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 죽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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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꿀호빵
작품등록일 :
2024.01.19 12:33
최근연재일 :
2024.07.24 21:1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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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7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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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늦은 밤의 기나긴 대화

DUMMY

주먹으로 이미 수많은 대화를 했기에 둘 사이에 더 이상 서먹한 분위기나 불편한 기류는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한 우진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무리 지어있는 강윤의 수하들을 바라봤다.


“알았어. 수하들은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하는 게 어때? 나는 여기에 그저 가볍게 대화나 해보려고 왔을 뿐이야.”

“모두 그만 물러가! 돌아가서 쉬던지 자던지 다들 마음대로 하라고.”


무리 지어 있던 총화기로 무장한 남성들이 고개를 숙이며 일제히 커다란 엘리베이터로 돌아갔으나 장창을 손에 쥐고 있던 최이한만이 떠나지 않고 자리에 남았다.


“형님! 정말 이래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아. 우진이는 오늘부터 내 벗이다. 우진이도 나처럼 남자라면 숨길 수 없는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어.”


최이한은 아직 우진을 완전히 신용할 수는 없었으나 그동안 강윤이 사람을 보는 안목이 틀린 적이 없었기에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최이한마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버리자 강윤은 호탕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 둘밖에 안 남았군. 만약 필요한 게 있다면 거기 있는 하율에게 뭐든지 말하도록 해.”


궁장을 입은 하율은 천천히 우진의 옆에 걸어오며 고개를 숙였다.


“슬슬 식사하러 가는 게 어때? 배고프지?”

“너는 여러모로 들었던 거랑 다르네.”

“나에 대해서 뭐라고 들었는데?”

“장왕은 손속이 잔혹하며 한 번 화가 나면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하하하! 약간은 맞지만 대부분 틀린 말이지. 소문은 언제나 과장되기 마련이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간 강윤은 복도를 가로질러 커다란 문을 활짝 열며 안으로 들어갔다.


“먹고 싶은 거 있어? 뭐든지 말해.”


하얀 천이 깔려있는 커다란 식탁이 방의 안쪽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식탁은 10명이 앉아도 자리가 다 차지 않을 만큼 굉장히 크고 넓었으나 의자는 겨우 세 개밖에 없었다.


“식당이라기엔 의자가 조금 모자란 것 같은데?”

“여긴 내가 쓰거나 혹은 나와 가장 가까운 측근들만 쓰고 있어.”

“사치스럽군.”

“하하!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지. 이봐, 우진. 나는 왕이라면 왕 다워야 한다고 생각해.”


식탁의 상석에 앉는 강윤의 안광이 형형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재물도 여자도 권력도 모두 소유한다. 그것이 왕이라는 존재야. 왕이란 가장 위에 군림할 수 있지만 그만큼 외롭고 고독한 존재지.”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구나. 왜 꼭 왕으로서 누군가 군림해야 하지? 하물며 왕이 존재하더라도 모든 것을 소유한다는 네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


우진이 강윤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 여인들이 빠르게 노릇하게 익은 닭고기와 돼지 고기, 오리 고기를 커다란 식탁으로 옮겼다.

여인들이 식탁으로 옮긴 싱싱한 포도와 딸기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파극문은 과거에 연개소문께서 만드셨고 천령문은 척준경께서 창안하셨었지. 그 분들은 하나같이 위대하며 지고하신 분들이었어. 하지만 우진. 우리가 그 분들의 무학을 익혔다고 해서 그 분들처럼 올곧게만 인생을 살아야 하는 건 아니야. 그 분들은 그 분들이고 우리는 우리니까. 우리에겐 우리들만의 인생이 있는 거야.”

“그래. 물론 네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한데······.”


잘 익은 닭고기를 포크로 찍어 먹던 우진은 옆에서 하율이 고개를 숙이고 미동도 없이 서 있자 작게 헛기침을 했다.


“이봐, 강윤. 하율 씨도 식사하라고 하는 게 어때? 나만 여기서 이렇게 호화롭게 먹으면 불편해서 식사가 목구멍으로 제대로 넘어가질 않는다고.”

“네가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하율. 함께 식사를 해도 좋다.”


하율은 고개를 숙이더니 우진의 옆에 앉아서 조용히 식사를 했다.


