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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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수
그림/삽화
AI
작품등록일 :
2024.08.16 00:11
최근연재일 :
2024.09.16 06:00
연재수 :
30 회
조회수 :
455
추천수 :
34
글자수 :
171,885

작성
24.08.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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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EP 1-2. 첫사랑

DUMMY

작은 여아의 인형이 그려진다.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단발머리, 허리 뒤로 뒷짐을 지고 있다.

머리는 살짝 이 쪽을 향하고 있는데, 표정은 모르겠지만 목소리에는 흥미가 가득하다.


“너가 걔구나? 케이든 아저씨네 집 아들.”

“··· 누구야?”


그레이스가 경계심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마을 사람들과 안면은 텄지만, 그들이 그레이스에게 호의가 없다는 사실 쯤은 안다.

그저 퇴역 기사 케이든에 대한 존중, 혹은 두려움으로 예의를 차릴 뿐이다.


장애에 대한 차별은 지구보다 이 세계가 더욱 심하다.

친부모가 흑마법사였기 때문에 아들인 그레이스가 시력을 잃었을 것이라는 뒷담화를 들었을 정도다.

자연스럽게 동네 아이들과 어울린 적이 없고, 그레이스는 주로 케이든과 함께 집에서만 생활했다.


털썩.


소녀가 그레이스의 바로 옆에 주저앉았다.


“난 리아. ‘리아 크로노스’야.”

“··· 크로노스?”


처음 듣는 ‘성’이다.

애초에 성이 있다는 건···.


“귀족?”

“응. 우리 아빠가 남작이야.”

“귀족이 토이카 마을에는 왜 온 거야?”

“내가 몸이 안 좋아서래! 시골에서 요양하면 금방 좋아질 거라고 했어.”


그레이스는 오히려 리아와 살짝 거리를 벌렸다.

‘귀족과 얽히면 좋을 것이 없다’는 케이든의 말이 경고음처럼 맴돌았다.


“······.”

“헤헤.”

“······.”


그레이스는 느낄 수 있다.

엉덩이 걸음으로 정확히 다섯 걸음 멀어질 때마다, 다섯 걸음 가까워진다.


“··· 왜 자꾸 따라와?”

“와! 너 대단하다. 앞도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알았어?”
“소리가 들리니까.”

“으응, 그렇구나! 눈을 대신해서 신께 축복을 받았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어?”

“에잇.”


순간, 리아가 그레이스에게 확 다가와 손을 잡았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리아가 쾌활하게 그레이스의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나도 악수라는 걸 해 보고 싶었지, 뭐야!”

“왜?”
“멋있잖아! 어른들의 놀이니까. 근데 네 이름은 뭐야?”


귀족과 얽혀서 좋을 것이 없다.


“··· 그레이스.”

“아하하! 되게 여자애같은 이름이네? 반가워, 그레이스!”


한 차례 웃음을 터뜨린 리아가 옆에 앉아 재잘재잘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버지는 남작위를 수여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진 귀족이지만, 정말 멋지다는 말부터 시작했다.


“우리 아빠는 마법 공학의 천재거든! 그래서 동료 연구원이랑 마법사도 되게 많다?”


마법 공학은, 마법 에너지-에테르를 동력으로 활용해 일종의 ‘전자 제품’을 만들어 내는 기술이다.

그레이스네 집에도 마법 전등, 통신 수정구 따위가 있다.


“있잖아, 그거 알아? 내가 아픈 이유가 병 때문이 아닐 수도 있대.”

“그럼?”

“나, 그거일 수도 있대. 초상··· 뭐였지?”

“초상 능력자?”
“응! 초상 능력자!”


세계에 ‘변칙성’으로 설명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역시 변칙적인 능력을 개화한 인간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을 ‘초상 능력자’라고 하는데, 십만 명 중 한 명 꼴로 등장한다.


“그래서 요양도 하면서 다양한 곳에서 적응을··· 앗, 미안.”

“잘 됐네.”


리아가 미안한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기, 기분 나쁘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그레이스 앞에서 할 말이 아니었는데···.”


그레이스가 자신의 눈을 쓰다듬었다.

리아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느껴진다.


“괜찮아. 익숙하니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히잉. 미안해, 그레이스.”

“괜찮다니까.”


이 정도는 차별 축에도 못 낀다.

울먹이던 리아가 무언가 결심한 듯 벌떡 일어나 그레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

“아, 맞다.”


리아가 다시 그레이스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뭐하는 거야?”

“그레이스, 너는 햇빛처럼 찬란한 금발을 가지고 있고, 안개처럼 신비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그리고 피부는 도자기처럼 참 고와.”
“······?”

“얍.”


리아가 그레이스의 뒤로 돌아가 허리를 안았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몸이 느껴진다.


“리, 리아?”

