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님을 위한 순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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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수
그림/삽화
AI
작품등록일 :
2024.08.16 00:11
최근연재일 :
2024.09.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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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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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3-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DUMMY

1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교실에서는 이론 수업이 이루어졌다.

공부는 어렵지 않았다.

판서는 볼 수 없었지만 수업은 들을 수 있었고, 손으로 종이를 만지며 필기도 할 수 있었다.


수업 내용은 다양했다.

많은 교사들이 번갈아 들어오며 대륙의 정치, 사회, 문화, 역사, 경제를 가르쳤다.

마법과 변칙성, 변칙 개체에 대한 수업도 있었다.


물론 기사 수업이 가장 비중이 컸다.

기사도를 비롯해 기본적인 무기술은 물론, 전략과 전술, 용인술 등 기사로서 갖추어야 할 폭넓은 지식을 다뤘다.


학년이 올라간다 해서 과목이 바뀌지는 않는다.

더욱 학문적 깊이가 깊어지며, 실습 비율이 높아질 뿐.


아카데미에 잠입-편입한지 일주일이 된 금요일 저녁, 그레이는 교재를 덮으며 중얼거렸다.


“이래도 되나 몰라.”


단장이 그를 기사학부에 넣은 이유를 알겠다.

대부분의 과목이 놀라울 정도로 쉽다.


2학년이 탐독해야 하는 교재가 총 스무 권이다.

이미 모든 책을 훑어봤으며, 오늘로 다섯 권을 모두 암기했다.


다 아는 내용이다.

아는 것을 넘어, 체화한지 오래다.

특임단에서 담당한 현장 임무가 50개.

이제는 그만의 이론을 수립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변칙성은 언제,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다.

특임단원은 어느 나라든 잠입해 녹아들 수 있어야 한다.

대륙 정세 등의 교양도 필수다.

변칙성과 관련한 지식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당장은 몇 개만 신경쓰면 되겠는데.”


가령, 무기술이나 기초 마법 같은 것들.

이론은 빠삭하지만 각 잡고 익혀본 적은 없다.

그래도 어떻게든 될 것이다.


“당장은 에테르 운용 쪽이 문제인데···.”


가장 고민되는 부분이다.

지금은 학기 초인 4월.

다음 달부터는 본격적인 실습이 시작된다.


그는 현재 기사학부의 ‘에너지 트레이닝’ 학과에 소속되어 있다.

말 그대로 다양한 에너지-즉, 에테르를 수련하고 전투에 적용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첫 실습은 각자의 에테르 운용 수준을 증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화륵.


손 위로 옅은 유백색 플레임이 피어올랐다.

다른 기사학부 동급생들에 비하면 10분의 1도 안 되는, 미약한 기운이다.


기사, 격투가와 같은 육체파는 에테르 중 기(氣)를 주로 운용한다.

즉, 그레이의 플레임은 케이든의 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이 떠오른다.


‘엄밀히 말해, 기운의 씨앗이지.’

‘내 기운을 바탕으로 얼마나 성장하는 지는 네 손에 달려있다.’


“본의 아니게 불효를 저질렀어.”


그레이는 그 이후로 기를 수련한 적이 없다.

그럴 필요가 없었고, 방법도 몰랐기 때문이다.

케이든이 전해준 기운의 씨앗 그대로 남아있다.


“B급 이상을 만난 적이 없으니까.”


그는 철저한 테크니션으로, 초감각과 그래플링 실력으로도 대부분의 변칙성에 대응할 수 있었다.

초임 단원인 그레이가 담당한 개체는 모두 하위 등급이었다.


B급 이상은 특임단원 중에서도 소수의 강력한 인원만 담당한다.

단 하나의 A급 개체가 작은 왕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적도 있다.


언젠가는 그레이도 상위 등급의 변칙 개체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때가 됐다.

초감각은 초감각이고, 슬슬 기를 본격적으로 수련해야 한다.


철컥.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기숙사 방문을 잠궜다.


제논은 아마 공용 실험실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그와는 몇 번 시덥지않은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다.

도움을 주기는 커녕, 속만 박박 긁는 데다가 얼굴도 보기 힘든 룸메이트다.


“오히려 좋지.”


톡 - 톡톡 - 톡, 톡 -


품 속에서 주먹 반만한 수정구를 꺼내 묘한 박자로 두드렸다.

희미한 빛과 함께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레이가 낮게 말했다.


“단원 G, 보고합니다.”

[ - 상황은.]

“반경 300m 내, 도청 없습니다.”

[저녁이라, 보고가 늦었구나.]


단장의 목소리가 반가울 줄은 몰랐다.


[특이사항?]

“아직은 없습니다. 아카데미에 성공적으로 잠입··· 편입했습니다.”

[불편한 점은 없나?]

“··· 모든 게 불편합니다만.”

[후후. 귀족 나부랭이들이 다 그렇지. 게다가 철부지들이니, 짐작이 간다.]


단장이 낮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했다.


[공부는 할 만 한가?]

“생각보다 적성에 맞습니다. 이번 쪽지 시험에서 2등 했습니다.”

