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삼키는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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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지도
작품등록일 :
2024.08.1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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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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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너야? (1)

DUMMY

진실을 밝히는 데 생각보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권강민과 이택수는 입을 꾹 다물었으나,

감식반이 폐공사장을 자세히 조사한 결과 이미현의 혈흔이 발견되었고.

권강민의 수하들이 살인 사건에 연루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털어놓으면서 자연스럽게 범행이 입증되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회사 자금을 담당하던 이미현은 권강민의 사무실에서 해외 계좌가 담긴 USB를 빼돌렸다.

이를 눈치챈 권강민은 곧장 이미현을 불러냈고, 추궁으로 시작된 말다툼은 몸싸움으로 이어져 그녀의 복부에 칼을 찔렀다.

이후 이미현은 권강민을 피해 집으로 도망쳤지만, 이미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린 탓에 사망한 것이었다.


“거 봐. 내가 죽인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혐의가 벗겨진 이갑수는 깔깔거리며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반대편에서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던 김누리의 기분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내심 재판을 우롱하는 이갑수가 처벌 받기를 원했는데,

오히려 그의 혐의를 벗겨준 상황이 조금은 분하게 느껴졌다.


“그럼 난 이제 여기서 나갑니다? 에휴.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이갑수가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지.

조금 찝찝하긴 해도 죄가 없는 사람을 벌할 수는 없으니 그만 포기하려는 그때.


“잠깐만요. 아직 안 끝났습니다.”


옆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형우가 이갑수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예? 변호사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김누리조차도 형우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의 의뢰인이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무슨 더 할 말이 남아있겠는가.


“사건 당시 이미현씨 손톱에는 당신의 피부 조각이 박혀있었습니다. 맞습니까?”

“그게 뭐 어쨌다고요.”


형우의 날카로운 질문에 김누리 검사의 눈이 번뜩였다.


“변호사님. 설마...”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이갑수씨가 집에 도착했을 때 아직 이미현씨는 살아있었을 겁니다.”


이갑수는 당황한 듯 침을 꼴깍 삼키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다.


“그... 그럴리가요. 제가 왜 제 부인을 죽게 내버려 두겠어요.”

“이 USB 때문이겠죠.”


형우는 주머니에서 흙이 묻은 USB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그걸 어떻게...”

“사건 당일 당신은 현장에서 도망쳐 나와 곧장 근처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시신을 목격한 사람이 뜬금없이 공원을 갔다.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CCTV를 돌려봤더니 당신이 화단에 이 USB를 숨기는 장면이 찍혀있더군요.”

“아..아니야... 나는 모르는 일이야.”


형우의 증언이 계속 될수록 이갑수는 온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 USB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현씨가 쓰러져 있는 걸 확인하고 USB를 빼앗으려던 중 이미현씨가 당신의 팔을 붙잡았던 거겠죠. 제 말이 틀렸습니까?”


이갑수는 다리가 풀려 비틀거리더니, 곧장 형우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X발. 너는 내 변호사잖아. 당신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김누리 검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형우가 싱긋 웃으며 쳐다보자,

김누리는 피식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공익신고자 보호법 제14조. 공익신고자의 신고는 그 내용에 직무상 비밀이 포함된 경우에도 직무상 비밀준수 의무를 위반하지 아니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남형우 변호사에게는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

“젠장...”


형우의 증언에 따라 이갑수는 살인 혐의에서 과실치사 혐의로 이전되어 다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형우도 이갑수의 변호에서 제외되었다.

자신의 범죄를 고발한 변호사를 선임할 사람은 세상에 없을 테니까.


...


이후 사건은 빠르게 종결되었다.

권강민과 이택수는 불법 자금 세탁과 살인죄로 각각 징역 30년과 10년을 선고 받았고,

이갑수는 과실치사 혐의로 3년의 금고형을 선고 받았다.


형우를 나쁘게만 바라보던 김누리의 시선도 어느정도 바뀌었다.

물론 여전히 싸가지 없고 제멋대로인 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썩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김누리는 종종 형우의 사무실을 찾아가 진행상황에 대해 알려주었다.

딱히 알려줄 의무는 없지만, 진실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준 귀인에 대한 예우랄까.

