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 죽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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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꿀호빵
작품등록일 :
2024.01.19 12:33
최근연재일 :
2024.07.24 21:10
연재수 :
3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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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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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간발의 차이

DUMMY

우진은 가파른 황톳빛 분지를 올라가고 있었다.


‘곤란한데······.’


죽염산에 올 때까지 습격해오는 약탈자들이 없었다. 아무래도 주변에 아문왕을 쓰러트리며 위험하다는 인상이 단단히 박혀버린 듯 했다.

다음에는 다른 지역까지 오고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방주 근처까지 온 우진의 시야에 빠르게 접근해오고 있는 검은 기모노를 입은 남자들이 보였다.

선두에 있는 무리에서 달려오던 다이스케는 우진을 보더니 눈을 부릅뜨며 황급히 멈췄다.


“사범님! 아무래도 저 놈은······.”

“시끄럽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우진은 무리의 가장 앞에 있는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의 온몸에서 날카로운 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서슬 퍼런 안광은 심장을 꿰뚫어버릴 것처럼 차갑게 번뜩이고 있었다.

흡사 날카롭게 번뜩이는 검과도 같은 노인은 우진의 옆에 오더니 물끄러미 노을에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 하늘을 바라봤다.


“젊은이. 어떤가?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


노인의 옆에서 찬연하게 불타오르고 있는 황혼을 보며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름답군요.”

“노을은 하루에 딱 두 번밖에 볼 수 없지. 그렇기에 그보다 아름다운 것도 흔치 않아.”


카게류의 사범, 이츠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진을 바라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경치도 봤으니 자네도 이제 아쉬운 건 없겠지?”

“꼭 이래야겠습니까?”

“자네의 사저가 내 제자를 죽였네. 그러니 이건 서로 공평한 것 아닌가?”

“정당한 비무였습니다.”

“허허! 내 알 바 아니네. 내 제자가 죽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거야.”


스르릉.


이츠키가 검을 뽑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변했다.

방금 전까지는 조금이나마 온화한 기색이 있었지만 이젠 사방을 갈가리 찢어버릴 것처럼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어 버렸고 카게류의 문하생들은 숨이 막혀 황급히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미 예전에 60이 넘었건만 이츠키에게선 전혀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검을 쥐고 있는 이츠키는 날카로웠으며 패도적이었다.


“니가 아문왕을 쓰러트렸다고 들었다. 조금은 나를 즐겁게 해줬으면 좋겠구나.”


쿠구구구구......


묵직한 소음과 함께 천천히 방주의 두터운 철문이 열렸다.


“사제!”


황급히 방주에서 뛰쳐나온 단아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달려오려고 하자 우진은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지금 다른 사람이 이츠키와 우진 사이에 들어온다면 칼날 같은 예기를 견디지 못하고 갈가리 찢겨나갈 게 분명했다.


“파극문의 57대 제자 서우진입니다.”

“카게류 도장 사범 이츠키다.”


우진과 이츠키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카게류의 문하생 리쿠토는 둘 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왜 둘 다 가만히 있는 거야?”

“에이! 멍청한 놈!”


다이스케는 후배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사범님과 저 놈의 비무는 이미 한참 전에 시작한 거야. 봐도 모르겠어?”

“다이스케 씨.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그러니 잠자코 더 지켜보기나 해.”


다이스케는 절정을 넘어선 고수들 사이에선 사소한 차이가 승패를 가린다고 선배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둘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미 서로 기세를 부딪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츠팟!


순간 대지를 박차며 먼저 움직인 건 우진이었다.


“헛!”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던 카게류 문하생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앞으로 나아가는 우진의 신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섬전 같은 신법이었다.

초연한 얼굴로 우진을 노려보던 이츠키의 검이 번뜩였다.

검로가 기이했다. 공간을 일축하여 앞으로 뻗어오는 것처럼 어느새 이츠키의 검은 지척까지 쇄도하고 있었다.

선(線)을 지우며 점(點)으로 이행하듯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기이한 검술에 우진은 파천무극섬(破天武極閃)을 펼치며 방향을 틀었다.


핏!


우진의 왼팔이 베여나가며 붉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베였으면서도 워낙 검이 순식간에 날아오다 보니 고통이 뒤늦게 느껴졌다.


“제법이구나.”


일 검에 끝내려고 했던 이츠키는 내심 크게 놀라고 있었다.


‘아문왕을 쓰러트렸다는 소문은 과연 허언이 아니었던 건가?’


