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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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수
그림/삽화
AI
작품등록일 :
2024.08.16 00:11
최근연재일 :
2024.09.16 06:00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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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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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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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EP 1-4. 변칙성

DUMMY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발소린데요. 마을 사람인가?”

“아, 그레이스.”


케이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기억해 두거라. 규칙적인 숨소리와 발걸음을.”

“··· 훈련받은 사람이군요.”

“앉아있거라.”


그가 한 켠에 기대어 둔 검집을 들고 문을 열었다.

사냥개의 생활이 끝난 이후에도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

정체를 숨기고 살아왔다지만, 적이 많을 수밖에 없다.


“누구시오?”

“케이든 경의 댁이 맞습니까?”
“··· 그렇소만.”

“크로노스 자작가의 기사입니다.”


그레이스의 가슴이 섬찟했다.

크로노스.

리아의 가문이다.


케이든이 문을 열자, 단정한 플레이트 메일을 차려입은 기사가 절도있게 서 있었다.

불순한 목적은 아닌 듯했다.


“미안하지만, 귀족가와 얽히는 것은 선호하지 않는 지라. 용건만 알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선배님. 일선에서 물러나신 점은 알고 있습니다.”


정중한 케이든의 말투에 젊은 기사 역시 정중하게 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작은 아가씨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작은 아가씨라면··· 리아?”

“예.”


기사가 깔끔하게 봉인된 상자 하나를 흔들었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직접 전해줘도 되겠습니까?”
“··· 그러도록 하시오.”


케이든이 옆으로 비켜서고 기사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천천히 한 쪽 무릎을 꿇고 손수 그레이스의 손에 상자를 쥐어줬다.


“이게··· 뭔가요?”

“리아 아가씨의 선물이다. 영광으로 알거라.”


그레이스는 손의 감각에 의존해 포장을 벗겼다.

상자 안에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팔찌가 들어있었다.


끊임없이 진동하며 희미한 음파를 내뿜는다.

그레이스만 들을 수 있는 가청 범위의 소리다.


직감적으로 이 물건의 사용 방법을 깨달았다.

그레이스가 팔찌를 손목에 차자, 끊임없이 발산되는 파동이 방 안을 선명하게 그려낸다.


“아가씨께서 직접 만든 것이다. 동력 없이 구동되며, 웬만한 파손은 스스로 복구하지.”

“리아가··· 직접.”
“크로노스가는 얼마 전, 마법 공학에 기여한 공로로 자작가가 되었다. 리아 아가씨도 마법 공학에 훌륭한 재능을 보이고 계시지.”

“리아는 잘 지냅니까?”
“음. 초상 능력을 각성하셨고, 건강히 잘 계신다.”


턱.


기사가 그레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소년. 본관도 출신 성분이 좋지는 않다. 분수에 맞지 않는 사랑을 해본 적도 있지.”

“······.”

“잊거라. 그리고 씩씩하게 살거라.”


기사가 떠나간 후에도 그레이스는 한동안 팔찌를 쓰다듬으며 앉아있었다.


“괜찮은 놈이군. 기사도를 아는 녀석이야.”


케이든이 중얼거리며 문을 닫았다.

그가 안타까움이 섞인 눈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봤다.


‘해서는 안 된 짓을 한 걸까.’


그레이스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열 세 살이 된 그레이스의 일상은 조금 달라졌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초감각은 끝을 모르고 정교해져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를 손 끝으로 감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훈련이 없는 시간에는 가만히 앉아 책을 읽었다.

대륙의 역사부터 정치, 사회, 문학과 전술까지.

전생에도 공부는 꽤 했던 걸까, 스펀지처럼 지식을 흡수했다.

안타까운 점은, 그레이스는 마법에 끔찍이도 재능이 없었다.


“날 닮아서 그런가 보다.”

“내심 기대했는데.”


그레이스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시력을 대신하는 마법도 있다고 들었다.

어쩌면 장님 생활을 청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팔자려니 해야 하나.”
“실망하지 마라. 어차피 웬만한 건 다 느낄 수 있잖니. 그나저나, 네게도 좋은 여자가 생겨야 할텐데.”

“저, 아직 열 세 살입니다.”

“4년만 지나면 성인이다. 누구는 열 다섯 살에 결혼하기도 해.”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며느리를 바라는 케이든의 걱정이다.


“그럴 거면 리아와 왜 생이별을 시켰어요?”
“이 녀석아, 네 분수에 맞는 짝을 찾아야지.”

“눈이 이래서 누굴 만날 수나 있을지.”

“내 나이가 예순 다섯이다. 손주는 보고 죽어야 될 거 아냐.”

“죽기는. 아직도 번쩍번쩍 절 집어 던지시는 분이···.”


그레이스는 케이든의 말을 웃어넘겼다.

애초에 집 밖을 벗어나지를 않으니 인연을 만날 수가 없다.

케이든은 슬그머니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올렸다.