“애초에 왕이라는 호칭은 거북하다고. 대재앙이 일어난 뒤로 사람들은 너무 많이 변했어.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우진. 밖에는 무법자들이 가득해. 법이 사라진 지금 있어서 무력이란 가장 중요한 규율이자 권력이야. 누군가 나서서 마음대로 날뛰는 무법자들을 다스려야 돼.”

“아무래도 너는 배포가 꽤 큰 것 같구나. 난 벙커의 지휘관인 것 만으로도 가끔은 상당히 불편하던데.”

“하하! 불편할 게 뭐가 있어? 그저 아쉬운 것이 있었다면 왕은 홀로 위에 서야 하니 친구가 없어 외로웠는데 그것도 오늘로서 해결이야. 자! 한 잔 받으라고. 이 친구야.”


강윤이 잔에 붉은 와인을 따라주자 우진은 미소를 지었다.

가치관은 비록 많이 달랐으나 둘은 무학을 추구하는 무인이며 가슴 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은 굉장히 달콤하며 편안했다. 최근에 방주의 지휘관이 된 뒤로 가벼운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기에 제대로 술을 마신 적이 없었다 보니 술이 더욱 달게 느껴졌다.

술기운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강윤은 웃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먼저 일어날게. 자네가 잘 곳은 하율이 안내해줄 거야. 앞으로 얼마든지 쉬어도 좋으니까 편하게 지내라고. 그냥 내 집처럼 생각해. 하하하!”

“고맙다.”


강윤이 호탕하게 웃으며 식당을 떠나자 우진은 와인을 한 잔 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있던 하율이 일어나려고 하자 우진은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굳이 방까지 함께 가지 않아도 됩니다. 방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시면 혼자서 가겠습니다.”

“술에 많이 취하셨으니 제가 방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하율이 조금은 완고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하는 수 없이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식당을 나오자 옆에서 조용히 걷고 있는 하율의 몸에서는 감미로운 향기가 나고 있었다.

방에 가는 동안 우진은 하율과 대화하며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국적이 한국인데도 하율이 굳이 궁장을 입고 있는 건 아무래도 강윤의 취향인 듯 했다.

반쯤 눈을 감고 조용히 복도를 걷고 있는 하율의 나이는 스무 살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너무나도 변해버려서인지 하율은 나이에 맞지 않게 몸가짐이 조심스럽고 조용했다.

하율이 안내해준 방은 굉장히 넓었으며 바닥엔 고급스러운 카펫이 깔려있었고 구석엔 커다란 침대가 있었다. 방주에서 지금껏 검소하게 살았던 우진에겐 상당히 호화로운 방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하율은 방을 나가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율이 방에 들어오며 도어락은 자동으로 잠겨있었다. 하율이 불을 끄고 은은한 조명을 키자 우진은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스르륵......


궁장의 허리에 있는 복대를 하율이 천천히 풀고 있었다. 허리에 두르고 있던 복대를 하율이 놓자 물결치듯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만일 필요한 게 있으면 하율에게 뭐든지 말하라고 했던 강윤의 말이나 성격으로 보았을 때 어쩌면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고 어느 정도 생각은 했으나 실제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깨에 두르고 있는 궁장을 붙잡는 하율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하율은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거나 혹은 처음인 듯 했다.

우진은 흔들리고 있는 하율의 손을 잡아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이 대화나 하죠.”


어쩌면 하율은 우진이 벙커에 오기 전부터 강윤에게 명령을 받았던 것인지도 모르니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안심한 건지 긴장으로 굳어있던 하율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지며 평소대로 돌아왔다. 풀었던 복대를 허리에 묶은 하율은 가볍게 우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늘밤은 함께 있어야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 듯 했기에 이대로 계속 서서 대화를 하는 건 좋지 않았다.

책상 앞에 있는 고급스러운 의자를 빼낸 우진은 하율의 어깨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앉혀줬다.


“계속 서 있으면 힘드니 앉으시죠.”


남는 의자가 없어 우진은 침대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젊은 남녀가 늦은 밤에 한 방에 있는데 서로 아무런 대화도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벙커에 오신지는 얼마나 되셨죠?”

“오늘로 30일이 되었습니다. 만약 지금도 밖에 있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예요.”


