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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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수
그림/삽화
AI
작품등록일 :
2024.08.16 00:11
최근연재일 :
2024.09.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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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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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EP 1-1. 퇴역 기사의 양자

DUMMY

삼십 년간의 현역 생활이 끝났다.

남은 것은 성한 곳이 없는 장년의 몸뚱이와, 낡은 플레이트 메일 한 벌.

그리고 세 번째 팔처럼 익숙한 롱소드 한 자루.


조용히 여생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다.

온갖 ‘더러운 일’을 해온 기사 치고, 그처럼 전역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케이든 실버팽’은 로브 자락으로 거센 눈바람을 막으며 발길을 옮겼다.

목적지는 이 빌어먹을 툰드라 지대가 끝나는 지점의 작은 마을이다.


문득 케이든의 눈에 이질적인 것이 들어왔다.

눈더미 위에 회백색 천 뭉치가 놓여 있다.


거적데기?

아니, 어린아이를 감싸 둔 낡은 이불 따위다.

비쩍 마른 세 살 배기 아이가 미동 없이 들어있다.


“······.”


흔한 일이다.

특히나 요즘같은 시기에는.

잠시 눈길을 주고 다시 몸을 돌리던 찰나, 케이든은 기이함을 느끼고 아기를 자세히 살폈다.


“살아있군.”


아직은 온기가 느껴지는 작은 신체.

생명의 불꽃이 촛불처럼 스러져 간다.


케이든의 말에 아이의 눈이 그의 얼굴을 향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일말의 감정을 찾아볼 수 없는, 유백색의 동공이다.


초점이 없다.


“장님인가. 부모에게 버려질 만도 하다.”


그는 아기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냥개 케이든’을 아는 사람이라면 의심을 할 장면이다.


“네 부모님은?”

“······.”


세 살 짜리 갓난쟁이와 소통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케이든은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아들었다.

그 때, 그는 온 몸에 전류가 관통한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 빼빼 마른 아이가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케이든의 검지손가락을 꼭 쥐었기 때문이다.


케이든은 손을 들어 아기의 백금발 머리카락을 쓸었다.


“제법 잘생긴 녀석이로다.”

“······.”

“너는 우는 법도 모르느냐?”

“······.”


케이든조차 견디기 힘든 추위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얼마나 큰 공포를 느꼈을까.

타고난 정신력일까, 아니면 이미 죽음을 받아들였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 없지.”


이윽고 케이든은 건조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유리 장식품이라도 된 듯,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추위를 잊으려고 발을 동동거리던 한 노인이 케이든을 발견하고 손을 높이 흔들었다.


“케이든 경, 이 쪽입니다!”

“촌장.”


촌장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다.

수 시간 동안 그를 기다렸던 것이 분명하다.


“가문으로부터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부족함 없이 모실 테니 걱정 마십시오. 이미 경께서 머물 저택은··· 어라? 그 아이는?”


촌장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제가 알기로 케이든 경은 미혼이십니다만.”

“오다 주웠네.”

“오다 주워요?”


퇴역 기사가 씨익 웃었다.


“양자를 삼을까 하는데. 괜찮겠지?”

“··· 그거야, 경의 의사입지요. 마을 아이가 늘어나면 제 입장에서도 좋습니다. 그런데 왜···?”

“글쎄. 변덕이라고 해 둘까.”


촌장은 케이든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피냄새에 침을 꿀꺽 삼켰다.

애초에 반대할 생각도 없었지만, 사냥개의 소문은 축소된 면이 있다.


“아이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 그레이스.”


케이든이 작게 읊조렸다.


“축복··· 입니까?”

“그렇네. 악마의 삶을 산, 내 인생에 다가온 축복··· 정도로 해 둘까.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는 하염없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쉰이 넘어 여자 손도 잡아본 적 없는 케이든 실버팽이 육아 지식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놀라운 속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어떤 음식이든 불만 없이 받아먹었고, 일반인의 이해를 뛰어넘은 생존 본능을 지니고 있었다.


‘살아야 한다.’


세 살, 원래라면 단순한 사고밖에 할 수 없는 나이다.

그러나 그레이스에게는 전생의 영혼이 들어있었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을 ‘지구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름이든, 외모든 제대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저 성인의 사고 능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눈보라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고, 굉장히 위험해 보이는 기사의 품에 안겨 마을에 도착했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여기가 어떤 세계인지 알 수 있다.

일반인보다 월등히 뛰어난 청력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의 대화에서 세상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었다.


왕과 기사, 영주, 마수, 그리고 마법.

중세 판타지 세계다.

생각과 다른 부분이 조금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일단 살고 보자.’


4년이 흐르고 그레이스는 일곱 살이 되었다.

그 동안에도 전생의 기억은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변한 점이 있다면, 그레이스가 이 세계의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다는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일반인처럼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으며, 마을 사람들과도 안면을 트긴 텄다.

건강을 완전히 회복해 여느 일곱 살 짜리 아이들만큼 자랐다.

덩치는 조금 작았지만 체력과 몸의 균형은 좋은 편이다.


그의 양아버지가 케이든이었기 때문이다.

