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던전에 취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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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든너구리
작품등록일 :
2024.07.16 19:24
최근연재일 :
2024.09.0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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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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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2. 가디언 선발 (5)

DUMMY


어지러운 꿈을 꿨다.


온통 새까만 먼 우주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붉은 상흔이 새겨졌다. 시야를 가득 매우는 상흔에서 쉴 새 없이 빛이 번쩍이고 빛에 눈을 감으면 다시 새로운 우주에 새로운 상흔이 수없이 새겨졌다. 위도, 아래도 없는 세상에 다시 색을 알 수 없는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우주 어딘가를 헤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몽에 짓눌려 신음하고 허우적대던 순간, 번쩍이는 상흔 사이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날 엿보는 것이 보였다. 먼 우주보다 더 먼 어딘가에서 날 훔쳐보는 듯한 그 눈빛. 황금빛 눈동자는 깜빡임도 없이 번쩍이는 상흔 속에서 또렷이 날 엿봤다. 그리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흐억."


크게 숨을 들이쉬며 기나긴 꿈에서 해방되었다. 자다 깼을 뿐인데 호흡이 진정되질 않았다. 야전용 24인 텐트같은 천장, 조약하게 만든 진흙 토기, 아구가 맞지않는 가구들, 그것들이 뿜어내는 낯선 공기. 혼란스런 정신이 가다듬어지지 않는다. 여기가 어디더라? 내가 누구였지? 내가 왜.....?


"팀장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귀가 뾰족 솟은 금발의 엘프녀가 나를 보고 있다. 아, 아직 꿈인가? 꿈이 깨질 않는구나.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팀장? 팀장? 내가? 그러고보니 나 던전 마스터로 취직했지..... 던전 마스터.... 그런 직업이 있었나? 응? 응?


"흐어어어억! 니아?"


갑자기 정신이 든 나는 벌떡 일어나서 니아의 손을 잡았다. 눈이 동그래진 니아가 2배는 귀여워보였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여긴 어디야? 백호족은? 너 안 물렸어? 나는 안 물렸나? "

"아유, 아유. 말씀하시는 걸 보니 멀쩡하시네요! 진정하세요. 아무도 안 물렸고 멀쩡합니다."


니아는 웃으며 내 어깨를 잡아 다시 눕혔다. 마치 어린애처럼 니아의 손길에 따라 침대에 다시 누운 나는 이불을 끌어올려 토닥거리는 니아의 손길을 느꼈다. 만병 통치 란게 이런거구나.


"고갈된 마나를 채우러 몸 속으로 대량의 마나가 휘몰아치면서 생기는 거에요. 단순 마나릭(Mana Leak)이라 마나 버닝까지는 안갔어요. 다행이지 뭐에요."


니아는 내가 잡았던 손을 빼서 이불 위에 살포시 올려두고 뒤 쪽 선반에 올려둔 컵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그러고보니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냥 물인 줄 알았던 컵에는 꿀물이 들어있었다. 아무렴 어때. 맛이 좋았다.


"그래도 2시간이면 회복이 빠르시네요.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적성자이신지도 모르겠어요."

"2시간? 그렇게나?"

"네. 물론 제가 마나 순환을 도왔다는 걸 잊으시면 안되요?"


니아는 빈 컵을 받아들며 웃었다. 그 미소 때문인지 꿀때문인지 몰라도 속이 따뜻해지고 피가 도는 게 느껴졌다.


적막하던 텐트가 소란스워진 것을 눈치 챈 거대한 덩치의 하얀 호인이 한 명 들어왔다. 쓰러지기 전 기억에 또렷이 남은 백호족의 족장, 칸이었다. 거친 털만큼이나 거친 숨소리를 내쉰 그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괜찮소?"

"어....예. 덕분에요."

"핫핫핫! 무리하셨소! 그렇게 앞뒤 안가리고 마나를 방출하하는 걸 보니, 마스터가 구상하는 던전이 기대가 되오!"

"감사합니다."

"좋소. 아주 좋소! 그대를 위해 던전 가디언이 될만한 자들을 선별해 두었으니, 어디 한 번 만나 보시겠소?!"

"아, 정말 괜찮으신거죠? 늑대족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고하던데......"

"하! 그런 꼴통들하고 비교하지 마시오! 집 지키는 개 버릇은 없어질 줄을 모르니!"


늑대족 이야기에 그는 이빨을 보이며 그르릉거렸다. 늑대족은 곰을 싫어하는 것 같더니 여기는 늑대를 싫어하는 건가? 물어봤으면 싶었는데 긁어부스럼 만들까봐 입을 닫았다.