‘글쎄다.’


사냥개의 삶은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을 죽인 만큼, 그도 죽음의 위기를 넘긴 적이 수도 없다.

젊음으로 견뎠던 상처들이 요즘따라 심상치 않다.


그레이스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피를 토하는 일이 잦아졌다.

적의 검이 장기를 뚫은 적만 다섯 번이 넘는다.

아직까지 제 기능을 하는 것이 다행이다.


‘네 덕분이다.’


그레이스는 그야말로 말년에 찾은 축복이었다.

비로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아이.


“아버지.”

“아아, 아무것도 아니다.”


케이든이 재빨리 신색을 바로 했다.

요즘따라 그레이스의 감각이 예민하다.

조금만 티를 내도 이상한 점을 알아차릴 것이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을 뿐···.”

“아니, 잠깐만요.”

“음?”


그레이스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비명.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 뭐라고?”

“마을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요.”


케이든의 굳은 얼굴로 검을 쥐고 벌떡 일어났다.


“넌 여기에 있거라.”

“아뇨. 같이 가겠습니다.”
“여기에 있으래도.”

“아버지.”


그레이스가 케이든의 손목을 잡았다.


“제 몸 쯤은 지킬 수 있습니다. 제가 누구 아들입니까?”

“··· 그러냐.”


‘어느덧 이만큼 컸나.”


“내게서 떨어지지 마라.”
“물론입니다.”


그레이스는 가벼운 가죽 갑옷을 걸친 후 케이든을 따라나섰다.


***


두 부자가 사는 집은 마을 외곽에 위치해있었고, 중심지로 가려면 몇 분은 달려야 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쓰러져 신음하는 한 사내를 발견했다.


“제임스!”


케이든이 소리치며 빠르게 달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케, 케이든씨.”


숨이 넘어갈 듯 호흡이 가파르다.

그레이스는 그의 심장이 불규칙적이며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는 소리를 들었다.


“··· 심각하군.”


케이든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임스의 옷을 찢었다.

배 중앙에는 구더기를 닮은 검은 애벌레가 쉴 새 없이 그의 살을 파먹고 있었다.

잠시 후면 내장까지 도달할 것이다.


‘흑마법? 아니다. 마기는 느껴지지 않는데.’


“제임스. 좀 아플 거야.”

“괘, 괜찮습니다. 어떻게든, 빨리···.”


케이든의 손 끝에서 불꽃이 피어났다.

그는 곧장 제임스의 환부를 지져버렸다.


“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그레이스는 깜짝 놀랐다.

어둠 속에서, 케이든의 손 위에서 밝게 빛나는 불꽃을 보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직접 ‘본’ 현상이었다.


“아, 아버지. 방금은?”

“간단한 마법이다.”


‘마법을 볼 수 있다고?’


케이든이 그레이스의 상념을 깨웠다.


“놀랄 것 없어. 이건 길거리 거지들도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천을 다오.”

“아, 예!”


‘나중에 생각하자.’


그레이스는 자신의 옷을 길게 찢어 케이든에게 건넸다.

그가 천으로 불타버린 애벌레 시체를 털어내고, 환부를 칭칭 동여맸다.


“그렇게 놀랐냐?”

“··· 그렇지요.”

“불만큼 유용한 게 없어서 억지로 익혔다. 너도 나중에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다. ‘마나’가 아니라도 간단한 마법을 쓸 수 있는 방법은 많거든.”


짝! 짝! 짝!


케이든이 연거푸 제임스의 뺨을 올려붙였다.

원시적이지만 이만큼 효율적인 방법이 없다.

혼절한 제임스가 눈물을 질질 흘리며 눈을 떴다.


“무슨 일인가?”

“가, 갑자기 마을 중앙에 이상한 게 나타났습니다.”

“마수?”

“아니, 아니요! 마수는 아닙니다. 무,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으, 으음.”

“변칙성.”


그레이스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것, 변칙성의 특징 중 하나다.

민간인이 변칙성을 발견할 때 공통적인 증언 중 하나가, 봐도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레이스. 마지막 기회다. 집에 가도 된다.”


차갑게 굳은 목소리지만, 그레이스는 그 속에서 아들에 대한 걱정을 느꼈다.

동시에 이건 시험이다.

언젠가는 그의 품을 벗어나 세상에 나서야 한다.

함께할 것인지,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선택권을 주는 이유가 있다.

그레이스는 서슴없이 답했다.


“아버지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건방진 놈.”


케이든이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제임스. 몸을 숨기고 있게. 곧 돌아오지.”

“부, 부디. 조심···.”


정신을 잃은 사내를 뒤로하고 두 부자는 몸을 날렸다.


마을이 가까워질 수록 비명소리가 점점 커진다.

곳곳에 쓰러진 사람들이 널려 있고, 그 중에는 시체들도 섞여 있다.

작은 마을이라고 하지만 이백 가구가 넘게 살던 곳이다.

