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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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수
그림/삽화
AI
작품등록일 :
2024.08.16 00:11
최근연재일 :
2024.09.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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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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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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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EP 1-5. 구출

DUMMY

오히려 앞이 보이지 않기에, 그레이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강력한 존재감을 발하는 저것은 ‘살아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을 회관.”

“··· 그렇군. 마을 회관이 있던 자리다.”


케이든의 마법에 이어 두 번째로 ‘볼’ 수 있었다.

원래는 흰색인 거대한 고치는 그레이스의 시야 속에서 적색으로 빠르게 점멸하고 있다.


‘홀로그램이다.’


새로운 기술을 익힐 때마다 등장했던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경고를 표하는 것이다.


“아들. 괜찮냐?”

“예. 조금 역겹긴 하지만.”


‘놀랍군.’


케이든이 턱을 쓸었다.

기든, 마나든, 차크라든 에테르를 다룰 수 있는 인간이 아니면 변칙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공포에 질리거나 착란을 일으키는 일도 빈번하다.

그런데 육체 훈련만 받은 케이든이 변칙 개체의 정체와 위험성을 확실히 파악하고, 견뎌내고 있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겠지.’


그레이스의 감각은 특별한 면이 있었다.

아무튼 멀쩡하니 다행이다.


“고치가 마을 회관을 감싸고 있어요. 고치 속에 건물이 느껴집니다.”

“··· 그게 정말이냐?”

“네. 게다가···.”


그레이스가 얼굴을 굳혔다.


“고치 자체도 살아있지만, 마을 회관 속에서도 생명 반응이 느껴집니다.”


이건 숨소리나 심장 박동 따위로 감지한 게 아니다.

홀로그램이 변칙 개체에 대한 정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수 십 명의 사람들이 마을 회관 안에서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없어요. 그런데 살아있어요. 당한 걸까요?”

“모르지. 그러니 변칙성이다.”


케이든이 생각을 정리하고 빠르게 말했다.


“아들아. 생존자를 탐색하고, 부상자는 대피시켜라. 나는 저 빌어먹을 고치를 조사해야겠다.”

“저도 돕겠습니다.”

“아니. 나는 변칙성을 경험한 적이 있고, 너는 감각이 예민하다. 이건 효율적인 역할 분담이다. 게다가 네가 안전한 것도 아냐. 아까 제임스를 기억하냐?”


배에 구더기같은 것이 가득하던 사내다.


“공격성이 있는 변칙 개체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 이해했어요.”

“변칙성이 느껴지면 피해라. 무조건. 무슨 말인지 알아?”


아들을 못 믿는 것이 아니다.

변칙성이 확인되지 않은 개체는 섣불리 접근하지 않는 것이 맞다.

그레이스는 케이든의 말을 완벽히 이해했다.


“예. 미지에 도전할 생각은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제국에서 ‘단체’가 파견될 거다. 우리는 피해 확산만 막자.”


케이든은 검을 빼들고 고치로 천천히 향했고, 그레이스는 감각이 닿지 않았던 장소로 몸을 날렸다.


***


리아의 팔찌가 적막한 마을의 풍경을 세밀하게 그려줬다.

그의 인지 범위는 직경 20m에 근접했다.


정신을 집중하니 생각 외로 생존자를 많이 구출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시체 사이에서 기절해 있었다.

변칙 개체를 마주한 후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것이다.


깨워서 구체적인 상황을 물어봤지만,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기억의 대부분이 왜곡되어 있었으며, 서로 말이 맞지도 않았다.

그래도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이었어.”

“아니야. 사람이 아니라 마수지. 인간형 마수.”

“사람도, 마수도 아냐. 그건··· 그냥 괴물이었어. 어쩌면 악마일지도.”


횡설수설하는 말을 종합해보면 변칙 개체는 인간형이다.

그 수는 하나가 아니며, 최소한 열 명 이상이다.

인간에게 적대적인 존재며, 개체에게 부상을 당하면 상처가 빠르게 부패한다.


“그, 그레이스. 제발 도와줘.”

“너는 기사 훈련을 받았잖아, 응?”

“네가 아니면 우리는···.”


평소에는 알게모르게 무시해왔던 어른들이 그에게 매달렸다.

그레이스는 내심 한숨을 내쉰 후, 가까운 건물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애들은? 다른 피해자들은요?”

“몰라.”

“우, 우리도 갑자기 정신을 잃었어.”

“··· 알겠습니다.”


‘결국 직접 찾아야겠군.’


그레이스는 느슨해진 안대를 다시 동여맸다.

이제 장터 쪽만 확인하면 된다.

장날은 아니니 피해자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 후에는 바로 아버지께 복귀한다.


“··· 아, 잠깐.”


한 장년인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보니 영애께서.”

“어?”

“허억!”


‘영애?’


그가 아는 영애는 리아 크로노스 뿐이다.

장년인이 얼굴이 파랗게 질려 말했다.


“큰일이다. 에코 아가씨가 마을에 있었다.”

“··· 누굽니까?”

“아이고, 이 바보 녀석아. 에코 아가씨를 모르면 어떡하냐! 배, 백작님의 막내딸!”

