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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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수
그림/삽화
AI
작품등록일 :
2024.08.16 00:11
최근연재일 :
2024.09.16 06:00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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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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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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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EP 2-1. 입단(1)

DUMMY

7. 입단(1)


단장은 가만히 파릇하게 수염이 난 턱을 쓸었다.

깊은 고민에 빠질 때마다 나오는 동작으로, 어느새 그의 버릇이 됐다.


“단장님. 절차대로 하시지요.”


단윈 ‘P’가 말했다.


에코같은 고위 귀족이 아니라면, 기억 소거제가 듣지 않는 사람은 제거하는 것이 규칙이다.

변칙성에 대해 면역력을 가졌더라도 같다.

면역력의 정도는 사람마다 가지각색이고, 개체에 접촉한 이상 정신 오염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다.


“소년. 이름이 뭔가?”

“······.”


그레이스는 말 없이 케이든의 롱소드를 내려다봤다.

이별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빨랐다.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이 셀 수 없이 떠오른다.


단장은 그레이스를 가만히 바라보다 P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P는 일말의 주저 없이 그레이스의 뒷목을 향해 단검을 내리쳤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챙!


“······!”


상황을 지켜보던 단원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레이스가 고개를 숙인 채로 케이든의 롱소드로 공격을 방어했다.


‘장님 소년에게?’

‘단원의 공격이 저지당한다고?’

‘아무리 능력을 쓰지 않았다 한들···.’


P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단장. 다시···.”

“아니, 됐다.”


단장은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그레이스에게 다시 물었다.


“소년. 이름이 뭔가?”

“······.”

“협조하지 않으면 죽는다.”

“······.”

“널 위해 죽은 사람을 헛되이 할 생각인가?”


그 말에 비로소 그레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충혈된 눈으로, 갈라진 목소리로 답한다.


“··· 그레이스 실버팽. 케이든 실버팽의 아들입니다.”

“그런가.”


턱.


단장이 씨익 웃으며 그레이스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평범한 크기지만 바위같은 묵직함이 느껴졌다.


“‘그레이’라고 부르면 되겠구나.”


***


기억 소거제가 듣지 않는 그레이스도 마취제의 효과는 잘만 나타났다.

애초에 중형 몬스터도 재울 수 있는 복용량이니, 듣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이다.

정신을 잃은 채 널부러진 그레이스 옆에서 P가 단장에게 말했다.


“이례적인 일이군요, 단장님. 신원도 알 수 없는 아이를 단체로 끌고 가다니.”

“빛이 강해지면 그림자는 길어지며···.”

“··· 우리는 그림자 속에서 빛을 향한다. 갑자기 단체의 이념은 왜?”

“마을 모두에게 잊힌 소년. 단체에 어울리지 않나?”

“그 이유가 전부입니까? 그래봤자 장님인데.”

“말은 바로 하지. ‘훈련된 단원의 공격’을 방어하는 장님 소년이다.”

“··· 음.”


얼굴을 붉히는 P를 보며 단장이 피식 웃고 말했다.


“이 녀석, 아마 초상 능력을 이미 각성했을 거다.”

“확실한 겁니까?”

“단체로 데려가서 확인부터 해 봐야겠지.”

“··· 설마. ‘푸른 상자’로요? 곧바로?”

“그래.”

“훈련은 받은 것 같습니다만, 너무 성급합니다. 단원으로서는 아직···.”

“페이.”


단장이 그의 진명을 불렀다.

이번 임무가 끝났다는 의미이다.

페이가 한결 풀어진 얼굴로 답했다.


“네, 형님. 물어보시지요.”

“초상 능력자의 공통적인 특징이 뭐냐?”

“공통적인 특징이라, 글쎄요.”


‘단체’의 소속 인원은 전원 초상 능력자로 이루어져 있다.

변칙적 에테르 감응력을 지닌 사람들 중, 변칙성에 대응할 만한 무력과 정신력을 지닌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페이는 지난 세월을 되짚으며 답했다.


“무작위 능력을 각성한다?”

“또?”

“웬만한 놈들은 쌈싸먹을 정도로 강하다?”

“저렴한 표현이군.”

“··· 음, 대체로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낸다?”

“거의 근접했다.”

“아하.”


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결함’이 있습니다.”

“그래. 초상 능력 각성자는 반드시 어떤 결함이 있기 마련이다.”


단장이 그랬으며, 페이 또한 그랬고, 모든 단원이 그러했다.

초상 능력은 인간에게 적용된 변칙성이며, 그렇기에 반드시 모종의 신체적, 정신적 결함을 동반한다.

페이의 경우 간헐적인 단기 기억 상실을 겪고는 했다.


“그게 이 소년의 경우 시력 상실로 나타났다는 추측이십니까?”

“페이. 너는 스스로의 공격-기습을 등 뒤에서 방어할 수 있냐?”

“··· 높은 확률로 안 되죠.”


그는 타고난 암살자다.

능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모든 공격이 무색무취다.

페이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이 소년이 고도의 육감에 가까운 감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라···. 그걸 왜 지금 알았지?”

