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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우우우른
작품등록일 :
2024.06.10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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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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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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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DUMMY

-이전과 말이 다르잖나?

아무런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숲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숲을 가득 채운 수풀이 본연의 색을 잊어버린 것처럼 새까맣게 변해버린 숲은 달빛조차 닿지 않아 깊은 우울감을 선사한다. 바람마저 거부한 숲은 그 어떤 생명의 꿈틀거림을 허락하지 않아 나무들이 대리석처럼 굳어버린 것 같았다. 모든 감각이 시들어 버릴 정도로 정적인 고요는 감각이 머물던 자리에 공포감을 심어 넣는다.

그 어둠 속에서 유일한 줄 알았던 목소리에 화답하듯 괴기스러운 목소리가 아무런 동태도 없는 고요 속을 가르고 지나갔다.

-축사를 처리한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섞인 듯이 들리는 그 목소리는 도저히 남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 더불어 정녕 사람의 것이 확실한지 분간할 수 없었다. 더구나 서로 다른 목소리들은 서로 불협화음을 이루어 들을 때마다 끔찍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다.

-어이가 없군. 오히려 급한 건 그쪽이 아닌가? 그리고···.

사람인지 모를 것과 대화하는 남자가 말하다 멈추고 뜸을 들이다 다시 말을 꺼낸다.

-감히 하찮은 것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석연치 않군.

그 조롱과 비하가 섞인 듯한 말에 사람인지 모를 것이 움직이며 정적을 깬다.

-워~ 진정해. 그렇다고 해서 너에게 나무라는 것은 아니야. 너무 화가 날 뻔했지만, 그 역겨운 상판을 직접 마주하는 것보다 나은 일이지. 엄! 아무렴~ 당연한 일이지.

남성이 더욱 조롱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것이 점점 그 남성에게 가까워진다.

-거기까지. 얼른 나아야지. 응?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그 말에 그것은 발길을 멈추었는지 다시 숲이 고요하다.

-그래~ 그래야지. 뭐 이번 일은 너희 마음대로 해 대신-

희롱하고 조롱하는 남성의 장난스러운 목소리는 다시 진지해졌다.

-새로운 축사는 구해야 한다.


-어디 축제는 잘 즐기고 있나?

술독에 빠진 채 여전히 술잔을 쥐고 있는 후안이 칼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한다. 칼은 최대한 마을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고자 축제를 즐기고 있는 무리가 보이지 않는 돌담 뒤에 숨어 있었으나 후안에게 들켜버린다.

-하하 내가 자네를 찾기 위해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아나?

칼은 자신을 찾으러 다녔다는 후안을 보며 어젯밤 아작을 낸 침대 같은 가구가 떠 올랐다.

-일단 한잔하겠나?

후안은 칼처럼 돌담에 등을 기대어 앉아 허리춤에 찬 술병을, 칼을 향해 흔들어 보인다. 그리고 술잔을 칼에게 내민다.

술을 마셔보지 못한 칼은 자연스레 내미는 잔을 건네받고 잔 속을 멍하니 바라본다. 활활 타오르는 불기둥이 뻗치지 않는 곳이라서 그런지 잔 속은 밤이 내려앉은 듯 어두컴컴하다.

후안은 잔에 술을 따른다. 칼은 술병을 한번 쳐다보고 후안의 얼굴을 본다. 배가 튀어나온 탓에 칼을 향해 몸을 돌리는 것조차 힘이 든 후안은 입을 다물고 숨을 참으며 칼의 잔에 술을 따르고 다시 고쳐 앉으며 날숨을 뱉었다. 그리고 후안은 목을 뒤로 젖히며 하늘을 바라본다.

칼은 후안을 바라보다 다시 술잔을 본다. 밤이 내려앉았던 그곳엔 별들이 피어났다. 별들은 빛을 반짝이며 술 위에 차분히 떠있다. 가끔 바람이 일 때면 잠시 흔들릴 뿐 그 빛을 잃거나 어디로 사라지지 않았다.

-아 뭐해 마시지 않구.

후안이 마시지 않고 술잔만 바라보는 칼을 향해 따지듯 말했다.

