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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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마
작품등록일 :
2024.07.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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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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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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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DUMMY

16화




맑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투명한 비는 또박또박 내려와 땅 위의 만물과 만났다. 가을 소나기였다.


쏴아아—


황궁은 40여 년 전 건설 당시 배수에 심혈을 기울여 지었기에 물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실제 기록적인 폭우도 황궁을 범하지 못했다.


봉천전을 비롯한 외조 삼대 정전을 떠받치는 기단에는 용머리로 장식한 배수구가 무려 1142개, 지하의 배수로와 연결돼 있었다. 또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으며 곳곳에 90여 곳의 정원이 있어서 빗물을 효과적으로 저장할 수 있었고 덕분에 침수 피해 없이 남쪽 하천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지난 40여 년 동안 황궁이 단 한 번도 침수되지 않은 까닭이 그러하며 따라서 폭우도 아닌 가을비가 봉천전 광장에 늘어선 행렬을 막을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환관들과 금의위 정병이 받쳐 든 우산들이 광장을 빼곡하게 채웠고, 그 우산 아래서 황실과 문무백관이 덕왕 주견린을 환송하고 있었다.


색색의 비단에 품계가 지정한 이무기와 잉어, 범과 표범 등 짐승을 수놓은 철릭 차림의 금의위. 그들이 마치 병마용처럼 광장 외곽을 에워쌌다. 몸으로 세운 벽이었다.


[······.]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에 무정한 얼굴로 서 있는 그들의 머리 위 둥그런 전립의 챙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굳게 다문 입술을 비집고 나온 더운 숨이 피어올랐다.




그 성벽의 가운데서 긴 여정을 위해 철릭과 전립으로 갈아입은 주견린과 얼마 전 그의 정비 즉, 덕왕비가 된 남궁수현이 황제와 황후에게 석별의 예를 취하는 중.


“폐하, 황후 폐하. 내내 강녕하시옵소서.”

“강녕하시옵소서.”


황제와 황후는 그런 부부를 새하얀 대리석 기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고.




얼마 전부터 생애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쉼 없이 경험 중인 남궁수현은 황궁 예법에 서툴렀지만, 지아비를 곁눈질하며 곧잘 따라 했다.


올해 열여섯으로 주견린과 나이가 같은 남궁수현은 작약꽃을 닮았다. 용모에서 수줍은 듯 차분한 미(美)가 묻어나는, 보기 드문 가인. 총명하고 무재(武才) 역시 출중한 팔방미인이었다. 그 남궁이 ‘수’자 항렬의 여식 중 두 번째로 아끼는 인물이고.




그런 부부의 인사에,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병색이 더 짙어진 주기진은 가마에 앉은 채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손바닥을 내보였다.


스윽—


그처럼 거동조차 힘들어진 그를 대신해 다정한 목소리를 낸 사람은 황후. 그녀는 줄곧 순한 성품으로 친왕의 모범이 돼주었던 주견린을 시원섭섭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덕왕과 덕왕비도 늘 강녕하세요. 이 사람이 빌겠습니다.”

“망극하옵니다, 황후 폐하.”

“망극하옵니다, 황후 폐하.”


그런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 차례 숨을 몰아쉰 주기진은 아침에 건청궁에서 아들 부부와 부족하나마 덕담을 주고받았으니,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비 냄새도, 내리는 비 때문에 쌀쌀해지는 공기도 더는 감당키 힘들었다.


사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마음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헛헛해지는 기분이랄까. 이런 심정을 아버지는 모르셨으리라. 아버지는 슬하에 친왕이 하나뿐이었고, 그조차도 봉지로 보내기 전에 당신께서 먼저 붕어하셨으므로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하셨으리라.


반면에 조부는 아홉이었으므로, 당신 폐하께서는 느끼셨을 것이다. 자식을 떠나보내는 심경을. 자식들을 천하 각지에 찢어 놓는 마음을.


그 어린 것이 금세 저처럼 장성하여 떠나는가. 지금 별리(別離)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주기진의 생애 중에는 마지막이리라.


골육상쟁을 막고, 용상의 주인을 명확하게 해둔다는 명분으로 아들들과 거리를 둔 세월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 많이 늦었으나 순쟁 이후 아들들과 시간을 보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죽기 전에 깨달았으니 족하다.


