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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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수
그림/삽화
AI
작품등록일 :
2024.08.16 00:11
최근연재일 :
2024.09.16 06:00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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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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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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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3-3. 몰락한 가문의 영애(1)

DUMMY

13. 몰락한 가문의 영애


삼십 분 전, 도서관에서 쪽지 시험을 준비하던 에코에게 한 학생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에코가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


1년이 훌쩍 넘는 아카데미 생활 와중에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건 학생은 없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냉막한 인상의, 푸른 머리의 학생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코 실바너스.”

“··· 누구?”

“미다스 가문의 제논이라고 한다.”


그가 에코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용건이 있어 찾아왔다.”


에코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미다스 백작가’는 요새 주가를 올리는 크로노스 백작가와 마법공학 분야에서 양대산맥을 이루는 유망한 가문이다.

오히려 크로노스 가문보다 마법 공학 쪽으로는 더욱 역사가 깊다.


‘제논 미다스’라는 이 학생은 아웃사이더인 에코도 익숙하다.

천재적인 마법 실력을 지녔으며, 그보다 뛰어난 마법 공학적인 재능이 있다.

벌써부터 특허를 낸 제품이 서른 개가 넘어간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동학년 내에서 ‘괴짜’라고 불린다.

제논의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으나, 그의 행보는 언제나 학생들의 비난을 산다.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후작, 공작가의 사람들을 무시하기 일쑤다.

수업을 빠지는 일이 다반사며, 조별 과제라도 하는 날에는 제 하고 싶은 대로 따르지 않으면 아예 협업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정기 시험과 쪽지 시험에는 타고난 재능으로 상위권을 기록해 성적을 관리하니, 밉보일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타인들의 비난에 무관심한 것도 한 몫 했다.


천재, 혹은 괴짜.

조금 더 보태면 사이코, 혹은 또라이.

그런 폭탄 덩어리가 어째서 에코를 찾아왔을까.


“무슨··· 일이야?”

“겁먹지 마. 반역자의 딸이라 해도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제논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에코 실바너스. 너는 그레이 케이든과 인연이 있는가?”

“··· 응?”

“정원에서 그레이와 이야기하는 것을 목격했다. 제법 친밀해 보이더군.”


에코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레이스-그레이와 인연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를 생각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타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원치 않는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레이를 위해서라도.


“원하는 것이··· 뭐야?”

“별 건 아니다.”


턱.


제논이 금속성이 나는 주머니를 책상 위에 올려놨다.


“그가 상점가로 가서 수업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하려고 하더군. 그를 도와줘라.”

“그레이가?”


에코가 주머니를 살짝 열어봤다.

금화가 한가득 들어있다.


“어째서. 이걸, 내게?”

“그레이 케이든과 어울리는 사람은 너니까.”


제논이 흘긋 에코의 다리를 봤다.


“나는 당장 할 일이 있어서 말이지.”

“······.”

“싫으면 안 해도 된다. 그저 권유일 뿐.”


제논이 몸을 일으켰다.

감정 없는 목소리로 에코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갔다.


“돈은 알아서 해라. 내게는 별 것 아니다.”


4년치 교재를 사고도 한참은 남을 만한 금액이다.

에코는 머뭇거리다 품 속에 주머니를 넣었다.


***


“뭐라고?”

“··· 도와···.”


짜증스러운 그레이의 말에 에코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이내 입술을 깨물고 허리를 폈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응?”

“수업에 필요한 것들을 사려는 거 아냐? 앞도 안 보이는 주제에 곤란하겠지.”


그레이가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에코를 바라봤다.


“네가, 날? 돕는다고?”

“그, 그래. 아카데미의 물가도 모를 거 아냐.”

“필요 없는데?”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한데, 에코의 꼬장을 받아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에코는 몸을 돌려 첫 번째 상점으로 들어가려는 그레이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탁.


“놔.”

“··· 거기는 교재를 취급하지 않아.”

“내가 알아서 살피겠다.”

“도와 달라는 말, 한 마디만 하면···.”

“에코 실바너스.”


그레이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에코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게 악감정은 없다. 그러나, 아버지를 죽인 가문의 딸에게 도움받고 싶은 생각은 없어.”

“어, 어?”

“모른 체해도 소용 없다.”


털썩.


그레이가 에코의 어깨를 밀쳤다.

장애로 인해 가뜩이나 자세가 불안정했다.

무게중심의 원리를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그의 손짓에 에코가 힘 없이 주저앉았다.

