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삼키는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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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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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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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6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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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누리 검사 (2)

DUMMY

정신 없는 재판 분위기 속에서도 형우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리고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진술을 시작했다.


“검사 측에서 제출한 증거들은 모두 정황증거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피고 이갑수 씨는 집에 돌아온 뒤, 곧바로 방에 들어가 술을 마셨다고 증언했습니다.”


형우는 사건 당시 발견된 소주병과 도시락 사진을 재판장에게 보여주었다.


“실제로 피고는 자택에 들어가기 직전. 근처 편의점에서 소주 두 병과 도시락 하나를 구매했죠. 살인을 계획한 사람이 태연하게 집에서 먹을 음식을 샀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변호 측의 변론대로 당시 피고는 술에 만취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평소 가정폭력을 남발하던 피고의 행실을 보아 우발적 살인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김누리의 말에서 뼈가 느껴졌다.

변호인에게 단 한 마디도 지고 싶지 않다는 투쟁심.

뒤에서 웅성이던 참관인들도 침을 꼴깍 삼키며 완전히 재판에 집중했다.


“이의 있습니다. 검사 측에서는 피고가 평소 가정폭력을 해왔다고 증언하고 있지만, 이웃들의 제보만으로 피고의 가정사를 판단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건 당일, 피고는 피해자와 거친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그 증거로 피해자의 손톱에서 피고의 혈흔이 발견되었죠. 이래도 가정폭력이 없었고 발뺌하실 겁니까?”

“...”


김누리 검사의 말에 전부 반박하던 형우가 처음으로 침묵했다.

빤히 김누리 검사의 얼굴을 쳐다보는 형우.

하지만.

형우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건 당황이 아닌... 동정이었다.


“변호인... 변호인...!!”


짜증 섞인 김누리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합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하... 피고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물론입니다. 혹시 CCTV 영상을 다시 한 번 재생해주시겠습니까?”


본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김누리는 귀찮다는 듯 CCTV 영상을 다시 중앙 스크린에 띄웠다.


“네. 알겠습니다.”


천천히 다시 재생되는 영상.

이갑수가 집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장면까지.

별다른 이상한 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게 무슨 증거가 된다는 거죠?”

“피해자의 옷에 집중해주십시오.”


갑자기 뜬금없이 옷이라니.

김누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옷이 뭐 어쨌다는 건데요. 딱히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요.”

“영상을 보면 피고는 자택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같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런데요. 그게 무슨 증거가 된다는 거죠?”

“사건을 정리해보자면 피고는 자택에 돌아가 방에서 술과 음식을 먹은 뒤, 피해자와의 몸싸움 끝에 칼로 찔러 살해를 한 뒤, 황급히 밖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정리해도 될까요?”


지금까지 했던 말이지 않은가.

의도를 알 수 없는 형우의 진술에 김누리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자꾸 논점을 흐리시는데. 본론을 말씀하세요.”

“피고가 자택에 들어가고 다시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15분입니다. 검사님께서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15분이라는 시간은 꽤나 긴 시간입니다. 우발적 살인 가능성이 있는 만큼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텐데요.”

“과연 그럴까요. 만약 피고가 피해자를 칼로 찔렀다면 피고의 옷에서 다량의 피가 튀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피고의 옷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죠.”


처음으로 김누리의 표정에서 당황이 느껴졌다.


“같은 옷으로 갈아입었을 수도 있고, 우비같이 방수가 되는 옷을 미리 준비해두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피고는 분명 자택에서 나올 때 아무것도 소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는 건 집안 어딘가에서 발견되었어야 하는데. 제가 알기로 그런 증거물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김누리가 다급히 사건 자료를 뒤적이자,

형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변론을 이어갔다.


“15분입니다. 범행 시간을 제외하면 증거물을 숨길 시간은 3분 남짓이었겠죠.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숨긴 증거물을 검찰 측에서 찾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요.”


반문할 여지가 없는 상황.

김누리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형우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변호사님께서는 다른 진범이 있다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그건 검찰 측에서 조사할 내용이죠. 하나 확실한 건 현재까지 수집된 증거만으로 피고의 범행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겁니다.”