"니아."


나는 몸을 일으켰다. 니아는 이불을 걷어서 일어나는 나를 부축했다. 굳은 몸을 살짝 비틀었더니 뚜두둑하며 근육이 화답했다. 자고 일어나서 그런가 몸이 더 가벼웠다. 익숙한 손짓으로 주변에 마나를 집어 입으며 말했다.


"가시죠."


칸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라기보단 연극무대의 암막커튼 같은 것을 젖히고 밖으로 나서자마자 잠시 잊고있던 겨울 바람이 휑 하니 먼저 느껴졌다. 성긴 눈 조각이 날아와 볼을 스쳤다. 실제로 눈이 내린 건 아니었다. 서넛의 호랑이들이 몸에서 김이 나도록 몸을 풀며 눈밭을 구르는 바람에 눈 먼지가 날린 것이었다. 그리고 우르르 모인 다른 이들이 빙 둘러 그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칸. 준비되었습니다."


곁에 선 족장에게 한 여인이 다가왔다. 향이랄까 기분이랄까, 순간 느껴지는 이질적인 느낌에 그녀를 보았다.


"어?"


나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백호 족의 부락일 텐데 칸에게 준비가 되었음을 고하는 이는 어떻게 봐도 곰이었다. 그리즐리인걸까. 말하지 않아도 마나를 다룬다는 그리즐리들의 특수한 마나 흐름이 이질적인 느낌의 이유였다. 내 호들갑에 그녀가 무심히 나를 내려다 보았다.


"호랑이들 사이에 어찌 곰이 있는가, 라고 생각하셨나 보군요. 자주 보는 반응이니 딱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예. 그래도....저 죄송합니다."


잡아떼기도 뭐 해서 바로 사과했다. 곁에 있던 칸이 커다랗게 웃었다.


"카핫핫! 솔직하시구려. 마누라가 곰이라는 것에 놀라는 인간들이 많긴 하오. 하지만 뭐 우리가 피만 다르지 같은 마물 아니겠소! 카핫핫!"


아니, 바로 그 피가 다른 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잠시 우리 세계에서 통용되는 생물학을 떠올려 보았지만 뭐 괜찮다고 하니 괜찮겠지. 아니 그것보다 족장의 부인인건가? 늑대들은 그리즐리를 상당히 경계하던데 여기는 분위기가 다른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오히려 백호족은 늑대들을 좀 싫어하는 것 같던데.....


나는 다시 그녀를 잠시 훔쳐보았지만 거기에 대해 더 생각을 이어갈 상황은 아니었다. 칸은 공터에서 몸을 풀던 호랑이들에게 대열을 맞추라는 명을 내렸다.


흩날리던 눈 조각이 잠시 멈췄다. 충분히 몸을 풀던 3인의 용사들의 거친 숨소리가 대신 밀려왔다.


"자, 다들 산 아랫자락에 던전이 열렸다는 것을 알 것이다. 오늘 그 던전의 마스터가 가디언이 되어줄 자를 찾아 우리 부족을 방문했다. 던전의 마력핵에서 발생하는 정순한 마나의 맛은 모두들 잘 느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스터에게 기꺼이 우리의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나!"

"우오오아아아아!!!"


쩌렁쩌렁한 호랑이의 포효가 공터를 너머 산 전체를 울렸다. 어마어마한 기세에 살짝 기가 죽은 것을 니아가 눈치 챈 모양이다. 그녀의 고운 손이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려줬다. 그래. 꿀릴 거 있나 뭐!


"첫째 후보는 우리 백호족이 자랑하는 역사! 오우거와 3일 연속 팔씨름을 했다는 전설을 가진 수문장! 페드로!"

"오오오오!"


족장의 말에 어지간한 호랑이보다 어깨가 1.5배는 커다란 호랑이가 손을 뻗쳐 들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말 없이 성대를 울려 낮은 그로울링을 들려주며 나를 내려다 보는 그의 눈빛은 흡사 먹이감을 앞 둔 포식자의 것과 같았다. 하지만 겁이 나지는 않았다. 공포에 면역이 생긴 걸까? 니아의 기운 탓 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도 지지 않고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크르르르."


그는 그로울링을 멈추고 희미한 미소를 남기고서 자리로 들어갔다. 곧 이어 두 번째 선수의 소개가 이어졌다.


