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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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수
그림/삽화
AI
작품등록일 :
2024.08.16 00:11
최근연재일 :
2024.09.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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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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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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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3-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DUMMY

1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인간의 감각 대부분은 저열하다.

짐승보다 못하며, 마수보다는 더욱 열등하다.


특히 후각의 측면에서 그렇다.

그런 인간조차 다른 종족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 있는데, 바로 비 냄새를 맡는 능력이다.


그레이는 에코의 전신에서 비에 젖은 진한 흙냄새를 맡았다.

온 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적막한 기숙사 복도를 울린다.


얕게 몸을 떤다.

숨소리가 가파르고, 심장 박동이 빠르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대칭의 다리가 흔들린다.


“하아.”


일단 주변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금요일 밤부터 가문으로 돌아가 주말을 보낸다.


그레이가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


“··· 일단 들어오지.”


에코가 절뚝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다쳤나?”

“으, 응?”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불안정하군.”

“··· 별 일 아니야.”

“앉아.”


그레이가 의자를 권하고, 자신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이지?”

“······.”

“말하지 않을 거면 나가.”

“··· 도와줄 수, 있어?”

“들어는 보지. 어쨌든··· 원치는 않았지만, 도움을 받았으니까.”


에코가 입술을 깨물고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언니가··· 위험해.”

“언니가 있었나?”


그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존자는 너 뿐인줄 알았는데.”

“··· 아니야. 언니는 술집에서 일하고 있어.”


에코가 찢어질 것 같은 마음을 애써 부여잡았다.

적어도 그레이에게는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언니가 몸을 파는가보군.”

“함부로 말하지 마.”

“그게 어때서?”

“··· 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창녀는 누군가의 삶의 낙이기도 해.”


가감 없이 직설적인 말에 에코가 몸을 떨었다.

그러나 비웃음과 멸시가 아닌, 처음 듣는 긍정적인 반응이다.

에코는 조금 더 용기를 냈다.


“언니의 몸이 많이 망가졌어. 당장 치료를 받고 휴식을 취해야 돼. 그런데 술집의 실장이··· 오늘 밤 다섯 명의 남자에게 언니를 보냈어.”


‘윤간이라.’


“··· 돈 따위, 내가 더 열심히 일하면 돼. 더 이상 가족을 괴롭힐 수 없어. 언니를··· 구해줘. 날 도와줘, 그레이.”

“네가 하면 되잖아. 너도 초상 능력자다.”

“난 안 돼.”

“왜?”

“나, 나는···.”


자기도 술집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그 곳이 아니라면, 에코를 받아줄 곳이 없으니까.

게다가 정체를 들키면 반역자를 넘어 창녀라는 프레임까지 씌워진다.

그 때는 정말 미래가 없다.


“너는 할 수 없으면서, 내게 도와달라고?”


그레이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왜, 내가 평민이라서? 유일하게 부탁할 수 있는, 만만한 놈이니까?”

“아, 아니야, 그레이스···.”

“그레이 케이든이다.”


그가 몸을 일으키고 에코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툭.


그레이의 손이 닿자 에코가 몸을 살짝 떨었다.


어떻게 뒷사정을 말할 수 있을까.

그녀까지 술집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레이가 알면, 정말로 에코는 무너질 것이다.


“에코 실바너스, 자기 일은 스스로 하는 하는 버릇을 들여.”


그레이가 문을 열었다.

에코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외쳤다.


“그, 그레이. 사실은!”

“늦었어. 제논이 오니, 어서 돌아가.”

“아아···.”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야 했을까.

단호한 그레이의 표정은,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들을 것 같지 않다.


에코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레이의 방을 나섰다.

눈물만 끊임없이 흘렀다.


***


퍽!


“우웩.”


스스로 배를 쳐 수정구를 뱉었다.

토사물과 위액이 뒤섞인 수정구를 대충 닦아 품에 넣었다.


비가 그쳤다.

몇 분 동안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그레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빌어먹을 계집애.”