양측의 진술이 모두 끝나고, 판사는 한참 동안 범행 자료를 뒤적였다.

다른 용의자가 없는 것은 명백했지만,

그렇다고 확실한 증거 없이 판결을 내릴 수도 없는 법.


고심 끝에, 판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판결을 내렸다.


“판결하겠습니다.”


피해자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은 명백하나,

피고의 범행을 입증하기에는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한 상황.

그러나 검사 측에서 제출한 증거에 따르면, 여전히 피고의 혐의가 의심될 여지가 남아있으므로 재판을 잠시 미루겠다고 발표했다.


“그래. X발. 이게 정의지. 정의야.”


낄낄거리는 이갑수의 표정에 김누리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건 둘째 치고 너무나 화가 났다.

재판을 물로 보는 저 남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했다.


...


“당신이 그러고도 대한민국 법조인이야?”


재판장에서 나온 김누리는 곧장 형우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 자식은 말이야. 자기 손으로 가정을 파탄시킨 쓰레기 중에 쓰레기야. 당신은 법조인으로서 일말의 양심도 없어?”

“그 문제라면 이미 재판에서...”


김누리에겐 형우의 말이 비겁한 변명으로 느껴졌다.


“알리바이도 없고, 동기도 확실해. 더군다나 피해자분 장례도 치루기 전에 사망 보험금이나 밝히던 게 그놈이야. 그런데 당신 때문에 지금... 하...”


울분을 겨우 참아내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겨우 분을 삭히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승소율 100%도 매번 이런 식이었나 보지? 돈 좀 벌어보겠다고 비겁하게 범죄자들 편드는 거. 범죄자보다 네가 더 나쁜 놈이야. 알아?”


여태 단 한순간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형우의 표정에서 짜증이 느껴졌다.


“검사님은 왜 이갑수 씨를 범인으로 확신하십니까?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도 아니고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잘난 척 하지 마. 아직 재판 안 끝났어. 흉기만 찾아내면 그 새끼 감빵 쳐 넣는 거. 일도 아니야.”

“자. 자. 재판 끝났는데 두분 다 왜 이러십니까.”


뒤늦게 도착한 왕석훈이 싸움을 중재하려 했으나,

서로 한 발자국도 양보하지 않는 싸움을 말려내는 건 불가능했다.


“확실한 증거도 없으면서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가시네요. 누가 그러더군요. 백 명의 범죄자를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라고요. 편견 없이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검사로서 마땅한 일 아닙니까?”

“당신은 피해자 측 생각은 안 하지? 당신 같은 변호사들이 범죄자 새끼들 옹호하는 동안, 유족들은 매일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 당신이 그분들 심정을 알기나 해?”


‘유족’이라는 말에 형우는 순간 아픈 과거가 떠올랐다.

유족의 아픔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하긴. 방구석에서 쳐박혀서 사건 자료만 읽는 사람이 뭘 알겠어.”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아. 미안합니다. 혼잣말한다는 게. 근데 조금 지나치게 말해도 되는 상황 아닌가?”


주먹이 오고 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슬아슬한 공방전.

한참 동안 서로를 째려보다가 형우가 먼저 눈꼬리를 내렸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저와 함께 다시 사건을 처음부터 조사해보는 겁니다.”

“내가 왜요? 난 검사고 그쪽은 변호산데.”

“아까는 그렇게 당당하시더니. 자신이 없으신가 봐요?”

“그래 좋아. 대신 그 자식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나오면. 책임지고 이 사건에서 빠져.”

“알겠습니다. 하지만. 무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피고께 공손히 사과하세요.”

“참 나. 검사 앞에서 정의로운 척은 지가 다하네.”


김누리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형우의 어깨를 밀치고 재판장 밖으로 향했다.


“내일 저녁 7시. 사건 현장으로 와.”


***


집에 돌아온 형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흥분했나.’


본래 ‘화’라는 감정은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나 생기는 법.

그녀의 기억을 읽었음에도 너무 감정적으로 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우 왔니?”

“아직 식사 안 하셨어요? 먼저 드시라니깐.”


밤 9시의 늦은 시간.

