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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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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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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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DUMMY

17화




주해서 3권을 받자마자 신이 나서 자리를 뜨려는 견신을 이현이 붙잡았다.


“전하, 더 고할 것이 있사옵니다.”


그에 견신이 진지한 얼굴로 돌아갔다.


“말해 보시오.”

“지금 조정에서 전하를 모실 방도를 논의 중이온데, 소신의 판단에는 금의위, 동창, 도찰원에서 한 명 내지는 약간 명을 붙일 듯하옵니다.”

“···그런 걸 내게 말해줘도 되는 것이오?”

“아니 되옵니다.”

“고(孤)는 태자태사가 곤란해짐을 원치 않소. 경뿐만이 아니라 전부 마찬가지요.”


견신의 대답을 듣고 역시나 군주의 재목이라고 생각한 이현이 옅게 웃으며 화답했다.


“소신은 지금 아는 바를 그저 고하고 있을 뿐이옵나이다. 논의하고자 함이 아니옵고 이 일을 다른 데 알릴 생각이 없으니, 전하께서 발설치 않으시면 문제가 아니 될 것이옵나이다.”

“···고맙소. 태자태사.”

“소신으로서는 당연한 일을 하였사온데 이리 치하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아직 순장 철폐를 지지해 주신 은혜의 반도 보은치 못했사옵니다.”


견신은 밤하늘 천랑성처럼 빛을 내는 이현의 눈동자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 옛날 전우들의 눈빛을 보는 것 같아서.


그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은혜는 무슨. 아무튼 보아하니 태자 전하께서 내신 방도인가 보구려.”

“그러하옵니다. 조정 중신 반수 이상이 지지하는 방도인지라 그리될 것이옵나이다. 또한 소신 역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방도로 보는 중이옵니다. 유람하시는 전하를 드러내놓고 호위하기에는 다소의 무리가 있지 않겠사옵니까.”

“그렇소. 고(孤) 또한 제국군을 끌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소. 홀로 다닐 생각이오.”

“참···! 뵈면 뵐수록 놀라운 분이시옵니다. 위험천만한 천하를 홀로 거닐 작정을 하셨다니. 소신, 그저 경탄스러울 뿐이옵나이다.”

“경탄할 게 있겠소. 궁 밖도 다 사람 사는 곳이거늘. 그저 백성들처럼 통행한다면 별문제 없을 것이오.”


그 대목에서 이현은 견신이 황궁 밖 세상을 잘 아는 사람처럼, 경험한 사람처럼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며 의아해했으나 지적하지는 않았다.


“소신이 입에 담기도 황망한 일이나, 도적이 횡행하지 않사옵니까?”

“도적이 두려울 핏줄은 아니지 않소.”

“아···! 송구하옵니다. 소신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황룡의 자손이시니.”


솔직히 말하면 걱정스럽다. 해가 바뀌어도 열다섯, 이제 겨우 지학(志學)에 지나지 않는 사람. 얼굴에 아직 소년의 태가 남은 사람이 무슨 수로 천하를 홀로 누비겠다는 것인지.


큰 고을도 해가 지면 위험하고, 외진 지역 작은 고을이나 고을을 벗어난 야지는 사실상 무법지대나 마찬가지다.


물론, 도적이 이 세상 어디나 활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적 관련 상소가 각지에서 꾸준히 올라오는 현상 또한 실상이다.


따라서 운수가 나쁘면 언제든 마주치기 마련인데 무인으로서 완성도 아직인 사람이 도적무리라도 마주치면 어쩌려고 홀로 유람을 다니겠다는 건지.


이는 아마도 세상물정에 대한 무지, 친왕으로 거침없이 살아온 세월과 타고난 무재를 향한 지나친 신뢰 등으로 말미암은 자만이리라.


옥에 티라고 할까? 방심이나 자만 같은 치기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주견신에게도 이런 치기가 있었다니. 역시 주견신도 그 또래의 소년이었다. 호기 넘치는 소년.