-뭐야? 혹시 술을 마셔본 적이 없나?

-네.

칼은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후안은 칼의 얼굴을 곁눈질하며 이리저리 둘러보다 말했다.

-일주일 밤낮 내리 마셔도 멀쩡할 거 같이 생겨놓고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니.

후안은 칼을 신기하게 쳐다본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보며 말한다.

-어려운 거 없어. 그냥 쭉 들이키게.

칼은 후안의 말대로 쭉 들이켰다. 처음 술이 입으로 들어올 때 그 쓴맛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물이 흐르듯 술은 칼의 목을 통해 들어갔다. 칼은 쉬이 지워지지 않은 술의 흔적에 미간을 약간 찡그린다.

그 찰나를 잡은 후안은 웃으며 말한다.

-하하하. 표정을 보아하니 술을 처음 먹어본다는 것이 사실이구만. 어때 한 잔 더 하겠나?

칼의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사양하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그럼, 이것들은 아까우니 내가 마셔 버려야겠군.

후안은 즐거운 기분을 얼굴에 드러내며 아쉬워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호리병의 입구를 바로 자신의 입에 갖다대고 시원하게 들이마셨다.

-크흐~ 술맛 좋구먼. 역시 마누라 몰래 마시는 술이 맛있어.

후안은 술을 마시고 밤하늘을 향해 한 숨을 내뱉었다. 술 향기가 가득한 한숨이 밤공기에 흩어져 사라졌지만,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술 냄새에 칼은 코앞에서 손을 휘젓는다. 후안은 그 광경을 보고 코웃음을 치고 칼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내숭 떨기는···. 끌끌.

그리고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신다.

-그런데···.

후안이 오고 나서 칼이 처음으로 운을 띄었다.

-저를 찾아오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칼은 후안에게 말했다. 얼른 이유나 말하라고.

후안은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시고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고 눈을 감은 채 코로 숨을 내쉰다. 드디어 때가 왔군.

-고맙다고 말을 전하러 왔네.

-도와드린 일 말입니까?

칼은 그를 도와 배를 만들었던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물론 그것도 그렇지만···.

후안은 속에 있던 말을 칼에게 꺼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것을 꺼내 놓으면 자신이 괴로워지리라는 것을 알기에 후안은 이번에 술을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취기가 물꼬를 텄다.

-나에게 아들이 있었네. 어디에 내놓을 만한 녀석은 아니었지만 마을에 보탬이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하던 녀석이었어. 제대로 일을 해낸 적이 없어 도움이 되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 아이의 됨됨이와 끈기를 항상 칭찬했지. 어떤 녀석이랑 다르게 말이야. 혹시 빌리라고 들어봤나.

칼은 후안의 입에서 그 녀석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반사적으로 얼굴에 작은 움찔거림이 있었다.

-아는 모양이군. 끌끌끌~ 뭐 아무튼 우리 아이, 반···. 우리 반은···.

후안이 숨을 몰아쉰다. 훌쩍이는 숨소리가 들린다. 후안은 관절염으로 부어오른 투박한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쓱 닦아낸다. 그리고 말을 이어간다.

-반은 그런 자신이 싫었던 모양이야. 그 아이가 작업을 하다 퇴짜를 맞고 돌아와 집에서 좌절하고 있기도 했거든. 나는 그럴 때마다 뭐 그런 일로 우울해하고 있냐고 타박했지. 사실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야.

후안은 다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네가 뭘 하든 뭘 하지 못하든 너는 지금 정말 잘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을 해줄 수가 없었어.

후안은 말의 끝을 흐리며 숨을 참았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어느 날 마을에서 수색대가 없는 동안 식량을 구할 팀을 꾸린다는 말이 돌았지. 그 말을 듣고 저녁을 먹기 위해 모인 식탁에서 그 말을 꺼냈어. 그 녀석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더군. 나는 그 반응을 기다렸어. 내심 아버지로서 아들이 무언가를 해내는 걸 보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그래서···. 그 말을 해줄 수 없었던 거야.