이 못난 아비가 아들들을 보살피지 아니함으로써 보살피고자 하였음을. 아들들이 이해해 줄 때가 있을런가. 그때가 오려나.


붉은 우산 아래, 투명한 빗방울 사이로 보이는 아들의 얼굴을 잠시 눈에 담았다. 거기 오래전 젊었던 날, 동경으로 본 정통제 주기진의 얼굴이 보였다. 닮았다. 주기진을.




이윽고, 눈에 담은 아들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겠다는 듯 눈꺼풀을 닫은 주기진이 힘겹게 뇌까렸다.


“가자. 이만 가시지요, 황후.”

“예, 폐하. 폐하를 뫼셔라.”

[예이— 황후 폐하.]


곁에 서있던 태자 주견심과 귀비도 부부를 따라 돌아섰다. 주견린의 출궁은 모자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마치 앓던 이를 대하듯 싸늘한 눈빛으로 흘겨본 뒤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들이 광장을 빠져나가기가 무섭게 신비가 두 손으로 치마를 움켜쥔 채 기단을 달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탁— 탁탁—


그에 우산을 들고 있던 젊은 환관들이 기겁하며 얼른 따라가는데···


“비, 비 전하!”

“비 전하!”


그들보다 한발 앞서 움직인 이가 있었으니 신비의 근시환관, 만영이었다.


[!!!!!!]


만영이 우산을 낚아챔과 동시에 비에 젖은 계단을 도약했고 눈 깜짝할 새, 신비보다 한 걸음 앞서서 우산을 받치고 있었다. 젖은 계단 위로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앉았으므로 이는 동집사창의 비전, 월영신보(月影神步)다.


만영은 젖은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신비를 말리지 않았다. 한 마디 말없이 그저 조용히 따를 뿐이었다. 혹시라도 신비가 넘어지려거든 그 즉시 신비를 부축할 태세를 갖추고.




그렇게 신비는 신발과 발이 다 젖도록 길고 긴 빗길을 달려서 마침내 아들의 앞에 도착했다.


찰박— 찰박—


곱게 틀어 올린 머리는 흐트러졌고 동글한 눈에서는 맑은 눈물이 비처럼 흘러내리는 어미가 쓰러지듯 허물어지자 놀란 주견린이 얼른 안아 들었다.


“어머니···!”


아들을 부둥켜안은 신비는 말없이 흐느꼈다. 아니, 그것은 오열이었다.


맏이는 이제 나라의 큰 행사가 있을 때나 황궁에 올 수 있고, 그마저도 지아비의 뒤를 이어서 용상에 앉을 태자가 허락하지 않으면 올 수 없다. 그러니, 사실상 생이별이다.


전생의 무슨 업보로 인해 후궁과 친왕으로 왔을까. 후궁 아니라 평범한 규수였다면, 친왕 아니라 평범한 아들이었다면 이런 이별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을.


맏이를 낳았을 때의 기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환희가 생생했다. 옹알이, 첫걸음마,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러주었을 때. 품에 앉아서 고사리손으로 서책을 쥐고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주던 때. 동생들을 낳을 때마다 어미 곁에서 어미 손을 꼭 쥐고 목 놓아 울어주던 때.


그 모든 순간이 뇌리에서 비 온 뒤 죽순처럼 생장했다.


아들아, 내 아들아.

어미는 네가 너무, 너무···


우욱— 욱—




그처럼 길 떠나는 아들을 붙잡고 우는 어미의 잇새로 자꾸만 빠져나가는 울음에, 구슬픈 헛구역질에 문무백관도 금의위도, 신비를 쫓아온 환관들과 궁녀들도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를 들썩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신비를 부축한 주견린은 안간힘을 다해 웃고자 노력했다. 체면은 둘째 문제고 울면 그런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이 너무나도 힘들 것 같아서.


그러나, 불에 덴 듯 뜨거워지는 눈으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녀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형님.”

“신아···!”


어머니 뒤로 늘어선 환관들과 궁녀들을 뚫고 그 사이로 덤덤하게 걸어오는. 다섯 동생 중에서도 특별한 동생과 녀석이 품에 안은 소반 거기 놓인 것을 보는 순간 밀려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어머니처럼 서럽게 울 수밖에.


