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 죽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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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꿀호빵
작품등록일 :
2024.01.19 12:33
최근연재일 :
2024.07.2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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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7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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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살아남은 인간

DUMMY

경기도 안산시 백목산 인근.

거대한 벙커가 작열하는 태양 아래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지상에 드러난 외부가 모두 철제로 이루어져 있는 벙커 주변은 거대한 짐승이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대지가 갈라지며 무너져 있었으나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벙커에는 아무런 피해도 보이지 않았다.

벙커의 안에는 한때 한국을 주름잡았던 재벌들이 가득했다.

T-205. 극심해진 지구 온난화와 환경의 파괴로 세계 곳곳에서 재난이 심해지자 재벌들이 위기를 느껴 함께 건설했던 벙커였다.

방에서 나온 김상철은 복도를 지나가는 재벌들을 보며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다.


“최 사장! 빨리도 일어났네.”


T-205. 재벌들이 보통 편하게 티이백으로 부르는 벙커에 가장 많은 투자를 했던 건 다름 아닌 김상철이었다.


“누워있어봤자 잠도 안 오는데 어쩌겠어?”


과거였다면 서로 머리를 굴리며 한 번 대화를 하면서도 복잡한 계산을 깔아야 했겠지만 대재앙으로 절반에 가까운 인류가 사망하며 각국의 정부가 궤멸해버렸다 보니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제 수표의 가치는 청소할 때 쓰는 종이와 같거나 혹은 그보다 이하였다.

거대한 기업들을 굴렸던 대기업의 대표들은 재앙으로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해버리며 회사가 갖는 개념이 사라졌다 보니 이젠 티이백에서 앞으로 식량을 얼마나 소비하며 식수를 어떻게 충당할지만 고민해도 상관없었다.

매일을 쉬지 않고 바쁘게 살아왔기 때문일까?

굴지의 기업을 운영했던 대표들과 체스를 두고 잡담을 나누며 예전에는 누릴 수 없었던 여유와 늘어지는 낮잠에 빠져도 김상철은 요즘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오히려 요즘은 회사를 운영했던 과거가 더 즐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적어도 그때는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바쁘고 알차게 매일을 보낼 수 있었는데.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벙커에만 있다 보니 몸이 뻐근하며 괜히 머리가 굳는 느낌만 들었다.


“후우······.”


흡연실에 들어가서 담배를 피던 김상철은 물끄러미 맞은편에 앉아있는 조민수를 쳐다봤다.

사업 종목이 서로 같으며 실적이 비슷했던 조민수는 김상철에게 있어 라이벌이자 호적수였다. 물론 그것도 이젠 과거에 불과하지만.


“아, 씨.”


담뱃갑을 꺼내던 조민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담뱃갑은 완전히 비어있었다. 방을 나오기 전에 담뱃갑을 챙긴다는 걸 잊어먹은 것이다. 일거리가 사라지며 나태해지다 보니 괜히 스스로가 멍청해진 것 같아서 짜증이 울컥 솟구쳤다.


“어이. 조 대표.”


담배를 피던 김상철이 한 개비 뽑아놓은 담뱃갑을 내밀자 조민수가 고개를 들었다.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조금 싫은 기색을 나타내던 조민수는 이제 와서 방까지 돌아가기는 귀찮았기에 하는 수 없이 담배 한 개비를 받았다.


“참 웃기네요. 여기서 우리가 이러고 있다니.”

“그러게 말이야. 설마하니 진짜 이렇게 되리라고 누가 알았겠어?”


서로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기에 둘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듯 하면서도 불편하지 않은 미묘한 관계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세계가 멀쩡했으며 모든 것이 규격에 벗어나지 않게 돌아갔건만. 피폐해진 환경으로 지구의 순환이 붕괴하며 일어난 극심한 재앙의 변화가 김상철은 아직 낯설었다.


“오늘 점심은 뭐냐?”

“채은이가 그러던데 참치 통조림에 백반일 거 라더군요.”

“씨발. 매일 참치만 먹어? 아주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참치 되겠어.”


대재앙 이후 티이백에 오면서 처음에 가장 적응이 되지 않았던 건 무엇보다도 식사였다.

끼니마다 식탁이 부러질 만큼 가득했던 값비싼 요리들을 한 점씩 맛보며 남으면 아끼지 않고 버려도 충분했던 과거와 지금은 너무나도 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식량이라도 꽉 채워두는 거였는데······.’


