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 죽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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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꿀호빵
작품등록일 :
2024.01.19 12:33
최근연재일 :
2024.07.2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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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9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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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라의 왕녀

DUMMY

며칠 후 고급스러운 검은 외제차를 타고 방주에 손님이 찾아왔다.

방주에 온 두 명의 남녀는 잘 다려진 검은 정장을 입은 백발의 노인과 아름다운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었는데 노인은 우진을 보자마자 깊이 허리를 숙이며 몹시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방주로부터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소나라의 테츠이라고 합니다. 여기 계신 이 분은 소나라 소왕의 왕녀인 모모코라고 하옵니다.”


우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며칠 전에 완공이 끝난 알현실로 테츠이를 데려갔다.

은서가 앞으로 필요하게 되리라고 했었기에 예전부터 만들었던 알현실에는 붉은 융단이 길게 깔려있었고 끝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왕좌가 있었다.

우진이 옥좌에 앉자 테츠이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소왕께서는 염제께서 왕녀님을 받아들여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앞으로 화의를 돈독히 하고 관계를 굳건히 하여 앞으로 난관이 닥친다면 서로 손발이 되어 함께 나아가고자 합니다.”


모모코는 피부가 하얗고 얼굴이 고운 아름다운 미녀였으나 우진에게는 아침부터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소식이었기에 마음이 다소 심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알현실의 옥좌에 앉아 눈을 감고 고민하던 우진은 천천히 눈을 뜨며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테츠이를 내려봤다.


“그대의 뜻은 알겠으니 여기서 지내는 동안 편히 쉬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테츠이가 모모코와 함께 알현실을 떠나자 우진은 눈을 감으며 한숨을 쉬었다.


“곤란한데. 갑자기 왕녀를 받아달라니.”


옆에 서 있던 은서는 짙은 속눈썹 아래 반짝이는 두 눈을 깜빡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주셔야 되요.”

“받아주라니?”

“지금 모모코를 아크 로드님이 받아주지 않는다면 방주의 위상은 무너지게 될 거예요. 지금은 소왕의 왕녀를 받아들이고 제왕에 걸맞는 풍모를 보여주셔야 되요.”


은서는 평소에는 우진을 가볍게 부르고는 했으나 상석에서는 단 둘이 있어도 높여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모모코와 나는 오늘 처음 만났어. 양국 사이에 받아준다는 의미는 곧 볼모를 의미하는 거잖아?”

“지금 아크 로드님이 모모코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방주의 위상은 흔들리고 주변의 소국들은 아크 로드님이 왕에 걸맞는 인물인지 의심하게 될 거예요. 지금은 받아주셔야 되요.”


눈을 감고 고민하던 우진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네 말은 일리가 있어.”


사실 우진은 왕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다지 탐탁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저 무인으로 살아가고 싶었으나 방주에는 엇나가지 않는 통치자가 반드시 있어야만 했고 하는 수 없이 우진은 왕으로서 방주를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오퍼레이터의 안내에 따라 모모코와 함께 알현실로 돌아온 테츠이는 몹시 감격하여 우진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소왕께서도 염제의 은혜에 깊이 탄복하실 겁니다!”


다음 날 테츠이가 방주를 떠나고 소나라로 돌아가자 모모코는 우진을 곁에서 따라다니며 보좌했다.


“필요하신 것이 있거든 무엇이든지 소첩에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모코는 우진이 식사를 할 때면 옆에 앉아 술을 따랐고 우진이 목욕을 하러 욕탕으로 들어가면 떠나지 않고 목욕이 끝날 때까지 문 밖에서 손을 모으고 기다렸다.

단아는 내심 모모코가 너무 우진과 가까이 붙어 다니자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우진에게도 무언가 생각이 있으리라고 짐작하며 별다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틀 뒤 욕탕으로 들어가려던 우진은 모모코가 문 밖에서 기다리려고 하자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모코. 앞으로는 욕실 밖에서 기다리지 말게나.”