“금군과 환관 거기에 어사까지 최소 삼인. 셋이나 따라붙으면 귀찮을 듯한데 고가 피할 수는 없어 보이는구려.”

“그러하옵니다. 피할 수 없다고 보셔야 할 것이옵나이다. 최초는 금군만 따르는 것으로 논의가 진쟁 중이었사오나, 폐하께서 동집사창과 도찰원을 더하셨사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어찌 선발할지, 그 방도를 논의 중이옵나이다.”

“부황 폐하께서···! 뭐, 상관 없소. 고의 유람을 방해하지만 않으면.”

“소신이 짐작건대 그러지는 않을 것이옵나이다. 그들을 전하께서 아실 수 없도록 은밀히 따르게 하는 쪽으로 논의 중이옵니다.”

“알겠소, 다른 건?”

“여기까지이옵니다.”

“허면, 고는 이만 가리다. 고맙소.”

“하오면, 소신이 내각의 중지를 잘 모아보겠사옵니다.

“그리해 주시오. 서책들도 고맙소, 태자태사.”

“망극하옵니다. 전하의 공부에 써주시옵소서.”

“나오지 마시오.”




이윽고, 문연각을 벗어난 견신은 걸으면서 생각했다. 곁은 근시환관 신득이 지켰다.


호위 관련 이현이 말하지 않은 것이 많다. 아니, 못한 것이다. 태자와 귀비를 험담하는 셈이 될 테니까.


첫 번째, 금군 등을 호위로 붙이는 일. 표면적인 목적은 호위겠으나 실제 목적은 감시일 터다. 심하면 친왕 시해가 될 수도 있고.


두 번째, 아버지가 나라 전체의 감찰을 임무로 하는 도찰원, 끼어들지 않는 분야가 없는 동창을 추가한 것은 태자와 귀비가 심은 사람을 견제하기 위해서 마련한 방책인 셈이고.


세 번째, 이현이 내각의 중지를 잘 모아보겠다고 한 것은 그 역시 아버지와 같은 우려를 하고 있다는 뜻. 그래서 호위를 선발하는 과정에 적극 개입하겠다는 의미일 터다.




생각 중 문득, 신득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전하, 용안이 밝아 보이시옵니다. 안에서 좋은 일이라도 있었사옵니까?”

“있었다, 이것들. 유불선 경전들의 주해서를 얻었다. 아주 희귀한 것이다.”

“오홍— 감축드리옵니다. 태자태사가 이리 큰일을 하다니, 역시 태자태사이옵니다.”

“더불어서 한 가지 알려주더군.”

“무엇을 고하였사옵니까?”

“조정에서 논의 중이라 한다. 출궁하면 금의위, 동창, 도찰원에서 뽑은 호위를 붙인다고 하였다.”

“호옹··· 그렇사옵니까. 호옹···”


잠시 머리를 굴리는 듯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걷던 신득이 재차 입술을 움직였다.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비직의 생각에는···!”

“안다, 고도. 최소 감시, 아니면 때를 봐서 고를 죽일 목적일 수도 있을 테지.”

“···창(廠)은 조금도 심려치 마시옵소서. 수당태감 만영과 비직이 조처하겠나이다. 또한 창과 일만 환관은 전하를 충심으로 지지하고 있사옵니다.”


신득의 말은 허언이나 빈말이 아닌 사실이었다. 순장 철폐의 일등 공신인 견신은 환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례감의 유일한 근심거리였던 순장을 끝장내 준 사람인데 어떻게, 무슨 수로 지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그런 지지를 뛰어넘을 만큼의 유대를 주인과의 관계에서 쌓아온 환관은 주인과 견신의 이익이 충돌 시, 견신보다는 주인을 지지하겠지만 그런 환관은 극소수에 불과할 거고, 대다수 환관은 견신을 지지할 게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대가 있어서 참으로 든든하다, 신득.”