술 냄새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는 거칠게 머리를 긁고 문을 나섰다.


복도에 길게 남은 술 냄새의 잔향은 에코가 향한 곳을 정확하게 안내하고 있었다.


***


에코는 집창촌 외곽에 있는 술집 앞에 섰다.


말이 술집이지, 집창촌에서 가장 큰 곳으로 대형 여관이나 다름 없다.

귀족과도 연이 닿아 있다는 소문이 있다.

반역 귀족의 딸내미들을 부려먹을 정도로 깡과 뒷배가 있는 곳이다.


속칭 ‘실장’으로 칭해지는 술집의 사장은 여러 가게를 운영한다.

다른 가게의 사장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 옳은 선택일까.”


그녀는 또래에 비해 뛰어난 마법사고, 초상 능력자다.

언니를 구해 탈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언니가 그걸 원할까.

언니를 구한 후에도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특유의 초상 능력과 절뚝이는 다리는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그 후에도, 나는···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을까.”


이내 결정을 내린 에코가 정신을 집중했다.


쿠구구구···.


발 밑에서 진동이 시작됐다.

진동은 점점 커지며, 술집까지 흔들기 시작했다.


에코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전보다 능력이 두 배는 강하게 발현되고 있다.

모든 것이 끝나게 된 이 시점에, 각성이라도 한 걸까.


술집 안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다.

건물을 무너뜨릴 수는 없더라도, 잠깐의 아비규환은 언니를 빼낼 틈을 만들 것이다.


에코가 문에 손을 올렸다.


툭.


“어?”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정신 사나워. 능력쓰지 마라.”

“그, 그, 그레이?”


안대를 벗은 그레이가 눈살을 찌푸리고 옆에 서 있다.


“어, 어떻게 네가 여길?”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어떻게 못 찾냐?”

“나, 냄, 냄새났어?”


에코가 허둥대며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을 감싸 냄새를 맡았다.

어느새 능력은 해제됐다.


그레이가 한숨을 쉬고 품 안에서 가면을 꺼냈다.


“일 때문에 마신 거냐?”

“어, 어어?”


에코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만둬라. 몸도 안 좋은게.”

“나, 나는 몸 안 팔았어! 그런 거 아니야!”


에코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이런 오해를 살까 봐 끝까지 말하지 않은 건데.


“목소리 낮춰. 잠입의 기본이 안 돼있군.”

“흡!”


기묘한 고양이 얼굴이 그려진 새하얀 가면이다.

이 가면은 매일매일 삼백 육십 다섯 개의 다른 모양으로 변한다.


가면이 그레이의 얼굴에 씌워진 순간, 에코는 눈 앞에서 그가 사라진 듯한 착각을 했다.

마치 투명 마법을 쓴 것처럼.


그러나 그레이는 그대로 있다.

그저 모든 기척이 사라졌을 뿐이다.

존재 자체가 주변 환경과 동화됐다.


“숨어 있어라. 얼마 안 걸린다.”


에코는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 너한테는 남자 체취를 느낀 적 없어.”


그레이는 나지막히 말한 후, 가볍게 몸을 날렸다.


에코는 얼음 송곳처럼 가슴에 박혀있는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


‘돈이 없기는 없나 봐.’


3층의 마지막 방에서 수수한 화장품 냄새가 난다.

에코와 똑같은 향이다.

지독한 분내가 가득한 곳이라 더욱 찾기가 쉬웠다.


“··· 살살 해주세요.”


찌지직.


“가만히 있어라, 이 년아.”

“제 까짓 년이 귀족이라고 꼴에 값은 존나게 비싸요.”

“돈만 내면 다리를 벌리는 창녀 주제에.”

“잠깐, 거기는···.”


퍽!


“꺄악!”

“음, 부족해. 더 크게 질러봐.”

“더 꼴리게 해 보라고···.”


역겨움이 턱 밑까지 치고 올라온다.

그러나 경거망동은 금물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방심하지 않으며, 모든 원칙을 지킨다.


스륵.


