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를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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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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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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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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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

DUMMY


임풍 교두는 자신의 집무실에 불려 올라온 사백이십삼번을 차근히 살폈다.


조그만 꼬맹이.

예리한 눈빛을 가진 것 외에는 아무리 보아도 특별할 것은 없어보인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던 교관의 말을 종합해보면,

이 꼬마가 머리를 굴리는 것은 보통의 수준이 아니었다.

홍옥이나 구노인의 관심을 산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 왜 불려온지 아나?”

“아마 엊그제 벌어진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 여러가지 반칙을 저지르셨다지?”

“저희들끼리는 원만히 합의가 되었습니다. 교관님도 그 일로 따로 지적은 안하셨구요”

“...오늘 저녁 배식은 어떻게 진행되었지?”


옆에 서 있던 교관이 대신 답했다.


“어제와 같은 소동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조장들이 자발적으로 만두를 나눠가지더군요”


임풍은 어깨를 으쓱하며 사백이십삼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사백이십삼번도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을 마주보는 것이 아닌가.


“잘 된 일이죠. 이제 쫄쫄 굶는 아이는 없을 것 아닙니까?”

“잘 된 일이라고?”


임풍은 흥 코웃음을 쳤다.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 녀석 같으니 솔직히 말해주지. 이곳에서 너희들이 겪는 일들은 모두 다 의도가 있는 것들이야. 훈련의 일부란 말이다. 너희 오급같이 떨어지는 녀석들은 조금 더 근원적이고 말초적인 동기부여가 필요해. 그뿐이냐? 조별로 고난을 함께 겪으면서 서로 뭉치는 법, 경쟁하는 법을 일찍 깨우쳐야 하는 거란 말이다. 그것이 조직생활이라는 것이지. 그것이 천마신교 내에서 하급무인들이 생존하는 방식이고”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낸 임풍이 손가락으로 사백이십삼번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런데 이렇게 단 나흘만에, 특정 인물의 주도로 정리가 되어버리면 곤란하지. 도대체 아이들이 그 과정에서 뭘 느끼고 깨우쳤겠어?”


종국에는 아이들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곤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삼주는 걸렸을 때의 이야기.


이번 기수는 여러모로 뭔가 이전과는 다르다.

패싸움은 이틀만에 일어났고, 대화합은 나흘만에 일어났다.

이전까지 오급 아이들을 다루고 자극하던 방식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 소년, 사백이십삼번이 있었다.


“저도 이야기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전혀 기죽은 모양새가 아닌 사백이십삼번이 말했다.


“교두님의 교육 철학에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잘 알지도 못하구요. 저는 그냥 배가 고팠을 뿐입니다”

“그냥 배가 고팠다는 녀석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만두를 나눠줘?!”


임풍이 탁자를 쾅 내리쳤다.

사백이십삼번은 눈 한번 깜짝 안하고 답했다.


“제가 배고픈 만큼 다른 아이들도 배가 고프지 않겠습니까?”

“얼씨구?”

“이곳에 오기 전 신세를 졌던 약방아저씨가 늘상 하셨던 말씀이 있죠. 저희 또래 아이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제때 끼니를 먹고 잘 성장하는 거라구요”


임풍은 얼굴을 찌푸린 채 의자에 몸을 깊숙히 파묻었다.

이 녀석은 똑똑하고 성숙한 녀석일까. 아니면 그냥 배고픈 어린애일 뿐일까.

말하는 내용이나 말투도 어른과 아이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이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냥 배고픈 것 뿐이라니까요”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녀석이 말을 덧붙였다.


“끼니만 잘 챙겨주시면 분명히 쑥쑥 자라나서 천마신교의 훌륭한 일꾼이 될 겁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임풍이 껄껄 웃었다.

암혼동에 들어온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녀석이 아닌가.

아직 한창 바싹 얼어있고, 교관들을 두려워해야할 시기의 어린아이가, 이곳 암혼동을 총괄하는 교두인 자신 앞에서 당차게 요구사항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황당할 뿐이었다.


