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아인수
그림/삽화
AI
작품등록일 :
2024.08.16 00:11
최근연재일 :
2024.09.16 06:00
연재수 :
30 회
조회수 :
463
추천수 :
34
글자수 :
171,885

작성
24.08.20 06:00
조회
18
추천
1
글자
12쪽

EP 1-6. 상실

DUMMY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파공성에 그레이스가 빠르게 뒤돌았다.


“위험!”

“꺄악!”


파바바박!


무언가 길고 끈적한 것이 그레이스의 팔을 휘감았다.

빨래를 쥐어 짜듯이, 팔을 부술 듯이 조여온다.


“이, 이게 뭐야?”

“꺄악! 꺄아악!”


공포에 질린 에코가 비명을 질렀다.


“그, 그 놈들이야! 악마들! 괴물이야!”

“변칙··· 개체!”


흰색 고치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시야 속 붉은색 위험 신호가 명확하게 녀석의 모습을 나타낸다.

그레이스는 민간인과 달리 변칙 개체를 정확히 관측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2m에 달하는 움직이는 덩굴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질은 작은 인간형 개체이다.

수십 개의 꿈틀거리는, 거대한 촉수 덕에 흡사 괴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그 중 가장 길고 굵은 촉수에 팔을 붙잡혀 있다.


“벗어날 수가··· 없잖아.”


팔을 조여드는 힘은 점점 강해지고, 변칙 개체와 거리가 가까워진다.


‘검을 가져와야 했어.’


맨손으로 촉수를 뜯을 수가 없다.

위기의 순간, 에코가 무언가를 던졌다.


“평민! 이거 써!”


감각으로 물건의 정체가 드러난다.


‘단검!’


호신용보다는 장난감에 적합한 작은 단검이다.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기에는 충분했다.


싹둑!


겉보기와는 달리 강한 개체가 아니었는지, 그레이스의 힘으로도 촉수가 잘렸다.


[끼이이익!]


놈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한층 더 빠르게 촉수를 휘젓는다.


“하압!”


검에 재능이 없다지만 그건 케이든 기준이다.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기초에, 촉수의 전방위 공격을 파악할 수 있는 감각이 있다.

그레이스는 땅바닥을 구르며 개체의 촉수를 제거해갔다.


푹.


[끼익!]


놈의 목에 에코의 단검이 꽂혔다.

그레이스는 머리카락같은 촉수를 붙잡고 톱질하듯 단검을 움직였다.

손과 얼굴에 뜨거운 액체가 잔뜩 튀며 머리가 몸에서 분리됐다.


‘후우. 아버지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아버지의 수준이라면 촉수 괴물 수십 마리가 달려들어도 상처 하나 안 날 것이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에코의 단검이 없었다면 분명 둘 다 죽었겠지만.


‘더욱 준비성을 철저하게 해야겠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이다.’


“주, 주, 죽였어. 사람을, 죽였어.”

“사람?”

“사, 사람이잖아. 이상한게 잔뜩 난 소년이잖아.”

“이제 제대로 보이는 거냐?”

“처음에는 무엇인지 제대로 못 봤는데, 시체를 보니까···.”


횡설수설하는 에코를 바라보며 그레이스가 턱을 짚었다.


‘평범한 계집애는 아니구나.’


성인조차 변칙 개체를 보면 실신한다.

약간의 착란 증상이 보였지만, 끝까지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제법이다.


‘그러고보면 부러진 다리로도 용케도 버티고 있었지. 내게 단검도 던졌고. 생존 본능이 대단한데.’


싸가지는 많이 없지만.

갑자기 에코가 숨을 들이쉬며 소리쳤다.


“어? 평민! 네 손가락이!”

“응? 크윽!”


갑자기 왼쪽 새끼 손가락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손 끝에서 시작된 붉은 빛이 점점 손가락 전체로 퍼지고 있다.