후안은 그 말을 끝에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칼은 무덤덤하게 그 옆에서 가만히 듣는다.

어느 정도 진정된 후안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이후의 상황은 자네의 생각대로야.

그리고 후안은 멍하니 하늘의 별 하나를 바라보고 말한다.

-지금도 그때 식탁에서 내가 진짜 해야 할 말했었더라면 어땠을지 상상하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칼은 후안의 눈가에 별 하나가 피어난 것을 보았다.


칼은 돌담에 기댄 채 졸기 시작한 후안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어 그를 집에 데려다주기로 한다. 칼은 후안의 집을 묻기 위해 혜나 칸나를 찾으려 아직 축제를 즐기고 있는 인파 속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해가 저문 지 꽤 오래되었지만,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 때문에 칸나와 혜는 쉴 틈도 없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칼은 후안을 임시 거처로 쓰고 있는 후안의 작업실에 데려가기로 한다. 칼은 부서진 침대는 어찌저찌 둘러댈 계획이다.

후안의 작업소는 광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환한 불빛도, 흥겨운 음악 소리도,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칼은 동정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내려 보는 달빛에 기대어 길을 읽으며 걸어가고 있다. 처음 후안과 어깨동무를 하려 했지만, 그와 후안의 키 차이로 인해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후안을 등에 업고 가고 있다. 가끔 후안이 반의 이름을 아련하게 되뇌었다.

흙바닥을 밝는 칼의 발소리만 박자감 있게 들리다가 가끔 맞은편에서 불어오는 식어버린 바람이 화음을 넣었다. 그 외에는 살인적인 침묵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느덧 후안의 작업실로 보이는 것이 나타난다.

창에 달빛이 들어 회색빛으로 빛난다. 언 듯 납빛으로 보이기도 하는 그 창은 바람이 불 때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떨렸다.

칼은 잠시 발을 멈춘다.

-흠···. 내가 잠시 졸았구먼.

후안이 깨어났다. 후안은 칼에게 내려달라 부탁하고 칼은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후안은 칼의 등에서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딘지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주변이 어두운 상황에다가 술에 취한 상태라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다 자신의 작업실을 발견한다.

후안은 비틀거리며 주변의 돌담에 다가가 손을 짚더니 그대로 돌담을 기대고 앉는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칼에게 말한다.

-들어가서 주무시게. 난 여기 있다가 술이 좀 깨면 집에 들어가겠네.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아니야. 괜찮네. 내가 아무리 저곳이 좋다며 자랑했지만, 자네가 지내기에도 비좁다는 것을 아네. 그러니 얼른 들어가시게나.

칼은 작업실을 보고 다시 후안을 보며 말한다.

-저 안에 제 배낭이 있습니다. 거기엔 텐트까지 있습니다. 저는 텐트를 치거나 침낭에 들어가 자면 됩니다. 같이 들어가시죠. 밤바람이 찹니다.

후안은 눈을 감고 고개를 내젓고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돌담에 몸을 기대고 떠지지도 않는 퉁퉁 부어버린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자네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도 바로 집으로 가겠네. 그러니 얼른 들어가. 오늘 늙은이 비워 맞춰주느라 고생했어.

칼은 고민하더니 말을 꺼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후안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하하하. 알겠네. 그럼, 내일 보게나.

후안은 부은 얼굴로 애써 웃으며 칼에게 가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칼은 돌아보지 않고 작업실로 향하였다.

후안은 그의 뒤를 보며 반의 모습을 떠올린다. 후안은 씁쓸한 웃음을 짓고는 뒤돌아선다. 후안은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고 칼에게 마음속 감춰둔 이야기를 꺼내 놓아도 아직 풀어지지 않는 응어리가 남아있는 모양이다.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이 다시 떠 오르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후안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

후안은 칼이 작업실에 다다른 것을 보고 몸을 돌려 자기 집으로 향했다. 숙취에다 평소 시달리는 무릎 관절의 통증 때문에 그의 걸음이 편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내색하지 않은 채 아들을 떠올리며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새빨간 빛이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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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샛별 24.06.20 2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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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파피(1) 24.06.13 28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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