“혹여 소첩이 무슨 실수라도 하였습니까?”

“아니. 그대는 실수하지 않았네. 다만 그대는 나를 불편하게 하고 있지.”

“어째서입니까?”


모모코가 물기에 젖은 눈을 깜빡이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우진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왕에게는 지켜야만 하는 수많은 덕목이 있지. 나 또한 수많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으니 그런 덕목으로부터 피해갈 수 없네. 그런데 만약 그대가 곁에 있다면 나는 앞으로 식사를 할 때에도 산책을 할 때에도 품위와 행동을 몹시 조심하게 될 거야. 그러니 불편할 수밖에 없지.”

“소첩은 염제님과 함께 하며 보고 들은 것은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함구하려고 이미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돌연 우진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내 어찌 그대를 믿지 못하겠는가. 다만 왕으로서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사고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식이 되어 내 머릿속에 박혀있다네. 그러니 그대는 앞으로는 내 곁에 있지 말고 벙커를 여유롭게 둘러보게나.”

“알겠사옵니다.”


모모코가 아쉬워하며 자리를 떠나자 우진은 한숨을 쉬며 욕탕으로 들어갔다.


‘앞으로는 계속 이래야 되는 건가?’


본래 왕이 되고 싶지 않았던 우진에게 있어 왕이라는 위치는 여러모로 귀찮을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은서가 말해준 대로 요즘은 아크 로드로서 뿐만 아니라 왕으로서도 행실과 품위를 조심하고 있었으나 왕으로서 살아간다는 건 우진에게는 무학을 수련하는 것 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졸졸졸......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자 욕탕의 물이 밖으로 넘쳐흘렀다.


“이것도 신경써야 되고. 저것도 신경써야 되고. 귀찮다, 귀찮아.”


욕탕에 등을 기대고 양팔을 걸치며 우진은 멍하니 천장을 향하여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는 하얀 김을 바라봤다.

밖에 있는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요즘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하는 무리들이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었다.

과학으로 문명을 이룩했던 현대에서 재앙의 시대로 넘어온 현재의 인류는 과거 같았으면 왕이라고 한다면 어이없어하며 그저 황당한 소리로 치부했겠지만 정부가 없으니 이제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염제님! 안에 들어가서 등을 밀어드려도 될까요?”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기에 밖에서 누가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다소 과격한 제안에 우진은 약간 머쓱해져버렸다.


“모모코. 내 말을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소첩이 그만 불경한 실수를······.”

“난 신경쓰지 말고 편하게 벙커를 둘러보게.”

“그리하겠습니다.”


문 밖으로 모모코의 인기척이 멀어지자 우진은 한숨을 쉬며 몸을 더욱 욕탕에 깊이 담갔다.



밤이 되어 우진이 방으로 들어가서 잠에 들 준비를 하려고 하자 아름다운 기모노를 입은 모모코가 방으로 들어왔다.


“모모코. 무슨 일인가? 나는 그대를 부른 적이 없네.”

“염제님. 부디 괜찮으시다면 소첩은 오늘 밤을 염제님과 함께 보내고 싶습니다.”


우진은 침대에 앉으며 푹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었다.


“모모코. 그대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그것이 무슨 말씀이옵니까?”

“지고한 위치에 있다고 한들 왕 또한 결국은 남자일세. 남자라는 생물은 겉으로 보았을 때 아름다운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아닐세. 남자 또한 여자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만나기를 원하지 않고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함께 있어도 기쁘지 않은 걸세.”


그제야 모모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크게 놀라며 깊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소첩이 무지하여 그런 각별한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였습니다.”

“모모코. 나와 그대가 만난 지 겨우 사흘이 지났네. 나는 아직 그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그대도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지. 그러니 앞으로는 천천히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군.”

“소첩 오늘 일을 과오로 삼아 앞으로 꼭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모코가 밖으로 나가자 마자 복도에서 은밀하게 엿듣고 있던 단아가 우진의 방으로 들어왔다.