우진은 겨우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이츠키는 내심 저토록 젊은 나이에 자신과 비슷할 정도의 경지에 오른 우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는 파극문을 나오고 카게류에 들어올 생각이 없는가?”

“설령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허! 아쉽군. 자네 같은 사람이 카게류에 있으면 참 든든할 텐데!”


사실 이츠키는 지금 카게류에 있는 문하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요즘 문하생들은 과거와는 달랐다. 과거에는 좀 더 오기가 있고 재능이 있으며 근성이 있는 투지가 가득한 사무라이들이 많았는데 요즘 문하생들은 의지가 빈약하거나 뚝심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자네를 죽이는 수밖에 없겠군.”


이츠키에게 온화한 기색이 사라지자 전력으로 앞으로 뛰쳐나가던 우진의 신형이 순식간에 우측으로 이동했다.


“엇?”


공간을 일축하며 전방으로 검을 뻗던 이츠키도 신묘한 신법에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로연마(右路連馬)로 우측으로 간 우진은 파천쌍룡(破天雙龍)에 이어 파천무쌍(破天無雙)을 날렸다.


쿵!


기묘했다.

이츠키의 신형이 물 흐르듯 좌우로 휘어지고 있었다.

파천쌍룡은 손에 스치는 느낌이 있었으나 파천무쌍은 허공을 타격하며 지나갔다.


콰아!


허공을 터트리는 묵직한 소리에 카게류의 문하생들은 황급히 귀를 틀어막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붉게 피멍이 든 옆구리를 내려보는 이츠키의 이마에서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방금 이어서 날아온 일격에 제대로 맞았다면? 온몸의 내장이 진탕되며 찢겨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츠키가 방금 보여준 신법은 카게류에는 없는 이츠키가 마연산에서 깨달음을 얻으며 만든 신법이었다.

홋카이도에 있는 마연산의 깎아지르는 가파른 절벽에서 이츠키는 1500일 동안 명상했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작열하는 뙤약볕이 쏟아져도 이츠키는 절벽에서 명상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에 이츠키는 카게류에 매진했으나 벽에 가로막혀 상승의 경지로 갈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명상하던 이츠키는 점차 공허함을 느꼈다.

공허하던 이츠키는 어느 날 절벽 아래 협곡으로 흐르는 강물을 멍하니 내려봤고 벼락같은 깨달음에 눈물을 흘렸다.

나가레루카와. 이츠키가 깨달음을 얻으며 창안한 신법이었다.

우진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이츠키의 몸은 흐르는 강물처럼 좌우로 비스듬히 빠져나갔다.

우진의 몸에 서서히 상처가 늘어갔다. 이츠키의 신법은 기묘하고 특이해서 손에 잡힐 듯 보여도 어느새 미끄러지듯 옆으로 빠져나갔다.


“소용없네. 그만 포기하고 카게류의 문하생으로 들어오게.”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둘의 혈투를 지켜보고 있던 금 장문은 침음하며 이마를 찡그렸다.

우진의 몸에 점차 상처가 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하여 피해가 쌓인다면 결국 우진도 언젠가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게 될 게 분명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제자를 도와주고 싶었으나 지금 함부로 뛰어들면 오히려 방해를 하게 될지도 몰랐다.

섬전무쌍(閃電無雙)을 펼치며 달려드는 우진은 안개 속에 뛰어든 것처럼 몹시 답답했다.

이츠키는 손에 닿을 듯 닿지 않고 있었다.

타격을 입힌 건 아직까지 파천쌍룡(破天雙龍)으로 이츠키의 옆구리가 스친 것밖에 없었다.

아문왕과의 결전으로 성장했다고 느꼈던 우진으로서는 그저 착잡하기만 했다.


‘아직 부족하단 말인가?’


이츠키는 어릴 때부터 당대 사범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던 검술의 천재였다. 자신의 손으로 사범을 죽이기 전까지 비등한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고 우열을 가늠할 만한 적수는 없었다.

이츠키로서는 우세를 점하고 있는 현실이 그저 당연하기만 했다. 지금까지 이츠키의 발 아래 죽어갔던 사무라이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슬슬 끝내도록 하지.”


이츠키의 온몸에서 흘러나온 예기가 날카로운 폭풍이 되어 사방을 휩쓸자 우진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이츠키는 푸른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가?”


사방을 찢어버리는 폭풍을 보면서도 우진은 오히려 초연해졌다.

