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신비로운 세계 2
< 63화 >
-휘잉 바스락
멀리서 바람 소리와 함께 파란색의 벼가 물결을 일으키며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어디지?”
주변의 엄청난 풍경에 압도되어 모두 말문을 상실했을 적에 드디어 정신을 차린 독고혈이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공유식과 강충재는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낡은 석판 너머에 이런 세계가 있으리라곤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고, 이런 곳에서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도 막막했다. 다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한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열심히 주변을 돌아봤지만, 앞과 뒤가 모두 똑같은 황량한 파란색의 세계였다.
-저벅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낡은 표지판이 하나 있었다.
낡은 표지판에는 여기저기 거미줄이 걸려있었는데,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 듯, 아니면 개의치 않는 듯 천천히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자네들은 누구지?”
“···어?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여긴 어디인가요?”
분명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할아버지가 말을 걸자 독고혈이 앞으로 나가 말했다.
“이곳은···, 내가 사는 세계지.”
“어, 이곳 이름이 뭔가요?”
“외지인인가 보군. 그러면 여기서 얘기할 게 아니라···, 어때? 우리 집으로 가서 잠시 쉬겠나?”
할아버지는 말하고선,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앞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셋은 할아버지의 일방통행에 당황스러웠지만 이곳에서 마냥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뭔가를 파악하기도 너무 낯선 장소라 할아버지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나이에 맞지 않는 신속한 걸음걸이를 하며 앞장서고 있었는데, 멀어졌다고 생각하면 가까운 곳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먼 곳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뒤따라오는 이들을 배려하는 것인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혼동되어 이상한 생각이 들 때쯤 한 저택이 나왔다.
저택은 푸른 유약을 발라 만든 청기와로 지붕을 이긴 호화롭고 대궐 같은 집이었는데, 지붕 위에는 그림같이 커다란 박이 넝쿨째 걸려있었고 주변에는 만개한 꽃과 풀들이 조화롭게 혼합된 정원이 있었다.
꽃과 풀들은 화려하게 피어나 보라색과 금색, 푸른색의 이파리들이 이슬을 맞아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고, 곳곳에 탐스러운 열매를 품고 있었다.
한쪽에는 커다란 새장도 있었다. 파랑새가 그 안에서 뭔가를 쪼아 먹으며, 손님을 맞이하듯이 이따금 고개를 꺾어 갸우뚱하게 주변을 쳐다봤다.
-끼이익
방문을 열자 번듯한 외관과는 다르게 녹이 슨 소리가 났고, 할아버지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이리 들어오게나.”
“네, 실례합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주방을 겸하고 있는 거실로 들어서자, 정원이 한눈에 내다보였고 그 와중에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낡은 오두막도 하나 보였다.
할아버지가 지정해 주는 대로 탁자의 맞은편에 앉은 세 명은 곧 그가 내오는 차를 받아들였다.
-달각
차는 묘한 향이 나고 있었는데, 이곳으로 들어오는 내내 붕 떠 있던 마음을 진정시키듯 가라앉혀 주었다.
독고혈과 강충재는 목이 말랐던지 냉큼 차를 한 모금 받아 마시고는 차분히 주변을 살펴봤다.
옆에는 조그마한 소나무 분재들과 장식장들이 있었는데, 갖가지 수집품과 희귀한 돌, 그리고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는 파란색과 금색의 화려한 등딱지를 가진 거북이 한 마리가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벽에 있는 그림에는 거대한 나뭇가지가 모든 것을 아우르듯 쭉 펼쳐져 있었고, 그 틈 사이에 희한한 포즈를 한 다양한 사람들, 화가 난 도깨비와 뛰어가는 호랑이, 동아줄과 두레박 같은 것들이 있었고 하늘 한쪽 위에는 먹구름이, 다른 쪽에는 뭔가를 물고 가는 제비가 있었다.
“자네들은 정해진 순리를 따르는 삶을 어떻게 생각하나?”
“······.”
갑자기 할아버지가 꺼내든 철학적 질문에 모두 의아한 표정을 한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순리가 뭐죠?”
할아버지가 건넨 말이 다소 어려웠던 강충재가 물었다.
“뭐, 이를테면 생긴 대로 산다. 그런 거지.”
