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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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수
그림/삽화
AI
작품등록일 :
2024.08.16 00:11
최근연재일 :
2024.09.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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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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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4-6.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DUMMY

021.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약 천 칠백 명.

아카데미의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대강당에 모였다.


“후배들끼리 합은 맞춰봤어?”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제이미가 물었다.

제논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입니다.”

“으응, 그래. 아직 시간은 남았으니까. 네가 에코구나?”

“처음 뵙겠습니다.”


어두운 얼굴의 에코가 고개를 숙였다.

제이미가 흐릿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깍듯하게 안 해도 돼. 난 평민이거든. 언니라고 해도 좋아.”

“아니예요, 선배님. 아카데미 안이니까요.”

“그래··· 주인공이 저기 오네. 우리의 딜탱.”


어지럽던 장내 한 쪽이 홍해처럼 갈라진다.

거구의 사내가 나타났다.


“여기야, 케테르!”


학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저 사람이 케테르 사모아.”

“과연, 미개한 느낌이 남아있어.”

“로브가 꽉 끼는데··· 진짜 마법사 맞아?”

“역시 기행종··· 힉!”


케테르가 그의 별명을 말한 2학년 학생을 정확히 쳐다봤다.

그가 입모양으로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학생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죄, 죄송합니다!”

“저주···!”

“역시 저주술사! 저주를 건 게 분명해.”

“으, 으아아!”


학생이 공포에 질려 강당 밖으로 달려나갔다.

케테르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는, 제이미 옆에 앉았다.


“진짜 저주라도 건 거야?”

“아니.”


케테르가 짤막한 대답에 제이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케테르가 에코를 유심히 관찰하다 물었다.


“에코 실바너스?”

“마, 맞아요. 영광입니다, 케테르 선배님.”

“다리가 아픈가?”

“··· 네.”

“빠른 움직임, 포기해야겠군.”

“죄송··· 합니다.”


이윽고 다섯 사람들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 활발하게 대화하며 계획을 의논하는 다른 파티와 대조적이다.


제이미는 공상에 빠진 사람처럼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 케테르는 눈을 감은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제논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복잡한 수식이 잔뜩 적힌 책을 읽는다.


그레이는 팔짱을 낀 채 말 없이 앉아있고, 에코는 안절부절 못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다.


‘··· 내 잘못이야.’


에코가 생각했다.

강력한 파티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그레이와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말에 고민 없이 덥썩 제논의 제안을 받아버렸다.


‘괜히 왔어. 그레이는 나를 부담스러워 하는데. 그리고 리아 크로노스를···.’


에코가 품 속에 있는 상자를 꼭 안았다.

그레이는 그런 그녀의 기색을 감지하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연무장의 에코를 보고 평정을 잃었다.

단체에 있을 때도 초감각이 흐트러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성해야 할 일이야.’


그레이의 냉정한 성격도 후천적인 것이다.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에코와 좋은 인연으로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호의에 모질게 대했으니 마음이 조금은 불편했다.


“잊고 있었어.”

“으, 응?”


그레이가 먼저 말을 꺼내자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에코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내 생일이었더군. 그 날.”

“아, 맞아.”


보고를 마친 날, 단장의 말에 생일이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에코가 자신에게 주려던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 미안.”

“응?”

“미안하다고.”


그레이의 작은 목소리에 에코의 표정이 환히 밝아졌다.


“저, 저기. 그러면···.”


용기를 내서 품 속에 손을 넣었다.

그레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들을 방해했다.


“에코 실바너스.”


그리고 방해꾼 덕에 그레이의 기분은 다시 급격하게 다운됐다.


“··· 카이 오라버니. 무슨 일이시죠?”


에코가 입술을 깨물었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좋은··· 파티를 구성했군. 케테르, 제이미. 제논 미다스 군인가.”

“음.”

“반가워, 카이 군.”

“카이 제피로스 선배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이미 안면이 있는 듯 두 선배가 인사를 받았다.

제논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레이 케이든.”


그레이는 불편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났다.


“아, 예. 안녕하셨습니까.”

“에코와 가까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잊었나?”

“아직도 뒤를 캐고 다닙니까?”

“······.”


두 사람의 눈이-정확히 말해서는 눈과 안대가 마주쳤다.


“오오. 좋은 장면.”

“정치 싸움인가.”

“이럴 땐 치정 싸움이라고 하는 거야.”


제이미와 케테르가 흥미로운 눈길을 보낸다.

이내 카이가 에코에게 눈을 돌렸다.


“저번 사건에 얽힌 학생들은 모두 징계 처분을 내렸다. 추후 네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받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 고마워요. 그 말씀을 해주려고 오셨나요?”

“일단은, 그렇다···.”


그 때, 케테르가 등장했을 때보다 더 큰 소란이 일었다.


“··· 튤립!”

“학생회의 분홍 튤립!”

“리아다!”

“와, 오랜만이야, 리아!”

“오늘도 너무 예쁘다.”