우우—


전혀 예상치 못했다. 동생이 그런 것을 준비했을 줄은. 동생이 가져온 건 아버지였다. 어머니였다. 셋째 넷째, 다섯째와 막내였다.


그 시절 건강했던 아버지부터 막내까지 가족의 모습을 그대로 조각한 목각인형이었다. 암갈색 소반 위에서 여덟 식구가 환하게 웃는 모습. 그 화목한 모습이 너무나도, 보고 있음에도 그립고 서럽게 다가왔다.




그처럼 완전히 무너진 모자 주변에서 환관들과 궁녀들도 눈물짓고 견신의 동생들도 견신의 양옆에서 훌쩍이고 있었다. 얼마 전 지아비와 마찬가지로 집을 떠난 남궁수현도 그때를 회상하며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그 사이, 담담한 기색으로 다가온 견신이 형과 함께 황궁을 떠나는 노(老)환관 권승에게 소반을 건넸다.


“권승, 이거.”

“예이, 전하. 비직이 산동까지 탈 없이 가져가겠나이다.”

“그대도 몸조심하고, 형님 잘 부탁한다.”

“망극하옵니다. 전하께옵서도 내내 강건하시옵소서. 비직이 항시 바라겠나이다.”

“고맙다. 곧 보자.”

“예이— 전하. 손꼽아 기다리겠나이다.”


소반을 받아 든 권승이 뒷걸음질로 물러서자 견신이 신비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어머니. 형님 발길이 무거워집니다.”

“정왕··· 어미는··· 어미는···”


우는 신비를 일으켜 세우고 동생들로 하여금 어미를 붙들게 했다.


“어머니를 모시자.”

[네, 형님 전하.]

[네, 오라버니 전하.]


울먹이는 동생들의 손에 이끌려 물러서는 신비. 그런 어미를 본 주견린이 비척비척 허리를 세우고 견신을 바라봤다. 동생은 늘 그렇듯 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문득 그게 조금은 서운하게 느껴졌다.


그래, 그렇구나. 너는 이리 슬프지는 않은 것이구나. 하긴, 너는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지. 그래서 그런 것이겠지. 지금도 담대한 것이겠지. 너답다. 아우야. 나는 네가 형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참 많았다. 네게 말하진 않았지만.


네가 내 아우라서 정말 좋았다. 요즘도 꿈을 꾸느냐. 악몽을 꾸느냐. 귀한 내 아우. 장한 내 아우. 형보다 나은 내 아우. 언젠가는 평안에 이르기를. 못난 형이 항시 바라고 있으마.




그처럼 주견린이 조금은 섭섭한 마음으로 견신을 보고 있는데 그는 조금 뒤 그런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형.”

“!!!!!!”


견신이 주견린을 형이라고 부른 것은 아주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에 놀란 뒤에야 주견린은 동생의 미간이 평소보다 유난히 찌푸려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발견이 주견린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동생이 오늘의 이별을, 형만큼은 아닐지라도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쁨과 위로, 힘이 돼주었다.


“잘 가.”


그처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기운이 솟은 주견린이 조금 여유를 찾았다. 얼른 눈물을 훔치며 싱긋 웃었다.


“녀석, 오랜만이구나. 그렇게 부르는 거.”

“들를게.”

“부럽다. 나도 자유를 달랠 걸 그랬나. 젓가락 한 번 얹어볼 것을 그랬어.”

“어림없지, 형은. 애초에 어디 한 군데 진득하게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무슨.”

“···녀석. 이제 나 없으···! 하긴, 이제 네가 내각에 나다니고 있으니까.”


견신이 거처 밖에서 진면모를 감추던 시절 주견린을 시켜 내각 서고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가져오게 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위장을 그만둔 견신은 직접 내각을 오갔다.


“형 시킬 때가 편하긴 했어.”

“이 녀석이···! 나도 그때가 좋았다. 내 아우에게 보탬이 되는 것 같아서.”

“항상 됐어.”

“···신아, 어머니 잘 부탁한다.”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자주 찾아올 거니까. 그러려고 자유를 얻은 거야.”

“그래,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총명한 사람이니까. 신아.”

“응.”