케이든은 2년 전부터 그레이스를 매일 훈련시켰다.


“그레이스, 정신 차려라.”

“··· 예, 아버지!”


훈련 때의 케이든은 냉정했다.

일말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장님 소년에게 기대할 수 없는 부분을 요구했다.


“적은 네 공격을 기다리지 않는다. 틈이 보이면 바로 칼을 꽂아 넣어라.”

“알겠습니다.”


탕!


그레이스가 땅을 세게 밟았다.

진동이 퍼져나가며 케이든의 모습이 심상 속에 그려진다.

이 능력이 그가 일반인처럼 살아갈 수 있고, 전투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이유다.

마치 박쥐처럼 소리의 반사를 통해 잠시나마 대상의 형태를 그릴 수 있었다.


‘빈틈.’


그레이스는 목검을 케이든의 겨드랑이 사이로 찔러 넣었다.

그러나 팔을 붙이는 단순한 동작 하나로 목검을 놓쳤고, 힘의 반동을 해소하지 못해 허공에 빙빙 돌며 날아갔다.


쿵.


작은 몸뚱이가 마당 구석에 쳐박혔다.


“아무래도 너는 검을 다룰 자질이 없는가 보구나.”


케이든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레이스가 대(大)자로 누운 채 불퉁하게 답했다.


“··· 애초에 일곱 살 짜리가 어떻게 숙련된 기사에게 덤벼요.”

“진짜 재능있는 놈들은 다 한다.”

“앞도 안 보이는 아들한테 너무해.”

“음.”


케이든의 목소리가 갑자기 변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레이스에게 다가왔다.


“많이 아프냐, 아들?”

“몰라요.”


그레이스는 짐짓 토라진 목소리로 고개를 돌렸다.

이럴 때면 케이든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어르고 달래주고는 했다.

4년의 세월이 흐르며 ‘사냥개’ 케이든은 아들 바보가 됐다.


그레이스는 이 순간이 제일 좋았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부모의 정이 그리워서일 수도 있고, 아직 신체 나이가 일곱 살인 이유일 수도 있다.


예상대로 케이든은 그레이스를 품에 안고 타박상과 찰과상을 살피기 시작했다.


“네가 걱정돼서 그렇지, 그레이스.”

“무슨 걱정이요?”
“세상은 험하단다. 특히 너같은 장님에게는. 요새는 ‘변칙 개체’까지 자주 등장해서···.”

“그거야 완전 드문 경우잖아요. 너무해요, 아버지. 앞 못보는 양아들이라고 막 대하는 거 아니에요?”

“···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그레이스.”


케이든이 씁쓸한 얼굴로 머리를 쓸었다.

따뜻한 감각.

첫 만남에서 느낀 손짓과 똑같았다.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 그레이스가 그의 품에 빠져나와 번쩍 일어났다.


“제가 검의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하셨죠, 아버지?”

“··· 그렇다만.”

“그럼.”


그레이스가 독특한 기수식을 취했다.


“격투로 한 번 해볼래요? 몸과 몸이 마주치면 또 모르죠.”


얼마 전부터 희미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마치 농도 짙은 스프의 거품이 찬찬히 터지듯, 정의할 수도, 형용할 수도 없는 막연한 기억이다.

어쩌면 전생의 기억이다.


잠시 놀란 눈으로 그레이스를 쳐다보던 케이든의 눈이 장난스러운 호선을 그렸다.


“··· 격투가 아들도 나쁘지 않지.”


탕!


그레이스가 발을 구르자, 케이든의 모습이 그려졌다.

종합격투기의 기본 스탠스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잠깐, 종합격투기?

종합격투기가 뭐지?


짧은 편린이 스친 순간, 케이든이 자세를 낮춘 채 태클로 파고들었다.

작은 체구의 그레이스를 가볍게 들어 땅으로 메치려는 동작이다.

역시 훈련 때만큼은 인정사정 없다.


툭.

케이든의 양 손이 그레이스의 허리에 닿았다.


순간, 그레이스는 몸을 오른쪽으로 틀며 양아버지의 팔에 팔짱을 꼈다.

자연스럽게 왼 발을 땅에 찍은 후, 오른 다리를 올려찼다.


붕 -


“어?”


케이든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린 채 허공에 붕 떠올랐기 때문이다.


털썩.


그의 몸이 한 바퀴 회전한 후, 땅에 떨어졌다.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인 그레이스조차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감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양아버지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미동도 없다.


“··· 그레이스. 뭐냐?”

“어, 음···.”


그레이스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허벅다리?”


아무렇지 않은 척 케이든의 물음에 답했지만 그레이스의 머리속은 그 어느 때보다 큰 혼란으로 가득차 있다.


케이든이 그의 다리를 감싼 순간 기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케이든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으로 느껴졌다.


느려진 시간 속, 눈 앞에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떠올랐다.

그의 심상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실제로 ‘보는’ 것은 아니었다.


3D로 구현된 백색 마네킹은 반복하여 특정 동작을 보여줬고, 이는 ‘더블 렉 태클’의 완벽한 카운터-즉, 허벅다리의 과정을 그레이스의 머리속에 쑤셔 박았다.


