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vs 마녀(105)
제이미의 분노
아칸 군단은 잔버크의 마지막 분지 앞에 진을 치고 있다. 사흘 전 나타난 마법사 무리 때문에 오크를 추적하는 것은 일단 멈췄다.
"헛소리를! 그딴 말을 믿으라고 하는 소리요."
노르딕은 탁자를 소리 나게 내리쳤다.
"흥, 내가 이 먼 곳까지 달려와서 헛소리나 지껄이는 사람으로 보이오?"
"그대들은 이것이 엄연한 침략 행위인 것을 모르시나 본데? 허락도 없이 타국에 전투 병력을 보내는 행위는 어디서 배운 것이오?"
"허락? 누구에게 허락을 받는다는 것이오? 윌리엄 대공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있고 두 왕자는 죽었고 대체 누구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건지? 그대들은 마족의 침입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니 한심할 지경이오."
"마족, 그 무슨 꿈속에서나 하는 말이오? 우리 솔라리스가 얼마나 밉보였으면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들먹이며 함부로 침입한다는 말이오?"
"기껏 도와주러 왔는데 이런 대접이야말로 화나는 일이오."
벌써 이틀째 노르딕 사령관과 베틀 워락의 타이탄 그놈 장군은 언성을 높이고 있다. 좀처럼 확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아칸으로 보낸 정찰병들이 돌아오면 알 일이요. 그대들이 마족 따위를 핑계 대고 솔라리스를 급습한 것인지 아닌지를···."
"눈은 형식으로 달고 있나? 이런 멍청한 장군을 봤나? 내가 쳐들어왔다면 이렇게 병력을 대동하고 당신 품으로 들어왔겠어? 멀리서 메테오를 떨어뜨리면 간단히 몰살 시킬 수 있는데!"
"뭐라고!"
"두 분 모두 진정하십시오."
제이미가 나서서 중재하자 두 사람은 입을 닫았다.
"만약 타이탄 장군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아칸 시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타이탄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아칸? 아칸은 이미 사라졌다. 마족이 미쳐 날뛰는 곳에서 멀쩡한 인간이 있을 수 있나? 오크 따위는 잊어버리고 아칸으로 진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말이야."
"허, 아칸이 어떻게 됐다고? 우리는 보고 받은 적이 없다. 지금이야말로 퇴각하는 오크를 섬멸시킬 절호의 기회다. 그 기회를 눈앞에 두고 마족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것을 보아라. 어제 날아온 전서구의 내용이다."
노르딕 장군은 서신 한 장을 탁자 위에 펼쳐 놓고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타이탄 그놈은 서신의 내용은 살펴보지 않고 서명자부터 확인했다.
"흥, 케이사르 후작? 이놈이 이번 사건의 원흉인 것을 모르나? 그놈의 편지나 받고 시시덕거리고 있는 꼴이라니."
"입이 있다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노르딕 사령관은 크게 화를 내며 검을 잡는 시늉을 해 보였다.
"허, 왜 뽑지 않고?"
그때 밖에서 경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미 백작님 백작님을 급히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치의 친서를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매우 급한 일이라고···."
"미치? 미치 형님이 보냈다고? 두 분 잠시만 자중하고 계십시오."
제이미가 천막 밖으로 나오자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경비와 함께 서 있었다.
"그대는?"
"미치라는 분이 보내서 왔다고 하면 제이미 백작께서 아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인가?"
"여기 서신을···."
사내는 품에서 서신을 꺼내 제이미에게 건네주었다.
제이미는 서신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갸웃하며 그 자리에서 서신을 펼쳐 읽었다.
글을 읽던 제이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하더니 급히 고함을 질렀다.
"내 말을 준비해라. 모헤드 남작은 어디에 있느냐?"
제이미가 급히 뛰어나가자 사내는 놀라운 속도로 달려나가 제이미 앞을 막아섰다. 제이미는 그것이 경신법임을 알고 그가 미치와 같은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왜 길을 막는 것인가?"
"만약 제이미 백작께서 서신을 읽고 경황없이 말을 찾거나 하면 그때 두 번째 서신을 주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어서 다오."
사내는 품속에서 두 번째 서신을 건넸다.