“고수가 되는 거야. 너와 이름이 같은 그분을 뛰어넘는 검사가 되는 거야. 내 아우는 할 수 있을 거다. 두 번째 검자 아니, 검자를 뛰어넘는 검사가 되는 거야. 할 수 있지? 그럴 거지?”

“···당연하지.”


잠시 주춤한 끝에 대답한 견신이 주견린을 힘주어 안았다.


꽈악—


[!!!!!!]


그에 주견린도 지켜보던 사람들도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이 됐다. 황궁에서 더군다나 지금처럼 만인이 지켜보는 데서 친왕이 견신처럼 행동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


존귀한 신분의 황실과 군자의 행동이 아닌 평범한 백성들이나 할 법한 행동이기에 놀란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無)와 파격이 가족인 주견린과 신비 그리고 남매들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아주 진한 감격, 감동으로.


“신아!”


감격한 주견린도 견신을 맞잡았고 그를 보고 있던 신비와 남매들도 일제히 달려와 형제를 부둥켜안았다.


[비 전하!]

[공주 전하!]


우산을 든 환관들과 궁녀들도 전부 주인들에게로 모여들었고 그 모습이 사람들의 망막에 신비 일가의 특별한 유대를 써넣었다. 황궁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별 풍경이었다.


이내 그런 가족을 축복하듯 서서히 소나기가 그치고 맑게 갠 하늘이 눈이 부시도록 파란 햇살을 내리쬐기 시작했다.




가을이었다. 백년 뒤의 가을.




#




하얀 서리 안개가 내려앉은 문연각.

전각의 주인 태자태사 겸 문연각대학사 이현은 입궐 후 잠시 환기를 위해 열어뒀던 창을 서둘러 닫았다.


“후— 춥다, 벌써 겨울인가.”


차갑고 날카로운 겨울 습기가 창을 넘어서 종이와 나무를 마구 헤집는 느낌. 사람의 폐도 그렇고.


그래도 조금만 있으면 벽난로에서 밀려 나온 열기가 집무 공간을 데우고 습기 먹은 종이도 바싹 말려줄 터였다.


“허면, 금일도 시작해 볼까. 보자—”


이현은 탁자 한가운데 아침에 중서사인이 가져다 놓은 서찰 중 맨 위 돌돌 말린 것을 펼쳐 들었다.


“정왕부 존속에 관한 논의라··· 흠···”


첫 번째 일감은 역대 친왕 중 최초로 자유 통행 권리를 얻은 정왕의 처우와 정왕부 유지 관련 문연각의 답을 달라는 요구였다.


“첫 번째··· 봉지는 명목상으로는 유지하되 궁은 추후에 축조하는 것으로 하고···”


몇 가지 쟁점 중 큰 것은 첫 번째, 정왕부의 설치 여부. 일단 정왕의 봉지는 남쪽 수천 리 떨어진 해안가, 복건성의 복주(福州)로 정해졌다. 그리 좋은 곳은 못 된다. 저 병부에 남해안 왜구와 관련된 상소와 보고가 수두룩하게 쌓여 있으니까.


그런 결정에는 귀비와 태자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갔고 그를 안 황제가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황제가 한발 양보하면서 일단락됐다.


모두가 알다시피 영락제 시절 번왕제가 폐지된 이래로 친왕에게 통행과 주거이전의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다. 아니, 자유의 금지가 법도고 원칙이다. 대명회전(大明會典)이 그렇게 말한다.


친왕은 봉지를 벗어날 수 없고 지방관들과의 교류도 금지되며 상업 등 다른 생업에 종사하는 행위 역시 금지된다고.


황제로서는 그런 법도를 깨고 예외를 두었으니 한발 물러선 것이다. 물론 천하를 유람할 예정이라며 천명한 정왕이 봉지에 얽매이지 않은 점도, 황제와 신비의 걱정을 덜어주기는 했을 것이다.


태자와 귀비가 머리를 썼으나 정왕의 입장에야 복주가 아닌 다른 곳에 머물면 그만이다. 혼인 후 살림을 차린다면야 복주로 돌아가야겠지만 다른 데 차린들 어찌 알겠는가.