형우가 찾아올 필요 없다고 거듭 사양했지만, 김누리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잘 마무리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재판도 마무리 되었으니 앞으로는 만날 일 없겠네요.”


딱 선을 긋는 김누리의 태도에 형우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말씀을 섭섭하게 하시네. 앞으로도 종종 마주칠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그러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더 좋을 것 같은데요.”


검사와 변호사.

사이가 나쁘다고 볼 순 없지만, 법정에서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어야 할 관계.

김누리 검사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으므로 딱히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아. 참.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뭘요?”

“USB 말이에요. 분명 사건 조사 자료에는 USB에 관한 내용이 없었던 것 같은데.”


허를 찌르는 김누리의 물음에 형우는 잠깐 당황했다가,

뒷 머리를 긁적이며 대충 둘러댔다.


“말씀드렸잖아요. 공원 CCTV를 확인해봤다고.”

“그건 그렇다 치고, 그 USB가 비밀 자금이 담긴 계좌라는 건 어떻게 아셨죠?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닐텐데요.”


사건도 해결 되었으니, 대충 넘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김누리 검사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땐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뇨?”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잖아요. 그래서 그냥 떠본 건데. 딱 들어맞지 뭐에요?”


김누리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형우를 째려보다가,

형우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다음부터는 그런 정보가 있으면 저희 측에 미리 말씀해주세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김누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90도로 허리를 숙여 형우에게 사과했다.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그렇게나 자존심이 센 김누리 검사가 허리를 굽히다니.

형우는 다급히 김누리를 일으켜 세웠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약속했잖아요. 진 쪽이 깔끔하게 사과하기로.”


김누리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는데.

김누리 검사는 자신이 뱉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제 손을 떠난 사건인걸요.”

“아니요. 변호사님이 아니었다면 사건의 진실을 밝힐 수 없었을 겁니다.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깔끔하게 인정하는 모습에 형우도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사과의 의미로 제가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은 어떠십니까?”

“내일 재판이 있기는 한데...”

“그럼 내일 제가 재판장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네. 그러시죠.”


김누리 검사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곧장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사무실까지 찾아왔으면 차라도 같이 한 잔 하고 갈 법도 한데.

한결 같은 김누리의 차가운 모습에 형우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


다음 날. 아침.

약속 시간보다 한참 이른 시간.

형우가 차를 끌고 재판장에 도착했다.

약속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 성격이기도 하고,

김누리 검사가 재판을 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판사가 출석을 부르는 것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웅성거리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침묵으로 변했다.

재판장은 검사 측 출석을 부르며 김누리 검사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검사 출신 판사 송영관.

그의 표정으로 봤을 때 김누리 검사와 꽤나 친분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김누리 검사는 송영관에게 가벼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한다는 건가.

출석 확인이 끝나자마자, 김누리 변호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하게 재판의 포문을 열었다.


반대편 피고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30세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정도의 사고 능력을 지닌 청각장애인 최보성.

수어 통역을 위해 최보성의 동생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검찰 측에서는 그를 성추행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 측 진술에 따르면.

사건 당일 피고인 최보성은 오후 3시경 지하철에 탑승했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최보성은 앞에 있는 여성에게 가까이 접근했고,

10여 분간 자신의 성기를 들이댔다고 주장했다.


피해자의 진술도 같은 맥락이었다.

수차례 엉덩이 아랫부분에 뭉툭한 무언가가 닿는 것을 느꼈다는 것.

이후 역에서 내린 최보성은 지하철 경찰대에 성추행 혐의를 추궁당했다.

조사를 위해 그의 가방을 뒤져보니 그의 가방엔 콘돔이 수두룩하게 들어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

왜 가방에서 콘돔이 나왔냐고 물으니, 최보성은 그것이 콘돔인 줄도 몰랐다고 진술했다.

당연히 경찰은 최보성의 말을 믿을 수 없었고,

지하철 CCTV 영상과 피해자의 진술을 기반으로 최보성을 재판에 넘겼다.


최보성은 진술은 전혀 일관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정도의 사고 능력을 지닌 탓인지.

무죄를 주장하면서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등.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변호인은 최보성과 다른 방향으로 재판에 접근했다.