“홍홍홍— 전하께서 비직의 호종을 허락지 않으시니 모자란 비직이 그리라도 해야지 않겠사옵니까.”

“물론 태감이 고를 지켜주면 고도 좋을 것이다. 그대는 고가 믿는 사람이니까.”

“오호홍— 망극하옵니다, 전하.”

“한데, 그대는 내신 중의 내신. 진실로 훌륭한 내신이라 아무리 감춰도 태가 난다. 특히 고를 과하게 떠받든다. 내신을 한 번이라도 접해본 자라면 보는 즉시 알아볼 것이다. 소매 속의 꼬챙이를 가린다고 가려지겠느냐? 즉, 과하게 뛰어나기에 고를 호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전하. 어찌 이리 비직의 마음을 울리시옵니까.”


금세 가슴이 먹먹해진 신득은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주인의 등을 바라봤다. 주인은 어쩌면 이렇게도 말을 고맙고 감격스럽게 하는 건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을 것인데 곧잘 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늙은 환관은 사람이 늙으면 자연스레 나는 냄새에 더해 지린내가 짙게 배어 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양물을 거세하는 과정에서 잘린 요도로 소변이 조금씩 새 나오는 것이다. 환관이 향수를 좋아하는 까닭이 거기 있다. 짙은 향으로 지린내를 가리는 것.


게다가 오랜 세월 환관으로 살아왔으니 특유의 언행이나 표정, 몸짓 등 습관들이 단단하게 굳어있을 터. 그러니 늙은 환관이 아무리 정교하게 위장한들 사람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주인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어줄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이 허락지 않을 테니 앞으로 할 일은 늙은 종을 대신해서 주인을 제 한 목숨 바쳐 모실, 젊고 유능한 고자를 골라내는 것이다. 일족 최고의 무환관을.




그렇게 신득이 절정의 기쁨 속에서 지극한 충성을 다짐하고 있을 때, 견신은 호위가 그리 귀찮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궁을 나가면 어지간해서는 신분을 드러낼 수 없을 테니 파리가 꼬이는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곤란한 일이 다수 생길 것이다. 이를테면 무언가를 직접 해야 하는.


그러니 호위들을 그런 존재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을 맡길 수하로.




#




땅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바람은 날카로워졌다. 야외의 것은 그게 무엇이든 손대고 힘주면 부서져 버릴 듯 단단하게 얼어붙었다.




가까운 날에 출궁이 예정된 견신은 아침에 황제의 부름을 받고 건청궁에 들었다.


순쟁 이후 종종 그랬듯 오늘 역시 독대였다. 다만 완전한 독대는 아니고 황후가 있었다. 장인태감과 제독동창은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천순제 주기진은 얼마 전부터 건청궁을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했다. 그로 인해 보름 전 원단 태묘대제도 태자 주견심이 대신 주재했다.


정무는 중요한 사안만 주기진이 황후의 보고를 받고 결정했고 나머지는 황후가 지아비 대신 섭정 중이었다. 사실 섭정은 성년이 된 태자 주견심이 맡는 게 정석이지만 주기진은 주견심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고 그에 황후에게 맡겼다.


주기진은 맏이에게 섭정을 맡기면, 맏이가 이복동생의 출궁 직전이나 직후에 몰래 손을 써서 모종의 해를 입힐 수도 있다고 봤다.




한편, 견신은 병석에 누운 아비의 침상 옆에 앉고 황후는 주기진의 머리맡에 다소곳이 앉아서 수건으로 지아비의 이마에 영그는 땀방울을 훔치고 있었다.


줄곧 말과 쉼을 반복 중인 주기진이 눈동자만 굴려서 셋째 아들을 봤다.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아들을.


“견신.”

“예, 폐하. 작게 말씀하소서. 소자가 잘 듣겠사옵니다.”