“저 옷, 어느 지점에서 나온 거야?”


사교계의 아이돌이 온 것 같다.

그레이, 에코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반응을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파티원 모두가 동시에 그레이를 바라봤다.


리아 크로노스.

이상할 만큼 그레이가 관심을 갖는 소녀.


“리아.”


그레이가 홀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아가 왔구나.”

“잠깐, 그레이.”


제논이 말했다.


“지금은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날 기억하고 있을까.”

“흐으응···.”


제이미가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들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그, 그레이?”


아직 에코의 손은 품 속에서 그레이에게 줄 선물을 쥐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카이의 눈이 서서히 호선을 그렸다.


“아아, 그랬지. 리아 크로노스라···.”


카이가 제논에게 말했다.


“제논 미다스 군.”

“예, 선배님.”

“그대는 리아 크로노스의 약혼자 아닌가? 인사라도 건네고 오는 게 어떤가.”


제논이 피곤한 얼굴로 두 눈을 감쌌다.


“··· 결국 이렇게 되는군.”


에코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리아에게 가려던 그레이가 돌처럼 굳었다.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케테르는 미간을 찌푸린다.


그리고 제이미는 황홀경에 빠져 이마를 짚었다.


“아아. 이게 바로 아카데미지.”


***


충격 속에서 협동 임무에 대한 설명이 시작됐다.

총괄 교관을 맡은 기사학부 교사가 단상에 서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한다.

마법으로 증폭된 목소리가 대강당에 울려 퍼진다.


[제국 북쪽 툰드라 지대에 대규모 던전이 나타났다. 현재까지는 일반적인 마수만 등장하고 있으나, 등장 개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중이다.]


[이번 토벌 작전은 최대한 많은 마수를 제거하는 것이 목표이자, 제군들의 달성 과제다.]


[만일 던전형 변칙성임이 확인되면 즉각 퇴거를···.]


설명이 귀에 들어올 리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레이에게 제논이 작게 말했다.


“해명은···.”

“딱히 필요없어.”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다.”

“알아.”

“내가 원한 약혼이 아니다.”

“그랬겠지. 귀족 간의 약혼이란 그런 거니까.”

“그저 마법 공학에 집중하는 가문 간의···.”

“··· 알았다니까. 괜찮으니 신경쓰지 마.”


낮은 그레이의 대답에 제논이 입을 닫았다.


‘전혀 괜찮아보이지 않는데.’


제논이 뻐근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미다스 백작가가 마법 공학의 개척자로 기반을 마련했다면, 크로노스 백작가는 후발 주자로서 급격히 성장하는 신진 가문이다.

두 가문은 경쟁이 아니라 화합을 선택했다.

만일 예정대로 결합에 성공한다면 제국의 마법 공학은 두 가문이 완벽하게 주도하게 된다.


문제는, 그 사이 어디에도 제논의 의사는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제논은 리아 크로노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학생회의 분홍 튤립.

아름답고 귀여운 외모에, 뛰어난 성적.

누구에게나 친절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사교적인 성격.


모두가 그녀를 좋아하지만 아카데미 입학 전부터 리아를 알았던 제논은 다르다.

그가 맨 앞자리에 앉은 리아의 분홍색 머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저 아름다운 가면 뒤에 어떤 얼굴이 숨어있는지, 제논은 안다.


한편, 에코의 머리속도 복잡하다.


‘제논이··· 리아의 약혼자.’


귀족 사이의 약혼은 사실 대단한 것이 아니다.

쉽게 성사되고, 쉽게 깨진다.

가문과 가문의 역학 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실바너스 가문이 잘 나가던 시절, 그녀도 고위 수사관 가문인 카이 제피로스와 약혼 관계였다.

물론 반역에 몰리자마자 여지없이 깨졌다.


그러나, 미다스와 크로노스는 다르다.

둘 중 한 가문이 망하기 전에는 약혼이 깨질 이유가 전혀 없다.

개인보다는 가문 어른들의 의사가 전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굉장히 높은 확률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다.


‘리아 크로노스정도 되는 여학생이 연애와 관련한 소문이 하나도 없다는 게 이상했는데. 그래서 그랬구나.’


생각해보면 제논과 리아는 가문을 떼어놓고 봐도 제법 어울리는 한쌍이다.

성격은 좋다고 말 못하겠지만, 중성적인 외모를 지닌 제논도 상당한 미남이다.

아름다움과 귀여움을 동시에 지닌 리아와 그림체가 맞는다고나 할까.


그렇다 보니, 그레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에코는 둘의 약혼 사실을 밝힌 카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어쩌면 그레이의 마음 속에서 리아 크로노스의 그림자가 지워질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구보다 설명을 열심히 들어야 할 전략가, 제이미는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었다.


‘짜릿해.’


예상하지 못한 삼각 관계.


‘아니야. 최소 오각 관계.’


그레이 케이든, 에코 실바너스, 카이 제피로스, 제논 미다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리아 크로노스까지.