현재 피고는 장애를 앓고 있어 자제력이 부족해,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라며.

충분히 반성하고 있고,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최보성의 보호자로 나온 그의 동생조차 변호사의 의견에 동의했다.

증거도 확실하고, 딱히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

형량을 탕감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정한 것이다.


“피고 측. 범행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판사의 물음에 최보성은 잠시 변호인과 동생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판장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성추행이라는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고.

증거 영상도 존재하는데. 결과를 볼 것도 없이 유죄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마지막 최종 변론이 끝나고. 재판 장의 선고만이 남아있는 그때.

형우의 머릿속으로 최보성의 기억이 들어왔다.


“판결하겠습니다. 피고가 저지른 범죄는 경시해서는 안 될 악한 범죄임이 분명하나, 피고가 8세 정도의 어린 사고를 지녔다는 점, 평소 자제력이 부족한 충동 증세를 보인다는 점. 그리고 혐의에 대해 인정하며 반성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피고에게 3000만원의 벌금형을...”


재판장이 망치를 들어 피고의 형량을 선고하려는 그때.


“잠깐만요!!”


뒤에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누구야. 신성한 재판장에서 감히 난동을 피우는게.

김누리 검사는 인상을 찡그리며 방청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남형우 변호사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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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99 as*****
    작성일
    24.08.21 20:01
    No. 1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8 로스쿨조아
    작성일
    24.08.21 20:12
    No. 2

    아...... 변호사가 자신을 수임한 클라이언트의 비밀을 밝히는 건 비밀유지 의무 위반입니다. 공익신고법 14조를 준용하는게 아니라요. 변호사는 상담 중 알게 된 사실을 밝히지 않을 의무가 있고, 설령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도 의뢰인을 설득하고 설득하지 못하면 수임을 거부해야하지, 자신을 수임한 의뢰인의 비밀을 누설해서는 아니됩니다.

    더군다나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은 피고인을 변호하기 위해 선임된 건데, 직접적으로 처벌받게끔 검사한테 일러바친 건 그냥 쉴드불가에요. 애초에 선임받지 않거나 의뢰인을 설득했어야 합니다.

    물론 소설이니 백번 양보해서 알고서도 그냥 수임을 받았다치더라도, 검사한테 저렇게 의뢰인의 명백하게 불리한 증거를 전달하는건 빼도박도 못하게 징계감이에요. 면책 사유가 아니라.. 앞부분에서부터 당황스러운 부분이 많았습니다만 소설적 허용으로 이해하고 읽었는데, 이건 아예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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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배신자 (4) 24.09.10 34 3 13쪽
23 배신자 (3) 24.09.09 37 3 12쪽
22 배신자 (2) 24.09.07 38 4 12쪽
21 배신자 (1) 24.09.06 37 3 14쪽
20 진실 24.09.05 42 3 12쪽
19 안의균 검사 (2) 24.09.04 42 4 11쪽
18 안의균 검사 (1) 24.09.03 50 3 12쪽
17 재회 (2) 24.09.02 50 5 11쪽
16 재회 (1) +1 24.08.31 58 5 11쪽
15 홍승호 (1) +1 24.08.30 60 4 15쪽
14 오해 (3) +1 24.08.29 70 5 11쪽
13 오해 (2) +1 24.08.28 81 4 12쪽
12 오해 (1) +1 24.08.27 78 4 11쪽
11 서태석 (3) +1 24.08.26 85 4 12쪽
10 서태석 (2) +1 24.08.24 87 6 11쪽
9 서태석 (1) +1 24.08.23 96 4 12쪽
8 또 너야 (2) +1 24.08.22 92 5 13쪽
» 또 너야? (1) +2 24.08.21 106 4 11쪽
6 김누리 검사 (5) +1 24.08.20 111 5 14쪽
5 김누리 검사 (4) +1 24.08.19 112 6 12쪽
4 김누리 검사 (3) +1 24.08.17 115 6 10쪽
3 김누리 검사 (2) +1 24.08.16 114 4 12쪽
2 김누리 검사 (1) +1 24.08.15 132 5 12쪽
1 아버지의 죽음 +2 24.08.14 158 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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