‘이 녀석을 내가 호출한게 맞나? 혹시 지금 이 녀석은 자신이 나를 불러냈다고 생각하는 거 아냐?’


하지만 이곳은 아무리봐도 자신의 집무실이다.

자신이 교두였고, 이 녀석은 오등급 훈련생이었다.

많이 쳐줘봐야 철전 몇개 정도에 팔려왔을.


“네놈이··· 휴. 됐다. 일단 너, 이리 가까이 와봐라”


임풍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녀석의 손목을 잡았다.

그에게서 일단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입을 터는 것을 보니 확실히 이 녀석은 보통이 아니다.

과연 녀석의 무공 자질 또한 그러한지 자신이 직접 판단해볼 생각이었다.


혹시나.

등급을 판정내리는 교관들이 잘못 본 것이라면.

대박을 쪽박으로 잘못 판정내린 것이라면.


“......”


하지만 꼬마의 몸을 자세히 살피던 그는 곧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는 잘 돌아가는 녀석일지는 몰라도, 타고난 체형과 체격에 한계가 명확해보였다. 더군다나 내공이 지나다녀야 할 길 - 혈맥이 잘 트여있는지가 제일 중요할텐데, 녀석에게는 그런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아이들은 다르다.

몸 안에 기를 조금만 흘려넣어보아도 금새 알아차릴 수가 있다.

개중에는 특별히 더 타고난 이들이 있다.

조금만 투자해도 커다란 성과로 곧장 나타나는 아이들.

홍옥이 그러했다.


‘아깝구나. 머리도 좋고 깡도 있는 것 같으니, 만약 힘있는 가문의 자제였다면 분명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텐데’


백도의 구대문파나 신교의 팔대가문같이 재력과 힘을 갖춘 가문들은, 그들의 자제들에게 영약을 투여하거나 내가고수의 힘으로 강제적으로 혈도를 타통하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다른 범재들보다 훨씬 더 앞선 곳에서 출발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밑바닥 암혼동에 그런 투자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어디있는가. 기껏해야 한달에 한알 주어지는 마화단 정도가 녀석들에게 할 수 있는 투자의 전부인 것이다. 그것들은 이미 일급으로 분류된 아이들의 잠재력을 폭발시키기 위한 것이니, 오등급 아이에게 돌아갈 몫은 없었다.


‘우리 교관 녀석들이 일은 참 잘해. 오급은 잘 내린 판단이군’


이 녀석이 이곳에서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행정관이나 사무관을 길러내는 명경관(明經館) 같은 곳에나 추천하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도도한 기관에서는 미천한 암혼동 출신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니 결국 머리만 좋은 이 녀석은,

임풍 입장에서는 당췌 쓸모가 없는 녀석이라는 이야기였다.



#



내 몸 전체를 샅샅이 살피는 임풍 교두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의 눈에 스쳐지나가는 실망의 눈빛은 바보라도 읽을 수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인 모양이군’


하지만 그것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전생에서도 어린 시절의 나를 높게 평가해준 사람은 없었다.

근골이니, 체격이니, 이미 시기가 늦었다느니 하는 이유를 들면서.


살수단에 파묻혀 있던 나를 홍옥이 발견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야말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소비되었을지 모르는 인생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정상적인 경로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 과감히 투자를 해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결국 나 자신을 챙기는 것은 나 스스로가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됐다. 가봐라”

“배식은요?”

“배식?”


임풍 교두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내 몸을 살피기 이전의 대화는 모두 잊어버린 듯한 눈치.


“애초에 저녁 배식 때문에 부르신 것 아니었습니까? 이제 저희 오급 아이들도 적정량의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고집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이.

잠시 고민하던 임풍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좋아. 저녁밥 가지고 장난은 그만치도록 하지. 배식도 삼급이나 사급처럼 정량으로 늘려주겠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하다.

임풍을 만난 성과로는.



#



“황기(黃耆)”

“두 근입니다”

“지황(地黃)”

“한 근입니다”

“백작약(白芍藥)”

“한 근이요”

“감초(甘草)”

“세 근”

“...이놈아. 말이 점점 짧아진다?”