그레이는 차가운 얼굴로 에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더 이상 너와 얽히고 싶지 않아.”


에코는 망연히 두 번째 가게로 들어가는 그레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게, 그게 아닌데···.”


그녀의 음성은 사람 가득한 상점가에 흩어질 뿐이다.


***


결국 그레이는 거의 빈 손으로 기숙사 방에 들어왔다.

시중보다 몇 배는 비싼 값에, 잉크 세 통과 깃펜 다섯 자루를 구한 것이 전부다.

늦은 밤, 저녁까지 굶고 돌아온 그를 보고 제논이 놀리듯 말했다.


“별 소득이 없었나보군.”


그레이는 제논의 말을 무시하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마음 깊이 그리던 사람은 따로 있었다.

교재도 못 구한 데다가 불쾌한 인연을 만난 덕에 기분이 좋지 않다.


문득 화학 약품 냄새가 풍겼다.

범인보다 감각이 월등한 그레이에게는 끔찍한 수준이다.


“무슨 냄새야?”

“실험 중이다.”


제논이 자신의 책상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가열하고 있다.


“창문이라도 열어.”

“그럼 반응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어. 참아라.”


‘개새끼.’


진득한 액체가 끓는 소리를 들으며 그레이가 물었다.


“제논.”

“말해라.”

“리아 크로노스라는 여자가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가?”


그레이스는 제논의 몸이 살짝 굳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 그래. 왜?”

“그냥, 물어봤다.”


마음이 조금 풀린다.

머지않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직감이 든다.

그레이의 초감각은 경지에 올랐고, 이런 육감은 그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약간의 위안을 얻으며 눈을 감았다.

쪽지 시험은, 어떻게든 되겠지.


***


그레이는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긴장이 풀렸나.”


졸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제는 루틴이 된 간단한 체조로 몸을 푼 후, 침대에서 점프해 바닥에 내려왔다.


[ - - -. ]


리아의 팔찌가 2인실 기숙사 방의 풍경을 그린다.

제논 미다스가 없다.

대신, 그의 자리에 큼지막한 종이가 창문에서 들어온 바람을 맞아 팔랑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레이는 선반에 붙은 종이를 떼어 손으로 훑었다.


[그레이 케이든.]

[얼간이처럼 자더구나. 용병 출신이 맞는가?]

[주말이 되면 대부분의 재학생은 가문으로 돌아간다.]

[물론 너는 기숙사에 있어야겠지.]

[내 부재에 두려워할 것 같아, 귀찮음을 무릅쓰고 서면에 적는다.]

[아, 글은 읽을 수 있나? 불가능하다면, 어쩔 수 없지.]

[추신. 택배 왔다.]


“와, 진짜 개새끼인데?”


사람 속 긁는 데에는 타고난 재주가 있는 녀석이다.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반으로 접어버려야겠다.


“그나저나, 웬 택배.”


이 세계에도 택배와 비슷한 배송 시스템이 있다.

물론 귀족들이 주된 소비자다.

귀중품을 주로 배송하다보니, 용병들이 목숨을 걸고 물건을 옮긴다.


아카데미에 택배 시스템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기숙사 방문을 열자마자, 발 앞쪽에 박스 하나가 걸렸다.


그레이는 방 안으로 박스를 들고 와 포장을 뜯었다.

내부에는 책 열댓 권과 앏은 노트, 그리고 정갈하게 접힌 쪽지 하나가 들어있었다.

그는 먼저 쪽지를 피고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레이 케이든에게.]

[기사학부-에너지 트레이닝 학과의 2학년 교재를 사서 넣었어.]

[노트에는 쪽지 시험의 족보가 들어있어.]

[학생들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니, 부정행위라고 생각하지는 마.]

[돈은 신경쓰지 마. 너와는 달리, 나는 이 정도 돈을 쓰는 것이 아무렇지 않거든.]

[예전에 목숨을 구해준 보답일 뿐이야.]

[건방지게 생각하지 말길.]

[- 에코 실바너스]


“이 년이, 미쳤나?”


잠이 확 깼다.


***


당장 에코를 찾아가서 멱살을 잡으려고 했지만, 발 등에 떨어진 불이 급했다.

주말 내내, 그레이는 이번 쪽지 시험의 족보를 중심으로 교재를 탐독했다.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된 월요일, 쪽지 시험의 결과는 곧바로 나왔다.


“··· 그레이 케이든.”

“예.”

“하나 틀렸다.”


총 20개 문항.