커튼이 걷힐 때보다 작은 소리를 내며 창문이 열렸다.

거사를 앞둔 다섯 명의 사내들은 눈 앞의 먹잇감에 정신이 팔려있다.


‘술, 금속, 마수. 화장품과 피.’


냄새로 남자들의 정체를 추론한다.


‘용병.’


덩치는 크지만 근육량은 적고, 배가 잔뜩 나와있다.


‘싸구려 용병. 잘 쳐봐야 C급.’


그는 맨 후미에서 숨을 헐떡이며, 고간을 쓰다듬는 용병에게 다가갔다.

그레이의 팔은 한 마리의 뱀이 되어 용병의 경동맥을 감쌌다.


꾸욱 -


“······!”


이미 그의 입은 플레임이 일렁이는 그레이의 손에 막혀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기절해 쓰러졌다.

다음 용병도 마찬가지로 당해 정신을 잃었다.


세 번째 놈을 해치우려던 순간, 침대 위에서 발버둥치는 에코의 언니와 눈이 맞았다.

반사적으로 남은 용병들의 눈이 그레이를 향했다.


“······!”

“누구··· 켁!”


푹!


목소리를 높이려던 용병의 목에 동료의 검이 날아와 꽂혔다.

눈이 휘둥그레진 다른 용병에게 달려가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뿌득!


바로 목에 발을 올리고 힘을 주자, 고개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였다.


“캬아악!”


마지막 남은 용병이 눈이 시뻘개져 도끼를 내리쳐온다.

그레이는 살짝 몸을 돌려 공격을 피한 후, 힘을 역이용해 땅에 메쳤다.


“자, 잠깐. 살려··· 켁.”


뿌득!


마지막 용병도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레이스는 에코의 언니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빠르게 이불로 몸을 감쌌다.


“누, 누구시죠?”

“난 장님입니다. 옷부터 입으세요.”


그레이가 가면을 살짝 아래로 내려 초점 없는 동공을 보여줬다.

언니가 빠르게 옷을 걸치며 물었다.


“누가 보내신 분이죠?”

“그 쪽 동생이.”

“··· 에코가···.”


까득.


그녀가 이를 갈고 중얼거렸다.


“바보같은 년. 어쩌자고 이런 짓을.”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귀찮아지기 전에 빨리 업혀요.”

“이들은 악명 높은 용병들이에요. 여기서 탈출해봤자 난 죽을 거예요.”

“그럴 일은 없지.”


그레이는 품 속에서 작은 도장을 꺼내 플레임으로 뜨겁게 달궜다.

주위에 자빠져 죽은 용병 하나의 상의를 벗겨 겨드랑이 아래에 도장을 찍었다.


치이익 -


고기 타는 냄새와 함께 옅은 칠각형 별 모양이 새겨졌다.


“다, 단체?”

“이야기는 빠르겠네.”


그레이가 시체에게 다시 옷을 입히며 물었다.


“기억 소거?”

“평생, 입 다물게요. 죽는 한이 있어도.”

“현명하시군.”


목격자는 그녀 하나 뿐이며, 그레이의 얼굴을 모른다.

사실 오늘 일을 불다가 죽어도 별 상관 없다.


“잠깐. 저 두 사람은 죽은 건가요?”

“살아있지.”


언니가 목에 검을 꽂고 죽은 용병의 시체로 다가갔다.

그녀는 검을 뽑아, 기절한 두 용병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푹. 푹. 푹. 푹···.


검이 꽂힐 때마다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던 용병들의 신체 반응이 사라졌다.


“하악, 학. 이제 가요.”

“··· 검은 챙겨요. 지문 때문에.”


그레이는 에코의 언니를 업고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


“언니!”

“··· 에코.”


빠른 걸음으로 에코에게 다가간 그녀가 뺨을 후렸다.


짝!


“··· 언니.”

“바보같은 년. 어쩌자고 이런 일을 한 거니?”

“더 이상, 언니를 그런 곳에서 일하게 둘 수는···.”

“여기가 아니면! 어떻게 아버지를 돌보고! 네 학비를 감당하는데!”