“네 형을 너무 미워···! 용서하여라.”

“심려치 마시옵소서. 궁이 본래 그런 곳이지 않사옵니까. 미워할 것도 용서할 것도 없사옵니다.”

“네 말이 짐을 참으로 기쁘게 한다. 견신, 이리 가까이 귀를 내보아라.”

“예, 폐하.”


견신이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서 조심스레 귀를 가져가자, 주기진이 작게 속삭였다. 환관과 궁녀가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내, 견신이 다시 물러났다.


“알겠느냐, 아무도 믿지 말아라. 아무도.”

“예, 폐하. 명심하겠나이다.”

“짐의 명이라고 해도 믿지 말아라.”


그 대목은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컸는지라, 침상 좌우 측면에 서있던 환관들과 궁녀들이 서로 놀란 눈초리를 교환했다.


[!!!!!!]


눈짓으로 묻는 것이다. 방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냐고, 조금 전 귀엣말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느냐며.


“아버지 폐하의 명을 소자가 감히 어찌 불신하겠사옵니까. 폐하께서는 백년 뒤에도 소자에게 명할 수 있으실 터. 하오니 소자, 어찌 아버지 폐하의 명을 불신하겠나이까.”

“···그리 말할 줄 알았다.”


대답하는 주기진의 입매가 아주 조금 휘어졌다. 힘겹지만 웃는 것.




그런 지아비의 미소를 알아본 황후가 찰나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견신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


덕왕 주견린도 훌륭한 아들이지만, 진짜배기는 주견신이다. 정왕 주견신이야말로 천순제 주기진이 낳은 아들 중 최고의 아들이요, 황제지재(皇帝之才), 황제의 재목이다.


누군가 아비의 명령으로 가장한 명령을 통해 위협할 수도 있으니, 쉽사리 믿지 말라는 말에 저렇게 대답하는 아들이 몇이나 될까.


아버지는 쾌차하여 천년만년 살 테니 걱정하지 마셔라, 그게 아니라도 태자 혹은 간신이 아버지의 명령을 가장했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불신했다가 진실한 아버지의 명령을 놓치는 수가 있으니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황궁의 대담, 황제와 후계자의 담화요, 황룡의 품격이 아니겠는가.




그처럼 황후가 감격한 사이 주기진이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중간에 입술을 다물었다.


“허고, 아비를 미···! 아비를 용···!”


끊어버린 말을 다시 잇지 않고 침묵하면서 살짝 얼굴을 찡그리자 지켜보던 환관들과 궁녀들은 병마의 고통이 다시 찾아왔다고 여겼다.


[폐하!]

“황후 폐하, 태의를 부르겠사옵니다.”


그처럼 놀란 환관들과 궁녀들이 얼른 사람을 부르러 종종걸음 치는데 견신의 목소리가 그들의 두 다리를 붙잡았다.


“소자, 알고 있사옵니다. 소자를 보살피지 아니하심으로써 보살피신 것을 익히 알고 있사옵니다.”

[!!!!!!]


그대로, 가려다 말고 멈춰 선 그대로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돌려서 견신을 주목했다.


“미워하고 말 것도 용서하고 말 것도 없사옵니다. 덕분에 소자, 이리 건재하나이다.”

[!!!!!!]


그리하여 마주한 것은 저절로, 예고 없이, 느낄 새도 없이 멋대로 치미는 격정이었다.


그런 말이었는가. 황제가 조금 전에 정왕에게 태자를 미워하지 말라며 용서하라고 말한 것처럼, 그동안 당신이 아들을 홀대한 일을 두고 아들에게 미워하지 말아 달라며, 용서해달라며 부탁하고자 한 것이었는가. 그러나, 막상 부탁하려니 면이 서지 않아서 차마 하지 못한 것이었는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그 말 그 뜻을 정왕은 기어이 알아듣고 이처럼 대답했다는 말인가. 어떻게? 제 나이보다 오랜 세월 동안 황제를 모셔 온 사람들도 알아듣지 못한 말을 무슨 수로 단박에 알아들은 것일까.


