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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콩
작품등록일 :
2024.07.14 21:13
최근연재일 :
2024.09.08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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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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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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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7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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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8. 성장의 시간 (3)

DUMMY

그토록 자존심 강하던 헤라는 결국 젠을 스승으로 받아들였다.

젠은 15년 인생 중 지금, 역대 최대의 열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지!"


젠은 샌드백을 들고 헤라의 빠른 주먹을 받아냈다.

헤라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땀을 잔뜩 흘렸다.


"간결하게 가는 거야!"


간결하지만 묵직하게, 그리고 빠르게.

헤라는 날이 갈 수록 진화하고 있었다.

글레어의 빠른 속도와 비례하듯, 주먹은 빠른 속도로 공기를 가르고 있었다.


"넌 속도가 무기야! 속도를 살리는 거야!"


젠은 매일을 뿌듯한 심정으로 살고 있었다.

과거, 불량배들을 상대하기 위해 하루하루 강해지던 그 심정과도 같았다.

2달이라는 시간은 이와 같이 흘러가던 중이었다.


"젠! 헤라!"


헤라가 강력한 발차기를 날리려던 순간, 로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젠은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헤라는 그 상태로 다리를 내렸다.

로건의 표정이 평소보다 어두웠다.


"잠깐 시간 좀 내야겠다."


어느새 단정한 옷을 차려 입은 젠과 헤라.

그리고 로건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생산자의 땅에 있는 한 산 속 오지였다.

유트니아 회장, 길버트 머피라는 거물이 잠들 장소는 그 누구의 발도 닿지 않을 것 같은 언덕.

마치 본인 스스로가 잊혀지길 원하는 듯 했다.


땅 속으로 들어가는 관을 그저 넋 놓고 바라봤다.

살면서 처음 느껴본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묘한 감정에 정신이 방황하고 있었다.

울려 퍼지는 악기 연주, 유품을 들고 한발씩 천천히 앞으로 내딛는 유트니아군, 상황에 맞지 않게 눈물 하나 흘리지 않는 사람들.

단 한명, 루퍼트 만이 그를 위해 울고 있었다.


"레이 장례식도 못 치뤄 줬는데... 당신 장례식은 오게 됐네."


루퍼트는 젠과 헤라를 발견하고 애써 눈물을 닦고 걸어왔다.


"젠, 헤라... 와줘서 고마워."


"루퍼트, 아직 6달밖에 안 지났잖아.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게..."


루퍼트는 고개를 돌려 묘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차피 죽게 될 거, 오래 살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많으니... 남은 날들은 버리고 떠나겠다고..."


"그렇구나."


사람들이 잠시 묘비 앞을 비웠다.

기다렸다는 듯이 젠은 그가 잠든 곳으로 다가갔다.


"머피 회장."


젠은 묘비를 바라보며 이제서야 차마 못 했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난 당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 제일 무겁다 생각했어. 근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당신이 내 힘을 막지 않았어도... 레이는 결과가 똑같았을 거야. 인정하기는 싫지만, 내 책임이라 봐야지."


무표정, 정확하게는 어두운 표정에 가까웠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지을 수 있는 최선의 표정이었다.

소중하지 않았기에 슬픈 기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음 앞에서는 찝찝한 이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난 아직 당신이 미워."


젠은 그럼에도 솔직한 감정을 전했다.


"많이 바란 것도 아니야. 아주 조금만 더 신경을 써줬다면 난 지금, 널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겠지. 당신의 결정으로 죽어간 생산자들도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열심히 이어가던 말을 멈췄다.

멀리 보이는 루퍼트의 모습을 보니 더 이상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봐하니 죽고 나서도 이러는 나도 문제가 많네."


젠은 바닥의 장미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가녀린 잎을 바라보며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당신이 말하는 질서 없는 위기가 대체 어느 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가 돼서 당신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으면 해볼게."


장미를 묘비 앞에 내려놓고 뒤 돌았다.


"이봐, 머피 회장. 루퍼트가 그래도 좋은 곳으로 갔으면 한대. 어디가 됐던... 잘 있어라."


나름대로 죽음에 대한 예의는 차렸다고 믿었다.

물론, 길버트가 살아 온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닌 그의 죽음을 슬퍼할 인간들에 대한 예의였다.

적어도 그들의 마음은 위로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소박하게 치뤄진 장례식 후, 루퍼트는 곧 바로 유트니아 본부의 회장 자리에 앉게 됐다.

어찌나 막막한지 앉자마자 자꾸 한숨만 크게 쉬는 모습이었다.

밖에서 들린 노크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로건 리브스 상사입니다."


"들어오세요!"


길버트의 장례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온 로건.

