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귀신과 숨바꼭질 4
< 103화 >
-달그락 탁
그동안 세 명이 겪은 일들이 나경석과 관련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이곳을 벗어날 단서도 그의 얘기 속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마리를 찾기 위해 세 명은 나경석의 말에 좀 더 집중했다.
“곧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고, 그녀와 사귄 지 3년이 되던 때였죠.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녀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저는 결국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어요. 그러나 경찰은 성인의 가출은 실종 신고가 되지 않는다면서 절 도와주지 않았어요.”
검고 깊은 구멍이 뚫려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나경석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 턱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제가 그녀를 찾아 헤매고 있던 어느 날 다시 그녀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자신이 묶고 있는 모텔로 찾아와 달라는 내용이었죠. 그녀는 그것 말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그녀에게 무슨 나쁜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어요! 전 모든 일을 제치고 그녀에게 달려갔어요!”
내용은 점점 심상찮게 변하고 있었고, 나경석은 맹목적인 사랑에 빠져 주변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전 어렵게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전 너무도 행복했죠! 그녀가 제게 다시 사귀자고 말을 해왔거든요!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어요. 그녀는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했어요.”
얘기를 풀어나가던 나경석의 표정이 급속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모텔에는 칼에 찔린 시체가 한 구 있었어요. 시체는 그녀를 쫓아다니던 스토커였고, 몸싸움 끝에 벌어진 사고라고 했어요. 물론 전 그녀가 설명하지 않아도 사실을 알 수 있었어요! 지금까지 벌어진 나쁜 사건들은 모두 다 희수가 벌인 짓이라는 것을요! 가냘픈 몸의 그녀가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으니까요!”
비극적인 사건의 탓을 모두 희수라는 남자에게 돌린 채, 나경석은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전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그녀와 함께 숲속 깊은 곳으로 향했어요. 숲속에는 이미 누군가가 파 놓은 것 같은 아주 깊은 구덩이가 있었어요. 그곳에 시체를 던져 넣는다면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그런 장소였죠. 전 망설이지 않고 시체를 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었어요. 하지만 다음 순간 저도 떠밀려서 그곳으로 떨어지게 되었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를 그의 얘기는 절망의 나락으로 향해가고 있었다.
“전 끝을 모르는 구덩이 속으로 시체와 함께 굴러떨어졌어요! 왜냐고 이유를 묻는 저한테 그녀는 슬픈 말을 꺼내기 시작했어요. 저와 쭉 함께하고 싶었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은 저뿐이었지만, 이제는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고요. 전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나경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울부짖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왜! 왜일까요?! 대체 그 이유가 뭐였을까요?!”
그리고 다시 나경석이 한 맺힌 듯 울며 거칠게 말하는 순간, 그의 몸집이 순간적으로 커지며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청명했던 하늘에는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고, 곧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그대로 나경석의 몸은 어둠에 지배당한 채 지금까지 전혀 본 적이 없던 다른 인물로 흑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핏빛으로 시뻘겋게 물들었고, 코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담았으며 입은 야수의 이빨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진 채로 빛나고 있었다.
“크크크킄···. 나약한 놈 같으니···!!!”
남자의 외침과 함께 주변에는 회오리바람이 치기 시작했고, 메마른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르르 쾅 쾅
순식간에 지옥에 온 것처럼 주변 풍경이 달라졌고, 폭포는 용암이 들끓는 화산처럼 분화하기 시작했다.
마치 지옥도를 보는 것 같은 모습에 모두 덜덜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나경석은 이미 다른 모습으로 변해 전의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어있었다.
“···나, 나경석 씨?!”
“그놈은 이제 없어!”
살벌하게 변해버린 주변 모습과 달라진 나경석의 모습에 불안해진 공유식이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나경석 대신에 몰골이 괴물처럼 변한 남자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신데요? 나경석 씨는 어디 갔나요?”
“난 그놈의 소꿉친구인 희수지! 그놈은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거야! 그 겁쟁이 자식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숨어버렸거든! 물론 이제 나도 그 편이 편하고 말이야!”
공유식은 뜻밖의 말에 놀랐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어렴풋이 파악할 수는 있었다.
놀랍게도 소꿉친구였던 김희수는 나경석의 몸에 자리 잡고 있었던 그의 또 다른 인격이었던 것 같았다.
“그럼, 지금까지의 나쁜 짓들은 전부 당신이 저지른 일이었나요?!”
“···나쁜 짓? 무슨 나쁜 짓?!”
공유식의 물음에 불쾌하다는 듯 김희수가 대답했다.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을 논한다는 어조였다.
“사람들 몇 명을 죽인 것 말인가?! 아하하하!! 아직도 모르겠어?”
“···네? 무슨···?”
공유식의 질문에 상대방이 무척 가소롭다는 반응을 하자, 세 명은 몹시 당황스러웠다.
눈앞에 있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도 적응하기 쉽지 않은 일인데 사건을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말을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이 자식이 내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다 이서현 혼자서 한 일이야! 난 그저 힘쓰는 일 몇 개를 도와준 것뿐이라고!”
“···이서현 씨요?”
낯선 이름이 등장했지만, 잘 생각해 보니 나경석이 사귀었던 여자 친구의 이름이 이서현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 경석이가 푹 빠져있었고, 나한테도 작업을 걸었던 여자였지! 경석이는 몰랐겠지만, 서현이는 애초에 내 모습에 반해서 작업을 걸었던 거였어! 우린 마음이 잘 맞았지! 서현이는 나랑 같이 범죄를 더 저지르고 싶어 했다고!! 아니, 사실 일을 먼저 시작한 건 서현이였지!”