이는 분명히도 사랑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주는 사랑. 사랑이 아니고는 정녕 설명할 방법이 없다. 주견신의 대답을 설명할 방법이.




그처럼 환관들과 궁녀들이 감동한 나머지 자리에 못 박힌 듯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주기진의 눈에서도 영근 눈물이 베개로 떨어졌다.


주르륵—


그에 황후가 조용히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지아비의 눈물을 훔쳐냈다. 의도적인 침묵이 아니라 항거불능의 침묵이었다.


그러자 이내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견신이 의미심장한 눈빛이 돼서, 전에 생각해 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폐하, 지금 명해두소서.”

[······?]


무엇을 명령하라는 말인지 주기진도, 황후도 궁금하지만 치솟은 격정으로 인해 목구멍이 타는 듯하여 대꾸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사정마저 짐작한 견신이 말을 이었다.


“모후 폐하와 해로하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

“지금 명하시면 그 명을 소자가 조정에 전하겠사옵니다. 폐하, 지금 명하소서. 들을 준비가 되었사옵니다. 사관(史官)은 이미 잘 듣고 또 잘 적고 있을 줄로 고가 믿어 의심치 않고 있으나, 부디 지금 더 잘 듣고, 빠짐없이 받아 적어 달라. 명이 아니라 부탁이다.”

“예, 전하.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소신, 명심 봉행하겠나이다.”


그런 감격은 사관의 몫이기도 했다. 한 나라가 직접 편찬하는 역사서 실록의 초고 즉, 사료를 작성하는 사관은 원칙상 황제도 이리 적어라, 그리 적지 말아라 등 일체의 간섭하는 행위가 금지된 존재다. 황제가 역사를 편의대로, 임의로 조작할 수 있기 때문.


따라서 아무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으니 사관은 조정 문무백관 중 가장 외로운 축에 드는 관리였다. 게다가 지금처럼 직무 수행 과정에서 알게 된 정보를 입 밖에 낼 수도 없다. 정보가 곧 사료요 실록이며 역사이므로.


이는 남들 다 하고 사는 일 이야기조차 터놓고 나눌 수 없는 존재라는 뜻. 그래서 같은 사관 외에는 찾아주는 이 없는 외로운 존재인데 자그마치 친왕으로부터 진심 어린 격려와 정중한 부탁을 받았으니 사기가 들불처럼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관은 정왕 주견신이 참으로 배포가 웅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붓 놀리는 재미가 솟아나는 날이.




그러나 이중 누구보다 감격한 사람은 황후였다. 황후는 지아비의 눈물을 훔치던 손수건으로 제 눈물을 훔치며 말끝을 흐렸다.


“···정왕, 이 사람이 참으로··· 고마워서 뭐라 말해야 할지···”


주견신의 말을 번역하면 늦기 전에 유언을 남겨두라는 권고다. 당신께서 붕어하시고 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황후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그를 아버지 당신도 알지 않냐고. 그러니 늦기 전에 유언으로 남겨두라는 권고다.


그 권고도 놀랍고 대단하며 고마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고마운 것은 그러한 명령을 직접 조정에 전달하겠다고 한 대목이다.


지금 이 황궁에서 말 한마디가 가진 힘이 가장 강력한 이가 황제도 황후도 태자도 아닌 정왕 주견신이기 때문.


순쟁 당시 모든 것을 걸고 임하였기에, 모든 것을 걸고 옳음을 주장했기에, 그 아무도 조정의 어떤 정파도 진정성만큼은 의심할 수 없는, 의심해서도 아니 되고, 의심하는 것이 죄악시되는 존재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정왕 주견신은 사리사욕을 우선시 하지도 않고 사리사욕을 위해서 거짓을 말할 리도 없는 성인군자가 된 것이다.


