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 죽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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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꿀호빵
작품등록일 :
2024.01.19 12:33
최근연재일 :
2024.07.24 21:10
연재수 :
3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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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9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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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폭우가 지나간 자리

DUMMY

점차 어둠이 쌓이고 있는 황톳빛 대지에 검은 기모노를 입고 있는 여인이 날렵하게 달려왔다.


“사범님!”


검은 기모노를 입은 여인, 하세가와 히마리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히마리는 참담한 심정으로 쓰러져 있는 이츠키를 내려봤다.

이츠키는 제자들 중에 히마리를 가장 아꼈다.

히마리는 날 때부터 남들보다 신법이 빠르며 검술에도 제법 재능이 있었기에 이츠키는 내심 다음 도장 사범을 히마리로 지목하려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괜스레 다른 문하생들이 재능이 있는 히마리를 보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하거나 헐뜯어도 사소한 것에 신경 쓰지 마라며 이츠키는 히마리를 받쳐줬었다.

부모가 없었기에 부친처럼 생각하고 있던 사범이 지금은 차가운 대지에 시신이 되어 누워있는 것을 보며 히마리는 물기가 묻어가고 있는 눈을 감았다.


“사범님의 마지막은 어땠습니까?”


온몸에 피를 흘리고 있으면서도 우진의 두 눈은 여전히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츠키는 최선을 다했다. 나와 이츠키는 마지막까지 적으로서 전력을 다하여 서로 부딪쳤다. 간발의 차이로 살아남은 것은 나였다. 단지 그 뿐이다.”

“그렇군요.”


히마리는 말없이 이츠키의 시신을 등에 업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부터 카게류의 사범은 나 히마리입니다. 언젠가 카게류의 진리를 완성하여 돌아오겠습니다.”


천천히 자리를 떠나는 히마리의 목소리가 실려 오는 바람에 흩어졌다.


“서우진. 언젠가 당신을 죽이는 건 나예요. 그러니 그때까지 당신은 절대로 죽으면 안 돼요.”


우진은 멀어져가는 히마리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사제. 괜찮아?”


다가오며 단아가 온몸에 피가 흐르고 있는 우진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며칠 쉬면 문제없습니다.”


흙먼지가 일어난 황톳빛 대지를 강렬한 바람이 쓸고 지나가자 찬연한 달빛이 자리를 채웠다.



다음 날 아침 우진은 방주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절벽에서 어제 있었던 이츠키와의 일전을 곰곰이 되짚어보고 있었다.

이츠키의 신법은 분명 신묘하며 특이하긴 했지만 침착하게 대응했었다면 어쩌면 빈틈을 찾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잡념이 섞여 있었기 때문인가?’


눈을 감자 절벽 위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의 격류를 느낄 수 있었다.

파천무극신공이 갖고 있는 양강의 기류를 온전히 느끼기 위해선 집착을 버려야 하며 완전히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츠키를 쓰러트리는 데에 정신이 쏠려 가장 중요했던 본질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감고 우진은 잠시 모든 것을 잊었다. 파극문의 제자라는 사실도 방주의 지휘관이라는 사실도 상승의 경지에 올라가고 싶다는 집착도 잊어버리자 점차 마음은 평온해졌다.

마음이 비워지자 양강의 기류는 바람이 흘러가듯 기혈을 따라 몸을 순환하고 있었다.

절벽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우진을 주의 깊게 노려보고 있는 한 무리의 인영이 있었다.


“형님! 저 놈 눈 감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저 새끼 저기서 대체 뭘 하는 거야?”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모히칸인 약탈자들의 우두머리는 까칠한 수염이 자라있는 턱을 쓰다듬으며 이마를 찡그렸다.

청년이 입고 있는 하얀 도복이 유난히 거슬렸다. 최근에 한창 이름을 날리고 있는 염제와 청년의 복장은 너무나도 비슷했다.


“야! 말수야! 저 새끼 갈겨!”

“형님. 염제랑 조금 비슷한데요?”

“씨발. 짝퉁이겠지. 요즘 사기 치는 새끼들이 한 둘이냐?”


박말수는 몹시 찝찝한 기분이 들었으나 하는 수 없이 K3의 조정간을 연발로 바꾸며 절벽에 있는 청년에게 사정없이 총알을 퍼부었다.


타다다다당-!


“어?”


웃고 있던 약탈자들의 우두머리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벌집이 되어야 할 놈은 아직도 멀쩡히 절벽 앞에 서 있었다. 더욱 어이가 없는 건 청년이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는 거였다.

약탈자들의 우두머리는 어이가 없어 굵은 손가락으로 눈을 벅벅 비비며 유심히 청년을 노려봤다.


“말수야! 제대로 쏜 거 맞아?”

“형님. 저 특등사수였습니다.”