막말로 다른 곳에 살림을 차리기는 했으나 부부가 유람 중 잠시 머무는 거라며 항변하면 어쩔 것인가. 진위를 구별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때가 돼봐야 알 일이지만 정왕이 그리 불리한 입장의 대국은 아니다. 물론, 용상에 앉은 자가 작정하면 그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판인 건 사실이고.


선황이 허락한 것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명분을 잘 만들고 신하들의 조력을 받아서 복주 귀환과 더불어 통행 및 주거이전의 금지를 명령하면 정왕으로서는 복종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다음, 봉록은 일만 석. 딸린 식구도 궁도 없는 출궁이기는 하지만 시작부터 제하고 보는 건 인지상정이 아닐 것. 폐하께서 말씀하신 바도 있고.”


친왕의 봉록은 최대 일만 석. 국고를 절약하자면야 줄이는 게 옳은 조처고, 그럴 명분도 있지만, 이쪽에서 줄이자고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무려 순장을 철폐한 인물의 봉록을 늘리지는 못할망정 줄이자고 주장할 리가 있나. 사실상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한 인물인데, 공자께서 총애하실 게 분명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이현이 전하의 봉록을 줄이자고 할 리는 없지. 늘리자고 하면 몰라도.”


게다가 황제가 보상을 결정할 당시 봉록도 줄 거라고, 주지 않으면 상이 아니라 벌이라고 한 바 있으니. 그 또한 줄이지 않을 명분이 된다.


“다음은 호위인데··· 흠···”


마지막은 호위 즉, 경호의 문제였다. 호위를 제공할 것인가 말 것인가부터 문제, 쉽지 않은 문제다.


봉지에 머문다면 가장 먼저 궁궐이 경계를 제공하고 그다음 병사들이 호위를 제공한다. 궁궐이 있으니 병사 숫자도 줄일 수 있고.


그러나 유람하는 사람을 호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호위에 충분한 숫자를 산출하기도 어렵거니와 외려 신분을 감추고 유람하게 하는 편이 호위에 훨씬 더 유리한 방법이 아닌지도 따질 문제다. 호위의 효율 면에서도 그렇고.


“일단 금의위 한 명, 도찰원 하나. 동집사창 한 명이 지배적인가. 그러면 사실상 호위가 아니라 감시라는 말이지.”


다른 내각과 조정 각 부의 견해를 보니 대내 3대 무력 조직에서 정예를 선발, 암중에서 따르게 하자는 견해가 많았다.


많다는 그 말인즉슨 귀비와 태자의 견해라는 이야기고 그 견해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이쪽 역시 무슨 수를 내야 한다.


귀비와 태자 그리고 정왕. 그들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으므로.


“···지명할 사람에서 태자 전하를 제외하는 게 중요하겠군.”


세 사람 마음에 들어가 봐야 정확한 정도를 알 수 있겠지만 크게 나쁠 수도 있다. 아니, 크게 나쁘다고 보는 것이 합당한 시각일 터다.


그렇다면 애초에 소수의 호위를 붙이는 것을 막거나 정왕에게 호의적인 인사가 호위를 지명하게 해야 할 터. 강력한 우군인 황제는 거동이 어려워질 정도로 건강이 악화한 상태라, 명료한 정신으로 선발할 수 없다고 봐야 할 거고.


그렇다고 해서 무공 구절 한 줄도 모르는 태자태사 이현 등이 지명할 수도 없는 노릇.


“누가 있을까··· 누가···”


그때였다. 이현을 보좌하는 중서사인이 그를 찾아온 것은.


“대학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 자네인가. 들어오시게.”


허락을 받고 들어온 중서사인이 품에 안은 두툼한 서책 세 권을 이현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쿵—


“말씀하신 서책입니다.”


서책을 내려다보는 이현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줄곧 기다린 모양.


“오오? 이게 정녕 있더란 말인가?”

“예, 무영전과 동각에 있었습니다. 소관도 찾을 줄은 몰랐습니다.”

“수고 많았네. 정말 노고 많았으이. 내 보아하니 밤을 꼬박 새운 듯한데?”

“그렇긴 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아닐세, 아니야. 이만 퇴청하시게. 나머지는 본관이 함세. 얼른!”

“고맙습니다, 대학사! 허면,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리하세! 허허허— 이게 정녕 궁에 있었다니.”


