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vs 마녀(184)
혼돈의 도가니
눈앞에 존재하는 사람은 허투루 말해서 통할 사람이 아님을 직감한 메흘린은 모든 정보와 의구심까지 모두 토해냈다.
"테드버드에 정보가 닿지 않았어? 그 정보는 레베카가 담당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알수 없는 일이군."
메흘린은 혹시나 황태자가 아칸으로 건너간다고 말을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황태자가 결심하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세렌이 내성을 공략했나?"
"지금 시간이면 내성 안으로 들어갔다고 생각됩니다."
"그래? 그렇다면 기다려보자. 세렌은 온두라스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도록 훈련했으니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거다."
"그럼, 정보가 오는 대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아. 어차피 침묵의 숲에서 내가 확인할 테니 문제없어. 여차하면 사령을 움직여 왕궁으로 가도 되니까."
"침묵의 숲으로 앨빈 장로를 뒤쫓는 사람들이 계속 모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귀찮은 파리떼다. 망자는 땅속에 숨겨 놓았으니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메흘린."
"네, 하명 하십시오."
"만약 맨시티 전체가 일시에 움직인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 같으냐?"
"네? 저번에 엠버스피어에서 이곳으로 올 때는 보름이 정도 걸렸으니···. 적어도 그 정도는 걸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문제는 윌슨의 용광로가 가장 큰 문제긴 하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너에게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다."
"말씀하십시오."
"아무도 몰라야 한다. 오직 너만이 알고 있어야 할 거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내성은 팬텀 가드너가만을 위해 꾸며져 있다. 건물의 중앙은 알현실이 있고 왕의 침실과 알현실은 50m에 달하는 통로로 이어져 있으며 가족이 머무는 우측의 건물에는 시종과 외곽 경비가 있고 왼쪽은 솔라리스 왕국을 통치하기 위한 여러 인물이 모이는 회의실이 있다.
중앙 건물과 좌·우측 건물을 제외하면 모두가 정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윌리엄 대공은 중앙 건물 왕의 침소에 잠들어 있으며 좌측 건물은 텅 비어 있었다. 두 왕자가 죽고 첫 번째 왕자비마저 떨어져 죽어 사망한 터라 왕을 직접 모시는 시종을 제외한 이는 모두 왕궁을 나온 상태였다.
특히 내성을 돌보고 담당하던 윌리엄 대공의 최측근인 왕궁의 집사이자 제이미의 멘토였던 맨허튼경을 쫓아낸 것은 시몰레이크 후작이었다.
그는 윌리엄 대공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외부인은 물론 내부인력까지 축소했다. 그 와중에 맨허튼경과 많은 시종이 왕궁을 떠나야 했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족이거나 온두라스 일행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지금 내성에는 시종이며 경비는 단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보호막이 살아난 이후에 내성에 있던 마법들이 모두 해제되었어."
아가므네는 어둠 속을 움직이며 내성의 분위기를 살폈다. 왕이 기거하는 내성은 암살자를 대비하기 위해 철저한 경비가 우선이었다.
왕궁 최고의 마법사들은 쥐새끼 한 마리도 숨어들지 못하도록 내성 곳곳에 마법의 덫을 설치하는가 하면 하루 4교대의 경비는 철두철미하게 왕궁을 수호했다.
지금 이곳은 마법도 경비도 그 어느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가지? 세렌 장로는 대기 명령을 받고 있을 텐데? 누가 이곳을 공격했을까?'
아가므네는 중앙에 보이는 높다란 건물을 바라보면서 높이 난 창을 바라봤다. 원래가 그런 식으로 훈련받았기 때문에 문보다는 창문이 더 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부 공기는 차가웠다. 이제 막 봄의 문턱으로 가는 길이라 아직 겨울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평상시라면 횃불이나 벽난로에서 뜨거운 열기가 궁 전체를 휘감아 돌겠지만 버려진 건물처럼 춥고 조용했다.
바닥은 완전한 대리석이라 살짝만 밟아도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리게 되어 있다. 숨어드는 자를 가장 싫어하는 곳이기에 작은 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설계된 덕분이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는 바닥을 디디지 않거나 맨발이어야만 했다. 아가므네는 텅 빈 알현실을 건너 긴 복도로 접어들었다.
복도에서 윌리엄 대공의 침실까지는 딱 직사각형의 통로뿐이었다. 천정도 없고 좌우 선반도 없는 땅굴과 같은 곳이었다.
