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 죽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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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꿀호빵
작품등록일 :
2024.01.19 12:33
최근연재일 :
2024.07.2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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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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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왕의 전령

DUMMY

우진은 왕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제야 중요한 국정이 끝났다는 사실에 조금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알현실은 벽이며 천장이며 바닥까지 전부 흑색이다 보니 쉬어도 조금 답답해졌다.

이대로는 쉬어도 기분이 개운하지 않아 알현실을 나간 우진은 지상층으로 올라갔다.

벙커를 나가자 하늘은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대지를 물들인다. 주황빛 노을은 짧지만 강렬하기에 아름답게 타오르고 있었다.

노을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우진만이 아니었다. 우진이 오기 전부터 아름다운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메이드가 노을로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메이드의 흑빛 머리가 폭포처럼 흩어졌다. 검은 보석처럼 영롱한 눈을 깜빡이며 메이드는 붉은 노을을 올려보고 있었다.

여인의 새하얀 피부와 짙은 속눈썹, 날카로운 콧날과 붉은 입술에서 우진은 잠시 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메이드 여인에게는 단아와 은서와는 다른 이목을 사로잡는 특이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인기척에 옆을 돌아보던 메이드 여인은 우진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크게 떴다. 당황했던 그녀의 얼굴에 서서히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천천히 우진에게 걸어온 여인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좋아해요, 염제 님.”


제아무리 우진일 지라도 지금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100명이 넘는 고수들을 앞에 두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던 우진이지만 지금만큼은 수많은 생각이 빠르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오늘 너를 처음 만났다. 처음 만난 남자에게 함부로 할 말이 아니구나.”

“저는 오래전부터 염제 님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패도적인 자태와 압도적인 위용에 저는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악한 음모나 간계라면 우진은 지체없이 메이드 여인의 목을 손으로 부러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진은 그럴 수 없었다.

고개를 들고 올려보는 여인의 눈. 붉은 노을에 주황빛으로 물들어있는 그녀의 눈은 분명 진심이다. 지금껏 수많은 악인과 조우하고 지옥과도 같은 곳에 다녀왔던 우진이기에 알 수 있었다. 여인은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다.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오늘부터 곁에서 전하를 보필할 이예나라고 합니다. 전하의 전속 메이드가 되었으니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닿아있는 그녀의 몸에서 전해지는 부드러운 온기는 그동안 계속되는 전투로 날카로워졌던 정신을 조금은 평온하게 만들어줬다.

우진은 조심스럽게 예나를 안았다.


“노을을 좋아해?”

“네! 특히 바스러지며 사라지는 노을이 좋아요. 꺼져가는 불꽃은 마지막에 가장 아름답게 타오르거든요.”

“그래. 장렬하게 타오르는 노을은 아름답지.”


노을이 사그라들자 우진은 천천히 포옹을 풀었다.


“슬슬 저녁을 먹는 게 좋겠구나.”


우진은 지옥이나 다름없던 곳에서 돌아온 뒤로 그다지 갈증이나 허기를 느끼지 않게 되었으나 예나는 식사를 해야 하니 이제 돌아가야만 했다.


“전하! 그럼 제가 당장 식당으로 가서 요리를 만들어놓을게요!”

“아니. 너도 내 옆에서 함께 식사하거라. 식당에 요리사가 있을 텐데 굳이 너의 손에 물을 묻힐 필요 없다.”

“정말요?”

“상관없다. 앞으로 내 옆에서 식사를 하거라.”


벙커로 돌아가자 우진은 별실로 들어갔다. 우진이 거대한 식탁의 상석에 앉자 예나는 조심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 별실에는 사람이 없었기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잠시 후 메이드들이 수많은 요리들을 가져왔다. 요리들은 하나같이 테이블이 부서질 만큼 호화롭고 값비싼 요리들이었다.


“겨우 두 사람이 먹기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요리들이구나. 너무나도 양이 많아. 여기에 남겨놓는 것은 네 접시면 충분하다. 나머지 요리들은 벙커 밖에 살고있는 백성들에게 나눠줘라.”

“알겠습니다.”


메이드들은 황급히 테이블에 가득했던 요리들을 갖고 나갔다.


“예나야. 양이 부족하면 사양하지 말고 말해라.”


이예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이걸로 충분해요. 어차피 다 못 먹으면 버리는 거잖아요. 백성들에게 나눠줄 생각을 하시다니. 참 훌륭하세요!”


기분이 참 오묘했다. 지금껏 찾아왔던 인간들은 목숨을 빼앗으려 했던 적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름다운 여성의 애정은 여러모로 어색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자 우진은 별실을 나왔다. 나가는 그의 뒤를 예나가 따라갔다.