아드레날린으로 고통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써, 썩고 있어, 평민. 네 손가락이 썩어버린다고! 다른 평민들처럼 죽어버릴 거야!”


결심은 짧았다.

그레이스는 단검을 역수로 잡고 새끼손가락을 찍었다.


콰직!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그레이스는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 정신을 차렸다.

이제는 넝마가 된 옷을 찢어 간단히 지혈만 했다.


“··· 빨리 업혀.”

“에, 에.”

“빨리!”


그레이스는 에코를 업고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어느 때보다 정신이 명료하다.


***


“우웨엑!”


흰색 고치에 도착하자마자 에코는 그레이스의 등 위에 토사물을 뱉었다.

변칙 개체를 보고도 제정신을 유지하더니 결국 본체를 보고 정신이 나가버렸다.


“싫어, 싫어···.”

“쉬고 있어.”


에코를 조심스럽게 담벼락에 기댄 후, 고치로 다가갔다.

고치의 박동은 이전보다 세 배 이상 빨라져 있다.


[끼에엑··· 끼엑···.]


마치 무언가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는 듯 간헐적인 비명이 흘러나온다.

그레이스도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속이 메슥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버지.”


이변이 생겼다.

흰색 고치에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균열이 생긴 것을 발견한 그레이스가 서슴없이 고치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 회관이 있는 곳은 어두웠지만, 그레이스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오히려 진정한 본체라고 할 수 있는 마을 회관 건물이 선명한 붉은 빛을 뿜고 있다.

이제는 생명 활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건물 안에는 태양처럼 빛나는 동그란 무언가가 있다.


“··· 아버지!”


그레이스는 번개같이 회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간헐적으로 촉수를 꿈틀대며 죽어가는 변칙 개체가 가득하다.

걸을 때마다 체액과 피가 섞인 끈적한 액체가 느껴진다.

그 사이, 가장 밝은 빛 옆에서 유일한 생명의 기운이 촛불처럼 스러져가고 있다.


그레이스는 이 순간을 부정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기운이다.

숨소리와 심장 소리부터, 냄새까지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레이스. 왔냐.”


케이든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버지. 이게, 이게···.”


그레이스가 떨리는 손으로 케이든의 몸을 안았다.

초감각을 부정하고 싶어 직접 아버지의 몸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와 안대를 적셨다.

두 팔이 팔꿈치 아래부터 없다.

옆구리가 움푹 파였다.


케이든은 죽어가고 있다.


“다쳤냐?”

“업히세요. 아버지, 말하지 말고 어서···.”

“··· 손가락을 잃었구나. 많이 아팠겠다. 절단된 손가락은 챙겼냐?”

“아버지!”

“진작 말해줘야 했는데. 빨리 치료하면 붙일 수도 있거든. 젠장, 널 다치게 둬서는 안 됐는데.”


케이든이 몸을 움찔거렸다.

아버지의 팔꿈치에서 적색 입자같은 것이 점점 어깨 쪽으로 올라간다.

부패하고 있는 것이다.


“임무를 잘 수행했나 보구나. 머리라도 한번 쓰다듬어주고 싶은데.”
“어떻게 된 거예요. 아버지가, 아버지가 당할 놈들이 아니었잖아요.”

“음, 사실은, 쿨럭!”


핏덩이가 터져나왔다.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장기가 망가진 것이다.


“몸이 좀 안 좋았거든. 젊은 시절의 상처가 도진 게다.”

“······.”

“오래는 못 살았을 거다. 그러니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라.”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부모란 그런 거니까.”


케이든이 씨익 웃었다.


“힘 쓰지 마. 너 기다리느라 버틴 거니까. 나는 곧 죽는다.”

“혹시 모르잖아요. 나가서 치료, 치료라도 받으면.”


그레이스가 안대를 벗어던졌다.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케이든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돈 없어.”

“돈, 돈 따위! 제가 어떻게든···.”

