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범이 매점에서 부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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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졸한톳찜
그림/삽화
옹골찬멸치국밥
작품등록일 :
2024.07.08 18:56
최근연재일 :
2024.09.11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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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5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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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소박한 희망

DUMMY

데라가 꺼슬꺼슬해진 목청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 분위기를 빌려 무언가 말할 것이 있어 보였다.

“무람 언니.”


“수빈이랑 민수 목소리로 작별 인사 한 번만 해주면 안 돼요···?”


"아직 놓아주기 힘드냐?"


"네에···."


300년을 끈질기게 버텨온 마녀의 부탁은 세상 그 누구보다 소박했다.

3세기 동안 쌓아 올렸던 정신력과 냉정함은 10년 남짓한 찰나의 순간에 묻혀 사무치게 쓰라린 그리움만이 남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라.


“아직···. 저녁 인사도 못 했단 말이에요···. 저녁밥도 못··· 먹고 헤어져서···.”

휘성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너무나도 연약해지고만 데라를 보며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우울함과 자괴감은 휘성의 마음속을 울리게 했다.

코끝이 시큰했고.

입술은 자꾸만 말라갔다.


“음···. 그거면 기분이 풀린다니 다행이구나. 대신, 잔치가 끝나갈 무렵에 들어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왜요···?”


“너의 간절한 부탁이니만큼 나도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보다 완벽한 목소리로 들려줄 것을 약속하마.”


“고마워요···.”


우리는 아무런 불편 불안 없이 나름 편안한, 혹은 두루뭉술한 파티를 벌였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새벽의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비애에 취한 듯이.

새벽 공기에 취한 듯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파티였다.

기쁘게 웃고 떠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 정도면 딱 좋았다.


김무람 씨와 휘성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나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것만은 확실했다.

그들의 파티는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음 일정을 보고 있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중악’이라는 극악무도한 세력과 싸우기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음을 난 알 수 있었다.


밤이 깊어 간다.

오두막의 밤이 깊어 간다.


“데라야. 파티는 아직 안 끝났어.”

휘성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끝 아니야?”

오랜만에 방 밖에 나온 탓에, 잔뜩 지쳐버린 데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근 아니야. 얼른 따라와.”

휘성이 방긋 웃으며 잔뜩 침울해진 데라를 이끌고 마당으로 나섰다.


우우우- 우우우-

부엉이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새벽의 마당은 스산하기만 했다.


“추워···.”

새벽 공기는 어째서인지 계절에 맞지 않게, 따갑도록 차가웠다.


“잔말 말고 따라와 인마.”

휘성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은 뒤, 데라에게 덮어주며 말했다.


덜컥-

휘성은 마당 구석에 위치한 아랫방 문을 열어젖혔다.


“불 좀 켜줄래?”


딸깍-


팅-


티팅-


팡-


시골에서나 볼법한 전등이 딸깍 소리를 내며 밝아진다.

불이 들어온 창고 안에서 데라가 본 것은 당연하게도 평범한 방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여고생의 방이었다.


“내가 이래 보여도, 여고생 방 구석구석 전부 꿰고 있는 사람이거든~.”


“변태야?”


“아니야.”


데라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천천히 방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파스텔톤의 벽지와 창가에 놓인 화분 하나.

새로 깔린 원목 무늬 장판과 시트.

살짝 헤진 독서실 책상과 정갈하게 꽂혀 있는 교과서들.


“옷장 문도 열어볼래?”

휘성이 옷장 문을 가리키며 말해다.

데라는 여전히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옷장을 응시한다.


덜컥-

“이게 대체···.”


옷장 안에 들어있는 것은 깔끔하게 다려진 교복 한 벌과 상자 두 개였다.


데라는 글썽거리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교복을 어루만졌다.

향긋한 라일락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괜히 허해지는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교복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섬유유연제의 향기와 더불어 울적한 마음이 더욱 진해질 뿐이었다.


“벌써 울음보 터지면 곤란하다.”

휘성이 살짝 웃어 보이며 위태로워 보이는 데라에게 말했다.


“안 터져.”

데라가 애써 눈물샘을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상자도 열어볼래?”

휘성이 방긋 웃으며 상자 2개를 가리켰다.


스윽-

데라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상자를 열어보았다.

열면 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건···.”


“그거 수리비가 엄청나더라. 나중에 돈 들어오면 갚아라.”


휘성이 가리킨 첫 번째 상자에서 나온 것은 망가져 버렸던 회색 헤드셋.

어느새 연보라 페인트로 커스텀 되어 데라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데라가 헤드셋에 붙어있던 쪽지를 읽어 보았다.

[입학 선물이야]

휘성의 정갈한 글씨체로 이루어진 단정한 문장이었다.


“너. 여기 파병 온 이상 바로 못 나간다며. 그럼 꾸역꾸역 살아남아야지. 안 그래?”

휘성이 연보라 헤드셋을 데라에게 씌어주며 웃어 보였다.