“아···, 관상은 과학이다. 이런 말씀이세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닐세.”
강충재의 대답이 탐탁지 않았는지, 할아버지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한 평생을 안내자로 살았지. 태어날 때부터 이 모습 그대로 할아버지였어. 하지만 살면서 그런 것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하지? 내 젊은 시절은 어디로 갔으며, 대체 누가 이런 걸 정했느냔 말이야?!”
이곳이 어디인지 물어보며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던 세 명은 갑자기 훅 들어온 할아버지의 난데없는 하소연에 난감해졌다.
공유식은 이 와중에도 날름 ‘여기가 대체 어딘가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공감 능력 제로인 그도 차마 그런 말을 할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서 조용히 있었다.
그걸 본 독고혈은 여기서 정상적으로 대화할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해서 할아버지한테 조심히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하···, 그래. 많은 일이 있었지. 어디 한 번 들어보게나.”
할아버지는 자신이 고난에 빠지게 된 그동안의 긴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김 씨가 강가를 걸어가고 있었다네. 그곳은 물이 갑자기 불어나기로 유명한 곳이라 돌다리를 건널 때면 항상 조심해야 하는 곳이었지. 아니나 다를까. 그때 한 남자가 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외쳤다네. 김 씨는 이에 머뭇거리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그를 구해주었지.”
독고혈은 할아버지의 말에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에서 구해진 박 씨는 고맙다는 말 대신, 자신의 봇짐을 보지 못 했냐고 물었지. 사실 김 씨는 꼼꼼한 성격이라 봇짐도 잊지 않고 챙겨서 그에게 건넸다네. 하지만 그 안에는 엽전 80냥밖에는 들어있지 않았지. 박 씨는 자신의 봇짐 안에는 금덩이와 은덩이가 있었다며 어서 자신의 봇짐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쳤다네.”
할아버지가 꺼낸 얘기는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주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 같은, 속담에도 등장하는 사연이었다.
독고혈과 공유식은 대충 짐작이 가는 내용이었지만, 강충재는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거든. 결국 둘은 시비 끝에 관아로 가게 되었지. 사또가 둘의 분쟁을 보고 명쾌한 답을 내려주기만 하면 해결되는 일이었다네.”
셋은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면 분명 사또가 명쾌하게 판정했을 테고, 사람을 구해준 김 씨가 곤란을 겪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또는 박 씨에게, ‘너의 봇짐에 금덩이와 은덩이가 있었다는 것이 사실인가?’라고 물었고, 박 씨는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지. 평소대로라면 사또는, ‘그렇다면 이건 너의 봇짐이 아니니 김 씨에게 돌려주고, 너는 강에 나가 너의 봇짐을 강에서 찾아라.’라고 말했을 거야.”
할아버지는 다음에 내린 판결 내용이 불만족스러웠던 듯, 쩝- 하며 입맛을 다셨다.
이런 얘기를 처음 듣는 강충재는 할아버지가 예시로 들었던 사또의 해법이 나름 명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또는 금덩이와 은덩이가 있는 곳을 말할 때까지 김 씨를 매우 치라고 명령했다네! 구경하던 사람들은 평소와 다른 사또의 명령에 모두 어리둥절했지만, 사또가 잘못 생각했는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은 매우 분분했어.”
갑자기 미궁으로 빠지려는 얘기에 듣던 세 명은 모두 어리둥절했다. 알고 있던 것과 다르게 얘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김 씨가 봇짐을 가로채지 않았다는 확신도 없고, 도와준 것은 고맙지만 그렇다고 남의 봇짐을 가져가도 되는 건 아니니, 뭐 그렇지 않은가? 라는 의견들이 생겨난 거야.”
사실 얘기의 서문만 들어서는 그 봇짐이 교체되었는지,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 정확한 증거는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런 의혹이 들기 시작하니, 결국 거짓말한 사람을 알아내려면 더 많은 증거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형리청에 가서 곤장을 맞고 혼쭐이 난 김 씨는 아무리 고문을 당해도 금덩이와 은덩이의 위치를 불지 않았다네. 그렇게 구금되어서 처량한 신세가 된 김 씨에게 한 밤중에 박 씨가 몰래 찾아왔지. 자네의 입이 상당히 무거운 것에 감동했다며, 혹시 부자가 되고 싶냐고 물었어.”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갑자기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자 세 명은 아리송했다.