희수로 변한 남자는 즐거웠던 기억을 얘기하듯 말을 꺼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밖에 나올 수가 없었어! 나경석의 의지가 너무 강했지! 원래 그놈이 본체이기도 했고, 난 그놈의 기면증이 발동할 때만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어!”
김희수가 내뱉은 말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순진한 피해자로 알고 있었던 그녀가 이 모든 악행의 주동자였다는 말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더욱이 외모로만 봐서도 김희수가 모든 일을 꾸몄다고 해도 이상해할 것이 없는 상황에 과연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의문스러웠다.
“이제 그놈 꼴을 안 보게 되어서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몰라! 저런 쓸모없는 놈 때문에 나까지 같이 죽을 수는 없지!”
“그럼, 나경석 씨는 어디 있나요? 잠깐이라도 볼 수는 없나요? 설마···, 죽은 건 아니죠?!”
김희수는 드디어 홀가분해졌다는 듯 온몸을 털어대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주변 환경은 점점 험악하게 변해만 갔고, 그가 풍기는 위압감에 산천초목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것 같았다. 두려움을 느낀 세 명은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특히 저 남자에게서 벗어나야만 했다.
“죽진 않았지만, 이제 이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했어!”
“그렇다면 한 번만 다시 나오도록 도와줄 수는 없나요?”
공유식은 회오리바람이 치고 있는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며 희수에게 제안하기 시작했다.
“왜?! 왜 그래야 하지?! 이제야 자유를 얻었는데?!”
“제가 완전한 자유를 얻게 해드릴게요! 어차피 그놈은 줏대도 없고 쓸모도 없는 놈인데 그 안에 있다가 언제 약속을 어기고 다시 튀어나올지 모르잖아요?”
“···맞아! 들어보니 자기 비관으로 가득 찬 어리석은 놈이었어!”
공유식의 말에 독고혈도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동조했다.
“네까짓 게 대체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김희수는 공유식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전 나경석이 파놓은 모든 술책을 피하고 이곳까지 왔어요! 그가 있던 곳의 그림자를 전부 파괴하기도 했죠! 전, 그를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이제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나요?!”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어차피 난 이제부터 자유라고! 네놈의 능력 따위 필요 없어!!”
김희수는 공유식의 말이 내키지 않는 듯 더욱 고함을 쳤다.
-우르르 쾅!!
그러자 갑자기 주변의 나무에 번개가 와서 꽂혔고, 번쩍이는 빛과 함께 주변에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두려운 현상에 독고혈과 강충재도 눈치를 보며 공유식이 하려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도우려고 다급히 말을 꺼냈다.
“아니죠! 나경석은 이서현과 관련된 얘기가 있다면 또다시 나오려고 할걸요?!”
“맞아! 여자에 대한 집착이 장난이 아니었어! 우리를 이곳에 붙잡아 놓고, 자기 얘기를 듣게 한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고!”
“그래! 그리고 변덕이 들끓는 놈이었지!”
다급해진 공유식의 말에 이어 독고혈과 강충재까지 합세하자, 김희수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기 시작했다.
“한 번만 다시 내보내 준다면, 다신 나오지 않게 만들어드릴게요! 어차피 한 번쯤은 다시 나온다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잖아요?”
“······.”
김희수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다가 말을 들어보니 자신의 손해가 그리 크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약속 꼭 지켜!!”
김희수는 공유식을 검지 손가락으로 여러 번 지칭해서 가리키며, 마치 일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시 불합리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을 각오하라는 듯 엄포를 놨다.
그리고 눈을 감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김희수는 이내 잠잠해졌다.
그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초조하게 기다리니, 어느새 김희수는 어딘가 바람이 잔뜩 빠져서 볼품없이 작아진 것 같은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나경석 씨?”
“날···, 다시 만나고 싶어 했다고? 왜···? 난 이제 다시는 밖에 나오지 않을 거야···.”
다시 밖으로 나온 나경석에게 공유식이 말을 걸어 보았지만, 그는 생기를 잃은 모습으로 고개를 저으며 어떤 말도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희수 말이 맞아···. 흑···, 서현이는 나 같은 걸 원한 게 아니었어.”
“그럼, 제가 서현 씨가 원하는 사람이 되게 해드릴게요!”
“···뭐?”
공유식의 말에 너무 놀란 나경석은 눈물이 맺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차피 두 분은 한사람이잖아요! 그렇다면 둘이 합쳐져서 하나가 되면, 서현 씨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진짜? 하지만, 어떻게?”
나경석은 공유식의 말이 미덥지 않으면서도 ‘혹시 그게 가능할지도 몰라!’ 같은 희망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지금은 경석 씨가 본체지만, 경석 씨가 희수 씨한테로 전부 흡수되면 되겠죠!”
“그···, 그렇게 하면 다시 사랑받을 수 있어?”
“서현 씨가 원하는 사람이 될 테니까···, 아마도 그렇겠죠.”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나경석은 믿을 수 없는 행운을 잡았다는 듯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공유식을 쳐다봤다. 그는 서현 씨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자신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것 같았다.
사실 흡수된다는 말은 나머지 한 쪽이 영영 사라지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냥, 제 손을 잡으면 돼요!”
“이···, 이렇게?”
그리고 나경석이 내민 손을 공유식이 잡자, 작은 진동이 일기 시작하더니 그 사이로 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커져 눈이 부실 정도가 되었고 곧 너무 환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음 순간ㅡ
엄숙하던 공기와 이 세계 같지 않던 영역들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더니 공유식과 독고혈, 강충재는 여러 가지 기계로 잔뜩 둘러싸인 병원의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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