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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광
작품등록일 :
2024.06.1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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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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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4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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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술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2)

DUMMY

“거, 거기 테이블에 두고 가시면 됩니다.”


아직 앳된 목소리는 여리고 힘이 없었다. 게다가 업무 외적으로 사람과 의사소통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자꾸 말을 더듬었다. 괜히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자, 눈치 빠른 메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빈 접시를 치워 주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세요.”


문이 닫히자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새 거래처와 미팅을 해도 이 정도로 어색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따끈따끈한 고양이가 웨앵, 하고 울었다.


“라피, 이게 다 무슨 상황일까···”

“먀아앍.”


이런 상황에서도 고양이는 명진의 곁을 지켰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라피를 두고 혼자 떠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명진은 메이드가 들어와 끊어진 생각을 이어갔다.







명진이 눈을 뜨자, 푹신한 이불의 감촉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침대로 들어온 건가?’


몸이 나른했다. 앞으로 딱 10분만, 아니 20분만 더 자면 개운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몸을 뒤척이려는 순간, 오늘이 아직 평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잠깐만, 지금 몇 시지?’


아직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밖은 밝았고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오며 전신의 피가 차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팔을 뻗어 머리맡에 있을 휴대전화를 짚으려 했다. 그러나 몸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겨우 팔을 뻗어 머리맡을 한참 짚었지만, 휴대전화 비슷한 것도 잡지 못했다.


‘설마 술 마시고 휴대폰까지 내팽개친 거냐, 진짜 좆됐다.’


그렇게 온몸의 근육이 긴장한 상태로 눈을 뜨자, 이상한 풍경이 펼쳐졌다.

집이 아니다.

그의 전셋집은 다른 집에 비해 넓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봤자 1.5룸이었다. 침실이 커 봤자 얼마나 크겠는가.

그러나 지금 명진이 누워 있던 곳은 대충 보아도 호텔 객실에 준했다. 침대는 더블 사이즈보다 조금 작은 수준이었고, 베란다로 이어지는 창가에는 커피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고개를 돌리다 무심코 반대쪽에 있던 거울을 본 명진은 놀란 나머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조금 길게 자라난 옅은 회갈색 머리카락에 둥글고 푸른 눈. 체구는 작았으며, 청년보다는 소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30년을 산 ‘윤명진’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게 뭐지?’


소설에서나 보던 빙의 같은 건가. 그러나 명진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가 읽고 쓴 소설 중에 이런 외모를 가진 이는 나오지 않았다.

침대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팔로 상체를 세워 앉는 게 고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누가 들여다보러 오려나?’


이 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명진은 당황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 바깥에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규칙적이고 가벼운, 여성으로 추정되는 소리였다. 몸이 굳은 명진은 가만히 문을 응시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복장을 보아하니 메이드 같았다.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에, 손에는 물이 절반 정도 채워진 작은 냄비와 수건을 들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메이드는 소스라치게 놀라 냄비를 떨어트렸다.


“세, 세상에, 도련님, 아니, 그,”


명진은 뭐라도 말하고 싶었으나, 바싹 말라붙은 목에선 바람 새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메이드는 떨어뜨린 냄비를 정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방을 뛰쳐나갔다.


‘뭐지, 이 몸 주인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비쩍 마른 몸은 사고를 칠 만한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그러던 중,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보다 사람이 많고, 다급했다.


“헬리온!”


다급하게 들어온 이는 중년 여성이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은 마구 흐트러졌지만, 푸른 눈동자는 명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잠시간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방을 나가버렸다. 명진은 여전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고,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소녀가 뒤이어 뛰어 들어왔다.


“헬리, 드디어 일어났구나!”


소녀는 이 몸과 많이 닮았다. 머리카락은 더 선명한 갈색이었지만 거의 비슷했고, 푸른 눈동자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몸을 가볍게 끌어안은 소녀는 그대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가씨, 도련님이 힘들어할지도 몰라요. 도련님을 정돈시켜드린 후에 인사를 나누는 건 어떨까요?”


그 뒤에는 이십 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이 서 있었다. 소녀는 그 말을 듣곤 흠칫 놀라, 순순히 몸을 놓아주었다.


“으, 응, 그럴게요. 저, 정돈이 다 끝나면, 말해 줘요.”


소녀는 눈물을 훔치며 여성과 함께 방을 나섰다. 이 방에는 이제 그와 황급히 뛰쳐나갔던 메이드 두 사람만이 남았다.

메이드는 떨리는 손으로 명진에게 물컵을 내밀었다. 혹여 놓치기라도 할까 컵을 한 손으로 받치고 집어 들어 천천히 목을 축였다.

컵에 든 물을 다 마시자, 메이드가 컵을 받아 옆으로 치웠다. 그녀는 상냥하게 명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도련님, 말할 수 있으시겠어요?”

“···네.”


흘러나온 목소리는 여리고 작았다. 그녀는 대답을 듣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조곤조곤 말을 걸었다.


“다행이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너무 놀라서 그만, 어서 빨리 부인께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아가씨까지 올라오실 줄은 몰랐지만요.”

“···네, 괜찮습니다.”

“아, 가만히 계세요. 몸 닦아 드릴게요. 백작님은 지금 잠시 나가셔서, 아마 오늘 오후 늦게나 돌아오실 거예요······.”






말 많은 메이드에게선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우선, 자신은 ‘윤명진’이 아닌 ‘헬리온 딜라드’라는 것.

