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삼키는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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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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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1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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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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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또 너야 (2)

DUMMY

재판장 송영관의 표정에서 짜증이 느껴졌다.

남형우 변호사의 명성은 익히 들어 얼굴을 알고 있었지만.

담당 변호인도 아니고.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외부인이 재판에 끼어들었다는 사실이 매우 불쾌했다.


“재판 아직 안 끝났으니까. 정숙하세요.”


애써 형우를 무시하고 선고를 계속하려는데.


“사건에 관하여 검사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또 다시 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재판장은 경비 인원에게 손짓하며 형우를 끌어낼 것을 지시했지만,

형우는 경비들 사이를 헤집고 방청석 맨앞까지 도달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검사님!! 저랑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딱 10분. 아니. 5분이면 됩니다!! ”


김누리조차 형우의 말을 무시했다.

꽤나 멀쩡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재판 도중 난동을 피울 정도로 무식한 사람일 줄이야.

뒤늦게 도착한 경비들은 형우의 양 팔을 잡고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판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제발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판결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말에 방청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형우의 얼굴을 알 리 없었던 일반인들은 그가 사건을 뒷받침할 증인이라고 착각했고, 심지어는 말을 들어주자는 여론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1시간도 아니고, 고작 5분이라는데.

점차 형우 쪽으로 기우는 방청객 분위기.

재판장은 한숨을 내쉬며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잠깐 멈추세요.”


재판장의 명령에 경비들은 붙잡고 있던 팔을 놓고 잠시 뒤로 물러났다.


“검사 측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원래 김누리의 성격이었다면 그냥 무시하고 재판을 진행했겠지만.

이번만큼은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남형우 변호사라면. 아무런 계획 없이 난동을 피울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판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재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고측은요.”

“...”


피고측 변호사는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형우와 김누리 검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피고의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고개를 저으며 판사에게 답했다.


“저희는 사건과 관련 없는 참고인을 받아들일 수 없습...”


변호인이 거절의 의사를 표하는 사이 옆에서 형우가 무언가를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는 분명 수화를 하고 있었다.


<제가 당신의 억울함을 풀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믿어주세요.>


“잠깐만요...!!”


최보성의 동생은 다급히 변호인의 말을 끊어내고는 형우의 수화를 해석해 그대로 전달했다.


“저분이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까?”

“네. 틀림 없어요.”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만약 저희 측에 유리한 진술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형량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징역형이 나올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


변호인의 말에 최보성의 동생은 다시 한번 형우를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긴 하지만. 딱히 거짓말을 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선뜻 판단을 내리진 못했다.

자신의 일도 아닐 뿐더러, 벌금형에서 그칠 수 있는 재판을 뒤엎어 제 손으로 최보성을 감옥에 보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변호인은 피고인과 형우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크게 한숨을 내쉬고 재판장에게 다시 답했다.


“사건과 관련된 내용이라고 하니, 검사 측의 뜻을 따르겠습니다만. 만약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언이 나온다고 해도, 저분은 사전에 채택되지 않은 참고인이라는 것을 명심해주셨으면 합니다.”


재판장은 양 측의 동의를 얻고 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잠시 휴정하겠습니다. 검사 측에서는 다시 준비가 끝나면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재판장이 자리를 뜨자, 김누리는 곧장 형우의 팔을 붙잡고 법정 밖으로 나갔다.


“남형우씨. 저한테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미안합니다. 상황이 너무 급해서 그랬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예의가 아니죠. 재판이 장난인 줄 아십니까? 그리고 그쪽은 이번 재판이랑 아무 상관 없잖아요.”


김누리는 여전히 화가 난 듯 씩씩 거리며 형우를 나무랐다.


“정말 미안합니다. 재판이 끝나면 정식으로 사과드릴 테니, 먼저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형우의 간절한 애원에 김누리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


10분 뒤.

형우의 말을 끝까지 들은 김누리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지금 그 말은 나더러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라는... 하...”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을 정도로 김누리의 태도에서 짜증이 느껴졌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이 남자는 매번 이런 식이다.

겉으로는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알고 있었겠지.

과연 김누리가 어떤 선택을 할 지.


