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아인수
그림/삽화
AI
작품등록일 :
2024.08.16 00:11
최근연재일 :
2024.09.16 06:00
연재수 :
30 회
조회수 :
467
추천수 :
34
글자수 :
171,885

작성
24.08.23 06:00
조회
15
추천
1
글자
12쪽

EP 2-4.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DUMMY

10.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실바너스가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토이카 마을에 던전형 변칙 개체를 의도적으로 풀었다.

단장의 말뜻은 그랬다.


“아직은 추측일 뿐이다.”


단장이 차를 들이켰다.


“아닐 수도 있지.”

“······.”


그가 그레이를 가만히 관찰했다.

훌륭한 단원이지만 아직 열 일곱 살이다.


토사구팽.

사냥개를 솥에 넣었다.

아버지의 죽음 뒤에 있는 자들을 알게된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까.


분노? 증오?


“··· 그렇군요.”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군.”

“썩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순간적으로 못된 싶은 마음이 든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몰락해버린 가문이다.


“··· 충분히 죄를 치뤘길 바랄 뿐입니다. 제가 나서는 건 아버지도 원치 않으실 겁니다.”

“이유가 궁금하지 않나?”

“궁금합니다. 그러나 당장 말해주지 않는 이유가 있겠지요.”


‘잘 키웠군요.’


“통과.”

“예?”


그가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특별 임무다.”


그레이가 종이를 쓸었다.


“··· 특별 입학 신청서?”

“현 시점부터, 단원 그레이는 테리안 제국 공인 아카데미에 잠입한다. 신분은 2학년, 편입생. 그 곳에서 정보를 수집해 단체에 보고한다.”

“잠깐만요.”


그레이가 안대 밑에서 미간을 찌푸리며 신청서를 밀었다.


“이게 뭡니까? 기존 임무는 어쩌고요? 에이미 누나가 난리를 칠 텐데.”

“그딴 작은 일에 신경쓰지 마라. 이건 굉장히 중요한 임무거든.”


단장이 신청서를 빼앗아 봉투 안에 넣었다.


“네가 만일 과거의 일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흔들렸다면 이런 기회는 주지 않았을 거다. 공인 아카데미에는 에코 실바너스도 재학 중이니까.”

“기회는 무슨 기회?”

“모든 귀족 자제들이 입학하고 싶어하는 곳이다. 평민들은 꿈도 꿀 수 없지. 너같은 인간 백정에게 주어질 수 있는 기회가 아니야.”


그레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전 특임단이 더 좋은데요.”

“지랄한다. 최전선보다 사망률이 높은 곳이 좋긴 뭐가 좋아?”

“······.”

“긴 휴가라고 생각하든지. 겸사겸사 공부도 좀 하고, 친구도 사귀어 와라. 유머 감각도 익히고.”

“당신, 단장 아니지. 설마 도플갱어형 변칙···.”


빡!


양초가 염동으로 날아와 그레이의 뒤통수를 때렸다.


‘괴물같은 인간.’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 단장님 맞네요.”

“까분다.”

“공인 아카데미에 대해선 저도 알아요.”


희미한 기억 속 먼 옛날, 리아가 이야기해줬다.

고위 귀족의 자제조차 입학하기 힘든, 정계 진출의 교두보이자 천재들이 모인 별천지.

제국 황실의 지원을 받는 유일한 아카데미다.


“구체적인 명령을 주십시오.”

“진짜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라는 거다.”

“··· 쫓아내는 겁니까?”

“미친 놈. 너를 방생하면 재앙이 발생한다.”

“너무하네.”


냉정하지만 사실이다.

작정하고 그레이가 숨으면 단체도 골치가 아프다.


“일단, 나이만 따져도 네가 아카데미에 잠입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원이다. 이견 있나?”

“앞 못 보는 장애인이라는 점만 빼고 동의합니다.”

“그리고 네 나이에 맞는 경험과 사회성도 중요해. 진짜 인간 백정이 되고싶은 건 아니지 않나.”