바람처럼 달려 나가는 중서사인을 보고 싱긋 웃은 이현이 다시금 시선을 서책에 고정했다. 갈변이 심한 표지 오른쪽에 세로로 제목이 쓰여 있었다.


<도덕심의주해(道德深意註解)>

<유마심의주해(維摩深意註解)>

<역심의주해(易深意註解)>


그는 한 권씩 차례차례 제목을 확인하면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기꺼워하시면 좋겠는데.”


때마침 문연각을 찾은 그 사람을.




이윽고.


“대학사! 대학사!”


퇴청하다 말고 돌아온 중서사인이 그 사람의 방문을 알려주었다.


“자네? 무슨 일 있는가? 왜?”

“정왕 전하께서 납시었습니다!”




#




잠시 후, 이현과 견신이 접객용 원탁에 마주 앉았다.


“소신, 그러지 않아도 언제 찾아주시나 하고 기다리던 참이었사옵니다.”

“경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견신은 종종 그래왔듯 거처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내각을 들렀다가 마지막 문연각을 찾은 참이었다. 심법의 창안을 위해 도교와 관련된 서책을 찾는 것.


“있사옵니다, 전하. 소신이 순장의 철폐를 지지해 주신 전하께 어찌 보답하나 고심 중이었사온데, 금일 약소하게나마 보답을 드릴 수 있을 듯하여. 이것 좀 보시옵소서.”

“도덕···심의주해···? 유마···심의주해···? 이름이 같구려?”

“그러하옵니다. 각각 도덕경과 유마경, 역경에 주석을 단 것이옵나이다.”


심의주해는 깊은 뜻을 알기 쉽게 풀이했다는 뜻. 이현의 설명대로 도교의 경전인 도덕경과 불교의 대표 경전인 유마경, 마지막 유교의 대표 경전인 역경에 주석을 단 책들이었다.


“이것들이 왜···?”

“보시면 아실 일이나, 이름도 필체도 문체도 같은 책이옵나이다. 각각 유불선을 대표하는 경전에 누가 주석을 단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시옵니까?”

“누구인데 그러오? 고(孤)가 알 만한 선생이오?”

“모르옵니다. 소신도 모르옵니다.”

“무슨 말이오, 그게···?”

“그저 종화산인이라고 쓰여 있사옵니다.”

“종화···산인(鐘火山人)? 종화산?”


그 대목에서 필연처럼 견신의 뇌리에 떠오른 이는 당연히 그였다. 동굴 속의 그 존재.


-종화산에서 왔노라. 빛이다. 별이다. 달과 바람이다. 그림자다. 꿈이요, 환상이다. 물거품, 이슬, 서리다. 다시 답을 찾아라. 그것은 답이 아니다.


종화산은 상상 속 산의 이름, 실제 지명이 아니다. 그런데, 종화산인이다.


물론, 유명한 신화고 전설에 등장하는 이름이니 얼마든지 빌려서 별호로 삼을 수 있겠지만, 그 존재를 만난 사람이라면 종화산인이라는 이름을 듣고 홀릴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그렇사옵니다. 소신이 서고를 정리하던 차에 우연히 본 기록이 있사옵니다. 소림 육조 혜능, 화산 조사 학대통 등이 종화산인을 만났다는 기록이었사옵니다. 하온데, 소신이 과거에 종화산인이라는 이름을 접한 기억이 있지 않았겠사옵니까? 그에 며칠 밤낮 기억을 더듬어서 찾아낸 것이옵나이다.”

“혜능과 학대통이···?”

“그러하옵니다. 소신이 문관인지라 잘은 모르나, 육조 혜능과 서악도조 학대통은 신묘한 마음공부를 만들어 낸 인물들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맞소, 그들이오.”



그때, 흔들리는 눈동자로 세 권의 주해서를 내려다보는 견신도, 그런 견신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현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현의 탁자 구석에 놓인 붓걸이. 거기 하얀 나비 한 마리가 흰 날개를 펄럭이고 있다는 사실을.


살랑— 살랑—


그리고 지금은 겨울이라는 사실도.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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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42화 +51 24.09.13 6,707 42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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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7화 +32 24.07.26 10,331 548 20쪽
» 16화 +16 24.07.24 10,540 423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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