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마회귀(劍魔回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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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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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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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DUMMY

장작 타들어 가는 소리가 고요했다. 한 꺼풀 벗겨진 밤그늘 아래로 모진 안광이 번뜩였다. 희끄무레한 기운을 안개처럼 퍼뜨린다. 동네형마냥 나긋나긋하던 눈매가 지금은 몹시 첨예하다.


방금까지 독에 골골대던 자라고 믿기 어려웠다. 언뜻 보기에도 대주급을 넘보는 기도. 숙련된 상승고수다.


줄곧 보였던 친근한 어투는 본 성격을 숨기기 위함인가. 설렁설렁한 기류가 적적하게 감돌았다.


“호, 자네도 검신교에서 온 건가.”


첫마디는 매우 담담했다. 엄청난 임기응변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저 태연한 거짓말은 청선에게 통하지 않았다.


“안면 근육 통제가 능숙하군. 이 와중에 당황한 기색 없이 재차 속이려 들다니. 대범하기까지 해.”


청선은 삐딱하게 웃었다. 눈썹을 구부러트린 한소백은 양팔을 펼쳐 보였다. 뻔뻔스러운 목소리가 쾌활하게 흘러나왔다.


“정말 억울하군. 같은 비밀 요원인데 너무 추궁하는 거 아닌가. 아마 네 상관일 텐데.”

“하, 끝까지 발뺌하기는.”

“아니라니까 그러네. 이런 참 곤란하군. 내가 교주랑 친한 사이인데 데려올 수도 없고.”


능청스러운 말투에 청선이 얼굴을 구겼다. 이젠 설득을 포기하려는지 한소백은 반쯤 놀리듯 말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봐라. 넌 십이혼의 총공격을 몰랐지? 고작 말단에 불과하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네가 한 말, 일 리는 있다. 나도 검신교의 비밀 전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니. 다만···.”


스앗─


검이 짧게 공기를 후려쳤다. 영묘한 아지랑이가 날붙이 위로 세차게 일렁거렸다. 도발하듯 까닥거리는 고개.


“뭐, 자세한 이야기는 널 제압하고 들으면 되지 않나. 네가 검신교에서 온 게 맞는다면, 유마억통술(幽魔億痛術)이라는 고문법은 당연히 알고 있겠지. 입만 멀쩡히 남겨 놓겠다.”

“그거 꽤 버틸 만하던데. 아프긴 하지만.”


검객에게 긴 설득은 하찮은 잡담에 불과했다. 발산하는 기파에 대기가 요동친다. 상체가 살짝 낮춰지고, 일직선으로 쏘아지기까지 순간이었다.


쾅! 쩌저저정! 콰앙, 쾅!


불규칙적인 격돌이 굉음을 터트렸다. 일시에 수십 번의 칼질이 뜨거운 불티를 흘리며 이뤄졌다. 흐릿해진 신형이 연신 붙었다 떨어짐을 반복했다.


“상상 이상의 실력이군.”


청선이 불안정하게 호흡하며 말했다. 이내 진각이 쿵 지반을 짓눌렀고, 충격파와 함께 초속으로 재차 거리를 좁혔다.


후우웅─


검풍이 밤공기를 밀어낸다. 벼락과 같은 연격이 공간을 갈라댄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기파가 한소백의 살점마저 조금씩 찢었다.


‘여파만으로 부상을 당할 정도라. 아직 갈 길이 멀군. 반면 저쪽은 거뜬해 보이고.’


한소백이 손목을 거칠게 움직였다. 끝으로 이어진 칼날이 검광(劍光)이 밤중에 서리서리 피어올랐다.


스가각!


어수선한 소음과 함께 검격이 적중했다. 그렇게 찢긴 옷자락이 광풍에 펄럭거렸다. 허나 드러난 살결은 한 치의 상흔 없이 무결했다.


호신기(護身氣). 강기를 이루기 전, 전신을 보호하는 무형의 내공갑주였다.


‘저 기막을 뚫어내야 하는데······. 어쩔 수 없군.’


후우우···


느슨한 들숨이 폐부를 채웠다. 익숙한 구결과 함께 공력이 기혈을 질주한다. 강인한 의념이 깃들며 진기에 신묘한 공능이 깃들었다.


파지직, 파직.


검은 번개가 튀어 오른다. 불경하고 위협적인 광경. 강호 무림에 몸을 담근 자라면 그 별호를 저절로 떠올릴 수밖에 없다.


“검흑제(劍黑帝)?”


무심코 내뱉는 말. 당황과 경외가 혼잡했다. 입을 동그랗게 벌린 청선이 현실을 연신 부정해댔다.


연배를 보나, 상황을 파악해도 검흑제가 직접 나타날 리는 없었다. 가장 큰 가능성은 검흑제의 직전제자. 그럼에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흑도의 절대자가 지닌 악명이 그랬다. 제자의 죽음으로 벌어진 후환. 어설픈 살인멸구는 경천동지할 분노만 불러올 테다.


“제압하고 듣는다고 했나? 나도 동의하는 바다.”