제이미는 즉시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편지를 움켜잡더니 다시 천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사내는 볼일을 다 봤다는 듯이 경비를 향해 포권지례를 해 보이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주변의 기사들은 모두 화들짝 놀라 사내의 움직임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인간이 어떻게 저리 빨리 달릴 수 있는지 어처구니없는 속도였다.
"타이탄 그놈 장군의 말이 사실입니다. 병력을 돌려 아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허, 이제야 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구먼."
"자네까지 왜 그러나? 케이사르 후작에게 온 서신이 버젓이 있는데 무슨 소리냐?"
"케이사르 후작에게 전서구를 날려 다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칸에서 마족이라고 판단되는 병력이 이 상도를 타고 행군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와 부딪치게 될 겁니다."
노르딕의 표정도 변했다.
"제이미 부사령관 자네까지 이러니 나는 어디에 초점을 둬야 할지 난감해졌네."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타이탄 장군의 말은 모두 진실이며 아칸은···."
"자꾸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그래? 케이사르 후작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그가 이번 사건의 주모자요. 아직 이해가 되지 않으시는구려. 쯧쯧."
타이탄 그놈 장군의 말은 노르딕에게 서서히 충격으로 다가갔다.
"도대체 아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오크를 쫓는 것은 포기하고···."
제이미는 급히 지도를 가져와 거칠게 탁자 위에 펼쳤다. 지도를 바라보던 제이미는 한곳을 가르쳤다.
"만약 그들이 정말 마족이라면 사방이 뚫린 벌판에서 그들과 싸울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놈들이 아칸을 나섰고 목적지가 엠버스피어라고 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엠버스피어로 후퇴해 그곳 사람들과 함께 방어진을 구성하는 것이고. 아니면 중간에서 매복하여 놈들을 치는 것인데 수적으로는 우리가 월등합니다. 그리고 테일리아드의 마법사가 가세한다면 어쩌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쯧쯧쯧. 당신들은 마족의 무서움을 몰라. 놈들에게 비하면 인간은 한낱 소 돼지에 불과하지. 마치 가축을 도축하는 것과 같을 거야. 애초에 인간은 마족과 싸울수 없어. 신체 능력이나 모든 것이 인간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월등히 넘어선 존재들이지. 마족 한 명에게 기사 백 명이 달라붙어 봤자. 놈을 잡을 수 없어."
점점 타이탄 그놈 장군의 말이 피부에 와닿기 시작했다.
"자네를 찾아온 사람이 누구던가? 그가 누구이길래 생각이 갑자기 바뀌었는가?"
제이미는 노르딕 백작의 말을 흘리고 지도에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매복하여 적을 친다면 이곳. 이곳이 좋을 겁니다."
노르딕은 제이미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타이탄 그놈 장군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대가 마침 그곳을 지나오면서 봤어. 매복하기 좋은 장소야 반 정도는 무너졌지만, 앞쪽에서 접근하는 소수의 병력을 방어할 정도는 충분해. 성벽 위에서 마법을 사용하기도 좋고."
제이미는 허리를 펴고 노르딕 사령관을 바라봤다.
"저는 오군단 병력 일부를 빼내 아칸으로 가 보겠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그들이 이미 아칸을 나와 이리로 오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 죽음 속으로 뛰어들 생각인가? 자네 혼자라면 말리지 않겠네만 죄 없는 오군단 병력의 죽음은 어떻게 책임질 생각인가?"
타이탄 그놈 장군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이미의 머릿속에는 아그니스 공주뿐이었다. 지금 당장 달려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마족과 한 번도 부딪쳐 본 적이 없으니 마족의 무서움을 알 리 없었다.
지금은 전설 속에서나 가끔 등장하는 단어고 살면서 마족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귀족 자재들의 역사서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보통 동화 속 이야기의 괴물이라는 거다.
"사령관님 오크는 잠시 놓아두고 현 사태를 자세히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케이사르 후작님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보고 우리 상황을 이야기해 보십시오. 반응을 기다려 봅시다. 그리고 병력을 전진시켜서 매복 준비를 해 놓으십시오. 정찰은 소수의 인원만으로 제가 직접 보고 올 것입니다.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다른 군단장들도 제이미의 의견에 찬성했다. 덕분에 타이탄 그놈 장군과 말싸움도 끝이 났다. 군단은 크게 술렁거리며 이동 준비를 했다.