“가만히 있어.”


그레이스보다 약간 큰, 비슷한 체구다.

그녀가 그레이스를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방향으로 바꾸고 속삭였다.


“저기에 토이카 마을이 있어. 마을 사람들은 순박하고, 집은 낮아. 그렇지만 행복한 곳이야. 응, 이따가 나랑 같이 애들하고 놀자.”

“대체 무슨···.”

“오늘의 날씨는 맑음! 저기에는 오리를 닮은 구름이 있고, 바람은 상쾌해. 앗, 바람은 그레이스가 더 잘 알겠구나.”


리아가 그레이스의 양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레이스! 내가 네 눈이 되어 줄게.”

“내··· 눈?”

“응! 엄청나게 귀가 좋은 그레이스지만, 보지 못하는 것들도 있지? 이제부터 내가 잘 알려줄게. 그러면 우리는 완벽한 친구가 되는 거야!”


갑자기 목이 턱 막힌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레이스? 괜찮아? 나랑 친구하기 싫어?”

“··· 아니.”


목소리가 먹먹하다.


“좋아.”


***


“안 돼.”


흔하지 않은 상황이다.

케이든은 그레이스가 원하는 것이라면 대부분 들어줬다.


“아버지. 리아 크로노스는 괜찮은 친구예요.”

“꼬맹이가 사람 보는 눈이 어디있다고 단정하느냐.”

“제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아이입니다.”

“그레이스.”


케이든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영애가 좋은 성품을 지녔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귀족이지 않느냐.”

“아버지 또한 귀족가의 기사 출신이지 않습니까? 어째서 귀족을 그렇게 싫어하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레이스! 그 말은 이제 그만하자.”

“아니오, 아버지! 제게도 이제 이유를 알려주세요! 그럴 나이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케이든이 어이없는 얼굴로 그레이스를 내려다봤다.


‘그럴 나이가 됐다고?’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해주마. 하지만 그레이스, ‘착한 귀족’은 없다. 그건 마치 ‘선행을 베푸는 강도’나, ‘정의의 살인자’같은 거야. 네가 또래보다 영리한 것은 알지만···.”

“됐습니다. 저는 리아를 믿어요.”


쿵!


그레이스가 집 문을 닫고 나갔다.

케이든이 아들이 사라진 자리를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춘기가 일곱 살에 오던가?”


***


사춘기 소년처럼 문을 거세게 닫고 나온 그레이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심했나.’


평범한 소년이라면 모를까, 성인의 영혼을 지닌 그레이스는 케이든이 베푸는 호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있다.

원래라면 몇 년 전 눈보라 속에서 진작에 끝났어야 할 삶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양아버지는 그에게 진짜 부모 못지않은 사랑을 주고 있다.


‘집에 들어가면 사과를 드려야겠어.’


“그레이스!”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리아.”


그레이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돌렸다.

리아의 음성에서 전해지는 파동이 그녀의 모습을 그린다.

여전히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채로 반갑게 그를 맞이하고 있다.


“아빠한테는 허락 받았어?”

“음.”


그레이스가 대충 둘러댔다.


“별 말씀은 없으셨어.”

“잘 됐다!”


리아가 방방 뛰며 그레이스의 손을 잡았다.

그레이스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넌 괜찮아? 평민들이랑 노는 거, 남작님이 싫어하지는 않으셔?”

“우리 아빠는 내가 뭘 하든 간섭 없으셔! 마법 공학 연구하는 일이 바쁘시거든. 가자, 그레이스! 애들이랑 놀자.”

“괜찮··· 을까?”

“에에. 왜?”

“음, 또래 아이들이 나를 반기지는 않는 것 같거든.”


그레이스가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리아가 표정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고작 그런 사소한 이유로 친구를 따돌리다니, 나빠!”

“그, 그래.”

“내가 혼내줄게. 걱정하지마, 그레이스. 나만 믿어!”


리아는 아이들이 자주 모여 노는 공터에 도착하자마자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호통을 쳤다.

그레이스와 당장 놀아주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나, 뭐라나.


서로 눈치를 보던 부모들은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부모의 허락을 받은 아이들은 슬금슬금 그레이스에게 다가왔다.

리아가 귀족이라는 사실은 마을 사람들이 다 안다.


“그, 그레이스. 난 진이라고 해.”

“··· 그래, 진. 반갑다.”

“저기, 우리 탈출 놀이 할 건데, 같이 할래?”

“어떻게 하는 건데?”

“술래가 눈을 가리고 애들을 찾아내는 거야···.”


팡!


리아가 그레이스의 엉덩이를 때렸다.


“그런 게임이라면 우리 그레이스가 딱이지. 그레이스, 술래 할래?”

“아, 뭐, 그래.”