식탁에는 갓 지은 식사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조금 늦는다고 말씀 드렸건만.

어머니께서는 한 번도 밥을 먼저 드시는 법이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특별한 날이 아님에도 식탁 위에는 여섯 종류가 넘는 반찬들이 보였다.


어머니는 강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번도 밥을 거르거나 대충 때운 적이 없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부족하게 키우고 싶지 않으셨단다.

어머니께서는 이른 새벽부터 청소 일을 나가신다.


“걱정하지마. 엄마만 믿어.”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이다.

용돈이든 대학 등록금이든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전액 장학금을 받아 딱히 많은 돈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투정을 부리며 용돈을 달라고 졸라댔다.

억지로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모습을 바라지 않으셨으니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셨으니까.


내가 변호사가 된 뒤로도 일을 그만두지 않으셨다.

아들에게 빌붙어 사는 엄마가 되고 싶지도 않고,

무엇보다 집에 혼자 있으면 아픈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셨다.

그래서 섣불리 그만두라고 말씀드리지도 못했다.

아들로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네. 그래서 내일부터는 조금 많이 늦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알겠어~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을게.”


가족의 유대라는 건 정말이지 신기하다.

기억을 읽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머니께서는 항상 형우의 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


“진짜 오셨네요. 솔직히 기대 안 했는데.”


솔직히 서로 반가운 얼굴은 아니였지만.

첫날부터 이렇게 비아냥 거릴 줄이야.


“약속했잖습니까. 같이 조사...”

“뭐해요. 안 들어가고.”


김누리는 형우의 말을 끊어내고는 곧장 현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단단히 미움을 산 모양이다.


김누리는 안에 들어서자마자, 사건 현장을 샅샅히 뒤지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조사를 진행했음에도 처음 현장에 온 사람처럼 작은 흔적도 넘기지 않고 일일이 확인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집중하느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김누리 검사는 땀을 닦아내며 형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형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처음 있었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저기요. 여기 놀러 오셨어요? 언제까지 거기 가만히 계실 거예요.”

“아. 거슬렸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딱히 현장에서 확인할 게 없어서요.”


어이없는 형우의 대답에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뭐라고요? 지금 나랑 장난해요? 그럼 여길 대체 왜 오자고 한 건데요?”

“저는 현장에 오자고 한 적이 없습니다. 검사님께서 여기서 만나자고 말씀하신 거지.”


사건을 조사하자면서 현장은 조사하지 않겠다니.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태도에 김누리는 답답해했지만.

형우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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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배신자 (5) 24.09.11 39 3 12쪽
24 배신자 (4) 24.09.10 35 3 13쪽
23 배신자 (3) 24.09.09 37 3 12쪽
22 배신자 (2) 24.09.07 38 4 12쪽
21 배신자 (1) 24.09.06 38 3 14쪽
20 진실 24.09.05 42 3 12쪽
19 안의균 검사 (2) 24.09.04 42 4 11쪽
18 안의균 검사 (1) 24.09.03 50 3 12쪽
17 재회 (2) 24.09.02 50 5 11쪽
16 재회 (1) +1 24.08.31 58 5 11쪽
15 홍승호 (1) +1 24.08.30 60 4 15쪽
14 오해 (3) +1 24.08.29 70 5 11쪽
13 오해 (2) +1 24.08.28 81 4 12쪽
12 오해 (1) +1 24.08.27 79 4 11쪽
11 서태석 (3) +1 24.08.26 85 4 12쪽
10 서태석 (2) +1 24.08.24 87 6 11쪽
9 서태석 (1) +1 24.08.23 96 4 12쪽
8 또 너야 (2) +1 24.08.22 92 5 13쪽
7 또 너야? (1) +2 24.08.21 106 4 11쪽
6 김누리 검사 (5) +1 24.08.20 111 5 14쪽
5 김누리 검사 (4) +1 24.08.19 112 6 12쪽
4 김누리 검사 (3) +1 24.08.17 115 6 10쪽
» 김누리 검사 (2) +1 24.08.16 115 4 12쪽
2 김누리 검사 (1) +1 24.08.15 132 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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