“전하. 제가 왕의 거처로 안내해드릴게요.”

“알았다.”


주왕이 죽기 전에 사용하던 거처는 지하 2층 복도 끝에 있었다. 끝에 있는 흑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좌우로 탁 트여있는 넓은 거처가 드러났다. 거처의 침대는 4명이 함께 잠을 자도 넉넉할 정도로 크고 호화로웠다.

방의 문을 닫은 예나는 우진의 품에 안겼다. 눈을 감은 예나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좋아해요, 염제 님. 저희들은 오늘 만나긴 했지만. 전 예전부터 염제 님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의 마음은 진심이에요!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저는 정말로······.”


우진은 부드럽게 예나의 하얀 볼을 얼굴로 어루만졌다.


“알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어.”


서로 알고 지낸 시간이 모든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10년 동안 알고 지냈던 친구가 배신하는 경우가 있고 5년 넘게 연애를 했던 연인이 바람을 피우는 경우도 있다. 인연이 이어지는 시간보다도 진심 어린 마음이 훨씬 중요하다.

허리를 숙이며 우진은 예나의 붉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우진은 그녀의 몸을 안으며 침대에 누웠다. 그녀의 볼이 서서히 붉게 번져갔다.



“하아··· 하아······.”


하얗게 드러난 어깨 아래로 몸을 이불로 가리며 예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침대에는 어지럽게 옷들이 흩어져있었다.

어젯밤이 떠오르자 예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격정적이었던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사랑해요, 염제 님.”


누워있는 우진의 굵은 팔을 끌어안으며 예나는 눈을 감았다. 단단하고 큰 철탑처럼 견고한 팔이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진은 손으로 예나의 흑단처럼 어두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팔에서 느껴지는 예나의 살결은 부드러웠다. 닿아있는 가슴의 감촉이 따스하다.

침대에서 일어난 우진은 옷을 입었다. 조금 더 예나와 침대에 누워있고 싶었으나 국정을 보려면 슬슬 일어나야만 했다.


“염제 님! 제가 아침 만들어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나는 저녁만 먹어도 충분해.”

“그럼 안 돼요! 거르지 않고 챙겨 먹어야 살이 빠지지 않죠!”


가슴 앞에 양팔을 모으고 뾰로통한 얼굴로 말하는 예나를 보자 우진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 덕분에 끼니를 거르지 말라고 했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오랜만에 기억났다.


“아니. 난 정말 저녁만 먹어도 충분해. 내 몸은 튼튼하니까.”


흑단처럼 고운 결이 좋은 검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예나는 우진의 팔을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알았어요. 전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니까. 뭔가 이유가 있는 거죠?”

“그래. 이제 나는 이만 가봐야겠어.”

“잠시만요! 제가 알현실까지 배웅해드릴게요!”


이불을 걷어내며 옷을 입으려던 예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우진의 단단한 등을 양손으로 힘껏 밀었다.


“염제 님! 잠깐 뒤로 돌아서세요.”

“어째서?”

“빨리요!”


예나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어지자 우진은 하는 수 없이 뒤로 몸을 돌렸다.

침대에서 옷을 모두 입은 예나는 싱긋 웃으며 우진의 등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됐어요.”


우진은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가슴에 안긴 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과거에는 남녀 사이의 애정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반드시 지켜줘야만 하는 사람이 생겼다. 설령 목숨을 걸어야 하더라도 망설이지 않고 예나를 지켜줄 것이다.


“가자.”

“네!”


방을 나온 우진은 지하 6층으로 내려갔다. 알현실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절도있게 고개를 숙인다.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알았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알현실로 들어간 우진은 왕좌에 앉았다.

잠시 후 신하들이 빠르게 알현실로 들어왔다. 신하들은 좌우로 줄지어 서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자유롭게 남아 있는 국정을 들어보겠소. 그대들은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말해보시오.”


눈치를 살피던 신하들은 서로 마주 보더니 수군거렸다. 작은 목소리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던 신하들은 의논이 끝난 건지 대화를 멈추고 처음처럼 좌우에 줄지어 섰다. 백발이 성성한 가장 나이 많은 신하가 천천히 우진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전하! 지금 저희 방주에 있어 가장 큰 적은 북쪽의 수라왕으로 사료되옵니다.”

“수라왕이라. 그 자는 강한가?”

“그러하옵니다, 전하. 그 자는 싸움을 무척 좋아하여 아수라로 불리는데 최근에 수많은 소국이 만연했던 북쪽 땅을 통일했다고 하옵니다.”


백두산의 폭발로 과거에 멸망했던 북한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수많은 군주들이 쉬지 않고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전부 차지한 건 수라왕이라고 신하는 설명해줬다.


