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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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수
그림/삽화
AI
작품등록일 :
2024.08.16 00:11
최근연재일 :
2024.09.16 06: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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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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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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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EP 2-3. 4년이 지나고

DUMMY

9. 4년이 지나고


소년의 몸뚱이를 찢어버리려는 D급 개체들의 공격을 5분 가까이 버텼다.

온 몸에는 상처가 가득하고, 개중 몇몇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위중하다.

그나마 근육과 힘줄은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처음에는 벽에 등을 대고 플레임을 사용해 하나하나 제압하려고 했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D급 개체 하나조차 숙련된 기사가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

아직 그레이스가 상대할 수준이 아니다.


방어, 회피, 도망의 반복.

그나마 이동 속도가 느린 개체들이라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죽을 위기를 다섯 번 쯤 넘겼을 때, 그레이는 깨달았다.


‘페이 선배를 공격하지 않는다.’


페이의 신체 신호를 분석한다.

숨소리는 미약하며, 심장은 십 초에 한 번씩 뛴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감추고 있다.


‘싸우는 거 아니야.’


페이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단체의 사람들은 이상할 만큼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탕!


그레이는 강하게 땅을 박차 변칙 개체들과 거리를 벌렸다.


[키에엑!]

[므므므므므.]


붉은 빛들이 천천히 가까워진다.

그레이는 털썩 주저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신체 조절.’


일반인이라면 불가능하다.

훈련받은 사람이라면 조금은 가능하다.

만일 에테르를 다룰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가능하다.

시작은 숨을 얕고 길게 쉬는 것부터다.


‘마치 시체처럼.’


정신을 집중한다.

한 호흡이 완성되는데 1분을 훌쩍 넘길 정도로 늘린다.


근육이 이완되고, 체온이 떨어진다.

심장 박동이 서서히 느려진다.

변칙 개체의 요란스러운 울음 소리도 점점 멎는다.


‘명상.’


종종 아버지도 가부좌를 튼 채 가만히 눈을 감고 계셨다.


‘편안하다.’


잠시 졸았던 걸까.

문득 눈을 뜬 그레이는 기괴한 표정의 페이를 마주했다.

변칙 개체는 모두 사라진 후였다.


“··· 넌 괴물이냐?”

“예?”


***


‘미친놈인가.’


페이는 정신 집중이 깨질 뻔했다.


단 십 분.

십 분만에 그레이는 페이의 의도를 이해하고, 특임단으로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기본을 갖추어 버렸다.


원래라면 수십 번의 트라이를 예상했다.

죽기 직전의 후배를 구해주고, 겸사겸사 존경심도 챙길 생각이었다.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가지각색인 변칙 개체들도 공통점이 있다.

생체 신호를 감지해, 반드시 인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물리적인 공격을 행할 수도 있고, 정신적으로 파멸시킬 수도 있다.

때로는 전염성이 강한 질병을 전파한다.


그렇기에 특임단의 기본은 암살자가 되는 것이다.

기척을 죽이고 흔적을 없애며 추적을 따돌리는 방법을 배운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생체 신호를 미약하게 만들어 변칙 개체를 속이는 능력을 각성해야 한다.


연습생 중 20%만이 변칙 개체에 대한 정신 방벽을 확립한다.

그들 중 다시 20%만이 생체 신호를 조절한다.

기본적으로 5년 이상이 걸리는 과정이며, 백 명 중 선별되는 인원은 다섯 명 이내.

새로운 요원을 육성하는 데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이유다.


‘그런데 이 꼬맹이는 십 분 만에 ‘은폐’를 깨달았다는 거지.’


페이는 단장의 선구안에 감탄하며, 그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레이가 페이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변칙 개체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다시 격리했다.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방금 네가 한 걸 ‘은폐’라고 한다.”

“은폐입니까.”

“어떻게 한 거냐?”

“호흡을 극단적으로 길게 늘렸습니다. 부족한 산소량은 에테르-기로 메꿨고요. 심장 박동도 느려지더군요.”

“하. 고전적인 방법이군. 하지만 확실해.”


그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하는 거 아닙니까?”

“사람마다 은폐 방식은 다르다. 자신만의 방법을 깨우치는 것이 중요하지. 의외로, 넌 암살자 스타일이구나.”

“페이 선배처럼 말입니까?”

“그래, 임마.”


페이가 피식 웃으며 그레이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빨리 배운 건 좋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일상 생활에서도 은폐 상태를 유지하도록 연습해라.”

“알겠습니다.”


단원들 사이에서도 은폐 능력은 차이가 있다.

은폐 능력이 떨어지는 단원일수록 변칙 개체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커지고, 사망율이 높아진다.


“다른 교육은 은폐를 완성한 다음이다.”

“예, 선배.”


***


페이에 이어서 제스트, 사이먼, 게놈, 세피로스, 티리엘···.

수십 명이 넘는 선배들이 그레이를 가르쳤다.


처음에는 ‘꼬맹이에게 특혜가 너무 과하다’며 불평하던 단원들은 머지않아 혀를 내둘렀다.