하율의 흑빛 눈에 다양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율은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장왕님은 좋은 분이에요. 장왕님은 저 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받아주셨어요.”


대화가 끊기자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의자에 앉아있던 하율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숙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염제님은 소문과 다르시네요.”

“저에 대한 소문이 어떻죠?”


하율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으시면 기분 나쁘실지도 몰라요.”

“궁금해서 그래요. 상관없으니 그냥 말해주세요.”

“가는 곳마다 피를 부르는 잔혹한 악마라고 들었어요. 무참하게 적을 분쇄해버리는 악마라던가······.”


말을 하는 하율의 얼굴이 긴장으로 조금씩 딱딱하게 굳어갔다. 하율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우진의 눈치를 살폈으나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우진은 그저 담담해 보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만나보니 다 헛소문이었네요. 염제님은 상냥하며 다정하신 분이세요.”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우진은 밤을 새도 상관없었으나 하율은 그렇지 않았기에 슬슬 잠을 자지 않을 수 없었다.

하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진은 의자에 앉으며 눈을 감았다.


“저는 여기서 자겠습니다. 하율 씨가 침대에서 자세요.”

“그,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

“저는 여기가 편합니다. 저라면 문제없으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우진은 상관없었으나 하율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벙커에서 강윤의 위치는 절대적이었고 우진도 강윤과 동등한 위치에 있는 남자였다. 하물며 우진은 다른 지역에서 온 귀한 손님인데 겨우 의자에서 잠을 자게 할 수는 없었다.

침대에 앉아서 고민하던 하율은 마음을 굳히고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우진을 바라봤다.


“괜찮으시면 함께 침대에서 자시는 게 어떠세요? 물론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냥 옆에서 함께 잠만 잘게요.”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괜찮지 않아서 그래요. 정말 옆에서 잠만 잘 거니까 거기 계시지 말고 이리 오세요.”


말을 하면서도 민망하여 하율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애초에 이런 적은 처음이었고 그저 강윤이 명령을 했기에 오늘밤 우진과 함께 보내게 되었을 뿐이었다. 하율에게 이런 일들은 너무나도 낯설고 어색했다.


“괜찮습니다.”

“계속 그렇게 의자에서 잠드시면 제가 나중에 장왕님께 드릴 말씀이 없어요. 저는 괜찮으니까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사실은 민망하여 괜찮지 않았으나 하율은 낯빛이 뜨거워져도 나름대로 용기를 내고 있었다.

하율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우진은 잠시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우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진이 침대의 오른쪽 끝에 올라가서 눕자 하율이 침대의 왼쪽 끝으로 이동하며 이불을 목 언저리까지 올리고 누웠다.

제법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우진은 평정을 유지하며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으나 하율은 괜히 심장이 두근거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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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총사령관 24.07.22 3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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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전쟁 24.04.27 62 1 12쪽
31 출진 24.04.21 60 1 12쪽
30 이면 24.04.15 66 1 11쪽
29 소나라의 왕녀 24.04.09 80 1 11쪽
28 아버지의 마음 24.03.20 118 1 12쪽
27 귀환 24.03.18 139 2 12쪽
26 다시 만난 처자 24.03.17 137 1 11쪽
25 병장과 상병과 일병 24.03.16 143 2 12쪽
24 빛의 마법사 24.03.05 148 1 11쪽
» 늦은 밤의 기나긴 대화 24.02.27 168 1 12쪽
22 장왕 24.02.24 188 0 12쪽
21 감기약 24.02.22 214 2 11쪽
20 기억의 편린 24.02.17 231 3 12쪽
19 세 가지 부류의 인간 24.02.15 256 2 12쪽
18 폭우가 지나간 자리 24.02.09 295 2 12쪽
17 간발의 차이 24.02.08 309 2 12쪽
16 살아남은 인간 24.02.07 339 4 11쪽
15 소문 24.02.05 370 2 12쪽
14 방주 점검 24.02.04 429 4 12쪽
13 목숨을 건 비무 24.02.03 447 4 12쪽
12 약탈의 시대 +2 24.02.02 533 3 12쪽
11 상승의 경지 +2 24.02.01 610 5 12쪽
10 비울수록 버릴수록 채워진다 24.01.31 622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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