“그게 이 녀석이 가진 초상 능력 중 하나일 수도 있다. 자신의 장애와 비정상적인 감각을 타인이 자연스럽게 여기게 만드는··· 일종의 변칙성일 수도 있지.”

“그러나 모든 건 추측이지 않습니까?”

“당연하다.”

“그 이유만으로 소년을 단원으로 받으려는 겁니까? 푸른 상자에 데려다 놓고요?”

“··· 단순히 그것 뿐만은 아니고.”


그 이후로 단장은 입을 열지 않았다.

페이는 어쩔 수 없이 마차의 창 밖과 그레이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시간을 때웠다.

단장의 의식은 그레이스의 손에 들린 케이든의 검을 향하고 있었다.


***


평범한 중소 규모의 용병 길드.

등록된 인원은 백 오십, 평균 등급은 실버.

어디가서 무시받을 규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나가는 길드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체이스’ 용병 길드의 회복실에서 그레이스는 깨어났다.


“··· 으윽.”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온다.

전생의 숙취가 생각나는 감각이다.

희미하게 울리는 리아의 팔찌가 주변 상황을 빠르게 음파로 전해준다.


똑같이 생긴 침상 여러 개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누워있다.

대부분은 멀쩡하지만 몇몇은 깔끔하게 사지 일부를 잃었다.

심지어는 신체 기관의 대부분을 잃은 듯한, 사람인지 의심되는 자들도 있다.


머리맡에는 케이든의 검이 있으며, 몇 안되는 그의 소지품 또한 가지런히 놓여있다.

케이든의 생가에 있던 것이다.


‘감금은 아니구나.’


그레이스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선반을 더듬어 안대를 찾아 다시 쓸 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젊은 여자의 목소리다.


“그레이 군, 깨어났군요.”


‘그레이 군?’


생소한 이름에,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에코와의 조우, 변칙 개체.

‘단체’의 사람들과, 자신에게 마취제를 투여한 단장.


동시에 가슴이 턱 막힌다.

아버지의 죽음.

이제 케이든을 만날 수 없다.


‘훌륭히 자라라, 그레이스.’

‘널 위해 죽은 사람을 헛되이 할 생각인가?’


아버지와 단장의 말이 번갈아 떠오른다.

그레이스는 헛기침 몇 번으로 감정을 추스리고 여자에게 물었다.


“여기는 어디죠?”

“경상은 모두 회복됐고, 신체 반응은 모두 정상···. 아, 여기는 체이스 용병 길드랍니다.”


그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단체’로 알려져 있기도 하죠. 그럼, 그레이 군. 날 따라오세요.”


치유사로 추정되는 여자가 몸을 돌렸다.

그레이스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어딘가로 향했다.


미로같은 좁은 통로를 지나고, 두꺼운 문 몇 개를 지났다.

걸음을 옮길 수록 지하로 향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침묵을 깨고 그레이스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흐음.”


그녀가 웃음 섞인 콧소리로 답했다.


“그레이 군이 초상 능력을 각성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곳이요.”

“초상 능력이요?”


변칙적 에테르 감응, 단장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저는 그런 건 모릅니다만.”

“그런가요? 만일, 그렇다면.”


쿠구궁···.


그녀가 두꺼운 문을 열었다.

성인 남성 몇 명이 붙어도 움직일 수 없을 듯한, 육중한 문이었다.


“죽을 수도 있겠네요.”


툭.


등을 떠미는 손에 밀려 문을 넘었다.


“··· 상자?”


리아의 팔찌가 새로운 공간의 정보를 전해준다.

사방이 막힌, 천장이 높은 널찍한 회랑이다.

중앙에는 재질을 알 수 없는 큼지막한 네모 박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레이스의 시야에서 붉게 점멸하고 있었다.


***


페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수정구를 바라봤다.

단장과 단원들은 회랑의 꼭대기 방에서 그레이스를 관찰하고 있다.

소년과 상자를 비추는 전방위 장면이 특수 제작된 수정구 위에서 송출된다.


“괜찮을까요?”

“죽는다면, 어쩔 수 없지.”

“으음. 그래도 C급 개체인데. 시체 치우겠는걸요.”


페이의 침음성이 끝나자마자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 상자의 윗면이 열렸다.

그 곳에서 수정구로는 감지되지 않는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단장이 편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넌 뭐였지?”

“··· 전 어머니였습니다. 형님은요?”

“불알 친구.”


두 사람을 비롯한 ‘특수 임무단’은 신입이 될 지도 모르는 소년의 반응을 지켜봤다.


***


산들거리는 바람이 느껴진다.

작은 체구의 움직임에 맞추어 노래하는 원피스 자락의 마찰 소리, 그리고 바람에 흩날리는 부드러운 단발 머리.

한 순간도 잊지 못한 장면이다.


“··· 리아?”

“안녕, 그레이스.”


리아 크로노스가 사뿐사뿐 그레이스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어떻게, 네가, 여기에.”

“많이 컸다, 너.”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광경이다.

