을 대신 보내고 있다. 알고 있는가. 이를 대립이라고 한다.”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신도 알고 있사옵니다.”

“좌상은 좀 조용히 하라. 나와 영상이 문답 중이다.”

“그것이······.”

“그냥 빠지라는 말이다. 눈치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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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20화 정상화의 길(2) +22 24.09.10 4,648 196 13쪽
» 19화 정상화의 길(1) +12 24.09.09 4,931 180 12쪽
18 18화 집현전 +15 24.09.09 5,204 191 15쪽
17 17화 흑화 +15 24.09.08 5,633 220 12쪽
16 16화 영의정 +11 24.09.08 5,465 191 13쪽
15 15화 침묵해야 할 이유 수정(9월13일/오후 1시 45분) +23 24.09.07 6,308 239 12쪽
14 14화 모기장 수정(9월 13일 / 오후 1시 44분) +20 24.09.06 6,948 250 12쪽
13 13화 이조판서 수정(9월 13일/오후 1시43분) +45 24.09.05 7,547 291 16쪽
12 12화 인생 참 수정(9월13일/오후1시43분) +33 24.09.04 7,891 298 16쪽
11 11화 내가 선택한 왕의 길(3) 수정(9월13일/오후1시42분) +37 24.09.03 8,084 33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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