우웅.


대기가 격렬하게 떨렸다. 적적한 밤을 뒤흔드는 흑색의 벼락. 그대로 칼날에 휘감기며 청선을 노려왔다.


쩌저정, 쩌엉!!


수비초가 당혹스럽게 펼쳐졌다. 상대가 품은 검의 묘리도 굉장했다. 연거푸 뒤로 밀려가던 청선은 곧 매서운 검격을 맞이했다.


스가가각─


호신기가 뚫리며 전신이 난도질 되었다. 불그스름한 피를 흩날리며 청선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쿵.


“대체 어떻게··· 검흑제의 제자라니?”


지친 숨결이 의문을 토했다. 죽음을 기다리던 청선은 눈썹을 찌푸렸다. 유언을 남길 자비라도 주는 건지 생각할 때였다.


‘한씨세가와 검신교. 그리고 십이혼. 복잡한 정쟁이야. 저 거대한 집단들에 맞서기 위해선 나만의 영역을 구축해야 한다.’


한소백은 조용히 검신교 밀정의 처후를 생각해봤다. 여기서 처분하기엔 능력이 탐났다. 한 명의 아군이 아쉬운 판국이었다.


‘검신교의 청선. 마침 첩정대원이기까지 하지. 부하로 두면 유용할 거다. 이 자리에서, 그를 품는다.’


바로 말문이 열렸다.


“타인의 신뢰를 얻기 위해선 먼저 믿음을 줘야 한다. 내가 한 번의 인생을 마치며 얻어낸 교훈이지.”

“무슨 소리를···.”

“나는 한소백. 검흑제의 제자이자 독불마검의 차남이며···.”


마지막까지 고민하던 한소백이 말을 이었다.


“죽음을 맞이하고 과거로 돌아온, 회귀자다.”


청천벽력 같은 고백은 느닷없었다. 청선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곧 이어지는 반발이 불쾌감을 표출했다.


“회귀? 터무니없는 망상을 지껄이다니···. 역시나 광인이었구나!”


그때 낮은 음성이 소름 끼치게 울렸다.


“검신교주 혁율성(赫律聖).”


침묵이 잠시 돈다. 청선의 움직임이 멎는다. 저 짧은 읊조림에 담긴 의미를 곰곰이 되짚는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확신 없이 부정했다.


“···그분의 존함, 나도 알 수 없는 걸 어떻게······. 아니, 사실일 리가 없지. 그냥 내뱉는 말에 불과한 거야.”


거짓이라기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여태까지 보여준 한소백의 행보와 분위기가 맹랑한 주장을 뒷받침한 것이다.


“안 믿기는. 흠, 뭐가 좋을까. 무명소졸이라서 너와 관련된 비밀은 아는 게 없군. 그래, 적당한 게 떠올랐다.”

“이번엔 또 무슨 헛소리를···.”

“광남서로(廣南西路) 오주(梧州). 검신교 본단(本壇)의 위치지? 이만하면 꽤 기밀 정보일 것 같은데.”


청선의 눈동자에 동요가 한 차례 일었다가 다급히 사라졌다. 비밀 첩보원의 표정 관리가 잠시 허물어진 것이다.


반응을 보여선 안 된다. 하지만 다짐은 지켜지지 못했다. 한소백의 입에서 연신 흘러나오는 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길주(吉州)의 태화(太和), 휘주(徽州)의 기문(祁門), 장주(漳州)의 용계(龍溪)······ 대략 기억나는 지부의 위치는 여기인데. 더 말할 게 있나?”

“···흡!”


본교의 정보가 유출된 건가, 혹은 검신교의 중책인 건가.


아니면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사실의 증인인가.


혼란은 가시질 않는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해도, 아직 더 부족하다는 듯 한소백은 말을 이었다.


“칠검공(七劍公)이라고 했나? 교주 휘하 검의 달인들. 각각 일정한 검의 묘리에 통달했지.”

“설마.”

“변검공(變劍公)은 한씨가주, 중검공(重劍公)은 남궁 태상가주의 동생, 쾌검공(快劍公)은 대리국(大理國) 장군···. 패검공(霸劍公)은 공석이라고 했나.”


검신교의 손길은 중원 곳곳에 뻗었다. 하나 같이 고강한 무위의 소유자들. 주요 집단의 요직에 있었으며, 당연히 중대한 비밀이었다.


‘임무 때문에 남궁가의 정보까지는 들었다. 헌데 대리국도 있었다고? 패검공의 부재까지 어찌···.’


마음에 의문의 씨앗이 심어진다. 빈틈을 파고들듯 한소백이 평이하게 부연했다.


“이쯤 하면 무지렁이라도 이상하다고 여기겠지. 설령 회귀자가 아니더라도, 내가 비범한 인물인 것도. 그런데 너를 살리고 힘들게 설득한다? 살인멸구하면 그만인 것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논리의 연속이다. 주도권을 빼앗기고 만다.