루퍼트는 애써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십니까. 어째,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네. 이제는 괜찮아요."


"다행이군요."


로건은 루퍼트의 앞으로 다가왔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해서요."


그가 루퍼트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6달 전, 내전 이후 피난처에서 마틴과 대화를 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 날은 헤오스가 수호자군에게 사살됐다는 소식이 들려온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둘은 옥상에서 먼 곳을 바라다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스크림이 붕괴되고 있다고 하더군. 오스먼드를 비롯해서 주요 인물들이 제거됐어."


"그렇습니까."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온 날 치고 로건은 하루 종일 근심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의구심이 가득해 보이는군."


"의구심이 들 것도 없습니다."


이미 로건은 스크림의 뿌리가 얼마나 단단한지 직접 확인했다.

고작 이런 식으로 스크림이 붕괴할 리가 없었다.

램페이지의 폭격에 수십이 죽어도, 추격전에 몇이 떨어져 나가도, 집행관의 칼에 수백이 죽어도 그들에게 멈추는 법이란 없었다.


"애초에 믿지 않았거든요."


"응?"


마틴은 의외의 대답에 눈을 크게 떴다.


"스크림은 분노 그 자체에요. 이번 사태로 분노가 더 거세졌으면 거세졌지, 결코 줄어들지 않았을 겁니다. 갈 곳 없이 오직 분노로 얼룩진 생산자들... 스크림이 제일 좋아하는 게 그런 사람들이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손을 뻗을 수 있는 곳도 그 곳 뿐이죠."


그들의 원동력, 분노라는 감정은 이 땅을 더 빠르게 삼키고 있었다.

지금은 잠시 분노한 이들에게 잠시 목줄 만을 채워 놓았을 뿐, 언젠가 목줄이 풀리면 그들은 또 이 땅을 공포로 물들일 수 있었다.

생산자의 땅은 항상 그런 곳이었다.


"나랑 생각이 통하는군."


마틴은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장님은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로건의 질문에 한숨을 크게 쉬며 눈을 떴다.

잠시 말을 이어나가지 못 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며칠 전, 스크림에 가담한 100명이 넘는 생산자들을 처형했다는 소식 들었나?"


"예. 들었습니다."


수호자군이 이름까지 온 나라에 공개하며 발표한 스크림 가담자들 100명, 마틴은 그들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우선, 우리 군은 곳곳에서 사살 당한 스크림 대원의 시체를 모아 신상을 파악했어. 그리고 그들의 가족, 연인, 친구, 동료... 어떻게든 관계가 조금이라도 있는 자들 100명을 손에 잡히는 대로 불러 모았다. 단지 스크림 대원과 관계가 있다는 이유, 그것 하나 만으로 그들을 스크림에 연루된 인물이라고 말이야."


로건은 떨리는 숨을 쉬며 이를 악 물었다.


"그렇게 모인 100명의 생산자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총살 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겠지."


수호자군 입장에서 생산자들의 시체는 소각해야 할 폐기물이나 다름 없었다.

구덩이를 가득 채운 100명의 생산자 시체는 이제 잿더미가 됐을 뿐이었다.


"왜 그런 짓을..."


"공포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진정 시키고, 수호자 정부의 위상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 생각한다."


스크림의 광기 못지 않은 수호자 정부의 만행, 잔혹한 진실 앞에 로건은 어느새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 과정에서 간과한 사실이 있어."


시체 더미에 타오르는 불꽃, 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진정 분노에 끓어오르는 눈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러내리는 법이었다.


"그 100명의 생명 때문에 탄생한 원한들... 그건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거다. 어쩌면 분노는 벌써 감당할 수 없을 정도까지 치솟고 있겠지."


이 모든 사실을 똑똑히 기억해둔 로건은 지금, 루퍼트에게 처음 털어놓았다.

루퍼트 역시 큰 충격에 휩싸인 듯 했다.


"수호자 정부가... 그런 짓을..."


"스크림의 분노는 결코 시들지 않을 겁니다. 이 사실을 꼭 알아두셨으면 했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로건은 그에 맞게 이미 갈 곳을 정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전 앞으로를 위해서 일하고 싶습니다. 숨어 있는 스크림에 대해 조사하고, 그들의 위협이 있다면 앞장 서서 싸우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루퍼트는 진심이 담긴 로건의 각오에 미소를 지어 보냈다.


"할아버지가 당신을 신뢰한 이유를 알 것 같네요."


"사실... 길버트 머피 회장님이 있을 때는 말씀 드리지 못 한 사실이 있어요."


로건은 유트니아군으로서 오랫동안 감춰야 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보였다.


"워낙에 제가 이 곳에 헌신하는 걸 원하셨거든요."