“설마, 실바너스 백작가?”
“그래!”

“젠장.”


알 턱이 없다.

아무튼 영주의 막내딸이 이 마을에 있다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그녀가 죽으면 변칙 개체가 아니라 영주의 손에 이 마을이 지워진다.

마을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도 상관 없다.

평민이란 그런 존재다.


“어딥니까?”

“아마 시장에···.”

“하필!”


그레이스가 문을 박차고 달렸다.

마을 사람들이야 알 바 아니지만, 아버지의 터전이 사라지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


***


케이든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정체 모를 흰 고치를 조사했다.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상태다.

그러나 1m에 가까운 거리까지 근접해도 고치는 박동하기만 할 뿐, 적대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


약 십 분이 경과했다.

통상적으로 변칙성을 감지한 ‘단체’가 도착하기까지 삼십 분이 소요된다.

그렇다고 손놓고 기다릴 수는 없다.

고치에 싸인 마을 회관 속에서 살아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 결국 이 방법 뿐이군.”


낡은 롱소드를 높이 들었다.


화륵.


은은한 푸른 불꽃이 검 위로 피어올랐다.

경지에 이른 기사가 기를 유형화하는 ‘플레임’이다.

플레임은 강철을 두부처럼 가를 뿐만 아니라, 비정형의 마수, 변칙성에게도 유효타를 먹일 수 있다.


그레이스가 없는 케이든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것 또한 내 속죄라면.”


주저함은 없었다.

푸른 불꽃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고치를 가른 순간.


[끼에에에엑!]


소름끼치는 비명이 터져나오며, 주변 고치의 실타래가 확 풀리며 케이든을 감쌌다.


“지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거미줄같은 실들이 쇄도한다.

그는 몸을 돌려 쉴 새없이 하얀 실을 베었지만, 실력을 떠나 한 명이 막을 수 없는 물량이다.

이러다가는 고치와 하나가 된다.


“이래서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니까!”


어쩔 수 없이, 그는 어두운 고치 속으로 몸을 날렸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흉가처럼 변한 마을 회관이 있었다.

고치에서 나온 수천 가닥의 실이 건물의 벽을 뚫고 내부를 잠식했다.


“··· 던전형 변칙성이었나.”


이제야 실마리가 풀린다.

이 변칙성은 일정 부피를 가진 공간에 작용해, 변칙 개체들을 생성한다.

원래부터 그 곳에 있던 존재들이 변칙 개체가 되는 것이다.

즉, 지금 마을 회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구하기 늦었다.


게다가 던전형 변칙성은 점점 크기를 키운다.

최대한 빨리 손을 써야 한다.

파훼법은 단 하나.

던전 중심의 핵을 파괴하는 것이다.


“부디 그레이스가 감당 가능한 개체들이길.”


콰직!


케이든이 검을 휘둘러 실로 덕지덕지 묶인 마을 회관의 문을 부쉈다.


***


장터에는 다행이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팔다리가 뜯기고 몸이 썩은 상인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널려있었지만, 어느새 무뎌졌다.


“에코! 에코 아가씨!”


그레이스가 소리를 높여 에코를 찾았다.

변칙 개체들의 주의를 끌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에코, 에코··· 음?”


문득 그의 감각에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집중하자 빠른 심장 소리도 들린다.

과일 향이 짙은 곳이다.


그레이스는 빠르게 무너진 과일 상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과일 냄새 속에서 희미한 화장품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그가 과일 무더기를 헤치며 말했다.


“에코 아가씨?”

“가, 가까이 오지 마!”


사과인가.

빠른 속도로 그의 얼굴을 향해 과일 하나가 날아온다.

그레이스는 간단히 고개를 젖혀 급작스러운 공격을 피했다.


“에코 아가씨, 맞습니까?”

“하악, 학. 누구야?”


겁에 질린 신체 반응이다.


그레이스와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 약간은 마른 체형, 고급 원단을 사용한 원피스를 입었다.

과일과 상자 속에서 웅크려 몸을 숨기고 있던 소녀는 ‘에코 실바너스’가 맞았다.


“일단 방해물부터 치우겠습니다.”


그레이스가 마지막 박스를 들어올린 순간, 에코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꺄악!”


‘부러져있었나.’


소녀의 정강이에 작은 뼈가 튀어나와 있다.

아이가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용케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 용하다.


‘그나마 다행이다. 큰 일은 없겠군.’


아직 어리니 빨리 치료받으면 금방 회복할 수 있다.

어쩌면 영애를 구했다는 사실로 마을에 상이 내려올지도 모른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 쪽 무릎을 꿇어 에코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레이스라고 합니다. 아가씨를 구하러 왔습니다.”

“너, 장님이잖아?”

“예.”

“앞도 안 보이면서 날 어떻게 찾았지? 너, 분명히 그, 그 놈들이랑 한 패지?”
“후우.”


그레이스가 미간을 짚었다.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일단 응급 처치부터.”


개방형 골절이다.

빠르게 소독하지 않으면 감염의 위험성이 있다.