“중국이 괴멸하여 북쪽 땅으로 넘어온 수라왕의 무력은 무척이나 뛰어나서 견줄만한 존재가 없다고 알려져 있사옵니다. 만약 수라왕이 남쪽으로 내려온다면 방주도 무사할지 장담할 수 없사옵니다.”

“아수라. 수라왕이라······.”

“전하. 이틀 전 주왕이 수라왕의 전령을 감옥에 가두었는데 한 번 만나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수라왕의 전령을 감옥에 가두었다고?”

“예, 전하. 주왕은 수라왕이 간사한 술수를 쓴다고 시기하여 전령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었나이다.”

“미친놈이로군. 그러다가 만약 수라왕이 기분이 상하여 쳐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랬단 말이냐?”

“부끄럽게도 주왕은 저희들의 말을 귀담아 듣는 군주가 아니었사옵니다. 말려보려 했으나 도통 저희들의 말을 듣지 않고 대신들과 놀기에 바쁘셔서 그만······.”


우진은 손을 들어 신하의 말을 제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여봐라! 감옥에 가두어두었던 수라왕의 전령을 이리로 데려오거라!”

“예!”


문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는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알현실을 뛰쳐나갔다. 잠시 후 병사가 밧줄에 묶여있는 남자를 데려왔다.

수라왕의 전령은 인상을 쓰고 우진을 올려보고 있었다.


“뭐야. 그새 왕이 바뀐 건가?”

“그대가 수라왕의 전령인가?”

“그러하오만?”

“지금 당장 저 자를 풀어줘라!”

“예!”


병사가 밧줄을 풀어주자 수라왕의 전령은 손목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당신은 조금 말이 통하는 사람인 것 같군.”

“무엄하오! 왕의 앞이오! 예의를 갖추시오!”


분노로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신하를 우진은 손을 들어 가볍게 제지했다.

수라왕의 전령이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는 것을 우진은 단번에 눈치챘다. 뛰어난 고수는 아니지만 일반인의 상대로는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진이라면 일격에 죽일 수 있기에 그다지 걱정은 없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곳까지 찾아온 것인가?”

“수라왕께선 강한 자와 겨루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나라에서 가장 강한 전사와 정당하게 비무하기를 원하고 계시오.”

“흐음······.”


과거 주나라였던 방주에서 가장 강한 전사가 누구인지는 고민해볼 필요도 없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전하! 지금 방주에는 병력이 너무나도 부족하옵니다.”

“수라왕은 터무니없는 괴물이옵니다. 과거 중국에서도 수라왕의 명성은 너무나도 드높아서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사옵니다.”

“전하. 병력이 부족한 지금 북쪽으로 전사를 보내지 않는 것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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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라왕의 전령 24.07.24 23 0 12쪽
38 총사령관 24.07.22 36 0 12쪽
37 나라의 새로운 변화 24.07.21 48 1 12쪽
36 복수 24.07.17 50 1 12쪽
35 남녀에게 평등한 주먹 24.07.15 59 1 12쪽
34 13번의 시험 24.07.03 58 1 12쪽
33 전쟁이 지나간 자리 24.05.13 62 1 12쪽
32 전쟁 24.04.27 62 1 12쪽
31 출진 24.04.21 60 1 12쪽
30 이면 24.04.15 66 1 11쪽
29 소나라의 왕녀 24.04.09 80 1 11쪽
28 아버지의 마음 24.03.20 118 1 12쪽
27 귀환 24.03.18 139 2 12쪽
26 다시 만난 처자 24.03.17 137 1 11쪽
25 병장과 상병과 일병 24.03.16 143 2 12쪽
24 빛의 마법사 24.03.05 148 1 11쪽
23 늦은 밤의 기나긴 대화 24.02.27 167 1 12쪽
22 장왕 24.02.24 188 0 12쪽
21 감기약 24.02.22 214 2 11쪽
20 기억의 편린 24.02.17 231 3 12쪽
19 세 가지 부류의 인간 24.02.15 256 2 12쪽
18 폭우가 지나간 자리 24.02.09 295 2 12쪽
17 간발의 차이 24.02.08 309 2 12쪽
16 살아남은 인간 24.02.07 339 4 11쪽
15 소문 24.02.05 370 2 12쪽
14 방주 점검 24.02.04 429 4 12쪽
13 목숨을 건 비무 24.02.03 447 4 12쪽
12 약탈의 시대 +2 24.02.02 533 3 12쪽
11 상승의 경지 +2 24.02.01 610 5 12쪽
10 비울수록 버릴수록 채워진다 24.01.31 622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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