말수는 20m 거리에 있는 알루미늄 캔을 정확히 맞출 수 있을 만큼 사격 실력이 뛰어난 사수였다. 말수가 그동안 한 번도 실수를 한 것을 본 적이 없기에 우두머리는 괜히 목이 바싹 타들어 갔다.


“그럼 저 새끼가 총알을 피했다는 거야, 지금? 게다가 눈을 감고? 그게 말이 되냐?”

“그럼 더 갈겨보겠습니다.”


말수는 더욱 신경을 집중하며 절벽 앞에 있는 청년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기묘했다.

우측에 있던 청년의 신형은 어느새 좌측에 있었고 좌측을 노리면 어느새 우측에 있었다.

연발로 총알을 퍼부으면서도 말수는 점차 식은땀이 흘러나왔고 공포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정말 피한 건가?’


약탈자들이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는 사이 절벽 앞의 청년이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쌍안경으로 청년을 절벽 아래에서 지켜보던 약탈자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우두머리를 쳐다봤다.


“형님! 들켰······.”


허전한 느낌에 민대머리의 약탈자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굳은살이 박혀있는 커다란 주먹이 가슴을 관통하며 튀어나와 있었다.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는 처참한 광경에 약탈자는 공포로 몸을 떨었다.


털썩.


민대머리가 힘없이 땅에 쓰러지자 장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지금이라도 땅에 머리를 박고 사죄를 하려던 모히칸은 이어지는 청년의 말에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덤벼라. 죽이겠다면 죽음을 각오해라.”


장내에 있던 약탈자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인간이 태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는 생명체의 본능. 죽음에 직면하면 경고를 울리는 경종이 쉬지 않고 위험을 알려오고 있었다.

지금부터 청년에게 어떠한 사죄도 사과도 의미는 없다. 청년에게 총을 겨누고 죽이려고 마음먹었던 순간부터 돌이키는 건 이미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제 약탈자들이 할 수 있는 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밖에 없었다.


“죽여!”


탕!


엽총이 발사된 순간 청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비명 소리에 몸을 돌리자 엽총 사수의 척추는 산산이 으스러져 있었고 내장이 진탕되며 입에서 검은 핏물이 쉴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씨발!”


190cm가 넘는 민대머리 덩치는 전력을 다하여 양손으로 쥐고 있던 슬레지 해머를 청년에게 휘둘렀다. 자신보다 키가 작은 청년에게 커다란 해머를 휘둘러서 과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이 정도로 눈 앞에 있는 청년을 상대하는 건 부족하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게차나 화물차가 존재한다면 민대머리는 주저 없이 청년을 당장 들이받아 버릴 것이다.


콰아!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민대머리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청년의 주먹은 어느새 가슴을 관통하며 등 뒤로 튀어나와 있었다.

우진은 서슬 퍼런 안광을 번뜩이며 모히칸을 돌아봤다. 이제 약탈자들은 우두머리밖에 남지 않았다.

공포로 얼굴이 하얗게 질려 몸을 떨던 우두머리는 우진에게 달려들며 미친듯이 사방으로 회칼을 휘둘렀다.


“으아아!”


커다란 굉음과 함께 터지는 소리가 장내를 울리자 패닉에 빠져 회칼을 휘두르던 우두머리의 움직임이 서서히 멈췄다.

굳은살이 박혀있는 우진의 주먹은 우두머리의 가슴에 틀어박혀 있었고 붉은 핏물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우진이 주먹을 거두자 절명한 모히칸의 시신이 힘없이 쓰러졌다.


툭. 투둑. 쏴아아!


하늘에서 쏟아지던 빗방울은 난데없이 거센 폭우가 되어 쉬지 않고 쏟아졌다.

지구 온난화의 심화로 이상 기후가 심해졌기에 갑작스런 폭우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다른 도시로 찾아가려 했던 우진은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 방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러모로 오늘은 쉬고 싶어지는 날이었다.

백야낙일홍(白夜落一紅)으로 빠르게 방주로 돌아오자 우진은 게이트로 걸어갔다.


“도아 씨. 게이트 오픈해줘.”


-오늘은 금방 돌아오셨네요?


쏴아아!


쏟아지는 비는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우진이 방주로 들어가자 안내 데스크에 있던 오퍼레이터가 황급히 수건을 가져왔다.


“갑자기 비가 엄청 많이 오네요.”

“그러게 말이야. 별 일 없었지?”

“네! 당연하죠!”


수건으로 머리를 닦은 우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5층으로 내려갔다.

우진과 단아, 은서의 방 뿐만 아니라 오퍼레이터들의 방도 대부분 지하 5층에 있었다.


철컥.


자동문이 열리자 방에 들어간 우진은 침대에 앉으며 탁상에 있는 레코드플레이어를 작동했다.

비가 오는 날의 음악은 평소와는 다르게 좀 더 특별하다. 음악은 PC로도 들을 수 있었으나 레코드플레이어는 특유의 감성이 살아있어 듣다 보면 생동감이 느껴졌다.


