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삼키는 변호사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추리

새글

두지도
작품등록일 :
2024.08.14 17:16
최근연재일 :
2024.09.17 23:59
연재수 :
30 회
조회수 :
2,034
추천수 :
117
글자수 :
161,103

작성
24.08.23 18:19
조회
95
추천
4
글자
12쪽

서태석 (1)

DUMMY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90도로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하는 동생의 눈에서 그렁그렁한 눈물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옆에 서 있던 최보성도 동생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형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들의 몸을 일으켰다.

딱히 무언가를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에서 뿌듯함이 느껴졌다.


“혹시... 김누리 검사님은 어디에 계세요? 그분께도 꼭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서요.”

“글쎄요... 아마 일이 너무 바쁘셔서 먼저 돌아가셨을 거예요.”

“그렇군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오늘 너무 감사했다고 대신 전해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꼭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최보성과 동생은 다시 한번 공손하게 감사를 표한 뒤, 재판소를 떠났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을 쯤.

형우는 고개를 돌려 구석을 향해 말을 건넸다.


“아무리 그래도 나와서 한 말씀 하시지 그러셨어요.”


그제서야 구석 모퉁이에서 숨어있던 김누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검사고, 저쪽은 피고인입니다. 재판도 아직 안 끝났는데, 감사 인사는 무슨.”


김누리는 형우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형우는 김누리의 화를 풀어주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생? 당신이 알기나 해요? 내가 그쪽 때문에 지금... 하... 됐다. 알고 있었으면 그런 미친 짓을 했을 리가 없지.”

“죄송합니다...”


분명 김누리는 화를 내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은은한 미소가 느껴졌다.


“그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거예요?”

“뭐가요?”

“수어 말이에요. 제법 능숙해 보이던데.”

“제가 원래 좀 다재다능한 편이라...”


김누리가 의심 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형우는 애써 눈을 피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김누리 검사. 나 좀 보지.”


분위기를 깨고 송영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재판은 너무 성급했어. 자네도 알잖아. 이 바닥에서 검사가 자존심을 굽힌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가벼운 인사를 주고 받을 새도 없이 송영관에게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검사들은 대개 완벽주의자다.

피고에게 합당한 형벌을 구형해야 한다는 직업적 특성 때문인지, 아무리 작은 실수라도 결코 융납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검사들은 재판에서만큼은 크나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 김누리가 벌인 행동은 검찰 전체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것과 같았다.


“만약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일단 재판을 끝내고 경찰에게 재조사를 명령했어야지. 왜 네 마음대로 책임을 다 끌어안냐, 이 말이야.”

“...”


사실 김누리도 알고 있었다.

형우가 없었더라면 분명 재판에서 벌금형을 받아냈겠지.

만일 재판 이후 피고의 무죄가 밝혀질 여지가 있다면,

경찰들에게 재조사를 명령하고 항소심을 건의하는 것이 일반적인 대처이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억울함이 밝혀질 때까지 고통받을 피고인의 마음.

그리고 본인의 책임을 경찰들에게 전가하는 검찰들의 악습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저는 검사입니다. 남의 잘못을 밝혀내는 사람인만큼. 본인의 잘못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제 뜻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떳떳한 검사가 되고 싶지. 무책임한 검사가 되고 싶지 않거든요.”


그녀의 당돌한 대답에 송영관의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하지만 김누리는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당당한 표정으로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송영관은 김누리와 한참 동안 사나운 시선을 주고 받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쯧. 쯧. 이래서 요즘 것들이 문제라니까. 이제 막 검사증 잉크가 마르기 시작한 놈이 감히 선배한테 눈을 부릅뜨고 대들고 말이야.”

“...”


송영관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물며 뿌연 연기를 내뱉었다.


“검찰 측에는 내 변심으로 재판을 연기했다고 보고할 거야.”

“네...?”


후배를 향한 지루한 잔소리가 계속되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송영관의 대답에 김누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검사라는 놈이 자기가 기소해 놓고, 제 손으로 재판을 무른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냐?”

“제가 전부 책임 지겠...”

“니 주제에 책임은 무슨. 책임이란 건 감당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짊어질 수 있는 거야.”


송영관은 단호하게 김누리의 말을 끊어냈다.