언니가 소리를 질렀다.

에코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내가···.”

“헛소리하지 마. 이미 더럽혀진 몸. 차라리 내가··· 으흑!”


언니가 얼굴을 감싸안고 주저앉았다.


“왜, 왜 모르는데. 너 하나만 보고 살았는데.”

“실망시켜서 미안해. 내가 어떻게든, 무슨 일이든···.”

“이 바보, 바보야!”


언니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정말 내가 널 출세시켜서 편하게 살고 싶었던 것 같아? 그럴 거면 도망쳤지! 멍청하고 돈 많은 남자 하나 물어서 살았지!”

“어, 언니.”

“넌, 능력이 있잖아. 내 동생이라도 꿈을 이루게 해주고 싶었어! 어머니가 달라도, 너라도 행복하게··· 흑.”

“··· 미안해.”


에코가 무릎을 꿇고 언니의 어깨를 감쌌다.


‘기구한 팔자다. 당신들도, 나도.’


그레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가문의 사람을 구하다니.

왠지 하늘에서 아버지가 이 광경을 보고 낄낄대고 있을 것 같다.


툭.


그레이가 에코 앞에 금화가 든 주머니를 툭 던졌다.


“그레이?”

“그거 들고 옛날 백작령 쪽으로 쭉 가세요. 북서쪽으로 몇 시간 걸으면 ‘바람이 머무는 곳’이라는 여관이 나옵니다.”

“흐윽, 네?”

“단원 G가 보냈다고 해요. 밥벌이는 시켜주겠지.”


그레이가 몸을 돌렸다.

아버지의 박장대소를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 그레이. 하지만 이 돈이 없으면.”


에코가 다급하게 말했다.


“몰라. 말 걸지마.”


그레이는 퉁명스럽게 말하고 아카데미로 몸을 날렸다.

다시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오늘의 일을 씻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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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P 5-1. 뒷풀이 24.09.16 2 1 14쪽
29 EP 4-14. 결투 24.09.13 4 1 14쪽
28 EP 4-13. 흉수 24.09.11 7 2 13쪽
27 EP 4-12. 조사(2) 24.09.09 12 1 13쪽
26 EP 4-11. 조사(1) 24.09.08 10 1 13쪽
25 EP 4-10. 살인 사건 24.09.06 9 1 13쪽
24 EP 4-9. 기행종 파티 24.09.06 9 1 14쪽
23 EP 4-8. 임무 시작 24.09.04 10 1 14쪽
22 EP 4-7. 재회 24.09.03 13 1 13쪽
21 EP 4-6.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24.09.02 13 1 12쪽
20 EP 4-5. 예상 밖의 손님 24.09.01 13 1 14쪽
19 EP 4-4. 파티 초대 24.08.31 11 1 13쪽
18 EP 4-3. 약간의 증명 24.08.30 12 1 13쪽
17 EP 4-2. 동물의 왕국 24.08.29 13 2 13쪽
16 EP 4-1. 병신 커플 24.08.28 14 1 14쪽
» EP 3-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24.08.27 14 1 12쪽
14 EP 3-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24.08.26 10 1 12쪽
13 EP 3-3. 몰락한 가문의 영애(1) 24.08.26 15 1 11쪽
12 EP 3-2. 편입생 24.08.25 17 1 13쪽
11 EP 3-1. 인연과 재회 24.08.24 21 1 13쪽
10 EP 2-4.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24.08.23 15 1 12쪽
9 EP 2-3. 4년이 지나고 24.08.22 21 1 12쪽
8 EP 2-2. 입단(2) 24.08.22 18 2 13쪽
7 EP 2-1. 입단(1) 24.08.21 18 2 12쪽
6 EP 1-6. 상실 24.08.20 18 1 12쪽
5 EP 1-5. 구출 24.08.19 20 1 12쪽
4 EP 1-4. 변칙성 24.08.19 21 1 11쪽
3 EP 1-3. 인연의 끝 24.08.18 31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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