외부인이 왕의 침소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이 복도를 지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숨을 곳이 아예 없다.
창문을 이용할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왕의 침실 창문은 쇠창살로 보호되어 있어 소리 내지 않고 부시고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는 구조였다.
아가므네는 심호흡을 한번 내지르고 조용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 몇 겹으로 덧댄 천 신발은 몸무게에서 오는 소리는 완전히 흡수했다.
암살자들이 착용하는 몇몇 종류의 신발이었다. 이전 같으면 앞뒤로 경비가 있어서 이런 식으로 당당히 들어갈 수 없지만, 지금은 경비는 물론 왕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종도 없었다.
아가므네는 복도 끝에 있는 왕의 침실 문 앞에 섰다. 이 방에 윌리엄 대공이 잠들어 있다.
문에 귀를 대어 보니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방에 들어갈 방법이 없다.
만약 온두라스나 마크라스가 있다면 곤란을 겪을 수도 있다.
이미 이곳에 들어올 때 각오한 바다. 운이 좋다면 윌리엄 대공 혼자만 있다거나 아그니스 공주가 있더라고 제압은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이다.
윌리엄 대공의 피만 받아서 성내 가장 높은 첨탑으로 올라가면 된다. 운명의 등불에 윌리엄 대공의 피를 붓고 불만 붙이면 끝이다. 아칸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를 제 손으로 완수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문에 귀를 대고 안쪽의 정황을 가늠했다.
'확실히 느껴지는 기색이 없어.'
온두라스와 마크라스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성 정문에서 기력을 뿜어 올리던 온두라스의 기세는 정말 대단했었다.
자신도 상대가 안 되겠다는 확실한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런 무서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는 순간에도 아가므네는 침착함을 잊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암살자로 살아온 덕분에 가지게 된 강심장이었다.
방안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복도 보다 더 차가운 냉기가 문틈에 쏟아져 나왔다. 음침한 기운과 함께 차가운 기운이 섬뜩함을 돋게 했다.
아무리 훈련받은 아가므네라 할지라도 사방이 막힌 곳에서의 어둠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창문으로 다가가 굵은 천의 커튼을 걷었다. 그제야 방안의 내부 모습이 들어왔다.
병자가 누워 있는 곳치고는 방 안 공기가 너무 차가웠다.
"아. 역시! 아무런 기척이 없다고 생각했더니···."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받듯이 덮여 있는 이불을 걷어 젖히고 손을 넣어 보았다.
천은 손이 시릴 정도로 냉기를 뿜어냈다.
"오랫동안 눕지 않았군. 어디로 옮겼을까?"
좌측은 회의실이고 알현실은 자신이 거쳐 왔었고 그러면 우측 가족이 머무는 성채뿐이었다.
아가므네는 즉시 방안을 나와 통로를 거쳐 중앙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 경비는 물론 시종도 눈에 띄지 않았다. 버려진 건물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우측의 건물에서도 불빛은 나오지 않았다. 그 흔한 횃불조차 밝히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을 것일 뿐.
아가므네는 천천히 우측 건물로 이동했다.
어둠에 휩싸인 건물이 긴장감을 더 끌어 올렸다. 사람이 북적하고 경비가 삼엄한 곳보다 한 층 더 집중했다.
이곳 건물의 구조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시종의 방도 많고, 사용하지 않는 방도 많았다. 방의 수만도 50개는 더 되어 보였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일이 방을 조사해 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곳 창문은 왕의 방과 달리 쇠창살이 없어 아가므네는 창문을 통해 방안을 들여다보는 식으로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있다.'
드디어 한 방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았다.
방안 침대에 사람이 누워 있는지 사람의 형체가 확실히 보였다.
제법 큰 방이라 왕가의 사람이 사용했을 법했다.
이런 나무틀의 창문 잠금장치는 쉽게 풀 수 있었다. 아가므네는 숙달된 솜씨로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서 쓰고 있었다.
아가므네는 단검을 왼손에 쥐고 천천히 이불을 끌어 내렸다.
'뭐야? 세렌 장로!'
맙소사.
침대에 곤히 누워 있는 사람은 세렌 장로였다. 두 눈을 감은 채 평온한 얼굴로 잠자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세렌 장로가 누구던가?