벙커를 지어놓고 통조림만 넣은 뒤에 방치했던 게 화근이었다.

사실 처음 티이백을 건설할 때도 재벌들은 회의적이었다. 재난이 일어나기 전 대기업들은 건재했으며 굳건했고 빌딩들은 하늘에 닿을 만큼 드높았다.

설마 커다란 재난이 일어나겠어? 그럴 리가 없지. 지금도 이렇게 평화로운데. 아무렴. 그런 건 다 헛소리야라고 생각하며 재벌들은 종말론에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후우.”


김상철은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다 지나가 버린 일이었다. 이제 앞으로 살아가려면 티이백에 남아 있는 통조림이라도 잘 관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흡연실을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인이 밝게 웃으며 김상철에게 걸어왔다.


“아빠! 윽! 담배 냄새!”


김상철에게 있어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승아였다.

예전엔 아버지의 말이라면 절대로 반항하지 않으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수동적이었던 딸이 티이백에 온 뒤로는 사소한 것으로도 짜증을 내는 일이 많아졌다.

대재앙으로 회사가 사라지며 화폐의 개념이 없어졌기 때문일까?

김상철은 자신의 입지가 전과 다르게 낮아진 것 같아서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아빠! 내 방이 나율이 방보다 작아! 더 큰 방으로 바꿔줘!”


강나율은 강 대표의 딸이었다.


“승아야. 아빠가 전에도 말해줬잖아. 여기서는 아빠도 어쩔 수 없어. 그리고 니 방도 아빠가 볼 땐 충분히 큰 것 같은데?”

“치! 아빠는 그것도 못해? 여기 처음에 아빠가 가장 많이 투자했잖아? 그럼 아빠 지분이 가장 많은 거 아니야?”

“승아야. 꼭 그렇지도 않다고 전에 말해줬잖아.”


화폐의 가치가 사라졌다 보니 전에 가장 많은 투자를 했었다는 사실도 이제 와선 큰 의미는 없었다.

처음 티이백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땐 김상철의 목소리가 가장 컸으나 그것도 요즘 들어선 다른 재벌들이 점차 불만을 갖고 있었다.

과거에 수많은 직원들을 관리하며 회사를 굴렸던 대기업의 대표답게 김상철은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와 몸을 사려야 할 때를 잘 알고 있었다.

법도 정부도 사라져 버린 지금 벙커에서 누군가가 선동하여 집단을 만들어 사람들을 휘어잡기라도 한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몰라! 아빠 미워!”


승아가 짜증을 내며 가버리자 김상철은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이지만 이럴 때 만큼은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다.


“김 대표님도 참 힘드시겠네요.”

“말도 마. 어제는 와이프가 마음에 드는 옷이 없다고 어찌나 짜증을 내던지. 나 원 참······.”

“통조림이나 먹으러 가죠.”


쿵! 쿵!


난데없이 벙커를 울리는 거대한 소리에 김상철은 걸음을 멈추고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뭐야? 지진이야?”

“김 대표님. 저기. 저기 좀 봐봐요.”


뒤를 돌아보는 김상철은 어이가 없어 순간 말문이 막혔다.

붉은 무복을 입은 남자가 두터운 강철로 이루어져 있는 벙커의 문을 손으로 천천히 열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어찌 인간이 저토록 힘이 강하단 말인가?

붉은 무복의 남자는 벙커에 들어오더니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크게 미소를 지었다.


“나의 거점으로 삼기 제격이구나. 천(天)! 마(魔)! 괴(怪)!”


서로 외모와 체격이 비슷한 세 명의 남자가 순식간에 붉은 무복의 남자 앞에 나타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천마괴는 중국에서 예전부터 악랄하며 잔혹한 삼형제로 악명이 높았다.


“처리해라. 단, 여자는 죽이지 마라.”


팟!


천마괴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옆에서 찢어지는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옆을 본 김상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천의 가슴에 최 대표의 가슴이 뚫려있었다.

어떻게 사람의 손이 가슴을 꿰뚫을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의문이 들었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크흐!”


어느새 김상철과 조민수는 반대쪽으로 미친듯이 달리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난데없이 벙커에 침입해온 괴한들은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크아아!”


등 뒤로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철컥.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쓰러지듯 방으로 김상철이 들어오자 침대에 누워있던 승아가 퉁명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왜 그래?”

“여보. 숨넘어가겠어요.”


테이블 앞에 앉아서 사과를 깎던 와이프가 힐책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자 김상철은 황급히 승아와 아내의 팔을 붙잡았다.