어렸을 적의 사진이었다.

생산자의 땅 어느 곳을 가도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하고 순진한 소년이 나무 아래에 앉아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저한테는 꿈이 있었습니다. 저도 평범한 생산자들과 별반 다름 없었어요. 수호자에게 제 능력을 인정 받고 새 땅을 밟는다는 상상은 늘 저를 행복하게 해줬어요. 그 곳에서 평온한 삶을 살기를 바랬죠."


로건이 유트니아군으로서 처음 내비치는 진심을 루퍼트는 조용히 경청했다.


"유트니아군이 돼서 유능한 군인이 되려고 했던 것도... 결국은 수호자에게 군인으로서의 제 능력을 인정 받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평온한 삶을 위해서는... 그 만큼 제 몸을 불살라야 한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럼, 언젠가는 그 꿈을 찾으러 가실 건가요?"


"네. 전 변함 없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루퍼트는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브스 상사님, 당신이 이 곳에 헌신해주는 건 감사합니다만... 현실적으로 지금 떠나는 게 아니라면 힘들 겁니다. 수호자 정부와 유트니아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고 있어요. 수호자들이 유트니아에 몸 담았던 당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일지..."


"결코 불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루퍼트는 유트니아가 처한 상황을 솔직히 고백하였지만, 로건은 아직은 꿈을 향할 수 없었다.


"그 날, 저는 꿈을 미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모든 걸 두고 떠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쌓였어요."


눈 앞에서 지키지 못한 한 소녀, 그리고 함께 했던 동료들.

그들을 위해서 꿈은 접어둘 수 밖에 없었다.


"적어도 스크림의 위협이 시들기 전까지는... 이 곳에 있겠습니다. 그들이 이 땅을 더 이상은 혼돈에 빠뜨릴 수 없도록... 제 모든 걸 불태우고 떠나겠습니다."


꿈에 대한 열정, 그 보다 강하게 불타고 있는 것은 죽어간 목숨들의 원한을 풀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작가의말

오랜만이에요! 방학이 끝나서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올리겠습니다. 이 작품이 완결 날 때까지 계속!


선호작, 댓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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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Chapter8. 성장의 시간 (4) 24.09.08 5 0 14쪽
» Chapter8. 성장의 시간 (3) 24.09.07 11 0 11쪽
28 Chapter8. 성장의 시간 (2) 24.09.01 17 0 11쪽
27 Chapter8. 성장의 시간 (1) 24.09.01 16 0 12쪽
26 Chapter7. 원래대로 (2) 24.08.31 11 1 12쪽
25 Chapter7. 원래대로 (1) 24.08.31 15 1 11쪽
24 Chapter6. 질서 없는 인연 (6) 24.08.30 21 1 11쪽
23 Chapter6. 질서 없는 인연 (5) 24.08.30 20 1 13쪽
22 Chapter6. 질서 없는 인연 (4) 24.08.29 15 1 11쪽
21 Chapter6. 질서 없는 인연 (3) 24.08.28 16 1 12쪽
20 Chapter6. 질서 없는 인연 (2) 24.08.27 24 3 11쪽
19 Chapter6. 질서 없는 인연 (1) 24.08.15 24 3 11쪽
18 Chapter5. 굳건한 뿌리 (4) 24.08.14 18 3 15쪽
17 Chapter5. 굳건한 뿌리 (3) 24.08.13 20 3 13쪽
16 Chapter5. 굳건한 뿌리 (2) 24.08.12 22 3 11쪽
15 Chapter5. 굳건한 뿌리 (1) 24.08.05 34 3 13쪽
14 Chapter4. 잔혹한 집행관 (3) 24.08.04 28 3 11쪽
13 Chapter4. 잔혹한 집행관 (2) 24.07.22 38 3 13쪽
12 Chapter4. 잔혹한 집행관 (1) 24.07.21 38 2 16쪽
11 Chapter3. 줄기를 꺾다 (3) 24.07.21 43 2 16쪽
10 Chapter3. 줄기를 꺾다 (2) 24.07.21 38 2 15쪽
9 Chapter3. 줄기를 꺾다 (1) 24.07.15 71 2 14쪽
8 Chapter2. 질서 붕괴 (6) 24.07.15 35 2 13쪽
7 Chapter2. 질서 붕괴 (5) 24.07.15 36 2 14쪽
6 Chapter2. 질서 붕괴 (4) 24.07.15 44 2 13쪽
5 Chapter2. 질서 붕괴 (3) 24.07.15 47 2 13쪽
4 Chapter2. 질서 붕괴 (2) 24.07.15 72 2 19쪽
3 Chapter2. 질서 붕괴 (1) 24.07.14 64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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