과일 상자 조각을 부목삼아 에코의 종아리 뒤에 대고, 옷을 찢어 압박하려는 순간.


짜악!


에코가 그레이스의 뺨을 때렸다.


“천한 것이 누구 몸에 손을 대느냐!”

“······.”


‘이게 귀족이구나.’


리아가 천사가 맞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귀족을 경계한 이유도 한 번 더 납득됐다.


“응급 처치입니다. 장애가 생기기 전에 전에···.”

“흥! 평민 따위가 날 구하게 됐다고 기세가 등등하구나? 건방진 것, 나 스스로 일어날 수··· 아얏!”


땅을 짚고 일어나려던 에코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 다리로 설 수 있으면 그건 초인이다.


“가만히 좀 있으세요.”
“놔라! 놔라! 이이익!”

“제발! 그러다 더 다칩니다!”


마음 같아서는 대가리를 한 번 후려쳐 기절시키고 싶다.


‘아버지때문에 참는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며, 억지로 에코의 다리를 붙잡아 응급 처치를 마쳤다.


“수치스러워. 수치스러워!”

“하아.”


그레이스가 에코의 허리에 손을 뻗었다.


짝! 짝! 짝!


에코가 연거푸 뺨을 올려붙인다.

피하려면 피하겠는데, 피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이 음탕한 놈.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느냐? 보는 눈이 없으니 날 욕 보이려는 거지?”

“업으려고 그랬습니다. 탈출해야 하잖아요.”
“평민에게 업히다니, 그럴 바에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죽음을 쉽게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아가씨에게 마을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있습니다.”

“너같은 평민 놈들이랑 내 목숨이랑 가치가 동등하다고 생각해? 보면 볼수록 건방진···.”


짜악!


“··· 어?”


‘저질러버렸다.’


참지 못하고 에코의 뺨을 때려버렸다.

힘 조절은 안 했다.


주륵.


에코가 얼빠진 표정으로 코에서 흐르는 액체를


“피? 나, 피가 나잖아.”

“에코.”


이판사판이다.

일단 살리고 본다.


“정신 차려라, 이 조그만 계집애야.”

“뭐, 뭐라고?”

“닥치고 업혀. 목을 비틀어버리기 전에.”

“··· 히끅.”


잠잠해진 에코를 들쳐메고 달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알았으니까 입 다물어.”

“죽여버릴 거라고. 천한 놈 주제에 감히···.”


‘이 녀석 때문에 감지가 안 되잖아.’


그레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주변 상황을 살피면서 이동해야 하는데, 자꾸 잡음이 끼어드니 초감각이 흐트러진다.


그래서 등 뒤까지 다가온 공격을 파악하는 것이 늦었다.

뾰족한 무언가가 업힌 에코를 노리고 쇄도하고 있었다.


거리는 고작 한 뼘 거리.

이미 지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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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P 5-1. 뒷풀이 24.09.16 2 1 14쪽
29 EP 4-14. 결투 24.09.13 4 1 14쪽
28 EP 4-13. 흉수 24.09.11 8 2 13쪽
27 EP 4-12. 조사(2) 24.09.09 12 1 13쪽
26 EP 4-11. 조사(1) 24.09.08 10 1 13쪽
25 EP 4-10. 살인 사건 24.09.06 10 1 13쪽
24 EP 4-9. 기행종 파티 24.09.06 10 1 14쪽
23 EP 4-8. 임무 시작 24.09.04 11 1 14쪽
22 EP 4-7. 재회 24.09.03 13 1 13쪽
21 EP 4-6.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24.09.02 13 1 12쪽
20 EP 4-5. 예상 밖의 손님 24.09.01 13 1 14쪽
19 EP 4-4. 파티 초대 24.08.31 11 1 13쪽
18 EP 4-3. 약간의 증명 24.08.30 12 1 13쪽
17 EP 4-2. 동물의 왕국 24.08.29 14 2 13쪽
16 EP 4-1. 병신 커플 24.08.28 15 1 14쪽
15 EP 3-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24.08.27 14 1 12쪽
14 EP 3-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24.08.26 10 1 12쪽
13 EP 3-3. 몰락한 가문의 영애(1) 24.08.26 15 1 11쪽
12 EP 3-2. 편입생 24.08.25 18 1 13쪽
11 EP 3-1. 인연과 재회 24.08.24 21 1 13쪽
10 EP 2-4.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24.08.23 16 1 12쪽
9 EP 2-3. 4년이 지나고 24.08.22 22 1 12쪽
8 EP 2-2. 입단(2) 24.08.22 19 2 13쪽
7 EP 2-1. 입단(1) 24.08.21 19 2 12쪽
6 EP 1-6. 상실 24.08.20 19 1 12쪽
» EP 1-5. 구출 24.08.19 21 1 12쪽
4 EP 1-4. 변칙성 24.08.19 22 1 11쪽
3 EP 1-3. 인연의 끝 24.08.18 32 1 14쪽
2 EP 1-2. 첫사랑 24.08.17 29 1 11쪽
1 EP 1-1. 퇴역 기사의 양자 +1 24.08.16 3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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