“거듭 말하지. 나는 회귀자. 그리고 한씨세가의 편임을 분명히 밝힌다. 싸움에서 패배한 네게 구명의 기회도 줬다. 아직도 내 진심을 못 믿나.”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난 검신교의 칼잡이. 너 같이 수상한 놈의 말을 독단적으로 판단할 순 없다. 일단 내가 본교의 상부와 널 주선하는 건-”


한소백이 턱을 매만졌다. 모독의 말이 대수롭지 않게 나왔다.


“검신이라. 아직도 불확실한 허상을 쫓을 건가?”


사나운 눈빛과 함께 신앙을 짓밟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네 교주가 아무리 비범해봤자 결국은 필멸자.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시간을 거스르는 기적을 보인 적이라도 있는가?”

“지금 교주님을 능멸하시는 거냐!”


청선이 으르렁거렸다. 피식거리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한소백은 수다스럽게 말했다.


“우스운 충심이군. 고작 암중세력의 앞잡이로 만족할 셈인가? 너를 귀중히 여겨 천금 같은 기회를 주겠다. 내 곁에 서는 것만으로 너도 특별해진다. 자, 이 손을 잡아라. 나와 함께 누대의 영화(榮華)를 누리자. 그리 약조하마. ”


고혹적일 정도로 거침없는 언행. 마귀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제안을 한다. 단숨에 마음을 휘어잡는다.


이내 거만스러운 말이 종지부를 찍듯 울렸다.


“나는 검마(劍魔). 하늘의 간택을 받은 존재. 내가 바로 천하의 중심이며, 이 시대의 주역이다.”


패도적인 위엄과 기백. 세상을 우습게 여기는 듯한 저 자신감은 몹시 강력한 마력을 지녔다.


손이 뻗친다. 광명을 퍼트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시선이 빛에 따라간다.


“충직한 죽음을 맞이하겠는가, 혹은 거대한 흐름에 편승하겠는가. 네 신앙의 대상을 이 자리에서 결정하라.”


감히 따를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청선은 홀린 듯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렇게 최후까지 간직하고 있던 망설임이 뚝 끝났다.


“신(臣), 청선. 비록 검신교라는 사특한 집단에 몸을 담았지만, 오늘부로······.”


맹신에 가까운 충성이 곧 울려퍼진다.


“당신을 영원토록 따르겠습니다.”



* * *



한소백의 일가가 머무는 처소. 첩정조장 청선이 그 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맞은편에는 한대명도 있었다.


“부친께도 회귀를 밝히신 거였군요. 아, 그래서··· 저번 금휘검객 사건 때 전모를 알겠군요. 저희가 지닌 부각주의 정보와 너무 맞지 않아서 무슨 회유나 밀약이 벌어진 줄 알았습니다.”


청선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의 정체를 들은 한대명이 반기듯 웃었다.


“우리 아들의 선택을 받은 걸 환영하네. 근데 참 웃기군. 시대의 주역? 하늘의 간택? 나이가 사십 줄이 넘은 줄로 아는데 말하는 게 참···.”

“설득하기 위한 과장된 표현입니다, 아버지.”


한소백은 낯부끄러워하며 반박했다. 분위기에 심취해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막 나왔다. 솔직히 내용도 기억이 잘 안 났다.


“그래, 그래. 알았다.”


웃는 목소리가 영 못마땅했다. 한소백은 자신의 부친을 찌릿 째려봤다.


한대명은 청선에게 물었다.


“검신교의 밀정이라. 내 묻고 싶은 게 많은데··· 일단은 간략하게만 말해주게.”

“예, 알겠습니다.”


숨을 가다듬은 청선은 빠르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부상이 다 안 나아서인지 중간중간 신음을 흘렸다.


“본디 첩보원이란 들통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법. 정보 공유가 쉽지 않죠. 특히나 검신교 같은 암중세력이라면 더더욱···. 세부적인 정보는 일단 뒤로 제쳐두고, 우선 중요한 이야기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청선은 얼굴에 음영을 깐 채 엄숙히 말했다.


“한씨가주가 검신교에 반기(反旗)를 꾸미고 있다, 현재 교 내부에서 떠도는 낭설입니다.”

“가주가 반란을?”

“예, 그래서 검신교에서는···.”


충격적인 소식은 연신 이어졌다.


“한씨가주의 숙청을 의논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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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강호는 잔혹하다 24.08.29 446 6 12쪽
29 맹세는 바스러지니 24.08.27 466 7 17쪽
28 복수는 미숙하고 24.08.26 511 10 18쪽
27 귀월객 24.08.25 486 9 16쪽
26 혈령탄 24.08.24 499 8 13쪽
25 가르침 (2) 24.08.23 560 8 17쪽
24 가르침 +1 24.08.22 561 9 15쪽
23 사공자 (2) 24.08.21 569 11 10쪽
22 사공자 24.08.20 607 10 18쪽
21 깨달음 24.08.19 651 11 14쪽
20 살생부 (2) 24.08.18 673 12 12쪽
19 살생부 24.08.17 663 13 13쪽
18 대공자 24.08.16 673 1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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