“안 되는거 알지 않느냐, 이 녀석아. 누구보다 잘 알 녀석이.”


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버지를 살릴 수는 없다.

그의 말마따나 이미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고, 변칙 개체에게 당했으니 손 쓸 방도가 없다.


“마지막 부탁이다, 그레이스.”

“··· 예.”

“던전형 변칙성이다. 핵을 깨거라.”


위험한 붉은 빛이 여전히 찬란하다.

직접 만져보니 은은한 열기가 느껴지는 원석으로 느껴진다.


“어떻게··· 깨죠?”
“‘기’를 사용해야 깰 수 있어.”
“안 배웠습니다.”

“지금부터 알려줘야지.”


케이든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전신에서 희미한 불꽃이 피어났다.

불꽃은 점점 길어져 그레이스에게 가까워진다.


동시에 케이든의 생명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신비로운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레이스가 황급히 말했다.


“이, 이게 뭡니까?”

“내가 살아오면서 모아온 기운이다. 엄밀히 말해, 기운의 ‘씨앗’이지.”

“예? 그, 그 말씀은.”

“그래. 네가 기운을 다 받아들인 순간 나는 죽는다.”

“싫습니다! 이딴 거 필요 없어요! 저는 그저 아버지와···.”

“그레이스!”


케이든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을 듣지 않을 셈이냐?”

“······.”

“원래부터 이럴 계획이었다. 단지 그 시기가 더 빨리왔을 뿐. 기운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사용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케이든의 기가 그레이스에게 서서히 흡수되기 시작한다.

그레이스는 알 수 없는 활력을 느꼈지만, 반비례해 절망감이 찾아왔다.

결국 아버지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꼴이 아닌가.

힘겹게 입을 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 어요.”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씨앗. 내 기운을 바탕으로 얼마나 성장하는 지는 네 손에 달려있다.”


그레이스가 눈물을 닦았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담는다.

모든 감각을 일깨워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집중한다.

케이든의 불꽃이 꺼져간다.


“훌륭히 자라라, 그레이스.”

“걱정마세요. 누구보다 떳떳하게, 잘나게 살겠습니다.”

“됐어. 그저··· 건강하게, 오래 살아라.”


심장이 터져버리고 장기가 찢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온 몸에는 힘과 생명력이 가득하다.


“이제··· 네 할 일을 하거라. 내 아들아.”


그레이스가 주먹을 쥐었다.

그의 눈동자 색과 같은, 유백색으로 빛나는 불꽃이 피어났다.

흐려지는 시야로 흐뭇하게 그 모습을 보던 케이든이 작게 말했다.


“··· 괜찮은 아버지였냐?”

“당신은.”


화르륵!


불꽃은 머리통만하게 커지고 팔 전체에 피어올랐다.


“최고의 아버지였습니다.”


콰아앙 - !


‘넌 내게 축복이었다.’


케이든의 환한 미소가 휘황찬란한 붉은 빛에 덮였다.


***


사건 발생 후 30분만에 도착한 단체는 빠르게 마을을 정상화했다.

생존자들에게 기억 소거제를 먹이고, 정신을 조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역병’이 크게 돌았다는 식으로 비극을 왜곡해 기억했다.


“단장. 이 아이들은 어쩔까요.”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은 사내가 같은 복장의 상급자에게 물었다.

단장이 까칠까칠한 수염을 쓸며 중얼거렸다.


“희한한 일이구나. 변칙적 에테르 감응을 지닌 아이가 한 마을에 둘이나 있다니.”


기억 소거제는 평민과 귀족을 가리지 않는다.

변칙성을 마주한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정신적인 문제를 겪게 되고, 추후 변칙성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단체’의 사람들은 초법적이며, 계급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나, 나는 실바너스 백작가의 막내입니다. 제게 나쁜 일을 하면 아버지가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거예요.”

“··· 게다가 귀족 여아라.”


그럼에도 곤란하다.

