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 죽이면 그만이다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딸기꿀호빵
작품등록일 :
2024.01.19 12:33
최근연재일 :
2024.07.24 21:10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17,574
추천수 :
144
글자수 :
206,753

작성
24.02.24 21:10
조회
188
추천
0
글자
12쪽

장왕

DUMMY

“약이 많군.”


무법자들이 점령한 뒤로 손을 대지 않은 건지 약국에는 다양한 약들이 아직 꽤나 많이 남아 있었다.


“엉? 갑자기 뭔 개소리야? 여긴 우리 영역이야. 뒤지기 싫으면 빨리 꺼져.”


덩치의 옆에 있던 놈이 나이프를 손으로 빙빙 돌리며 눈을 가늘게 뜨고 우진을 노려봤으나 우진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감기약이 하나 필요하다.”

“씨발. 요즘 약이 얼마나 귀한지 알아? 무턱대고 들어온 걸로 모자라서······.”


탁.


우진은 품에서 꺼낸 초코바를 카운터에 내려놓으며 무법자들을 차갑게 노려봤다.


“이거면 충분한가?”

“이 새끼가 정말 돌았나!”


무법자는 눈을 부릅뜨며 우진에게 재빨리 나이프를 휘둘렀다.

무법자는 비록 배운 것이 별로 없었으나 대재앙이 일어나기 전에도 갱단에서 살았었기에 어디를 노려야 치명적인지 알고 있었다.

나이프는 우진의 목에 있는 동맥을 향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우진이 목을 부여잡으며 쓰러지리라고 생각하며 무법자들이 비릿한 미소를 짓는 순간 거짓말처럼 나이프는 멈췄다.


“어? 어?”


나이프는 정확히 우진의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잡혀있었다. 당황한 무법자는 우진의 손에 붙잡힌 나이프를 빼앗기 위해 힘껏 팔을 움직였다.


“익! 이이익!”


나이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진은 그저 손가락으로 가볍게 붙잡고 있는 것 같은데 마치 쇳물에 붙어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나이프는 전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씨발! 김건! 장난 그만해!”

“병신아! 지금 이게 장난하는 거로 보여?”


순간 무법자는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눈.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차갑고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무겁게 가라앉은 한 쌍의 눈동자가 무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생적인 본능을 일그러트려 오는 어두운 공포에 무법자는 몸을 떨며 뒤로 넘어져 버렸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눈치챈 덩치는 재빨리 카운터 아래에 숨겨놨던 엽총을 꺼내며 우진을 겨누고 눈을 부라렸다.


“씨발! 당장 배낭 내려놔! 갖고 있는 거 다 내려놓으라고! 개새끼야!”


우진의 눈을 보자 총구를 겨누고 있는 덩치의 손이 숨기기 힘든 공포로 덜덜 떨렸다.

아까 전과는 우진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사자 앞에서 사슴이 대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듯이 토끼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도망치려고 하듯이 덩치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공포를 느꼈다.


“쏴라.”

“뭐? 뭐, 뭐라고?”

“쏘고 싶으면 쏘라는 거야. 하지만 방아쇠를 당긴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우진이 천천히 총구를 향해서 걸어가자 덩치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몸을 떨며 주저앉아 버렸다.

카운터 뒤에 있는 선반에서 감기약을 찾은 우진이 약을 품에 넣고 천천히 약국을 나갔으나 무법자들은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 못했고 살았다는 사실에 가슴 깊이 안도하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가운 바닥에 누워 앓고 있는 할아버지를 내려보던 소민은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부서진 문을 열고 우진이 방에 들어오고 있었다. 우진이 묵묵히 손에 들고 있던 감기약을 앞으로 내밀자 소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진을 올려봤다.


“대체 어떻게 가져온 거예요? 약국 주변에 험상궂은 덩치들이 득실거렸을 텐데······.”

“초코바와 감기약을 교환했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


믿기 어려운 말에 소민은 눈을 가늘게 뜨며 우진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바라봤으나 이내 피식 웃으며 감기약을 뜯었다.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가져왔는지가 얼마나 중요하겠어요. 고마워요, 오빠.”


소민은 조심스럽게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는 할아버지의 입에 감기약 한 알을 넣고 생수를 입에 물렸다.

할아버지를 조금 일으켜주며 등을 두드려주는 소민의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했다.


“할아버지. 조금 먹어봐요. 약을 가져왔어요.”


힘겹게 생수를 마시며 약을 삼킨 노인은 거친 기침을 쏟아내며 천천히 차가운 바닥에 드러누웠다.