객관식 15개, 주관식 3개, 서술형 2개 문항 중 객관식 하나만 틀렸다.


“2등이다.”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시험지를 받아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동급생의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한 거야?”

“앞이 안 보인다면서.”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초상 능력이 있나?”

“설마, 우리의 답을 다 베낀 거 아냐?”

“분명히 부정행위가···.”


탕탕!


“다들 정숙!”


담임이 검집으로 칠판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부정행위는 없었다. 내가 직접 시험을 감독했다. 날 무시하는 건가?”

“아닙니다!”

“고작 장님, 그것도 아카데미에서 1학년을 보내지 않은 녀석에게 성적으로 밀린 네 놈들 잘못이다. 반성하도록.”

“··· 예!”

“추후 지켜보겠다.”


담임의 서슬퍼런 말에 학급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그레이에게 꽂힌다.


‘짜증나네.’


그레이를 제물로 학습 의욕을 높이려는 담임의 얕은 술수다.

애들한테 너무 잘 먹혀서 문제지.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그레이는 수업 내용을 하나하나 필기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전생에 제법 공부를 잘 하던 학생이던 것 같다.


***


“저기···.”


클래스 타워의 공용 실험실.

늦은 저녁, 에코는 혼자 실험에 매진하고 있는 한 학생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레이는, 쪽지 시험 잘 봤어?”

“··· 에코 실바너스.”


얼음장같은 얼굴로 제논이 그녀를 돌아봤다.


“여기는 어떻게 찾아왔지?”

“네가 매일 실험실에 있다는 말은 모두가···.”

“꺼져.”


제논이 고개를 돌리며 냉정하게 말했다.


“너는 그레이 케이든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도구가 어째서 사람을 스스로 찾지?”

“제, 제논.”

“너같은 년과 얽힐 생각은 없다. 한 번만 내게 먼저 접촉한다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소멸시켜 주마.”

“내가, 반역자의 딸이라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게 너와 인연을 만들 이유라고 생각하나? 넌 그냥 보잘 것 없는 하급 귀족일 뿐이다. 방해하지 말고, 당장 눈 앞에서 사라져라.”

“알··· 았어.”


에코는 고개를 숙인 채 실험실을 나갔다.

오늘만큼은 평소보다 비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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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P 5-1. 뒷풀이 24.09.16 2 1 14쪽
29 EP 4-14. 결투 24.09.13 4 1 14쪽
28 EP 4-13. 흉수 24.09.11 7 2 13쪽
27 EP 4-12. 조사(2) 24.09.09 11 1 13쪽
26 EP 4-11. 조사(1) 24.09.08 9 1 13쪽
25 EP 4-10. 살인 사건 24.09.06 9 1 13쪽
24 EP 4-9. 기행종 파티 24.09.06 9 1 14쪽
23 EP 4-8. 임무 시작 24.09.04 10 1 14쪽
22 EP 4-7. 재회 24.09.03 13 1 13쪽
21 EP 4-6.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24.09.02 13 1 12쪽
20 EP 4-5. 예상 밖의 손님 24.09.01 13 1 14쪽
19 EP 4-4. 파티 초대 24.08.31 10 1 13쪽
18 EP 4-3. 약간의 증명 24.08.30 12 1 13쪽
17 EP 4-2. 동물의 왕국 24.08.29 13 2 13쪽
16 EP 4-1. 병신 커플 24.08.28 14 1 14쪽
15 EP 3-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24.08.27 13 1 12쪽
14 EP 3-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24.08.26 9 1 12쪽
» EP 3-3. 몰락한 가문의 영애(1) 24.08.26 15 1 11쪽
12 EP 3-2. 편입생 24.08.25 17 1 13쪽
11 EP 3-1. 인연과 재회 24.08.24 21 1 13쪽
10 EP 2-4.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24.08.23 15 1 12쪽
9 EP 2-3. 4년이 지나고 24.08.22 21 1 12쪽
8 EP 2-2. 입단(2) 24.08.22 18 2 13쪽
7 EP 2-1. 입단(1) 24.08.21 18 2 12쪽
6 EP 1-6. 상실 24.08.20 18 1 12쪽
5 EP 1-5. 구출 24.08.19 20 1 12쪽
4 EP 1-4. 변칙성 24.08.19 21 1 11쪽
3 EP 1-3. 인연의 끝 24.08.18 31 1 14쪽
2 EP 1-2. 첫사랑 24.08.17 28 1 11쪽
1 EP 1-1. 퇴역 기사의 양자 +1 24.08.16 3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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