케이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지옥도.

이 정도의 참상을 직접 본 건 손에 꼽는다.


“네가 앞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그레이스.”

“··· 오히려 더 크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레이스는 메슥거리는 속을 진정시켰다.

모든 인간의 형체는 각자의 생명 활동이 있고, 초감각으로 이를 생생하게 느끼며 살아왔다.

지금 미동도 없이, 기괴한 모습으로 나자빠진 시체들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사람인 척 하는 구체 관절 인형들이 무규칙하게 늘어선 것 같다.

게다가 사지가 멀쩡한 시체가 없으니,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걸을 때마다 종아리로 튀는 혈흔은 섬뜩함을 더했다.


“정신차려라. 죽음의 위기에서 믿을 건 다른 사람들도, 이 아비도 아니다.”

“··· 제 자신 뿐입니다.”

“그래.”


그 시점부터 둘은 자세를 낮추고 마을 회관이 있는 중심부로 향했다.

케이든이 정확한 위치를 지정하고 그레이스가 넓은 범위를 초감각으로 탐색하니 호흡이 제법 잘 맞았다.


“느껴지는 건?”

“없습니다.”

“··· 이상하다. 이상하리치만큼 조용해.”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비명소리조차 잦아들었다.

집집마다 숨죽이고 있는 민간인의 가쁜 숨소리와 공포만 느껴질 뿐이다.


변칙성은 말 그대로 규칙성을 벗어난 현상이다.

사람들의 상식과 세계의 인과율에 어긋나는 ‘변칙 개체’를 탄생시킨다.


변칙성이 적절한 정도로 인간에게 발현되면 ‘초상 능력자’가 되지만, 그런 요행은 드물게 일어난다.

주로 동물, 마수 등 생명체에 깃들어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탄생하며, 때로는 사물에 깃든다.

무해한 변칙 개체가 있는 반면 국가적 재난을 불러일으키는 녀석들도 있다.

그야말로 변칙적이다.


“아버지는 변칙 개체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종종.”


케이든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한 놈들도 있고, 착한 놈들도 있다. 직접 보기 전까지는 너무 두려워 말···.”


[끼에에엑 - !]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한꺼번에 우는 듯한 괴성이 먼 발치에서 들려왔다.

그레이스의 다리가 순간적으로 살짝 풀렸다.


“··· 라고는 못 하겠구나.”


드디어 그들의 눈 앞에 변칙 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이스에게 삼 층 건물에 달하는 크기의 원통형 물체가 감지된다.


아니, 물체가 아니다.

규칙적인 박동이 느껴진다.


“생명체?”


케이든의 눈에 잔뜩 찢긴 시체들 사이에서 우뚝 선, 거대한 흰색 고체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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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P 4-14. 결투 24.09.13 4 1 14쪽
28 EP 4-13. 흉수 24.09.11 8 2 13쪽
27 EP 4-12. 조사(2) 24.09.09 12 1 13쪽
26 EP 4-11. 조사(1) 24.09.08 10 1 13쪽
25 EP 4-10. 살인 사건 24.09.06 10 1 13쪽
24 EP 4-9. 기행종 파티 24.09.06 10 1 14쪽
23 EP 4-8. 임무 시작 24.09.04 11 1 14쪽
22 EP 4-7. 재회 24.09.03 13 1 13쪽
21 EP 4-6.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24.09.02 13 1 12쪽
20 EP 4-5. 예상 밖의 손님 24.09.01 13 1 14쪽
19 EP 4-4. 파티 초대 24.08.31 11 1 13쪽
18 EP 4-3. 약간의 증명 24.08.30 12 1 13쪽
17 EP 4-2. 동물의 왕국 24.08.29 14 2 13쪽
16 EP 4-1. 병신 커플 24.08.28 15 1 14쪽
15 EP 3-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24.08.27 14 1 12쪽
14 EP 3-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24.08.26 10 1 12쪽
13 EP 3-3. 몰락한 가문의 영애(1) 24.08.26 15 1 11쪽
12 EP 3-2. 편입생 24.08.25 18 1 13쪽
11 EP 3-1. 인연과 재회 24.08.24 21 1 13쪽
10 EP 2-4.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24.08.23 16 1 12쪽
9 EP 2-3. 4년이 지나고 24.08.22 22 1 12쪽
8 EP 2-2. 입단(2) 24.08.22 18 2 13쪽
7 EP 2-1. 입단(1) 24.08.21 19 2 12쪽
6 EP 1-6. 상실 24.08.20 19 1 12쪽
5 EP 1-5. 구출 24.08.19 20 1 12쪽
» EP 1-4. 변칙성 24.08.19 22 1 11쪽
3 EP 1-3. 인연의 끝 24.08.18 32 1 14쪽
2 EP 1-2. 첫사랑 24.08.17 29 1 11쪽
1 EP 1-1. 퇴역 기사의 양자 +1 24.08.16 3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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