“하지만...”

“어허. 또 말 대답이네. 네가 이뻐서 이러는 줄 알아? 너 같은 후배를 둔 느그 선배들이 불쌍해서 그러는 거여. 까불지 말고 너는 네 할 일이나 똑바로 해.”

“...감사합니다. 선배님.”

“지랄. 감사는 무슨. 아. 그리고.”


송영관은 고개를 돌려 형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형우 변호사님 맞으십니까?”

“아... 예.”


그리고 곧장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형우에게 악수를 건넸다.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실제로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네요.”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아닙니다. 그쪽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우리 후배 놈이 모자란 탓이지.”


그는 잠시 김누리를 찌릿 흘겨보고서는 껄껄대며 웃어댔다.


“김누리 검사랑 친분이 있는 건 알겠는데. 다음부터 그런 일이 있으면 저한테 직접 말씀해 주세요.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법정 안에서만큼은 제가 판단할 일이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 재판이 있어서.”


송영관은 형우를 향해 싱긋 웃어보인 뒤, 다시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좋은 선배를 두셨네요.”


형우는 송영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이가 들어 어깨가 움츠려들었음에도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 듬직해보였다.


“...”


아무런 반응이 없어 고개를 돌려보니, 김누리는 이미 멀찌감치 떨어져 자신의 차로 향하고 있었다.


“김누리 검사님!?”

“미안하지만. 식사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네요. 누구 덕분에 할 일이 많아져서.”


김누리는 차에 시동을 걸고 곧장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조금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 그녀에게 형우는 안중에도 없을 테니까.


...


성추행 사건은 생각보다 빠르게 종결되었다.

지하철 CCTV를 면밀하게 확인해 본 결과,

사람들을 피해 몸을 밀착하는 최보성의 모습이 확인되었고.

불법 유흥시설에서도 최보성에게 콘돔 심부름을 시킨 사실을 인정했다.

이후 모든 사정을 들은 피해자가 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성추행 사건은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


***


사건이 종결되고 보름이 지났음에도 좀처럼 김누리 검사에게서 연락이 오질 않았다.

잊어버렸을 수도 있고, 일이 너무 바빠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형우는 혹여 자신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변호사님... 변호사님...!?”


사무실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던 형우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변호사님...? 무슨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십니까?”


길게 머리를 묶은 서태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형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 근데 무슨 일이시죠?”

“부탁하신 자료 정리 다 끝냈습니다.”


「서울 교도소 신규 입소자 명단」


형우는 서태석이 건넨 서류를 빠른 속도로 넘겼다.

일반인에게 조회 권한이 없는 내용임이 분명한데,

서태석은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듯 코를 후벼댔다.


“살인을 저지른 죄수들은 맨 뒷장에 모아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봉대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형우가 자세히 명단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쯤,

서태석은 인상을 찡그리며 형우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제 말씀해주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뭐를요?”

“봉대만. 죽일 겁니까?”


순간 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한번도 보지 못한 싸늘한 눈으로 서태석을 노려보았다.


“어후. 무서워라. 직원으로서 겨우 이 정도 질문도 못하나?”

“입조심 하시죠.”

“근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가는 게 하나 있는데.”


정색을 하는 형우의 모습에 어느샌가 서태석의 말투에서 존중이 사라졌다.


“경찰 측 자료를 조회해보니까, 사건 당일 그쪽은 장롱 안에 가만히 숨어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놈 얼굴을 우연히 봤다고 치자. 근데 그놈 이름은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

“...”


봉대만.

이름, 얼굴, 출신, 나이, 사소한 버릇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살해된 그날, 형우의 머릿속에 들어온 살인마의 기억.

잊어서는 안 된다.

아니.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

그런 아버지를 조롱하며 무참히 살해한 살인마 봉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억울하게 눈을 감은 아버지를 위해.

그 날 이후 삶이 지옥으로 변해버린 우리 가족을 위해.


형우는 입술을 깨물며 손에 든 묵주를 꽉 쥐었다.


“경고했을 텐데요. 선을 넘진 말라고.”


당장 주먹이 오고 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서늘한 분위기.

서태석은 싸늘한 눈으로 형우를 노려보더니, 곧장 표정을 풀고 실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 그쪽이나 나나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니까 더 이상 묻진 않을게.”