“··· 뭘 잘못 드셨나?”

“싸가지 봐라.”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정신을 집중하면 웬만한 거짓말은 탐지할 수 있다.

그런데 세포 단위까지 신체를 조절할 수 있는 단장을 믿을 수가 있나.


“네 선배들도 장기 임무는 한두 번 씩 해봤다. 아예 위장 결혼을 한 녀석도 있어.”

“··· 그 정도입니까?”

“네 성과는 5년 근속한 단원과 비슷하다. 슬슬 나갈 때가 됐어.”


거의 납득한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이 이 정도까지 말한다면 모두 사실일 것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걸 들을 차례다.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까.”


단장이 턱을 쓸었다.


“알면 오히려 방해가 됩니까?”

“사안에 따라서는. 아예 모르는 것이 좋을 수도 있고.”

“··· 변칙성과 관련된 일이군요.”

“물론이다.”


인간의 마음을 직접 조종하거나 정신을 읽는 변칙 개체도 있다.

위험도는 최소한 B급 이상.

하나의 대상에만 작용하는 ‘푸른 상자’는 가장 안전한 축에 속했다.


“B급 변칙성··· 혼자 가도 되는 겁니까?”

“당연히 정체를 숨겨야지. 그건 기본이다. 보고는 매주 해라. 보고 내용은 자율에 맡기지.”

“일단 알겠습니다.”


그레이의 특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보고 내용을 제한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일반인이 알 수 없는 특이점까지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능하면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해라.”

“... 그건 자신 없습니다만.”

“이번 임무의 핵심이다. 원래 말 안 해주려고 했는데, 잘 들어.”

“예.”


그레이가 자세를 바로 했다.

중요한 내용이 나온다.


“공인 아카데미에는 ‘파견’이라는 제도가 있다. 최상위권 학생들을 조기 졸업시키고, 엄청난 부와 명예를 준다. 대신 황실을 위해 쓰거나, 다른 지역-나라로 파견시키지.”

“일종의 첩보원으로 쓰는 겁니까?”

“문제가 그 부분이다. ‘누구도’ 파견을 나간 학생들을 본 적이 없어. 뭘 하는지도 알 수가 없지. 단지 편지 등으로만 소식을 알 수 있을 뿐.”

“··· 가족들조차?”
“가족들조차.”


그레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말이 됩니까? 금지옥엽 키운 애들이 납치되는 거나 다름 없잖아요.”

“평민이나 그렇게 생각한다. 파견 대상이 되는 건 대단히 명예로운 일. 오히려 부모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 가문의 위상이 수직 상승하니까.”


도통 이해할 수 없지만, 원래 귀족 세계는 별천지다.

어렵사리 납득한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견과 관련한 정보를 위주로 살펴보겠습니다. ‘가능하면’ 파견 대상에 들도록 노력도 해 보죠.”

“별 기대는 안 한다.”

“··· 아, 예. 임무 기간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까?”

“뭘 그런 걸 묻나?”


단장이 피식 웃었다.


“졸업까지 하고 오도록.”


***


바로 그 날 밤, 그레이는 엉덩이가 걷어 차인 느낌으로 체이스 용병단의 건물을 빠져나왔다.

소지품은 손바닥만한 수첩 하나와 통신용 수정구, 그리고 금화 열 닢이다.

단장과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필요한 정보는 수첩에 다 있다.’

‘단장님.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만. 학교-아니,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가령 학부모 상담이라든지···.’

‘활동비는 섭섭하지 않게 넣었다. 출발은 다섯 시간 후. 업무 인수인계부터 하도록.’


“미친 인간.”


그래도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다.

한참 북쪽으로 올라가던 그레이는 널찍한 바위에 걸터앉아 수첩을 열었다.

달빛조차 구름에 덮인 어두운 밤이지만, 그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


“이름, 그레이 케이든.”


용병으로 활동할 때의 대외적인 이름이다.