[잘 했다. 친구는 만들었고?]

“자꾸 학부모같은 질문을.”

[아카데미에 잘 녹아들 수록 훌륭히 임무를 수행한다는 뜻이다.]

“음, 뭐.”


그레이가 볼을 긁었다.

반갑지 않은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 차례 교류한 학생은 있습니다.”

[누구지?]

“제논 미다스, 에코 실바너스.”

[미다스 백작가라. 일단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라. 힘이 있는 곳이다. ‘제논’이라면 아마 직계일 것이다.]

“소문대로 잘 사는 집 같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너와 처음부터 교류할 정도니 정신이 나간 놈은 맞을 거다.]


잊고 있었다.

단장도 속 긁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에코 실바너스는··· 별 일 없나?]

“다리를 절더군요.”

[그 쪽은 네가 알아서 해라. 감정 조절 잘하고.]

“걱정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알았다. 당장은 적응부터 하도록. 적극적인 탐색은 시기상조다. 장기 임무라는 점을 망각하지 마라. 특이점, 변칙성에 민감해지도록. 그럼···.]


통신을 끊으려는 단장에게 그레이가 급하게 말했다.


“단장님. 여쭤볼 게 있습니다.”

[음? 뭐지?]

“쓸 만한 운기법, 없어요?”

[운기법이라. 갑자기 왜? 현장 뛸 때도 필요 없다고 했잖아.]

“저 에너지 트레이닝 학과입니다.”

[아.]


잠깐 침묵하던 단장이 말했다.


[곧 실습이군.]

“예. 알고 계셨습니까?”

[너무 옛날 기억이라 치워뒀다. 그래, 2학년의 5월은 그랬지.]

“··· 그 말씀은?”


단장은 완벽에 가까운 기억력을 갖고 있다.


‘설마. 단장이 공인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숨길 일도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아니다. 조만간 네 편으로···.]

“잠깐.”


그레이의 초감각이 급격히 예민해진다.

육감이 움직인다.


[무슨 일이지?]

“···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 - .]


단장은 일말의 고민 없이 통신을 종료했다.

그레이는 수정구를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별 일 아니라면 식도로, 큰 일이라면 항문으로 꺼내야 한다.

가장 끔찍한 순간 중 하나다.


조심스러운, 불규칙한 발소리가 들린다.


“하.”


그레이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쓸 데없는 수고를 했군.”


철컥.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벌컥 열었다.


“또 뭔데?”

“··· 그레이.”


에코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


에코가 제논에게 받은 금화 주머니는,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둬도 될 만큼 충분했다.

어쩌면 당장 아카데미를 그만 두고 아버지, 언니와 함께 작은 집을 구해 사는 것이 맞을지도 몰랐다.

세 가족이 평생 밥 굶을 일은 없을 정도였다.


“- 당장 눈 앞에서 사라져라.”


제논의 차가운 말에 에코가 고개를 숙였다.


“알··· 았어.”


에코는 품 속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내 실험실의 책상 위에 올려뒀다.


에코가 나간 뒤, 제논은 책상 위의 주머니를 열어봤다.


정확히 교재 값 만큼만 사라져 있었다.

그가 입술을 말아올렸다.


“고귀함은 잊지 않았다는 말인가. 조금은 인정해주지.”


그는 다시 실험 도구로 눈을 돌렸다.


***


“병신 지나간다.”

“열심히도 사는군.”

“나였으면 즉시 자살했다. 더러운 반역자년.”


학생들의 비웃음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에코는 그럴 수록 허리를 더 꼿꼿이 폈다.

다리를 절뚝여도 마음은 꺾이지 않는다.


··· 남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원래대로라면 가문의 식솔과 사용인들까지 목이 잘려 완벽하게 멸문했어야 할 실바너스 가문은, 운좋게나마 남작의 지위를 유지하게 됐다.

반역 혐의를 뒤집어 쓰자마자 지금까지 축적해 온 막대한 부를 황실과 고위 귀족들에게 뿌리며 선처를 호소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아버지가 미쳐버린 것에 대한 동정론이 사교계 내에서 생겨서기도 했다.


가장 큰 이유는 철저한 조사에도 변칙 개체를 다루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동자는 미쳐버렸고, 관계자들은 모두 죽었으며 그의 두 딸들은 진실을 알고 있기에 너무 어렸다.


어쩌면 이렇게 살려두는 것이 더욱 불행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도 에코는 살았다.

입학 직전에 초상 능력을 각성하며 가치를 입증하고, 예정대로 입학했다.


부러진 다리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장애가 남았지만 계속 걸었으며, 반역자의 자식이라고 멸시를 당했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에코가 수정구를 들고 속삭였다.


“- 언니.”

[에코. 오늘 출근하지?]

“조금 있으면 실습이 시작돼. 조금이라도 대비를 하지 않으면···.”

[지금 그게 중요해? 너 안 오면 나까지 해고한다고 실장 새끼가 난리야.]


에코가 입술을 깨물었다.


“··· 어차피 나같은 애는 없어도 되잖아. 내가, 내가.”

[네가 뭐?]