우진이 그저 묵묵히 남아 있던 모든 공력을 끌어올리자 이츠키는 인심 좋은 노인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아!


장내를 울리는 거대한 소리에 카게류의 문하생들은 눈을 크게 뜨며 둘을 쳐다봤다.

이츠키의 검은 우진의 어깨를 베며 지나가고 있었다.

목과의 거리는 겨우 한 치. 만약 조금만 더 목에 가까웠다면 그대로 목이 꿰뚫렸을 게 분명했다.


치이이익......


우진의 주먹이 이츠키의 가슴을 꿰뚫고 등 뒤로 튀어나와 있었다.

이츠키의 가슴은 마치 뜨거운 불에 꿰뚫린 것처럼 이글거리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피를 토하며 이츠키는 허무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는 정말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야.”


격돌하는 순간 이츠키의 나가레루카와를 예상하며 우진은 파천무극섬(破天武極閃)을 펼치며 우측으로 다섯 보 더 전진했다.

이츠키가 움직이는 동선을 보고 행동한 게 아닌 도박이었다. 양강의 기류에 따라 날카로운 예기를 흘려보내며 본능에 모든 것을 맡겼기에 가능했던 기예였다.

무극무야광천하(武極無夜光天下)에 이츠키의 가슴은 일렁이는 극한의 고열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만약 마지막 절초가 빗나갔다면 패하는 것은 우진이었을 것이다.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은 이츠키의 몸이 점차 뻣뻣하게 굳어갔다. 우진이 주먹을 거두었으나 이츠키는 선 채로 죽어있었다.

천천히 몸을 돌린 우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카게류의 문하생들을 바라봤다.


“으! 으아아!”


절대로 패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사범인 이츠키가 죽자 카게류의 문하생들은 패닉에 빠졌다.

방금 이츠키와 우진의 일전을 보았기에 카게류의 문하생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절대로 쓰러트릴 수 없다. 모든 카게류의 문하생이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들더라도 우진의 옷깃조차 건드는 건 불가능할 게 분명했다.


“싫어!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다이스케를 비롯하여 카게류의 문하생들은 미친듯이 도망쳤다.

사범이었던 이츠키의 시신을 챙길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이츠키와 카게류 문하생들의 관계는 이득과 손해로 이루어져 있는 비즈니스 관계와 다름없었다.


“치졸한 놈들 같으니!”


지켜보고 있던 금 장문인은 혀를 차며 선 채로 죽어있는 이츠키를 땅에 눕혀줬다.

비록 적이었으나 지고한 경지에 들어섰던 검객이었다. 이츠키의 행실이 그간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금 장문인은 이츠키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 바라보고 싶었다.

뒤에서 살 떨리는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방주의 주민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살았다······.”

“왜 계속 저런 놈들만 오는 거야?”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며 강철을 장난처럼 구부러트리는 괴물들.

전에 아문왕인 묘남천이 게틀링 건과 포탑을 가볍게 피하며 파괴했던 것을 보았었기에 방주의 주민들은 우진이 쓰러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우진이 이츠키에게 쓰러졌다면 이츠키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방주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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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전쟁 24.04.27 63 1 12쪽
31 출진 24.04.21 61 1 12쪽
30 이면 24.04.15 66 1 11쪽
29 소나라의 왕녀 24.04.09 80 1 11쪽
28 아버지의 마음 24.03.20 118 1 12쪽
27 귀환 24.03.18 140 2 12쪽
26 다시 만난 처자 24.03.17 138 1 11쪽
25 병장과 상병과 일병 24.03.16 144 2 12쪽
24 빛의 마법사 24.03.05 149 1 11쪽
23 늦은 밤의 기나긴 대화 24.02.27 168 1 12쪽
22 장왕 24.02.24 189 0 12쪽
21 감기약 24.02.22 215 2 11쪽
20 기억의 편린 24.02.17 232 3 12쪽
19 세 가지 부류의 인간 24.02.15 256 2 12쪽
18 폭우가 지나간 자리 24.02.09 295 2 12쪽
» 간발의 차이 24.02.08 310 2 12쪽
16 살아남은 인간 24.02.07 339 4 11쪽
15 소문 24.02.05 370 2 12쪽
14 방주 점검 24.02.04 430 4 12쪽
13 목숨을 건 비무 24.02.03 448 4 12쪽
12 약탈의 시대 +2 24.02.02 533 3 12쪽
11 상승의 경지 +2 24.02.01 611 5 12쪽
10 비울수록 버릴수록 채워진다 24.01.31 622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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