마교에서 교주 다음으로 강한 사람이다. 이렇게 이불을 내리는데 기척을 못 느끼고 자고 있다고?
숨소리를 느꼈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손가락을 목에 대어 보았다.
맥박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아가므네는 즉시 세렌을 흔들어 깨웠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세렌 장로. 일어···."
그제야 그녀가 점혈 당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점혈? 누가? 세렌 장로를?"
난감하다. 감히 누가 세렌 장로를 점혈 시킬 수 있다는 말이던가?
아가므네는 점혈 당한 세렌의 혈도를 쳤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뭐지?'
아가므네는 점혈을 배울 때 교주에게서 들었던 사실을 되새김했다.
"점혈을 풀 수 있는 것은 평범한 점혈 수법인 경우에 한해서다. 만약 점혈한 자가 너보다 더 강한 내공으로 혈도를 점했다면 풀지 못한다. 그리고 독특한 수법으로 점혈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마교에 점혈 수법을 하나로 통일한 이유도 이것이다."
즉 지금 세렌 장로에 걸린 점혈 수법은 아가므네 자신보다 더 강한 내공의 소유자가 점혈했거나 마교의 점혈 수법이 아닌 다른 독특한 방법으로 점혈했다는 소리다.
아가므네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대기 중인 세렌 장로가 왜 이곳에 누워 있는지 그녀를 제압한 인물이 누구인지 모든 것이 혼란 그 자체였다.
'가만 그녀가 이렇게 되었다면 제럴드 일행은?'
교주는 세렌 장로와 늘 함께하도록 제럴드 일행도 직접 가르쳤다. 세렌 장로와 그의 팀은 마교에서는 첫손에 꼽히는 팀이었다.
아가므네는 다음 방에서 어렵지 않게 일행을 찾아냈다.
제럴드, 브라이트, 크림슨, 로이드, 바실 그리고 앨빈 장로의 제자 와이어트까지 여섯 명이 방 여기저기에 누워 있었다.
'내성 임무조가 모두 잡혔다.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지?'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 온두라스가 다시 살린 정문의 보호막은 재가동 중이고 혼신의 힘으로 내리친 장력에도 꿈적도 하지 않았다.
'이거 생각보다 깔끔 서러운 놈인데?'
아가므네는 방안에 누워 있는 사람들의 모양에 중점을 두었다. 만약 이들을 제압한 자가 단지 제압만이 목적이었으면 아무렇지 않게 방안에 던져두었을 것이다.
세 사람은 침대에 가지런히 눕혀 놓았고 나머지 사람도 구겨짐 없이 곧바른 자세로 편안하게 뉘어져 있었다.
혹시나 해서 조사해본 결과 전원이 점혈을 당한 상태였고 풀리지도 않았다.
'그건 그렇고 이들이 내성 임무조라면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제이미 백작만 없었다. 아가므네는 방을 나와 나머지 다른 방을 모두 살폈지만 제이미 백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조사해 볼 곳은 좌측 성채뿐인가?'
아가므네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세렌 장로를 제압한 자였다.
점혈이라면 당연히 마교인만이 할수 있는 수법.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모그룩이었다.
모그룩은 서쪽 지구로 넘어오는 마족을 잡으러 간다고 사라진 뒤 오리무중이었다.
'아무리 모그룩이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있다고 하지만 세렌 장로를 제압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이 팀 전체를 혼자 제압하는 것은 교주님이 아닌 다음에야 불가능에 가깝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이 점혈로만 전원 제압해서 이곳에 깨끗이 뉘어 놓았다고? 진짜 교주가 와서 무방비 상태인 이들을 제압해도 이 정도는 아닐 거로 생각했다.
더욱이 세렌 장로의 인성은 마교에서 소문이 자자한 터다. 여성의 몸임에도 그녀를 여자로 보는 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보통 세렌 장로를 장난삼아 부르는 말이 마교의 마녀, 마교의 저승사자, 마주치고 싶지 않은 장로 1순위에 꼽힐 정도였다. 성격이 대쪽이 다 못해 교주 아니고서는 타 장로와는 말싸움조차 그녀를 이길 수 없을 정도였다.
그에 못지않게 무공 실력도 타 장로를 앞서고 있으니 말할 필요도 없는 존재다.
아무리 머리를 써도 점혈로 이들을 제압할 사람은 교주밖에 없었다.
'설마? 교주님이 아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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