“사제. 들어가도 돼?”


방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들어오세요.”


방에 들어온 단아가 탁상 앞에 앉자 우진은 레코드플레이어의 전원을 껐다.


“좋은 클래식이네.”

“비가 오는 날에 듣기 좋아요. 레코드플레이어로 들으면 더 좋구요.”


단아는 수련을 하고 온 건지 하얀 도복을 입고 있었다.

짙은 속눈썹 아래 흑빛 눈을 반쯤 감으며 단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꽤 많은 시간이 지났네. 사제가 파극문에 들어왔던 게 어제 같은데. 다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아.”


반쯤 감겨있는 단아의 눈은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고 있었으며 그동안의 추억이 흘러가고 있었다.



새벽이 되자 거세게 쏟아지던 폭우는 거짓말처럼 멎었고 하얀 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드러나고 있었다.

대재앙으로 세계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며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었건만 폭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너무나도 맑고 청명하여 태초의 지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방주에서 나오며 푸른 하늘의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찬연한 여명을 묵묵히 바라보던 우진은 백야낙일홍(白夜落一紅)을 펼치며 방주를 떠났다.

방주의 근처에 있는 약탈자들은 요즘 들어 쉽사리 덤벼오지 않고 있기에 슬슬 다른 도시로 갈 필요가 있었다.

파괴되어버린 환경으로 날씨는 아침부터 무더웠으나 양강의 신공을 익힌 우진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방주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원주시에 우진이 들어서자마자 반파되어 허리가 잘려나간 아파트에서 통조림을 먹던 약탈자들이 황급히 우진을 노려봤다.

폐허에 가까운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수많은 약탈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구역에서 생활하며 인간들이 가끔씩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식량을 털어가는 건 근방에서는 익숙한 일상이었다.


“형님. 저 놈 배낭이 꽤 묵직해 보이는데요?”

“저 새끼. 못 보던 놈인데. 외지에서 왔나?”

“그런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약탈자의 우두머리인 민대머리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하얀 도복을 입고 있는 청년을 더욱 유심히 노려봤다.

청년은 덩치가 제법 컸고 온몸이 잔근육으로 압축되어 있어서 굉장히 오랜 시간 단련해온 듯 했지만 총과 칼이 있는 현실에선 그런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청년이 설마 최근에 아문왕과 이왕을 쓰러트렸다는 염제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평범한 청년이라면 맨손으로 총과 칼을 든 상대를 제압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차피 저대로 그냥 둬도 근방에 있는 다른 놈들이 청년을 약탈할 게 분명했다. 아까 전부터 반대편 아파트에 있는 은석 놈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게 벌써부터 심상치 않았다.


‘남 주느니 차라리 그냥 내가 가져가는 게 편하지.’


“조져!”


D구역 약탈자들의 우두머리인 김경수는 부하들과 함께 무기를 챙기고 아파트를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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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수라왕의 전령 24.07.24 23 0 12쪽
38 총사령관 24.07.22 37 0 12쪽
37 나라의 새로운 변화 24.07.21 49 1 12쪽
36 복수 24.07.17 51 1 12쪽
35 남녀에게 평등한 주먹 24.07.15 60 1 12쪽
34 13번의 시험 24.07.03 59 1 12쪽
33 전쟁이 지나간 자리 24.05.13 63 1 12쪽
32 전쟁 24.04.27 63 1 12쪽
31 출진 24.04.21 61 1 12쪽
30 이면 24.04.15 66 1 11쪽
29 소나라의 왕녀 24.04.09 80 1 11쪽
28 아버지의 마음 24.03.20 118 1 12쪽
27 귀환 24.03.18 140 2 12쪽
26 다시 만난 처자 24.03.17 138 1 11쪽
25 병장과 상병과 일병 24.03.16 144 2 12쪽
24 빛의 마법사 24.03.05 149 1 11쪽
23 늦은 밤의 기나긴 대화 24.02.27 168 1 12쪽
22 장왕 24.02.24 189 0 12쪽
21 감기약 24.02.22 215 2 11쪽
20 기억의 편린 24.02.17 232 3 12쪽
19 세 가지 부류의 인간 24.02.15 256 2 12쪽
» 폭우가 지나간 자리 24.02.09 296 2 12쪽
17 간발의 차이 24.02.08 310 2 12쪽
16 살아남은 인간 24.02.07 339 4 11쪽
15 소문 24.02.05 370 2 12쪽
14 방주 점검 24.02.04 430 4 12쪽
13 목숨을 건 비무 24.02.03 448 4 12쪽
12 약탈의 시대 +2 24.02.02 534 3 12쪽
11 상승의 경지 +2 24.02.01 611 5 12쪽
10 비울수록 버릴수록 채워진다 24.01.31 622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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