김누리는 곧장 뒤돌아 재판소 사무 직원에게 다가갔다.


“재판장님께 재판 준비 끝났다고 전해주세요. 아. 그리고.”


손가락으로 형우를 가리키며 단단히 일렀다.


“이 남자. 법정 안으로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까칠한 김누리의 태도에도 형우는 고맙다는 미소를 지었다.


“김누리 검사님. 감사합니다.”

“혹여나 들어올 생각 하지도 마요.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법정모욕죄로 기소할 거니까.”


...


다시 법정 안.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재판장이 재판 재개를 알렸다.


“갑작스럽게 휴정을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검사 측.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김누리는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피고 심문을 다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최보성은 잠시 변호인과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피고께서는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십니까?”


최보성의 동생이 김누리 검사의 말을 수화로 통역하니, 최보성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 당시 피고가 지하철에 탑승한 시각은 오후 2시 경이던데. 매일 그 시간에 이용하시는 건가요?”


최보성의 말을 동생이 대신 답했다.


“아니요. 원래는 출퇴근 시간에만 이용하는데, 그날은 특별히 다녀올 곳이 있었답니다.”


김누리는 고개를 돌려 재판장에게 증언했다.


“재판장님. 피고는 평소 사람이 북적이는 시간에 지하철을 이용했습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김누리의 증언에 재판장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래서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당시 CCTV 영상을 자세히 확인해보면, 피고는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피해자에게 가까이 밀착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누리의 증언에 영상을 다시 재생하니, 분명 최보성은 지하철이 정차할 때마다 피해자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지금 그 말은...”

“예. 맞습니다. 출퇴근 시간에는 발을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지하철을 이용합니다. 매일 사람들로 가득한 시간에만 지하철을 이용하던 피고는 습관적으로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잠깐만요.”


무언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분위기.

재판장은 김누리 검사를 가까이 불러 귓속말로 속삭였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피고의 범행을 해명하고 있는 것으로 들리는데요.”

“예. 맞습니다.”

“이봐. 김누리 검사. 지금 네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줄 알고 하는 소리야?”


순간 재판장의 말투에서 존칭이 사라졌다.

그 말은 재판장이 아닌 선배 검사로서 대하겠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밖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건 너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지금 네 행동은 경찰뿐만 아니라 검찰 조사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는 거라고. 만약 이대로 재판 물리면 위쪽에서 너를 가만히 둘 것 같아?”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완고한 김누리의 태도에 재판장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일단 그냥 넘어가. 만약 정말 죄가 없으면 그때 피고 측에서 다시 항소하면 되잖아.”

“그럴 순 없습니다.”


걱정으로 시작된 재판장의 말투는 점점 짜증으로 변했다.


“야. 김누리. 너 앞으로 검사 생활 안 할 거야? 이번 일은 분명 나중에 네 앞길에 발목을 잡게 될 거라고. 그래도 상관 없어?”

“상관 없습니다.”


단 1초도 망설이지 않는 확고한 대답.

도저히 김누리의 신념을 꺾어낼 수 없었다.

재판장은 한참 동안 김누리와 싸늘한 시선을 주고 받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넌 원래 그런 놈이었지. 어디 마음대로 해 봐.”


김누리는 아무렇지 않게 자리로 돌아가 증언을 이어갔다.


“피고의 키가 어떻게 되죠?”

“174cm입니다.”

“피해자는요?”


조금 예민할 수도 있는 질문에 피해자의 옆에 앉아있던 국선 변호사가 대신 대답했다.


“...160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피해자 측 증언에 따르면 엉덩이 밑쪽에 뭉툭한 무언가가 닿았다고 주장했습니다만. 과연 10cm가 넘게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김누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건 당시 피고가 성기를 들이댔다면 엉덩이 아래쪽이 아니라 위쪽에 닿았어야만 했다.

피해자의 진술과 일치하려면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어야만 하는데, CCTV 영상에서 피고의 그런 모습은 찍혀있지 않았다.


“사건 당시 피고의 주머니에는 담배와 라이터가 들어있었습니다. 만약 피해자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성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닿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됩니다.”


가만히 김누리 검사의 증언을 듣던 피해자 측 변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항의하기 시작했다.