소민과 노인을 내려보고 있는 우진의 심경은 복잡했다. 어차피 이대로 그냥 둔다면 약탈자에게 발각되어 납치되거나 혹독하게 변해버린 이상 기후를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질 확률이 높았다.

변해버린 세계는 여자아이와 병들어버린 늙은 노인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마음을 굳힌 우진은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소민아. 죽염산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네? 아뇨. 들어본 적 없는데요.”

“나는 사실 벙커에 살고 있거든. 거긴 물과 식량이 풍부하고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공간도 있어.”

“만약 정말 그런 곳이 존재한다면 지금 같을 때에는 천국이나 다름없겠네요.”

“괜찮다면 벙커에 오지 않을래? 여기보다는 안전할 거야.”


잠시 고민하던 소민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더 이상 오빠에게 신세를 질 수는 없어요. 약을 받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해요. 게다가 할아버지는 이미 한계예요. 사실 그동안 같이 오래 살아서 전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할아버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


슬픈 눈빛으로 앓고 있는 할아버지를 내려보던 소민은 눈가에 묻은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내며 억지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만큼은 할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어요. 벙커는 나중에 생각해볼게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염제의 벙커를 수소문하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우진은 돌아서며 천천히 무너진 건물을 떠났다. 마음 같아서는 소민을 벙커까지 데려다주고 싶었으나 벌써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방주의 공간과 식량이 한정되어 있으니 모든 약자들을 구제해주는 건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길에서 약자들을 마주칠 때마다 모두 방주에 받아준다면 언젠가는 방주의 규율이 버티지 못하고 붕괴해버릴 게 분명했다.

우진은 계속해서 영월군을 향해 나아가며 소민은 할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자리를 지킨다. 그것이 서로가 선택한 길이었다.

우진이 떠난 자리에 무너진 천장에서 하얀 눈송이들이 흩날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영월군에 들어서자마자 기이한 건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피라미드 형태의 거대한 철탑.

수많은 건물 사이에 사각뿔의 철제 건물이 깎아지르듯 위로 높이 솟아있었다.

거세게 쏟아지는 눈보라로 시야가 가려지고 있었으나 거대한 철탑 안에 범상치 않은 인물이 있으리란 느낌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피라미드 형태의 거대한 철제 벙커로 우진이 걸어가자 두꺼운 철문 위에 있던 CCTV가 움직이며 아래를 응시했다.


-여긴 위대하며 지고하신 장왕님의 벙커다. 신원을 밝혀라.


스피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굵고 낮은 저음이었다.


“장왕에게 파극문의 57대 제자 서우진이 왔다고 전해라.”


-뭣······?


스피커에서 웅성거리는 수많은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염제님. 들어오시죠.


쿠구구구......


아까 전과는 다르게 몹시 정중하며 깍듯한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땅이 진동하며 철탑의 문이 좌우로 서서히 열렸다.

피라미드 형태의 벙커로 들어서자 천장에 있는 샹들리에가 넓은 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엔 붉은 융단이 깔려있었다.

좌우를 보자 소총으로 무장한 덩치 큰 남성들이 벙커의 문 근처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흡사 전쟁을 코앞에 둔 군인처럼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보초들은 매우 기강이 잡혀있었다.

검은 머리를 뒤로 가지런히 묶은 궁장을 입은 여인은 우진에게 천천히 걸어오더니 눈을 감으며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염제님. 염제님이 이곳에 계실 동안 수발을 들게 된 하율이라고 합니다. 만일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개의치 않고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우진은 거대한 넓은 홀을 둘러봤다.

확실히 장왕의 벙커는 방주와는 달랐다. 장왕의 벙커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는 있지만 왕이 살아가기 위해 만들었다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홀의 끝에 있던 커다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총화기로 무장한 수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총을 들고 있는 수많은 남성들의 분위기는 하나같이 험악했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서 있는 남자만큼은 유독 남달랐다.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푸른 도복을 입은 남자는 품에는 총화기 뿐만 아니라 가벼운 날붙이조차 갖고 있지 않았으나 몸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금방에라도 꿰뚫어버릴 것처럼 날카로운 안광을 정면으로 직시하면서도 우진이 한 치의 동요도 없자 푸른 도복의 청년은 미소를 지었다.


“염제. 여기까지 먼길을 와줘서 정말 고맙다. 지금부터 그대가 과연 왕에 걸맞는 남자인지 확인해보겠다.”