그런 이의 입을 통해 전달하는 황명이 과연 어떤 위력을 갖겠는가. 태자와 귀비를 추종하는 세력을 제외한 모든 이가, 환관과 궁녀를 포함한 기술직 잡관까지 지지하는 이가 전달하는 황명은 아무도, 섣불리 왈가왈부할 수 없는 명령이, 문자 그대로 하늘의 명령이 될 것이다.


그런 사정을 다 헤아리는 씀씀이가 너무도 기특하고 또 고마운 것이다.




이윽고, 주기진 역시 목이 메인 나머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견신이 다시 나섰다.


“황후는 천추만세의 황후이다. 하여, 황후의 사후에 마땅히 짐과 함께 묻혀야 한다.”

[!!!!!!]


길지도 않았다. 그토록 간단명료했지만 거기 담긴 요지는 아주 날카롭고 선명하며, 부부가 원하는 모든 조처를 품고 있었다.


첫 번째, 황후는 반드시 황태후가 된다.


두 번째, 황후는 절대로 폐위될 수 없다.


세 번째, 황후는 천순제 주기진의 정비다.


네 번째, 귀비는 황태후가 될 수 있을지언정 천순제 주기진의 능에 합장될 수 없다.


다섯 번째, 정왕 주견신이 직접 들었음을, 그가 지지함을 만백성에게 고한다.


“윤허하시면 그리 전하겠나이다. 폐하.”


그런 아들의 속 깊은 마음에 베갯잇을 온통 적신 주기진이 울음이 끓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짐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바를 정왕이 다 헤아렸는가. 윤허한다, 진실로 윤허한다. 그리 전하라. 정왕이 그리 전해달라.”

“예, 폐하. 황명을 받잡겠나이다.”


없던 힘이 솟은 사람처럼 답한 그가 황후를 돌아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황후, 어서 그것을 내주세요.”

“예, 폐하. 그리하겠사옵니다. 금일 정왕을 이리 대하고 보니 폐하께서 준비하시기를 참으로 잘하셨사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그렇습니다. 저 하늘이 짐과 황후를 어여삐 여기시나 봅니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이리 연거푸 받고 있으니.”

“참으로 그렇사옵니다, 폐하.”


기쁨의 눈물을 훔치며 일어선 황후가 품속에서 금빛 비단 보자기를 꺼냈다. 안에 아이 손바닥 너비쯤의 물건을 감싼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견신의 곁에 가서 앉았다.


“받으세요. 부황 폐하께서 정왕의 출궁 전에 은밀하게 준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열어보세요. 이 사람과 태자태사 이현 등 믿을만한 사람들만 존재를 알고 있으니 훗날 때가 되면 증명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쓰이지 않기를 바라지만.”


황후의 의미심장한 설명.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황제와 황후를 번갈아 본 견신이 보자기를 열자, 거기 한가운데 세로로 두 글자가 양각된 철패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면(免)

사(死)




면사, 이는 죽음을 면한다는 뜻.

다른 뜻은 아버지 주기진이 아들 주견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천순제 주기진이 죽은 뒤에도 정왕 주견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든 한 번은 꼭 지켜주겠다는 의미였다.




그 이름을 면사철권(免死鐵券)이라 하였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장마 뒤에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온열손상 조심하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작가가 늘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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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4화 +22 24.08.07 9,725 410 20쪽
24 23화 +19 24.08.05 9,687 371 21쪽
23 22화 +23 24.08.02 9,821 433 21쪽
22 21화 +14 24.08.01 10,068 369 18쪽
21 20화 +15 24.07.31 10,270 380 21쪽
20 19화 +21 24.07.30 10,215 442 18쪽
19 18화 +16 24.07.29 10,581 411 21쪽
» 17화 +32 24.07.26 10,497 550 20쪽
17 16화 +16 24.07.24 10,713 424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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