애초에 단아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아까 전부터 이미 인기척을 느꼈었기에 알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앞으로는 좀 더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모코 씨는 참 적극적이네.”


편하게 테이블의 의자에 앉는 단아의 얼굴은 상당히 언짢은 듯 했고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정말 곤란하고 난감하기 그지없더군요. 모모코가 설마 밤 중에 침실로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사제가 생각할 때는 어때?”

“무엇이 말입니까?”

“모모코 말이야. 모모코는 확실히 아름다운 여자야. 정말로 사제에게 모든 것을 허락할 각오를 하고 여기에 온 것 같은데. 사제는 어떻게 생각해?”


겉으로는 태연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었으나 하얀 손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쓸어내리는 단아의 마음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돌연 침대에서 일어난 우진은 단아의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부드럽게 단아의 하얀 손을 포개어 잡은 우진은 나직이 말했다.


“제 마음을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단아는 내심 마음이 몹시 흔들렸으나 겉으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무슨 뜻이야?”

“제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밖에 없습니다.”


단아를 바라보는 우진의 눈빛은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사실 둘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져 있었고 서로가 연심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서로가 마음을 드러낼 마땅한 기회가 없어 그동안 미묘한 관계로 지냈으나 어찌 보면 이제야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적당한 순간이 찾아왔다고 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더 위험해질 거야. 어쩌면 우리 둘 중 한 명은 죽을지도 몰라. 그리고······.”


우진이 돌연 단아를 끌어안는 바람에 말은 끊기고 말았다.


“그런 거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본래 우진이 더 늦게 문파에 들어왔으나 나이는 단아보다 더 많았다.

우진이 편하게 말을 하자 단아는 그동안 가슴 한 쪽에 응어리지고 있던 무언가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너와 내가 가는 길에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더라도 상관없어.”


진심을 들었기 때문일까?

단아는 아까 전보다 훨씬 편해진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제. 강한 힘으로 약한 적을 무너뜨리는 건 전술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방법이야. 가장 중요한 건 싸우지 않고 적을 쓰러트리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단아가 방을 떠나자 우진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방금 전에 단아가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싸우지 않고 적을 쓰러트린다······.’


서로 전력의 차이가 명확하더라도 전투가 발생하면 양쪽 다 반드시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쉬지 않고 강한 힘으로 계속하여 적을 무너뜨리면 수많은 은원 관계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동안 너무 단순히 힘으로만 적을 쓰러트리려고 했던 게 아닐까?


‘앞으로는 좀 더 효율적으로 적을 쓰러트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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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전쟁 24.04.27 62 1 12쪽
31 출진 24.04.21 60 1 12쪽
30 이면 24.04.15 66 1 11쪽
» 소나라의 왕녀 24.04.09 80 1 11쪽
28 아버지의 마음 24.03.20 118 1 12쪽
27 귀환 24.03.18 139 2 12쪽
26 다시 만난 처자 24.03.17 137 1 11쪽
25 병장과 상병과 일병 24.03.16 143 2 12쪽
24 빛의 마법사 24.03.05 148 1 11쪽
23 늦은 밤의 기나긴 대화 24.02.27 167 1 12쪽
22 장왕 24.02.24 188 0 12쪽
21 감기약 24.02.22 214 2 11쪽
20 기억의 편린 24.02.17 231 3 12쪽
19 세 가지 부류의 인간 24.02.15 256 2 12쪽
18 폭우가 지나간 자리 24.02.09 295 2 12쪽
17 간발의 차이 24.02.08 309 2 12쪽
16 살아남은 인간 24.02.07 339 4 11쪽
15 소문 24.02.05 370 2 12쪽
14 방주 점검 24.02.04 429 4 12쪽
13 목숨을 건 비무 24.02.03 447 4 12쪽
12 약탈의 시대 +2 24.02.02 533 3 12쪽
11 상승의 경지 +2 24.02.01 610 5 12쪽
10 비울수록 버릴수록 채워진다 24.01.31 622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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