활동 자금은 귀족에게서 나온다.

그저 평민 아이라면 목숨을 거두어버려도 별 문제가 없을 텐데.

실바너스 백작같은 거물이라면, 살려서 데려가는 것이 이득이다.


단장이 가볍게 무릎을 굽혀 에코에게 눈을 마주쳤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아는가?”

“··· 단체, 아닌가요? 변칙성을 다루는.”

“이야기가 빠르겠군.”


그가 건조한 미소를 지었다.


“필히 밝혀질 일이니 투명하게 말해 두마. 너는 변칙적 에테르 감응력을 지니고 있다.”

“그게 뭔가요?”

“초상 능력자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지.”

“초상 능력자요?”


에코가 아픔을 잊고 눈을 반짝였다.


“반드시는 아니다. 개중에서도 운이 좋아야 가능하다. 좌우간, 변칙 개체를 보고서도 제정신을 유지한 것. 그리고 기억 소거제가 듣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그렇··· 군요.”

“협박 하나만 하자. 이 마을에서 있던 일,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백작가 하나 지우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흡.”


에코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단장이 빙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 죽이지 않아··· 지금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코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단장이 말했다.


“아이를 실바너스 백작가로 데려가라. 그쪽 백작과는 말이 통하니, 적절히 입을 맞추도록.”

“예, 단장님.”


두 단원이 나서 에코를 들쳐 메고 사라졌다.

단장은 묘한 표정으로 남은 소년을 바라봤다.


“이제 네 차례구나.”

“······.”


공허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앉은 소년, 그레이스.

팔찌를 찬 그의 손에는 케이든의 검이 들려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0 EP 5-1. 뒷풀이 24.09.16 2 1 14쪽
29 EP 4-14. 결투 24.09.13 4 1 14쪽
28 EP 4-13. 흉수 24.09.11 8 2 13쪽
27 EP 4-12. 조사(2) 24.09.09 12 1 13쪽
26 EP 4-11. 조사(1) 24.09.08 10 1 13쪽
25 EP 4-10. 살인 사건 24.09.06 10 1 13쪽
24 EP 4-9. 기행종 파티 24.09.06 10 1 14쪽
23 EP 4-8. 임무 시작 24.09.04 10 1 14쪽
22 EP 4-7. 재회 24.09.03 13 1 13쪽
21 EP 4-6.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24.09.02 13 1 12쪽
20 EP 4-5. 예상 밖의 손님 24.09.01 13 1 14쪽
19 EP 4-4. 파티 초대 24.08.31 11 1 13쪽
18 EP 4-3. 약간의 증명 24.08.30 12 1 13쪽
17 EP 4-2. 동물의 왕국 24.08.29 14 2 13쪽
16 EP 4-1. 병신 커플 24.08.28 14 1 14쪽
15 EP 3-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24.08.27 14 1 12쪽
14 EP 3-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24.08.26 10 1 12쪽
13 EP 3-3. 몰락한 가문의 영애(1) 24.08.26 15 1 11쪽
12 EP 3-2. 편입생 24.08.25 18 1 13쪽
11 EP 3-1. 인연과 재회 24.08.24 21 1 13쪽
10 EP 2-4.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24.08.23 15 1 12쪽
9 EP 2-3. 4년이 지나고 24.08.22 21 1 12쪽
8 EP 2-2. 입단(2) 24.08.22 18 2 13쪽
7 EP 2-1. 입단(1) 24.08.21 19 2 12쪽
» EP 1-6. 상실 24.08.20 19 1 12쪽
5 EP 1-5. 구출 24.08.19 20 1 12쪽
4 EP 1-4. 변칙성 24.08.19 21 1 11쪽
3 EP 1-3. 인연의 끝 24.08.18 31 1 14쪽
2 EP 1-2. 첫사랑 24.08.17 29 1 11쪽
1 EP 1-1. 퇴역 기사의 양자 +1 24.08.16 37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