며칠 전 수빈이 헤드셋을 씌워주던 순간이 연상되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이에 자극을 받은 눈물샘에서 눈물방울 하나가 뚝 떨어지는 것이었다.


“벌써 울어? 아직 좀 더 남았는데?”


“안 울···.”

말은 이렇게 했지만, 흔들리는 동공과 그렁그렁한 눈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휘성이 데라를 조롱하듯 비웃으며 두 번째 상자를 가리켰다.

“저건 무람이 선물. 그날 현장에서 주웠데.”


“무람 언니가···?”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보는 데라.


안에는 잔뜩 그을린 종이 한 장과 포스트잇이 들어있었다.

{집들이 선물이나라]

투박하고 조잡한 글씨체로 적힌 문장이었다.

포스트잇을 조심스레 떼어내고 그을린 종이 한 장을 뒤집어 본다.


스윽-

그을린 종이의 정체는 사진.

사진 속 풍경은 가을.

그 속에 내가 있었다.


“왜 이렇게 멍청하게 찍혔어···. 둘 다···.”


그날도 여전히 중악의 본거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문뜩, 우연히 고등학교 앞을 순찰하다가 든 생각.

‘가보고 싶다.’

단풍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가을의 늦바람이 내 가슴을 쓸어내린 그날.


“보내줄게.”

민수가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지친 탐사 업무 속에서 꿈꾸던 작은 소망의 내용.

[평범한 일상을 사는 것]

민수는 생각 이상으로 세심했고, 나의 마음을 잘 공감해 주고 있었다.

애초부터 나에게 ‘중악’은 논외였다는 것을.

나에게 사명감 따위는 없었다는 것을 용케 이해하고 있었다.


“잠깐 저 나무 좀 봐줄래?”

민수가 씩 웃으며 단풍 나뭇잎이 붉게 물든 나무를 가리켰다.


“음, 나무?”

무의식적으로 그가 가리킨 나무를 바라보고.


3-

2-

1-

찰칵!-

민수와 수빈이 내게 바짝 붙어 발그레 웃던 그 순간.

스마트폰 카메라의 섬광이 번뜩였다.


선선한 가을날 아침.

모두가 종업식을 바라보고 있을 그 순간.

나의 입학식은 산뜻하게 막을 올렸었다.


뚝-


뚝-

이 순간을 빌미로 잔뜩 흐느끼고 싶어졌다.

애써 잠갔던 눈물 댐을 개방해야 할 순간이 온 것이었다.

아마 꽤 오래, 많이 흘러나올 것이다.

전부 흘러나와서 동나버릴지도 모른다.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어···. 다 잘 될 줄 알았어···. 그냥 빠르게 끝내버리라고 한 건데···.”


잠시 후.

목을 완전히 풀고 만발의 준비를 끝낸 무람이 호기롭게 창고 방으로 들어온다.


“데라 있느냐! 내 완벽하게 준비해 왔느니라! 듣고 놀라 자빠지지나 말거라!”


“···.”


“데라야? 데라야! 듣고 자거라! 나 내일이면 목이 쉴 것인데!”


“···.”


“김무람 씨? 눈치 챙기도록 해요. 깨버리면 어떡하려고 그러지?”


“다시 기절시키면 되지. 까짓거···.”


“···.”

잠시 침묵이 흐른다.

데라의 고요한 들숨과 날숨만이 들려오는 새벽.

풀벌레 소리가 이따금 울려 퍼지는 산등선이.


“우리 그냥 이대로 나가요, 방에 이불 몇 개만 깔아주고. 나머지는 내일···.”


“내가 가져오마.”


“그래 주면 고맙겠네요.”


고요한 밤.

한가로운 새벽의 아랫방.

그곳에는 어느새 잠들어버린 데라가 그을린 사진을 꼭 쥔 채로 누워 있었다.

향기로운 라벤더 향기가 흘러나오는 휘성에게 기대어.

꿈나라 여행의 왕복 티켓을 끊어 본다.

.

.

.

마녀야 마녀야.

너는 중간에 스쳐 지나가는 강시 두 명에게 인사했고,

그들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


어차피 꿈이니까.

금방 잊어도 상관없을 거야.

저 두 놈, 관을 보아하니 속에 담아두고 해코지할 놈들은 아닌 것 같거든.


뭐? 어떤 연놈이 너를 원망스러워 한데? 내 말 못 믿니?

관상은 과학이야, 싹수 노란 년아.

진짜 마법보다 위대하다고.


지금은 그냥 잊어,

나머지는 내일 생각하자고.

너 솔직히 피곤하잖아.


‘이제 학교 갈 준비해야지.’

꿈속 화면이 암전되어 간다.

데라는 그렇게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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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6화. 결별과 추격의 때 24.08.08 35 0 9쪽
15 15화. 거래의 성립. 24.07.30 38 0 12쪽
14 14화. 빈민가 저항군들 24.07.30 3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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