“하급 귀족인 케이든 남작가 출신. 양친을 잃고 체이스 용병 길드에 입단했다. 길드에서 4년 동안 현역 용병으로 일함.”


이것도 맞고.


“최연소 골드 등급의 용병이며, 이는 길드에서의 실적이 증명. 유명 용병들도 인정. 용병왕에게 직접 지도를··· 순 구라잖아.”


미간을 확 찌푸렸다.

섬뜩한 사실 하나.

이렇게 자신있게 써 놨을 정도라면, 이는 이미 ‘실제 사실’이 된 거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외우기만 하면 된다.

단체는 그런 곳이다.


“놀랍긴 하네. 용병왕도 움직일 수 있다고?”


수백 개 용병 길드의 수장이며, 당대 최고의 용병에게 부여되는 칭호.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아직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대륙의 큰 손이다.

명령 하나로 수십 만의 용병을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이다.


“부담되는데.”


단장이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이번 임무는 굉장히 많은 시간과 자원이 투자되었을 것이다.


“··· 용병왕은 그레이 케이든의 재능을 높이 사, 직접 원장에게 그를 특별히 편입생으로 받아달라고 부탁함··· 가관이네.”


[추신. 이 정도는 되어야 네가 편입하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부담 느끼지 말도록. - 단장]


“자기 일 아니라고.”


그 아래에는 아카데미의 조직, 수업 내용, 학교 생활과 교칙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있었다.

그레이의 머리속에 있는 보편적인 ‘아카데미’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공인 아카데미의 위엄이 느껴지는 부분은 몇몇 있다.


4학년 졸업 제도지만 바로 진급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학기말 시험에서 일정 성적 이상을 받아야 진급할 수 있다.

졸업까지 걸리는 기가는 평균 8년.


“··· 굉장히 긴 장기 임무가 될 수도 있겠는데. 소속은 기사 학부, 에테르 마스터리 학과, C반.”


총 재학생은 삼천 명 가량.

백작가 이상 출신이 이천 오백 명.

학생들은 활발하게 동아리 활동을 하며, 어떤 동아리에 드는 지가 추후 정계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먼 옛날, 그 에코 실바너스가 백작가 출신으로 얼마나 싸가지없는 모습을 보였는지 생각하면 눈 앞이 깜깜하다.


“원래 깜깜했지만.”


한숨을 푹 내쉰 그레이가 힘 없는 걸음으로 여관으로 향했다.

내일은 준비할 것이 많다.


***


단장은 아카데미에 들어가기까지 하루의 유예를 줬다.

황성을 넘어 제국 중심부로 이동하고, 이것저것 살림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게다가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수집하고 ‘단원’ 냄새를 씻어내야 한다.


“기숙사라.”


대학 다닐 때 살아본 것 같기도 하고.


일단 금화 한 닢을 털어 가장 고급스러운 옷들을 샀다.

장님인 걸 알아보고 등쳐먹으려는 장사꾼들이 많았지만 어림도 없다.

거짓말을 알아채는 귀신같은 감각과, 수상할만큼 돈이 많은 그레이 앞에서 모두 착한 사장이 됐다.

금화 한 닢이 평민 가정의 1년 생활비다.


“··· 뭐, 더 필요한가?”


배낭에 옷가지를 쑤셔 넣으며 생각했다.


대단한 귀족 자제들이 사는 기숙사니 기본적인 생활 용품은 다 구비되어있을 것이고.

뭘 배우는지도 모르는데 책 같은 걸 준비할 수도 없다.


“필기구나 다른 것들은··· 됐다. 거기서 사면 되겠지.”


아카데미의 부지는 만 평이다.

작은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당부터 정원과 유흥 시설까지, 없는 게 없다.

물가는 좀 비싸다고 하던데, 돈 벌 방법도 생각을 해봐야겠다.


“투잡이라도 뛰어야 하나··· 일단 좀 쉴까.”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보니 근 4년 간 이렇게 한가했던 적이 없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를 임무다.