몇몇은 스스로 나서 자신들의 비전까지 그레이에게 전수하려고 했다.

그레이는 그야말로 가르칠 맛이 나는 학생이었다.

말라붙은 스펀지처럼 선배들의 지식과 경험을 흡수했다.


그레이가 완숙한 특임단이 되는 데에는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연습생이 현장에 나가기까지 평균 10년이 넘게 걸리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다양한 초상 능력을 지닌 선배들과 스파링을 하며 그래플링 시스템을 완성해 나갔다.

시간이 지날 수록 전생의 기억이 조금씩 깨어났다.

타고난 암살자인 페이가 인정할 만큼 기척은 은밀해졌다.


단원들은 종종 그레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아무래도 초감각 자체가 초상 능력이지. 저번에는 백 미터 넘는 거리에서 자기 욕하는 걸 듣더라.”

“그게 중론이긴 한데. 나는 정신 방벽인 것 같다. 걔, 이상할 만큼 변칙 내성이 강해.”

“개체를 ‘붉은 빛’으로 느낀다잖아. 변칙성에 대한 민감성이 능력인 것 같다.”

“학습력 아니에요? 저번에 내 필살기를 사흘만에 익혔다니까.”

“그레이, 무기는 못 쓰잖아. 은근히 몸치일 때가 있다니까.”


누구도 그레이의 초상 능력을 정의하지 못했다.

한 가지 사실에는 모두 동의했다.

그레이가 충분히 특임단의 자격을 보유했다는 것이다.


열 다섯이 된 그레이스는 특임단으로서 본격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2년이 흘렀다.


***


“야아, 그레이!”


금발을 트윈테일로 묶은 여자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이번에는 나랑 임무 나가는 거지?”

“아, 예.”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다고는 들었습니다.”

“평범한 마수 토벌이니까! 마음 편히 갔다오자고!”

“그래요. 그런데 단장님이 부르시던데.”

“에?”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단장 오빠가? 왜?”

“특별 임무에 대해 논의할 게 있다라나.”

“안 돼! 왜 우리 그레이를 뺏어가? 너 없으면 임무 망해!”


그레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단체에 입단한지 4년, 열 일곱이 된 그레이는 모든 단원들이 같은 팀을 이루기를 원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레이는 특히 인간형 개체를 상대할 때에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다.

최소한 이족 보행을 하는 적이라면, 어떻게든 땅으로 메쳐 제압할 수 있었다.

평범한 인간을 상대하는 위장 용병 임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초감각이 가장 효율적인 안전장치였다.

생명체는 물론이거니와 변칙 개체를 귀신같이 탐지했다.

최근 통계를 보면, 그레이와 함께 임무를 수행한 단원들의 생존율이 90%를 넘었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레이가 혼잣말을 했다.

본격적으로 현장에 나선 뒤, 그가 담당한 변칙성 임무가 50개를 넘어선다.

한 달에 두 건 가까이 변칙 개체를 격리하거나, 소거했다.

그만큼 또 다른 그레이스 실버팽이 나타나는 일을 막은 것이다.


모든 임무가 위험했다.

많은 동료를 죽거나 정신이 나가버렸고, 그 스스로도 죽을 위기를 몇 차례나 넘겼다.


그래도 보람차다.

또래에 적수가 없을 정도의 무력이 있고, 생각보다 대우도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다.


똑똑.


그레이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피곤한 기색으로 몸을 푸는 단장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진다.

이제는 굳이 리아의 팔찌가 없더라도 주변을 감지하는 데에 지장이 없다.

그저 유년 시절의 추억과, 리아에 대한 그리움으로 항상 착용하고 있을 뿐이다.


“단장님, 부르셨습니까.”

“지난 임무의 피로는 모두 회복됐나?”

“회복할 것도 없었습니다.”

“젊음이 좋긴 좋아.”


그가 건조한 미소를 지으며 차를 권했다.

도통 취향에 맞지 않는 뜨거운 액체를 마시며, 그레이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의 에이스, 최연소 단원의 최근 근황이 궁금해서 불렀지.”

“장난은 됐어요.”

“농담도 못하냐. 요즘 잘 나가더구나.”


단장이 피식 웃으며 차를 들이켰다.


“에이미가 너랑 같이 팀하고 싶어서 떼를 쓰더라.”

“너무 어리광 받아주지 마세요. 피곤합니다.”

“... 누가 어른인지 모르겠군. 그러고 보니, 너도 곧 성인이구나.”

“예.”


그레이가 케이든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아버지가 정해주신 생일이 다음 달이군요.”

“··· 그래.”


짧은 침묵이 흐른 후, 단장이 입을 열었다.


“실바너스가의 소식은 알고 있나?”

“예.”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가의 막내 딸, 에코 실바너스.

오만하지만, 제법 뛰어난 정신력을 지니고 있던 소녀다.

토이카 마을의 참사 당시, 변칙적 에테르 감응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가문으로 안전하게 복귀했다.


“남작가로 강등됐다고 하던가요.”

“그렇다.”