리아가 뒷짐을 진 채, 얼굴을 그레이스에게 들이민다.


어릴 때에는 그보다 키가 컸다.

그러나 열 세 살이 되어 만난 지금은, 그레이스가 더 크다.

체구도 달라졌다.

이제는 어느덧 여인의 향기를 조금씩 내고 있다.


“헤헤. 케이든 아저씨도 너무하다, 그치?”

“······.”

“그레이스의 눈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미안. 아저씨가 가문으로 직접 편지를 써 버렸지 뭐야. 집사고, 메이드고 절대 나가지 말라고 난리를 피웠어.”

“··· 그랬구나.”

“그래도 세피로 경이 준 선물은 잘 받았지? 와아!”


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그레이스의 팔목을 가리켰다.


“잘 차고 있네! 이렇게라도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레이스가 손목을 들어올렸다.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는 리아의 팔찌는, 제작자의 모습을 훤히 드러낸다.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살짝 빠른 심장 소리.


“기억 나? 우리가 했던 모험들.”


추억에 젖은 목소리도 정말 리아다.


“아이들과 숨바꼭질하다가 케이든 아저씨한테 걸린 기억, 같이 목욕도 하고, 마을을 벗어나서 숲속을 탐험하던 기억들.”

“당연히, 모두 기억해.”

“헷, 그치?”


리아가 그레이스의 손을 잡아왔다.


“케이든 아저씨는 잘 지내?”

“······.”

“있잖아, 그레이스. 나는 한 순간도 너를 잊은 적이 없어. 우리 지금부터···.”


그녀의 손이 닿기 직전.


“후우.”


별안간, 그레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단체 사람들이 있는 꼭대기 방을 정확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너무하군.”

“그레이스?”


그레이스가 리아의 손을 잡은 후, 곧바로 메쳤다.

깔끔한 한 팔 업어치기다.


쿵!


“하악!”


리아가 연무장 위에 떨어지며 숨을 들이켰다.

체중에 또래보다 강한 그레이스의 힘까지 더해졌다.

갈비뼈 몇 대가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충격이다.


턱.


그레이스가 리아의 목 위에 발을 올렸다.


“이제야 속이 시원하십니까?”

“그, 그레이스···.”


뿌득!


그가 체중을 싣자, 연약한 소녀의 목이 부러졌다.

심장이 파르르 떨리더니 서서히 멎는다.


그리고 ’붉은 빛’을 점멸하던 리아의 인형도 모습을 감췄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진득한 액체가 되어 땅에 흡수된다.


그레이스는 여전히 붉게 빛나는 상자로 다가갔다.


콰직, 콰지직.


그는 맨 손으로 상자를 때려 부수고 찢기 시작했다.

팔에는 희미하게 유백색 플레임이 불타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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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P 5-1. 뒷풀이 24.09.16 2 1 14쪽
29 EP 4-14. 결투 24.09.13 4 1 14쪽
28 EP 4-13. 흉수 24.09.11 7 2 13쪽
27 EP 4-12. 조사(2) 24.09.09 12 1 13쪽
26 EP 4-11. 조사(1) 24.09.08 10 1 13쪽
25 EP 4-10. 살인 사건 24.09.06 9 1 13쪽
24 EP 4-9. 기행종 파티 24.09.06 9 1 14쪽
23 EP 4-8. 임무 시작 24.09.04 10 1 14쪽
22 EP 4-7. 재회 24.09.03 13 1 13쪽
21 EP 4-6.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24.09.02 13 1 12쪽
20 EP 4-5. 예상 밖의 손님 24.09.01 13 1 14쪽
19 EP 4-4. 파티 초대 24.08.31 11 1 13쪽
18 EP 4-3. 약간의 증명 24.08.30 12 1 13쪽
17 EP 4-2. 동물의 왕국 24.08.29 13 2 13쪽
16 EP 4-1. 병신 커플 24.08.28 14 1 14쪽
15 EP 3-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24.08.27 14 1 12쪽
14 EP 3-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24.08.26 10 1 12쪽
13 EP 3-3. 몰락한 가문의 영애(1) 24.08.26 15 1 11쪽
12 EP 3-2. 편입생 24.08.25 17 1 13쪽
11 EP 3-1. 인연과 재회 24.08.24 21 1 13쪽
10 EP 2-4.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24.08.23 15 1 12쪽
9 EP 2-3. 4년이 지나고 24.08.22 21 1 12쪽
8 EP 2-2. 입단(2) 24.08.22 18 2 13쪽
» EP 2-1. 입단(1) 24.08.21 19 2 12쪽
6 EP 1-6. 상실 24.08.20 18 1 12쪽
5 EP 1-5. 구출 24.08.19 20 1 12쪽
4 EP 1-4. 변칙성 24.08.19 21 1 11쪽
3 EP 1-3. 인연의 끝 24.08.18 31 1 14쪽
2 EP 1-2. 첫사랑 24.08.17 29 1 11쪽
1 EP 1-1. 퇴역 기사의 양자 +1 24.08.16 3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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