그레이스는 무의식적으로 그 동작을 따라했다.

케이든을 땅 위에 메친 순간, ‘띠링!’하는 알림음과 함께 눈 앞에 안내창이 떠올랐다.


[허벅다리(Uchi-Mata)를 습득했습니다.]

[일본 유도의 대표적인 ‘메치기’ 기술 중 하나로, 상대의 몸을 자신의 허벅다리로 들어올려 넘어뜨리는 기술입니다. 상대방의 무게 중심을 끌어오는 ‘기울이기’가 선행 조건입니다.]


“유능제강(柔能制剛).”

“뭐, 뭐라고?”


생전 처음 듣는 비공용어에 케이든이 미간을 찌푸렸다.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


그레이스는 한 줄기 빛이 그의 뇌리를 강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3D, 홀로그램, 인터페이스.

일본, 유도, 태클, 메치기.


전생의 기억이 일부 돌아왔다.


“아들, 어쩌면 네게는 격투가의 재능이 있을 지도 모르겠구나. 대륙 역사를 뒤져보면, 제법 많은 장님 격투가가 있단다.”


케이든이 흥분한 말투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한 번 더 몸을 섞어 보자꾸나. 드디어 네 재능을···.”

“죄송해요, 아버지.”


그레이스가 털썩 주저앉고 말했다.

그는 일단 일곱 살 배기다.


“내일 하면 안 되나요? 너무 힘들어요.”

“그, 그래. 당연하지. 오늘 훈련이 조금 길긴 했구나.”


케이든이 그레이스를 품에 안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와중에도 그레이스의 머리속에는 전생의 지식들이 무중력 상태로 떠다니고 있었다.


***


마을 뒤편의 언덕이다.

산들바람을 느끼며, 그레이스는 갑작스레 찾아온 기억들을 정리하고 있다.


“UFC, 게임, 종합격투기, 유도, 주짓수, 레슬링.”


생소한 개념들이 쉴 새 없이 부유한다.

그와 더불어, 전생의 장면들이 간헐적으로 떠오른다.


매트 위에서 적의 도복을 잡으려는 손 놀림.

땅에 엎어진 적의 가드를 뚫고 유리한 포지션을 잡기 위한 수많은 시도.

역으로, 내 가드를 패스하려는 적의 움직임을 막기 위한 변칙적인 움직임.

그리고 적의 움직임을 역이용해, 거세게 메치고 제압하며 관절을 꺾고 경동맥을 묶는···.


“안녕?”

“흡!”


순간, 청명한 소녀의 목소리에 그레이스는 벌떡 일어났다.


이토록 가까이 올 때까지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니.

그레이스는 발을 굴러서 소녀의 정체를 파악했다.


작가의말

반갑습니다! 글을 쓰면서 신난 적은 오랜만이네요. 좋은 이야기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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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P 5-1. 뒷풀이 24.09.16 2 1 14쪽
29 EP 4-14. 결투 24.09.13 4 1 14쪽
28 EP 4-13. 흉수 24.09.11 7 2 13쪽
27 EP 4-12. 조사(2) 24.09.09 11 1 13쪽
26 EP 4-11. 조사(1) 24.09.08 9 1 13쪽
25 EP 4-10. 살인 사건 24.09.06 9 1 13쪽
24 EP 4-9. 기행종 파티 24.09.06 9 1 14쪽
23 EP 4-8. 임무 시작 24.09.04 10 1 14쪽
22 EP 4-7. 재회 24.09.03 12 1 13쪽
21 EP 4-6.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24.09.02 12 1 12쪽
20 EP 4-5. 예상 밖의 손님 24.09.01 12 1 14쪽
19 EP 4-4. 파티 초대 24.08.31 10 1 13쪽
18 EP 4-3. 약간의 증명 24.08.30 12 1 13쪽
17 EP 4-2. 동물의 왕국 24.08.29 13 2 13쪽
16 EP 4-1. 병신 커플 24.08.28 14 1 14쪽
15 EP 3-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24.08.27 13 1 12쪽
14 EP 3-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24.08.26 9 1 12쪽
13 EP 3-3. 몰락한 가문의 영애(1) 24.08.26 14 1 11쪽
12 EP 3-2. 편입생 24.08.25 17 1 13쪽
11 EP 3-1. 인연과 재회 24.08.24 20 1 13쪽
10 EP 2-4.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24.08.23 15 1 12쪽
9 EP 2-3. 4년이 지나고 24.08.22 21 1 12쪽
8 EP 2-2. 입단(2) 24.08.22 18 2 13쪽
7 EP 2-1. 입단(1) 24.08.21 18 2 12쪽
6 EP 1-6. 상실 24.08.20 18 1 12쪽
5 EP 1-5. 구출 24.08.19 20 1 12쪽
4 EP 1-4. 변칙성 24.08.19 21 1 11쪽
3 EP 1-3. 인연의 끝 24.08.18 31 1 14쪽
2 EP 1-2. 첫사랑 24.08.17 28 1 11쪽
» EP 1-1. 퇴역 기사의 양자 +1 24.08.16 3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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