“김 씨는 박 씨의 말이 어이가 없었지만, 곤장도 맞았고 자신의 신세도 처량했던지라 체념한 채로 그렇다고 대답했다네. 그러자 박 씨는 봇짐을 잃어버린 일은 묻어둘 테니, 자신이 꺼내주면 같이 한탕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기 시작했어.”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박 씨는 자신이 좋은 곳을 알아놨는데, 잘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고 꼬드겼다네. 그 말에 김 씨는 심통이 난건지, 아니면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던 건지, 큰 소리로 ‘부자가 되면 뭐가 좋다는 거요?’라고 외쳤지. 하도 큰 소리라, 옆 칸에서 자고 있던 다른 죄인한테도 들릴 정도였지.”
김 씨가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이 맞는다면 박 씨는 원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은데, 그런 놈이 다가와서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니 반감을 품을 만도 한 일이었다.
“그러자 옆 칸의 죄인이 그 말을 듣고 너스레를 떨며 말하길, 부자가 되면 빼어난 기생을 만나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으며 남한테 허리 굽히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고 했지. 또한 이런 곳에 갇혀있는 것도 돈이면 다 해결된다고 읊어댔다네.”
죄인이 말한 세상 이치가 딱히 틀려 보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김 씨와 박 씨는 도둑질을 공모하려는 상황이었으니 듣지 않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김 씨는 점점 박 씨의 제안이 유혹적으로 들리기 시작했지. 하물며 자신을 이곳에서 빼주겠다고도 했으니 더욱 거절할 이유가 없어 보이기도 했지. 그렇게 김 씨는 박 씨의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네.”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어서는 김 씨가 너무 쉽게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는 느낌이 들었지만, 애초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모를 일이긴 했다.
“그러자 박 씨가 무슨 수를 썼는지 사또는 김 씨를 풀어줬고 그는 관아에서 나올 수 있었지. 물론, 박 씨는 자기와 일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다시 감옥에 들어가게 될 거라고 엄포를 놨다네. 이제 자의든 타의든 김 씨는 박 씨와 같이 범죄를 도모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
처음에는 사람을 구해주던 선한 행동을 했던 김 씨였는데, 그로 인해 인생이 이상하게 꼬여가는 것 같아 세 명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박 씨가 제안한 일은 곡식을 훔치는 일이었다네. 아랫마을에는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우애가 깊어 수확하고 나면 자신보다 형제의 사정을 먼저 생각해서 몰래 상대방의 창고로 자기 곡식을 실어다 놓곤 했지. 그걸 둘이 몰래 슬쩍 하자는 얘기였어.”
할아버지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박 씨의 말대로 의좋은 형제의 곡식을 훔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네. 김 씨와 박 씨가 몰래 한쪽의 곡식을 훔치면, 다른 형제가 자기 곡식을 덜어내 빈 창고로 곡식을 옮겨놨으니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지.”
형제의 우애를 자신의 탐욕으로 이용하는 박 씨의 용의주도함에 듣던 세 명은 혀를 내둘렀다.
“곡식은 무게가 많이 나가서 혼자 옮기기는 힘이 들었지만, 둘이 같이 하니 손발도 척척 맞고 많은 양을 옮길 수 있었지. 그렇게 둘은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르고 한참이나 곡식을 훔쳤다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두 명은 이미 도덕과 양심은 상실한 지 오래인 듯 탐욕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두 명은 곡식이 자꾸 없어지자 이상함을 눈치챈 의좋은 형제와 딱 마주치게 되었지. 화가 난 형제는 둘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기 시작했다네.”
드디어 죗값을 받게 되는 건가 하고 세 명은 다음에 나올 말을 기대했다.
“형제가 위협적으로 나오자, 궁지에 몰린 박 씨는 그들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지. 곡식은 이미 다 써버려서 없지만,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으니 그대로 해보라는 거였다네.”
하지만 세 명의 기대와는 다르게,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또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곡식이 이미 없다면 되돌릴 방법은 없고, 박 씨의 제안에 따르자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니 형제는 그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지. 박 씨가 제안한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네.”
평화롭던 신비로운 세계가 첩첩산중의 인간세계와 닮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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