서태석은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형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 혹시나 오해하고 있을까 봐 말하는데. 난 그쪽이 쥐고 있는 내 약점 때문에 당신을 도와주는 게 아니야. 나는 그저 이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


서태석은 다시 한번 싱긋 미소를 지어보인 뒤, 곧장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하...”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사람.

이미 서태석의 기억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형우조차도 대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4년 전.


6개월의 실무 교육을 마친 형우는 곧장 개인 사무실을 차렸다.

확고한 목적을 지닌 그가 다른 로펌에 들어가는 건 무리였으니까.


처음엔 홀로 사무실을 운영했다.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읽는 능력을 지닌 형우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이 바뀌었다.


예상과는 달리 변호사 업무 만으로도 대부분의 시간을 잡아먹었다.

그렇다고 변호사 일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변호사 일을 하다 보면 많은 범죄자를 만날 수 있고,

그들의 기억을 이용한다면 언젠가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에게 닿게 될 수도 있으니까.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아버지 사건을 대신 조사해줄 사람.

그렇다고 아무나 뽑을 수는 없다.


유능함은 둘째 치고.

시킨 일에 의문을 갖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아버지 사건을 조사하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니까.


처음엔 무작정 인터넷에 공고문을 냈다.

하지만 좀처럼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력도 없는 초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지.


스스로 언급하기는 조금 무안하지만, 공고문에 '국내 최연소 변호사'라는 수식어를 덧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우의 명성을 알아 본 지원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메일로 간단한 자기소개를 받고 면접을 핑계로 한 사람씩 전부 불러냈다.

사실 형우에게 면접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좋게 포장한 면접 내용보다는 그 사람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니까.


개인적인 일을 밖으로 떠벌리고 싶진 않았기에, 입이 가벼운 사람은 후보에서 제외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 금방 일을 그만둘 사람,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은 사람 등.

사건 조사에 걸맞지 않은 사람들을 한 명씩 제외하다보니, 적합한 사람을 찾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랬던 걸까.

이대로라면 사람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으려던 찰나.


띠리링 -


수상한 차림의 누군가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서태석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기억을 삼키는 변호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0 꼬리(2) NEW 2시간 전 8 0 11쪽
29 꼬리(1) 24.09.16 23 2 12쪽
28 강재경 대표(3) 24.09.16 21 2 11쪽
27 강재경 대표 (2) 24.09.13 32 3 12쪽
26 강재경 대표 (1) 24.09.12 28 2 11쪽
25 배신자 (5) 24.09.11 38 3 12쪽
24 배신자 (4) 24.09.10 34 3 13쪽
23 배신자 (3) 24.09.09 37 3 12쪽
22 배신자 (2) 24.09.07 38 4 12쪽
21 배신자 (1) 24.09.06 37 3 14쪽
20 진실 24.09.05 42 3 12쪽
19 안의균 검사 (2) 24.09.04 42 4 11쪽
18 안의균 검사 (1) 24.09.03 50 3 12쪽
17 재회 (2) 24.09.02 50 5 11쪽
16 재회 (1) +1 24.08.31 58 5 11쪽
15 홍승호 (1) +1 24.08.30 60 4 15쪽
14 오해 (3) +1 24.08.29 70 5 11쪽
13 오해 (2) +1 24.08.28 81 4 12쪽
12 오해 (1) +1 24.08.27 78 4 11쪽
11 서태석 (3) +1 24.08.26 85 4 12쪽
10 서태석 (2) +1 24.08.24 87 6 11쪽
» 서태석 (1) +1 24.08.23 96 4 12쪽
8 또 너야 (2) +1 24.08.22 92 5 13쪽
7 또 너야? (1) +2 24.08.21 105 4 11쪽
6 김누리 검사 (5) +1 24.08.20 111 5 14쪽
5 김누리 검사 (4) +1 24.08.19 112 6 12쪽
4 김누리 검사 (3) +1 24.08.17 115 6 10쪽
3 김누리 검사 (2) +1 24.08.16 114 4 12쪽
2 김누리 검사 (1) +1 24.08.15 132 5 12쪽
1 아버지의 죽음 +2 24.08.14 158 6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