제이미는 오군단으로 돌아왔다. 오군단의 수뇌부를 모아 놓고 회의에 들어갔다.
"마족이란 놈들이 과연 맞는지 확인만 하고 올 거야."
"그쪽 인원이 얼마나 되는 겁니까?"
"정보에 의하면 이백 명 정도 된다고 한다."
"이백 명?"
"농담 아니시죠? 이백으로 무얼 어떻게 하겠다고?"
"우리 군단은 오만에 가깝습니다."
"말이 안 되는 병력 차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자는 이야기다."
"마족이라니 무슨 전설 속 이야기도 아니고."
"그들이 아칸의 시민들을 모두 죽였다는 겁니까?"
"마족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갑자기 어디서 나온 겁니까?"
"모두 조용히 하게. 궁금한 거야 나도 마찬가지네. 기마대를 이끌고 먼저 놈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보겠네. 모헤드 남작 자네가 오군단을 지휘하여 일군단 뒤를 쫓아 이동하면 될걸세."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기마대 오백을 준비하되 활에 능한 궁사들 위주로 편성하고 다 끝나면 연락을 주게."
"알겠습니다."
부하들이 물러나자 제이미는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했다. 아그니스 공주가 준 모탈의 태양 마르테스를 허리에 찼다.
이 사실을 병사들이 알면 일대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병사 대부분 가족이 아칸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그니스 공주도 아칸에 있다.
물론 서신에는 모든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아그니스 공주는 무사하다고.
그러나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도 구하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그니스 공주가 알면 얼마나 낙담할 것인가?
"제이미 백작님 기마대가 준비되었습니다."
제이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 들어라. 아칸에 사소한 문제가 생겨 오군단 기마대가 정찰을 나가기로 하였다. 노르딕 사령관에게 허락을 받은 사항이니 모두 말에 오르라."
아칸 시티까지 전속력으로 달리면 사흘 정도 걸린다. 기마병 중에서 활에 능하고 빠르게 말을 몰수 있는 오백의 정예를 추렸다.
제이미를 필두로 오백의 기마대가 힘차게 달려나갔다.
이틀째 늦은 오후쯤 그들은 잔버크를 가로질러 샤미르 평원에 접어들었다. 샤미르 평원은 오크와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의 유리한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제이미다. 제이미는 기마대를 상도에서 벗어나 언덕 위로 올렸다.
조금 있으면 날도 저물어 간다. 시간적인 흐름으로 봐서 아칸 시티에서 출발한 이 백의 병력도 샤미르 평원에 도착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오늘은 움직이지 않는다. 불을 피우지도 않을 것이니···."
말은 곧 끊어졌다. 반대편 지평선 아래 가물가물하는 움직임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평원에서 높은 언덕 위에 포진하고 있던 터라 멀리 움직이는 사물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제이미는 즉시 병력을 언덕 뒤쪽으로 포진시켰다. 이백대 오백. 어쩌면 승산이 있는 전투가 될지도 모른다.
마족, 마족, 도대체 마족이 무엇이기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전설 속의 종족이니 마족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무서움을 지녔는지 전혀 정보가 없다.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리고 형체가 어느 정도 보일 정도가 됐다.
언덕 위에 납작 엎드려 관망하고 있던 제이미와 부관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은 아칸의 왕궁 경비병들이 아닙니까?"
"얼래? 임페리얼 나이트도 섞여 있습니다. 저들은 무슨 목적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칸 왕궁의 경비병은 일반 병사와 다르다. 이들은 군병이 아닌 왕궁 경호만을 목적으로 조직된 팬텀가드너 가의 사조직이나 마찬가지다. 군단 소속이 아닌 왕실 소속 경비이며 이들을 관리하는 왕실 기사들이 임페리얼 나이트다.
그런 그들은 전투 병력이 아닌 왕실을 지키는 기사들이다. 왕실을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올 이유가 없다는 소리다.
최후까지 왕궁을 보호하도록 명령받은 자들이 말을 타고 아칸 시티 밖으로 나왔다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다.
"어떻게 할까요? 제가 내려가서 일단 저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제이미는 잠시 고민했다.
"호위병 열을 데리고 가라. 저들의 우두머리가 누구이며 무슨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알아보라."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