설마 설마 했지만, 정말로 소설 속에 빙의되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고등학생 때 쓴 설정 오류투성이의 소설에.

게다가 ‘헬리온 딜라드’는, 당시 연재분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초고에서 최종 악역으로 설정된 인물이었다. 반역을 돕고, 계획이 실패하자 주인공과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는.

심지어 그 결말은 교수형. 비참한 죽음이었다.

두 번째로, ‘헬리온’은 3년째 의식불명 상태였다. 3년 전, 영지 바로 옆에 위치한 레바나 산맥에서 마수가 쏟아져나온 걸 백작이 처리하고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그때 헬리온의 나이는 열두 살. 그러니 지금 그는 열다섯 살이다.


‘회춘했네, 아주. 나이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몸이 건강했다면 기뻐했겠지만, 이런 몸이라면 차라리 회춘하기 전이 나았다. 근육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던 것도 3년 동안 누워 있었기 때문이리라.

마지막으로, 이 집의 가족 관계. 딜라드 백작과 백작 부인, 그리고 누나 클레어. 초고에서는 설정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럼 도련님, 쉬고 계세요. 간단한 식사라도 가져다드릴게요.”


메이드는 웃으며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헬리온은 긴장이 풀린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초고에서도 대략적인 흐름이랑 이름 정도만 정해 뒀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는 저자였지만 아는 게 거의 없었다. 10년도 더 전에 쓴 원고를 기억하는 게 더 신기한 일이다.

그때 창가에서 작게 매앵, 하는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헬리온은 기대감이 담긴 작은 목소리로 울음소리의 주인공을 불렀다.


“라피?”

“앵.”


회색과 검은색이 섞인 털에, 배 쪽엔 하얀 털. 고개를 쑥 내민 고양이는 정말로 라피였다. 조금 전 메이드가 환기한다며 작게 열어둔 창틈으로 들어온 라피는, 주인을 알아보는 듯 헬리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바깥 공기를 맞아서인지 털은 조금 차가웠지만, 체온은 언제나처럼 따끈했다.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와우웅.”


헬리온은 거의 뼈만 남은 팔로 고양이를 안았다. 주인의 기분을 아는지 라피는 오늘따라 얌전했다.

따끈한 배에 얼굴을 파묻고 있기도 잠시, 갑자기 눈앞이 밝아졌다.

전날 술을 마시고 보았던 ‘헛것’과 똑같은 글자가, 또다시 공중에 떠 있었다. 그러나 표시된 문자는 완전히 달랐다.


[[□□□ □□□: 초고]를 열람하시겠습니까?]


앞 여섯 글자는 깨진 건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초고’라는 말로 짐작해보건대, 아마 그가 학생 때 쓴 소설의 초고를 말하는 것 같았다. 헬리온은 고양이를 무릎에 내려놓고 [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찬란한 금빛이 헬리온을 감싼다. 따스한 온기 같기도, 차가운 금속 같기도 한 빛은 그의 몸 주변을 맴돌다가 허공에 한 권의 책을 띄웠다.


‘진짜 그때 쓰던 노트네.’


헬리온은 공중에 나타난 책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은은한 광채를 내뿜는 책은 ‘명진’의 손글씨가 아닌, 정갈한 글씨로 정리되어 있었다.

당시 그가 글을 쓰기 위해 모았던 허접한 자료와 초고는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왔다. 초반 내용에는 헬리온의 ㅎ도 나오지 않지만, 맨 첫 번째 페이지를 펼쳤다.


‘거의 다 까먹었으니까,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지.’


앞부분은 그가 사이트에 올린 연재분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페이지를 한두 장 넘기다 보니, 시야 끝에 금빛 글자가 띄워졌다.



[완성도: 0.3%]

[이 세계를 완성하십시오.]

[기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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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38. 비밀 결사(4) 24.09.06 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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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6. 비밀 결사(2) 24.09.02 7 0 10쪽
35 35. 비밀 결사(1) 24.08.30 8 0 11쪽
34 34.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5) 24.08.28 10 0 10쪽
33 33.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4) 24.08.26 11 0 10쪽
32 32.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3) 24.08.23 10 0 11쪽
31 31.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2) 24.08.21 10 0 10쪽
30 30.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1) 24.08.19 10 0 9쪽
29 29.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5) 24.08.16 12 0 10쪽
28 28.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4) 24.08.14 11 0 10쪽
27 27.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3) 24.08.12 13 0 9쪽
26 26.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2) 24.08.09 11 0 11쪽
25 25.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1) 24.08.07 12 0 10쪽
24 24. 금빛 태양 24.08.05 11 0 10쪽
23 23.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4) 24.08.02 12 0 10쪽
22 22.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3) 24.07.31 14 0 10쪽
21 21.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 24.07.29 11 0 11쪽
20 20. 헬리온 딜라드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1) 24.07.26 13 0 11쪽
19 19. 피서지는 북쪽으로(2) 24.07.24 19 0 9쪽
18 18. 피서지는 북쪽으로(1) 24.07.22 14 0 12쪽
17 17. 진급 시험(5) 24.07.19 16 0 10쪽
16 16. 진급 시험(4) 24.07.17 18 0 10쪽
15 15. 진급 시험(3) 24.07.15 20 0 10쪽
14 14. 진급 시험(2) 24.07.12 18 0 13쪽
13 13. 진급 시험(1) 24.07.10 17 0 9쪽
12 12. 방어는 최선의 공격(3) 24.07.08 2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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