“콘돔은요. 당시 피해자의 가방에서 수많은 콘돔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가방에 콘돔이 들어있다고 해서 피해자의 혐의를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사건과 무관한 증거임을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충분히 의심이 들만한 정황인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납득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해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장은 피해자 측 변호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인정합니다. 피고 측. 변론 하세요.”


재판장의 결단에 최보성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여전히 같았다.

자신은 콘돔이 뭔지도 모른다는 것.


본인이 직접 구매했으면서 무슨 물건인지도 모른다니.

누구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김누리 검사는 종이에 무언가를 작성하고는 최보성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건넸다.

쪽지를 확인한 최보성은 머리를 긁적이며 한참 고민하더니 김누리 검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대신 해명하겠습니다. 피고인은... 불법 유흥시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옆에 앉아있던 동생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최보성에게서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피고가 불법 유흥시설에서 일을 했다면, 수많은 콘돔을 구매한 이유도 납득이 됩니다. 그래서 피고는 해명하고 싶어도 차마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고용주가 절대로 다른 곳에 누설하지 말라고 당부했겠죠. 피고. 제 말이 맞습니까?”


김누리의 물음에 최보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죄를 선고하려던 재판장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이전과 같은 판결을 내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피해자가 성희롱을 느낀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검사 측에서는 사건의 본질을 흐리며 지나치게 피고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변질되는 재판장 분위기에 피해자 측 변호인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저는 지금 피고의 무죄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김누리는 중앙에 서서 허리를 숙이고 피고 측과 피해자 측에게 공손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저의 부족으로 사건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일에 대해서는 제가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두 분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오늘 재판을 잠시 미루고 사건을 다시 한번 조사하고 싶습니다.”


김누리의 간곡한 부탁에 양측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도 재판을 이어가려는 마음이 없으니.

재판장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양 측 다 동의하신 것 같으니. 이번 재판은 잠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검사 측에서는 확실하게 조사를 마친 뒤, 다시 공소장을 제출해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장이 자리를 떠나자, 김누리는 몸에 힘이 풀린 듯 자리에 주저 앉았다.


‘하... 이번 재판은 완전히 망했네.’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된 상황임에도.

김누리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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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꼬리(1) 24.09.16 23 2 12쪽
28 강재경 대표(3) 24.09.16 21 2 11쪽
27 강재경 대표 (2) 24.09.13 32 3 12쪽
26 강재경 대표 (1) 24.09.12 28 2 11쪽
25 배신자 (5) 24.09.11 39 3 12쪽
24 배신자 (4) 24.09.10 35 3 13쪽
23 배신자 (3) 24.09.09 37 3 12쪽
22 배신자 (2) 24.09.07 38 4 12쪽
21 배신자 (1) 24.09.06 38 3 14쪽
20 진실 24.09.05 42 3 12쪽
19 안의균 검사 (2) 24.09.04 43 4 11쪽
18 안의균 검사 (1) 24.09.03 50 3 12쪽
17 재회 (2) 24.09.02 50 5 11쪽
16 재회 (1) +1 24.08.31 58 5 11쪽
15 홍승호 (1) +1 24.08.30 60 4 15쪽
14 오해 (3) +1 24.08.29 70 5 11쪽
13 오해 (2) +1 24.08.28 81 4 12쪽
12 오해 (1) +1 24.08.27 79 4 11쪽
11 서태석 (3) +1 24.08.26 85 4 12쪽
10 서태석 (2) +1 24.08.24 87 6 11쪽
9 서태석 (1) +1 24.08.23 96 4 12쪽
» 또 너야 (2) +1 24.08.22 93 5 13쪽
7 또 너야? (1) +2 24.08.21 106 4 11쪽
6 김누리 검사 (5) +1 24.08.20 111 5 14쪽
5 김누리 검사 (4) +1 24.08.19 112 6 12쪽
4 김누리 검사 (3) +1 24.08.17 115 6 10쪽
3 김누리 검사 (2) +1 24.08.16 115 4 12쪽
2 김누리 검사 (1) +1 24.08.15 132 5 12쪽
1 아버지의 죽음 +2 24.08.14 160 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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