“몸을 파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음식을 나르고 술만 따르는···.”

[에코 실바너스!]


언니의 찢어지지는 목소리가 수정구에서 울려퍼졌다.

에코는 혹여 누가 들을까, 품 속에 수정구를 빠르게 숨겼다.


[너까지 내가 더러운 일을 한다고 멸시하는 거야?]

“아니야, 아니야. 아닌 거 알잖아.”

[너, 너 하나 공부시키겠다고. 혼자 아버지까지 모셔가면서 일 하는데. 어떻게 네가···!]

“알았어. 오늘··· 갈게.”

[··· 하아. 이따 봐.]


통신이 끊겼다.


늦은 저녁, 에코는 아무도 없는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무릎에 얼굴을 박았다.


반역 혐의를 받고 강도 높은 조사가 진행된 후에야 알게 됐다.

그녀와 언니는 배 다른 자매다.


에코는 첩의 자식이다.

어린 시절 당했던 묘한 차별과, 변칙 개체에게 당하고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니었다.


원망할 곳은 없었다.

의지할 혈육은 언니 뿐이었고, 아버지는 미쳐버렸다.


언니의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해가 됐다.

몰락한 귀족의 딸이 일할 곳은 술집 밖에 없었고, 평생을 무시해 온 시정잡배에게 몸을 팔아야 했다.


언니는 혼자서 바보가 된 아버지를 보필했다.

몸을 팔아 에코의 학비를 보탰다.

좌우간 그들이 살아날 구석은 에코가 아카데미를 성공적으로 졸업하는 수밖에 없었다.


에코도 일과가 끝난 날에는 술집에 나가 술과 음식을 날랐다.

푼돈이라도 받아 언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했다.


술집에는 특이 취향인 사람들이 많았다.

귀족 출신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열 일곱 소녀.

에코의 장애는 오히려 그들의 시선을 끌었다.


손님들의 말과 행동은 조금씩 과감해졌다.

술집 실장의 눈치를 보느라 결정적인 선을 넘지는 못하지만, 실장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바꿔먹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래도, 방법이 없잖아.”


얼굴을 묻은 무릎 자락이 서서히 젖어간다.

에코의 어깨가 잠시 동안 들썩였다.


“그레이스···.”


그녀는 오늘도 아카데미의 성문을 나섰다.


***


“······.”

“이성의 기숙사에 출입하는 건 교칙 위반이다.”


그레이가 끓어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수정구가 위를 넘어 대장으로 내려가기 전에, 빨리 개워내고 싶은 생각 뿐이다.


“할 말 없으면 가···.”

“··· 도와줘.”

“뭐?”

“날 도와줘, 그레이.”


울음 섞인 목소리에 그레이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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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EP 5-1. 뒷풀이 24.09.16 2 1 14쪽
29 EP 4-14. 결투 24.09.13 4 1 14쪽
28 EP 4-13. 흉수 24.09.11 7 2 13쪽
27 EP 4-12. 조사(2) 24.09.09 11 1 13쪽
26 EP 4-11. 조사(1) 24.09.08 10 1 13쪽
25 EP 4-10. 살인 사건 24.09.06 9 1 13쪽
24 EP 4-9. 기행종 파티 24.09.06 9 1 14쪽
23 EP 4-8. 임무 시작 24.09.04 10 1 14쪽
22 EP 4-7. 재회 24.09.03 13 1 13쪽
21 EP 4-6. 제논이 감추고 있던 것 24.09.02 13 1 12쪽
20 EP 4-5. 예상 밖의 손님 24.09.01 13 1 14쪽
19 EP 4-4. 파티 초대 24.08.31 10 1 13쪽
18 EP 4-3. 약간의 증명 24.08.30 12 1 13쪽
17 EP 4-2. 동물의 왕국 24.08.29 13 2 13쪽
16 EP 4-1. 병신 커플 24.08.28 14 1 14쪽
15 EP 3-5. 몰락한 가문의 영애(3) 24.08.27 13 1 12쪽
» EP 3-4. 몰락한 가문의 영애(2) 24.08.26 10 1 12쪽
13 EP 3-3. 몰락한 가문의 영애(1) 24.08.26 15 1 11쪽
12 EP 3-2. 편입생 24.08.25 17 1 13쪽
11 EP 3-1. 인연과 재회 24.08.24 21 1 13쪽
10 EP 2-4. 입학-제국 공인 아카데미 24.08.23 15 1 12쪽
9 EP 2-3. 4년이 지나고 24.08.22 21 1 12쪽
8 EP 2-2. 입단(2) 24.08.22 18 2 13쪽
7 EP 2-1. 입단(1) 24.08.21 18 2 12쪽
6 EP 1-6. 상실 24.08.20 18 1 12쪽
5 EP 1-5. 구출 24.08.19 20 1 12쪽
4 EP 1-4. 변칙성 24.08.19 21 1 11쪽
3 EP 1-3. 인연의 끝 24.08.18 31 1 14쪽
2 EP 1-2. 첫사랑 24.08.17 28 1 11쪽
1 EP 1-1. 퇴역 기사의 양자 +1 24.08.16 3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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