그레이스는 5분만에 모든 아이들을 찾아냈고, 아이들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다시 해!”

“말도 안 돼.”

“그레이스는 앞을 못 보는 거 아니야?”

“바보야, 그러니까 안대가 소용이 없지!”


리아가 빙글거리며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그레이스, 어때? 또 할 수 있어?”

“얼마든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전방위를 탐색할수 있는 그레이스에게, 기척을 숨길 줄 모르는 아이들의 위치를 찾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단 한 번이라도 그레이스를 이겨보려고 하는 아이들의 시도는 해가 서산에 걸려 노을을 길게 뻗을 때까지 계속됐다.


“하악, 하악.”

“그, 그레이스. 너 진짜 대단한데.”

“너처럼 탈출 잘하는 애 처음봐.”

“우리 그레이스 최고지?”


그레이스가 인정받자, 리아가 활짝 웃으며 자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

리아가 그레이스를 뒤에서 살포시 안으며 태양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레이스, 느껴져?”

“··· 응.”

“노을이야. 노을이라는 건, 햇님이 밤이 오기 전 기지개를 길게 피는 거야. 햇님은 달님이 떠오르기 전에 잠에 드시거든.”

“그렇구나.”

“평소보다 훨씬 붉어지고, 낮아져. 나는 노을이 뜰 때면 많은 생각을 해. 조금만 있으면 자야 된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하루종일 열심히 논 리아에게 작별인사를 하기도 해.”


그레이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동심과 애정이 가득한 리아의 말에 마음 속의 얼음 조각이 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응, 따뜻하다.”

“내일도 놀자, 그레이스. 나도 아침에··· 어?”


갑자기 리아가 고개를 휙 들었다.

그레이스는 누군가 자신의 목깃을 잡아 들어올리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그레이스.”


건조한 케이든의 목소리다.


“집에 갈 시간이다.”

“아, 안녕하세요오···.”


리아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저는 리아 크로노스···.”

“리아 아가씨. 다시는 그레이스와 함께하지 말아주십시오.”

“아버지!”


단호한 케이든의 말에 그레이스가 소리를 질렀다.


“에, 에에?”

“아가씨는 천한 놈들과 어울릴 신분이 아니십니다.”

“괘, 괜찮아요! 그냥 노는 것 뿐인데···.”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부디 품위를 지키시길.”


케이든은 짧게 고개를 숙인 후, 발버둥치는 그레이스를 품에 안고 집으로 향했다.

훌쩍이는 리아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아이들과 부모들은 어찌할 줄 모르며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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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P 5-1. 뒷풀이 24.09.16 2 1 14쪽
29 EP 4-14. 결투 24.09.13 4 1 14쪽
28 EP 4-13. 흉수 24.09.11 7 2 13쪽
27 EP 4-12. 조사(2) 24.09.09 12 1 13쪽
26 EP 4-11. 조사(1) 24.09.08 10 1 13쪽
25 EP 4-10. 살인 사건 24.09.06 9 1 13쪽
24 EP 4-9. 기행종 파티 24.09.06 9 1 14쪽
23 EP 4-8. 임무 시작 24.09.04 10 1 14쪽
22 EP 4-7. 재회 24.09.03 13 1 13쪽
21 EP 4-6.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24.09.02 13 1 12쪽
20 EP 4-5. 예상 밖의 손님 24.09.01 13 1 14쪽
19 EP 4-4. 파티 초대 24.08.31 11 1 13쪽
18 EP 4-3. 약간의 증명 24.08.30 12 1 13쪽
17 EP 4-2. 동물의 왕국 24.08.29 13 2 13쪽
16 EP 4-1. 병신 커플 24.08.28 14 1 14쪽
15 EP 3-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24.08.27 14 1 12쪽
14 EP 3-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24.08.26 10 1 12쪽
13 EP 3-3. 몰락한 가문의 영애(1) 24.08.26 15 1 11쪽
12 EP 3-2. 편입생 24.08.25 17 1 13쪽
11 EP 3-1. 인연과 재회 24.08.24 21 1 13쪽
10 EP 2-4.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24.08.23 15 1 12쪽
9 EP 2-3. 4년이 지나고 24.08.22 21 1 12쪽
8 EP 2-2. 입단(2) 24.08.22 18 2 13쪽
7 EP 2-1. 입단(1) 24.08.21 18 2 12쪽
6 EP 1-6. 상실 24.08.20 18 1 12쪽
5 EP 1-5. 구출 24.08.19 20 1 12쪽
4 EP 1-4. 변칙성 24.08.19 21 1 11쪽
3 EP 1-3. 인연의 끝 24.08.18 31 1 14쪽
» EP 1-2. 첫사랑 24.08.17 29 1 11쪽
1 EP 1-1. 퇴역 기사의 양자 +1 24.08.16 3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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