“빨리 세느라··· 그냥 천천히 할까요?”

“됐다. 계지(桂枝)”

“셋”

“......”


구노인의 약방에 들락거린지도 벌써 몇 주째가 되었다.

고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드디어 정량이 나오기 시작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이곳 약방으로 이동하여 약재들을 정리하고 분류하고 무게를 잰다.


까탈스러운 성격의 구노인이지만, 내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그의 일손을 확실히 덜어주자 차츰 나에게 의존하는 부분이 많아졌다.

이런 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도 많이 하게되고.


“며칠 전 일급에서 나온 시체가 매우 끔찍했지. 보기 드물게 잔인한 시체였어. 두 눈은 파열됬고, 목을 졸라 죽인 뒤에도 수차례 얼굴을 내리쳤더군. 뼈가 완전히 바스라질때까지. 마치 뿌리깊은 원한을 마침내 갚은 것처럼 말이야”


일혼의 솜씨이다.

원한은 없다. 과시만이 있을 뿐.

하지만 굳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그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다.


“어르신. 그 커다란 침을 들고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 너무 무섭습니다”

“이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녀석이 뭔 엄살을···”


구노인은 지네 농축액을 묻힌 장침을 내 팔꿈치 깊숙한 곳에 찔러넣었다. 평소에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지만, 침만 잡으면 그 날카로움과 정확성을 잃지 않는다.


“요즘은 어떻지?”

“처음보다 많이 나아진 것 같습니다”


오른손은 차츰 나의 뜻대로 움직여주고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축 늘어져있지는 않았다. 주의깊게 관찰하지 않는다면 정상처럼 보일 정도로.


“몇달 안에는 완쾌가 되겠군. 애초에 안 움직일 이유가 없었던 팔이니 말이다”

“다행이군요”

“말해보아라. 팔은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팔이 잘려나가는 상상을 했다고”

“쓸데없는 소리”


구노인이 군데 군데 알빠진 옥수수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며칠간 지켜보니 너는 공상 따위에 휩쓸려있을 유형이 아니야”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어차피 숨길 내용도, 말해줄 수 있는 내용도 없다.


“무언가 강렬한 경험을 했음이 틀림없다. 죽음과 비견될만한, 어쩌면 죽음보다 더한··· 네놈이 나이답지 않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도 아마 그것과 관련있을테지. 애초에 너같은 녀석이 이 곳 암혼동에 들어온 것도 이상한 일이다”


노인의 통찰력은 때로 지나치게 예리할 때가 있다.

티내지 않고 하하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럴리가요. 도대체 저를 어떤 사람으로 보고 계신지 모르겠군요. 이상한 놈입니까?”

“이상하지. 많이 이상하지”


노인이 홀홀 웃었다.


“홍옥이란 녀석만큼 이상하지”


생각지 못한 순간,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나의 표정이 굳었다.


“누군지 아나?”


노인장.

그에 대하여 나만큼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오.


“들어봤습니다. 저보다 한 기수 선배라지요”

“그 녀석은···”


노인이 말꼬리를 흐렸다.


말해주시오.

그 자가 이곳 암혼동에서는 어떤 아이였는지.

당신이 보기에는 어떠했는지.


하지만 구노인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뒤로는 구노인과 잡담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노인이 극도록 예민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일급 아이들에게 첫 마화단을 복용시킬 시기가 찾아왔다.

내 내공의 실마리가 되어줄 마화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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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자령화 +2 24.08.26 1,009 20 13쪽
17 수색 +3 24.08.25 1,018 18 14쪽
16 목표 +3 24.08.24 1,024 20 14쪽
15 두번째 만남 +3 24.08.23 1,065 18 12쪽
14 살인 +3 24.08.22 1,055 21 15쪽
13 사백이십삼, 사백이십사 +3 24.08.21 1,085 19 13쪽
12 마화단(魔火丹) +2 24.08.20 1,088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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