실바너스 백작가는 강력한 가문이었다.

그레이가 막 임무를 수행하던 2년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실바너스가는 별안간 반역과 국가 전복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빠른 속도로 몰락했다.

가문의 7할이 단두대 위에서 목숨을 잃었다.

막내딸이던 에코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해 제국 아카데미에 입학했다고 들었다.


“작년만 해도 시끄러웠죠. 위장 용병 임무를 할 때 알게됐습니다.”


찻잔을 톡톡 두드리던 단장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레이스의 등 뒤에 있던 낡은 롱소드가 둥실 떠올라 그의 손으로 다가갔다.

단장의 초상 능력 중 하나인 ‘염동’이다.


“그레이.”

“예.”

“종종 케이든 경의 이야기를 해주곤 했지.”

“······.”


단장히 가만히 케이든의 롱소드를 쓰다듬었다.


“과거, 네 아버지가 어느 가문 소속이었는지 아나?”

“모릅니다.”

“실바너스 백작가였다.”

“역시 그렇습니까.”


토이카 마을에는 실바너스가 소속이었으며, 그를 위한 살림이 마련되어 있었다.

실바너스에 대한 악감정은 없다.

모든 고위 귀족 가문은 더러운 짓을 하며, 사냥개를 부린다.

오히려 멀쩡하게 케이든의 전역을 허락했으니 도의는 지킨 셈이다.


그렇다 해도 망해버린 실바너스에게 동정심이 드는 건 전혀 아니지만.

그러나 이어지는 단장의 말은 그레이의 예상과 달랐다.


“내가 케이든 경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곳 역시 실바너스 백작가-아니, 남작가였다.”

“··· 변칙 개체를 ‘의도적으로’ 건드린 곳. 그게 바로 실바너스였다는 말씀이십니까?”

“역시 영리하구나. 실바너스는 변칙성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고 하던 곳들 중 하나다.”


단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했다면 추론할 수 있겠지. 실바너스가 몰락한 진짜 이유를.”

“반역죄는 명분이었던 겁니까?”

“그렇다. 아마 다른 조직의 특임단에서 처리했겠지. 그렇게 몰락한 가문이 제법 된다.”


평소의 단장과 다르다.

그는 마치 임무 수행에 보상을 주듯, 가볍게 케이든의 옛 이야기를 해주고는 했다.

지금처럼 무거운 사담을 나눈 적은 없었다.


불안한 예감이 든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일 것 같나?”

“··· 글쎄요. 힘? 권력?”

“그걸 위해서는?”

“변칙 개체를 조종하는 방법을 연구한다든지···, 설마.”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이 굳었다.

단장은 농담은 해도 이유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 4년 전, 던전형 변칙성의 발현이 실바너스의 계획에 의한 것이다. 그런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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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P 5-1. 뒷풀이 24.09.16 2 1 14쪽
29 EP 4-14. 결투 24.09.13 4 1 14쪽
28 EP 4-13. 흉수 24.09.11 8 2 13쪽
27 EP 4-12. 조사(2) 24.09.09 12 1 13쪽
26 EP 4-11. 조사(1) 24.09.08 10 1 13쪽
25 EP 4-10. 살인 사건 24.09.06 10 1 13쪽
24 EP 4-9. 기행종 파티 24.09.06 10 1 14쪽
23 EP 4-8. 임무 시작 24.09.04 10 1 14쪽
22 EP 4-7. 재회 24.09.03 13 1 13쪽
21 EP 4-6.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24.09.02 13 1 12쪽
20 EP 4-5. 예상 밖의 손님 24.09.01 13 1 14쪽
19 EP 4-4. 파티 초대 24.08.31 11 1 13쪽
18 EP 4-3. 약간의 증명 24.08.30 12 1 13쪽
17 EP 4-2. 동물의 왕국 24.08.29 14 2 13쪽
16 EP 4-1. 병신 커플 24.08.28 15 1 14쪽
15 EP 3-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24.08.27 14 1 12쪽
14 EP 3-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24.08.26 10 1 12쪽
13 EP 3-3. 몰락한 가문의 영애(1) 24.08.26 15 1 11쪽
12 EP 3-2. 편입생 24.08.25 18 1 13쪽
11 EP 3-1. 인연과 재회 24.08.24 21 1 13쪽
10 EP 2-4.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24.08.23 15 1 12쪽
» EP 2-3. 4년이 지나고 24.08.22 22 1 12쪽
8 EP 2-2. 입단(2) 24.08.22 18 2 13쪽
7 EP 2-1. 입단(1) 24.08.21 19 2 12쪽
6 EP 1-6. 상실 24.08.20 19 1 12쪽
5 EP 1-5. 구출 24.08.19 20 1 12쪽
4 EP 1-4. 변칙성 24.08.19 21 1 11쪽
3 EP 1-3. 인연의 끝 24.08.18 31 1 14쪽
2 EP 1-2. 첫사랑 24.08.17 29 1 11쪽
1 EP 1-1. 퇴역 기사의 양자 +1 24.08.16 3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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