“무례하군.”

“하하! 초면에 무례하게 느껴졌다면 사과하지. 남자가 한 입으로 자잘한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먹은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지.”


푸른 도복의 청년이 앞으로 세 걸음 걸어 나오자 총화기로 무장한 남성들이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천령문의 22대 제자 김강윤이다. 나를 장왕이라 불러도 상관없다.”

“파극문의 57대 제자 서우진이다.”


순간 우진에게 달려드는 장왕의 신형이 귀신처럼 잔상을 흩뿌리며 등 뒤로 길게 이어졌다.


스스슷......


어느새 허공으로 뛰어오른 장왕의 주먹이 기이하게 네 갈래로 나눠지며 쇄도하고 있었다.

단순히 변초와 파식을 섞은 게 아닌 귀행연환권의 신묘한 본질이 스며들어있는 절초였다.


콰아!


장내가 터질 것만 같은 거대한 폭음에 지켜보고 있던 장왕의 수하들은 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서로 부딪치고 있는 둘을 지켜보던 장왕의 오른팔이자 창술의 대가인 최이한은 흡사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부릅떴다.

겨우 일합을 주고받은 것처럼 보였으나 둘은 어느새 세 번이 넘는 공방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최이한은 장왕의 초수가 세 번이 넘어가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귀행연환권을 마주한 자들은 대부분 일합을 막지 못해 당황하며 죽어갔고 그나마 오래 버틴 자들도 이어지는 절초를 막지 못했는데 우진은 계속해서 날아오는 절초들을 주먹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저 자는 지금 눈으로 보고 받아치고 있는 건가? 아니. 귀행연환권은 눈으로 본들 본질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막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고요했다.

폭풍처럼 귀신같은 주먹이 사방에서 쇄도하고 있건만 우진의 눈빛은 너무도 고요하고 깊게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설마 몸이 가는 곳을 마음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는 곳을 몸이 따라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정녕 가능하단 말인가?’


초수가 열 번이 넘어가자 장왕은 손을 거두더니 가볍게 뒤로 물러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다! 과연 그대는 왕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내가 왕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한 명의 무인이자 파극문의 제자일 뿐이다.”

“그대가 어떻게 생각하든 왕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드디어 나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자가 나타났으니 오늘은 정말로 경사스러운 날이로구나!”


장왕은 웃으며 우진에게 걸어오더니 가볍게 등을 두드렸다.


“이제부터 편하게 강윤이라고 불러. 우리 사이에 딱딱한 호칭은 더 이상 필요 없잖아.”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패 죽이면 그만이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9 수라왕의 전령 24.07.24 23 0 12쪽
38 총사령관 24.07.22 37 0 12쪽
37 나라의 새로운 변화 24.07.21 49 1 12쪽
36 복수 24.07.17 51 1 12쪽
35 남녀에게 평등한 주먹 24.07.15 59 1 12쪽
34 13번의 시험 24.07.03 58 1 12쪽
33 전쟁이 지나간 자리 24.05.13 63 1 12쪽
32 전쟁 24.04.27 63 1 12쪽
31 출진 24.04.21 61 1 12쪽
30 이면 24.04.15 66 1 11쪽
29 소나라의 왕녀 24.04.09 80 1 11쪽
28 아버지의 마음 24.03.20 118 1 12쪽
27 귀환 24.03.18 140 2 12쪽
26 다시 만난 처자 24.03.17 138 1 11쪽
25 병장과 상병과 일병 24.03.16 144 2 12쪽
24 빛의 마법사 24.03.05 149 1 11쪽
23 늦은 밤의 기나긴 대화 24.02.27 168 1 12쪽
» 장왕 24.02.24 189 0 12쪽
21 감기약 24.02.22 215 2 11쪽
20 기억의 편린 24.02.17 232 3 12쪽
19 세 가지 부류의 인간 24.02.15 256 2 12쪽
18 폭우가 지나간 자리 24.02.09 295 2 12쪽
17 간발의 차이 24.02.08 309 2 12쪽
16 살아남은 인간 24.02.07 339 4 11쪽
15 소문 24.02.05 370 2 12쪽
14 방주 점검 24.02.04 430 4 12쪽
13 목숨을 건 비무 24.02.03 448 4 12쪽
12 약탈의 시대 +2 24.02.02 533 3 12쪽
11 상승의 경지 +2 24.02.01 610 5 12쪽
10 비울수록 버릴수록 채워진다 24.01.31 622 5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