“승아야. 우리 지금 당장 도망쳐야 돼!”


철컥.


등 뒤를 돌아보는 김상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삼형제 중 괴가 천천히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김상철은 황급히 침대 아래에 있던 엽총을 꺼내서 괴에게 겨눴다.


“멈춰. 움직이면 쏜다.”


순간 눈 앞에서 괴의 신형이 사라졌다.


“호오. 진짜 총이었나?”


순간 뒤에서 들리는 거친 목소리에 김상철은 눈을 부릅뜨며 황급히 뒤로 총구를 겨눴으나 이어져서 느껴진 건 허전해진 어깨였다.

왼팔이 잘려있었다.


“크아아아!”


왼팔이 뜯겨나간 부위에서 붉은 피가 쉬지 않고 쏟아지고 있었다.

김상철은 지독한 고통과 함께 점차 아내와 딸의 비명 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방에 들어오던 붉은 무복의 남자는 공포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 떨고 있는 김상철의 아내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여인이로군.”


붉은 무복의 남자는 고통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김상철을 차갑게 내려봤다.


“살고 싶거든 도망쳐라. 너의 아내를 봐서 한 번은 살려주도록 하겠다. 딸 또한 데려가도 좋다.”

“크윽!”


김상철은 한 손으로 장전되어있는 엽총을 붉은 무복의 남자에게 겨누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어느새 그는 눈 앞에 없었다.


“봐주는 건 여기까지다. 두 번은 없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김상철은 기겁하며 주저앉았다.


“여보. 빨리 가요.”

“헛소리 하지 마!”

“어쩔 수 없다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아내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김상철을 보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어금니를 부서질 만큼 꽉 깨물고 눈을 부릅뜨며 김상철은 하나 남은 주먹으로 바닥을 후려쳤다.

무력했다. 살면서 이토록 무력했던 적은 여지껏 없었다.

총알을 피하는 괴물들을 상대로 김상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김상철은 팔이 잘려나간 부위를 꽉 움켜쥐며 승아와 함께 천천히 방을 나갔다.


“꼭 데리러 올게.”


지켜질지 모를 약속을 남기며 김상철은 벙커를 떠났다.



“허억······.”


시야가 흐릿했고 목구멍은 바싹 타들어 가고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견디기에는 김상철의 부상이 너무 심각했다. 비틀거리며 눈을 감고 간신히 걷고 있는 김상철을 부축하며 승아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빠. 죽는 거 아니지? 그렇지?”


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정처 없이 걸어가던 김상철이 몸을 가누지 못하며 앞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아빠. 일어나봐. 어서 일어나라고. 흐윽······.”


눈물을 흘리며 승아는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승아는 너무나도 변해버린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하염없이 울던 승아는 인기척에 퍼뜩 고개를 들며 앞을 바라봤다.

무너진 건물 잔해가 쌓여있는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에서 검은 무복을 입은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제발 아빠를······.”


흑의를 입은 아름다운 용모의 여인이 걸어오는 걸 보며 김상철은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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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전쟁 24.04.27 63 1 12쪽
31 출진 24.04.21 61 1 12쪽
30 이면 24.04.15 66 1 11쪽
29 소나라의 왕녀 24.04.09 80 1 11쪽
28 아버지의 마음 24.03.20 118 1 12쪽
27 귀환 24.03.18 140 2 12쪽
26 다시 만난 처자 24.03.17 138 1 11쪽
25 병장과 상병과 일병 24.03.16 144 2 12쪽
24 빛의 마법사 24.03.05 149 1 11쪽
23 늦은 밤의 기나긴 대화 24.02.27 168 1 12쪽
22 장왕 24.02.24 189 0 12쪽
21 감기약 24.02.22 215 2 11쪽
20 기억의 편린 24.02.17 232 3 12쪽
19 세 가지 부류의 인간 24.02.15 256 2 12쪽
18 폭우가 지나간 자리 24.02.09 296 2 12쪽
17 간발의 차이 24.02.08 310 2 12쪽
» 살아남은 인간 24.02.07 340 4 11쪽
15 소문 24.02.05 370 2 12쪽
14 방주 점검 24.02.04 430 4 12쪽
13 목숨을 건 비무 24.02.03 448 4 12쪽
12 약탈의 시대 +2 24.02.02 534 3 12쪽
11 상승의 경지 +2 24.02.01 611 5 12쪽
10 비울수록 버릴수록 채워진다 24.01.31 622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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