‘협동 임무 따위. 케테르가 어떻게든 해낼 거야.’


마지막으로 케테르는 자고 있었다.


***


그 날 저녁, 같은 방에 들어온 그레이와 제논 사이에는 서먹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레이는 침대에 누워있고, 제논은 매일 빼놓지 않던 실험도 하지 않고 책상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좋은 사이는 아니더라도 간간히 티격대고는 했다.

첫 만남보다 불편하다.


“··· 그레이.”

“······.”


제논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 네게 호감이 아닌 흥미로 접근한 것은 맞다.”

“······.”

“그래도 지금은 아카데미에서 가장 친밀한 사람으로 너를 뽑고 싶군.”

“오글거리는 소리하지 마.”

“나는 오랜 시간 독방을 써 왔다. 누구도 나와 룸메이트를 하려 하지 않더군.”

“당연하지. 매일 이상한 악취나 풍기는 데다가 싸가지도 없잖아.”


그레이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원래 이쯤 되면 제논이 재수없는 말을 던져야 한다.

그러나 제논은 답이 없었다.


불편한 마음에 그레이가 몸을 뒤척였다.


‘사실 당연한 일인걸.’


리아는 귀족이다.

그것도 가장 잘 나가는 귀족 가문의, 능력 있는 딸이다.

그녀에게 정해진 짝이 있는 것은 지구가 둥근 것만큼 당연하다.


단지 받아들이기가 힘들 뿐이다.

그리고 그녀의 약혼자가, 하필 제논 미다스라는 것이 더욱 문제다.

제논이 그와 리아의 친분을 반대했다는 점도 그렇다.


‘아니, 그게 중요한가. 누가 됐든, 리아와 나는···.’


그레이가 애써 말했다.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잠시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인연으로 말이야.”

“······.”

“예민하게 반응해서 미안하다. 조금은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빨리 정리할게.”

“... 백마디 말보다, 직접 보는 것이 낫겠지.”

“응?”

“그레이.”


제논이 무언가 결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주 금요일에는 학생회실에서 회의가 있다. 바로 내일이군.”

“··· 그런데?”

“2학년인 리아는 서기로서, 혼자 남아 회의 내용을 정리한 후 밤중에 귀가한다고··· 알고 있다.”


그레이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왜, 그걸. 내게 알려줘?”

“직접 만나봐라. 너의 유년 시절이 아닌, 아카데미 재학생인 지금의 리아 크로노스를.”


그레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쩌면 내가, 네가 리아를 만나는 걸 막았던 이유를··· 알 수도 있을 거다.”

“··· 고맙다.”


제논은 말없이 기숙사 방을 나갔다.

그는 밤새 들어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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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P 5-1. 뒷풀이 24.09.16 2 1 14쪽
29 EP 4-14. 결투 24.09.13 4 1 14쪽
28 EP 4-13. 흉수 24.09.11 7 2 13쪽
27 EP 4-12. 조사(2) 24.09.09 11 1 13쪽
26 EP 4-11. 조사(1) 24.09.08 9 1 13쪽
25 EP 4-10. 살인 사건 24.09.06 9 1 13쪽
24 EP 4-9. 기행종 파티 24.09.06 9 1 14쪽
23 EP 4-8. 임무 시작 24.09.04 10 1 14쪽
22 EP 4-7. 재회 24.09.03 13 1 13쪽
» EP 4-6.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24.09.02 13 1 12쪽
20 EP 4-5. 예상 밖의 손님 24.09.01 13 1 14쪽
19 EP 4-4. 파티 초대 24.08.31 10 1 13쪽
18 EP 4-3. 약간의 증명 24.08.30 12 1 13쪽
17 EP 4-2. 동물의 왕국 24.08.29 13 2 13쪽
16 EP 4-1. 병신 커플 24.08.28 14 1 14쪽
15 EP 3-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24.08.27 13 1 12쪽
14 EP 3-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24.08.26 9 1 12쪽
13 EP 3-3. 몰락한 가문의 영애(1) 24.08.26 14 1 11쪽
12 EP 3-2. 편입생 24.08.25 17 1 13쪽
11 EP 3-1. 인연과 재회 24.08.24 21 1 13쪽
10 EP 2-4.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24.08.23 15 1 12쪽
9 EP 2-3. 4년이 지나고 24.08.22 21 1 12쪽
8 EP 2-2. 입단(2) 24.08.22 18 2 13쪽
7 EP 2-1. 입단(1) 24.08.21 18 2 12쪽
6 EP 1-6. 상실 24.08.20 18 1 12쪽
5 EP 1-5. 구출 24.08.19 20 1 12쪽
4 EP 1-4. 변칙성 24.08.19 21 1 11쪽
3 EP 1-3. 인연의 끝 24.08.18 31 1 14쪽
2 EP 1-2. 첫사랑 24.08.17 28 1 11쪽
1 EP 1-1. 퇴역 기사의 양자 +1 24.08.16 3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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