이제는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져야 한다.


시체처럼 정자세로 휴식하고 있던 그레이에게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코.”


케이든을 사냥개로 부린 가문의 막내 딸.

아버지를 죽인 것이 사실상 확실한 곳이지만 그녀에게 악감정은 없다.

그 때 에코의 나이가 열 셋이다.


“다리도 부러졌었지.”


딸이 있는 곳에 변칙 개체를 보낸다?

석연치 않지만, 귀족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깔끔한 일처리를 위해 딸의 죽음을 면피 수단으로 삼으려 했을 수도 있다.


[ - - -.]


적막 속에서 가만히 누운 그레이의 귀에 묘한 고주파음이 들린다.

이제는 신체 일부처럼 익숙해진, 여전히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는 팔찌다.


“··· 리아.”


공인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요새는 크로노스 가문의 마법 공학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곳이 없다.

여러 시설부터, 가정집, 심지어는 단체에서도 크로노스의 제품을 많이 쓰고 있다.


남작가로 시작한 크로노스가는 4년만에 백작가가 되었다.

에코와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리아도 입학했으려나.”


똑똑하고 착한 데다가 이제는 돈까지 많으니 혹시 모른다.


“··· 많이 컸겠지.”


심장 박동 정도야 마음만 먹으면 조절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오늘따라 왠지 쉽지 않다.


그레이는 천천히 눈을 감고, 오랜만에 유년 시절의 추억을 회상했다.

푸른 상자, 부수지 말 걸 그랬다.


***


“어디서 평민 냄새가 나는군.”

“······.”


2인실 기숙사.

룸메이트의 첫 마디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0 EP 5-1. 뒷풀이 24.09.16 2 1 14쪽
29 EP 4-14. 결투 24.09.13 4 1 14쪽
28 EP 4-13. 흉수 24.09.11 8 2 13쪽
27 EP 4-12. 조사(2) 24.09.09 12 1 13쪽
26 EP 4-11. 조사(1) 24.09.08 10 1 13쪽
25 EP 4-10. 살인 사건 24.09.06 10 1 13쪽
24 EP 4-9. 기행종 파티 24.09.06 10 1 14쪽
23 EP 4-8. 임무 시작 24.09.04 10 1 14쪽
22 EP 4-7. 재회 24.09.03 13 1 13쪽
21 EP 4-6.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24.09.02 13 1 12쪽
20 EP 4-5. 예상 밖의 손님 24.09.01 13 1 14쪽
19 EP 4-4. 파티 초대 24.08.31 11 1 13쪽
18 EP 4-3. 약간의 증명 24.08.30 12 1 13쪽
17 EP 4-2. 동물의 왕국 24.08.29 14 2 13쪽
16 EP 4-1. 병신 커플 24.08.28 15 1 14쪽
15 EP 3-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24.08.27 14 1 12쪽
14 EP 3-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24.08.26 10 1 12쪽
13 EP 3-3. 몰락한 가문의 영애(1) 24.08.26 15 1 11쪽
12 EP 3-2. 편입생 24.08.25 18 1 13쪽
11 EP 3-1. 인연과 재회 24.08.24 21 1 13쪽
» EP 2-4.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24.08.23 16 1 12쪽
9 EP 2-3. 4년이 지나고 24.08.22 22 1 12쪽
8 EP 2-2. 입단(2) 24.08.22 18 2 13쪽
7 EP 2-1. 입단(1) 24.08.21 19 2 12쪽
6 EP 1-6. 상실 24.08.20 19 1 12쪽
5 EP 1-5. 구출 24.08.19 20 1 12쪽
4 EP 1-4. 변칙성 24.08.19 21 1 11쪽
3 EP 1-3. 인연의 끝 24.08.18 32 1 14쪽
2 EP 1-2. 첫사랑 24.08.17 29 1 11쪽
1 EP 1-1. 퇴역 기사의 양자 +1 24.08.16 37 1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