"다음 후보는 자타공인 최강의 무투가, 타고난 격투 센스는 푄 그름 마저도 인정할 정도! 17인의 레이드를 단 한대도 맞지 않고 격파했다는 전설의 주인공! 크라인!"

"크아아아앙!"


적당한 공포를 담은 포효를 펼치며 크라인이 한 걸음 나섰다. 균형잡임 몸에 갈라질 듯 온 몸으로 뻗은 잔근육들이 섬세하게 다듬은 조각의 느낌을 주었다. 한 걸음, 한 동작 움직일 때마다 마치 잔근육들이 꿈틀대는 모습이 어느 예술품을 관람하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크라인은 앞에 서서 어금니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게 기분좋은 웃음인지 그저 가소로운 비웃음인지, 혹은 맛있는 식사를 바라보는 포식자의 그것인지를 알 수 없단 단점이 있었지만 나는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호랑이는 적이라고 인식한 상대에게 어금니를 보이는 습성이 있대요."


옆에서 니아가 남들이 들을세라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아. 그렇구나. 니아. 굳이 몰라도 되는 정보, 감사합니다.


크라인이 들어가자 칸은 마지막 선수를 소개했다.


"마지막 선수는, 우리 부족의 영웅! 푄 그름이 사랑한 가디언! 전성기 셰리프 산맥의 대호라 불린, 전 족장! 라무!"

"우아아아아아!!"


족장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이전과는 다를 우뢰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공포심에 어지간히 내성이 생긴 상태인데도 압도적인 환호와 거기서 느껴지는 부족원들의 자신감이, 마나를 담보한 피어보다 더 큰 공포심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 라무라 불린 호랑이는 깊이 패인 주름을 몸 곳곳에 가득품고, 채 아물지 못한 상처들을 위압적으로 흔들며 다가왔다. 산이 움직이고 바람이 튕겨저나가는, 거대한 나무 혹은 마왕 코퍼레이션 빌딩같은 건물이 나를 내려다봤다.


"잘 부탁하오."


그 한마디에 순간 다리에 힘이 빠졌다. 아무런 기교도 사심도 없는 담백한 한마디가 산맥에 오르기 전 느꼈던 드래곤 피어와 같은 압박처럼 다가왔다. 온 몸이 떨리고 식은땀이 폭발했다. 대답은 커녕 차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것 마저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


"라무님. 오랜만에 뵙네요. 잘 부탁 드려요."


불쑥, 니아가 내 앞으로 한걸음 나와 그에게 알은 척을 했다. 니아의 그림자가 거대한 그의 그림자 위에 덧씌워지자 정신이 들었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내려다 보는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요정 여왕이여. 세월이 흘렀는데 그대의 푸르름은 여전하구려. 기대가 크오."

"어머. 과찬이세요."


니아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격식을 갖췄다. 라무님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며 돌아섰다.


"자, 그리고 이들을 상대하는 셰리프 산맥, 푄 그름님을 대신하는 던전의 마스터!"


응? 푄 그름 대신? 그 정도는 아닌데?


"드래곤의 마나를 갈무리 한, 가장 정순한 마나의 통솔자!"


드래곤의 마나를?


"귀공의 성함이 어찌 되셨소?"


포효하던 칸이 살짝 고개를 돌려 조용히 물었다.


"우성, 정우성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초의 드래곤 마나의 마스터로 기록 될, 정우성 마스터!"


아니,아니, 아니지 않아? 내 던전은 볼품없는 산 속 조그만 동굴인데? 너무나 과한 과대과장 광고에 놀란 나는 니아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내게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주고는 어깨를 펴고 당당히 호랑이들의 환호를 즐겼다. 그녀를 따라 나도 어깨를 폈다. 당당한 내 모습을 본 호랑이들은 다같이 으르렁 거리며 어금니를 뽐냈다.


"호랑이는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볼 때 어금니를 보인데요."


옆에서 니아가 속삭여줬다. 뭔가 좀 전에 들은 이야기와 좀 차이가 있어보이지만 알고 싶지 않은 정보라는 건 차이가 없었다. 나는 우는 눈으로 힘겹게 웃는 미소를 만들어냈다. 내 미소에 따라 호랑이들의 사나운 웃음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내가 무리 가운데로 들어서자 정렬해있던 세 백호족 중 첫 번째로 소개된 호랑이 외에 둘은 무리 속으로 돌아갔다. 열광스런 환호가 내딛는 걸음에 맞춰 사그러들고, 눈 덮인 고산 지대의 차가운 공기가 거대한 덩치의 호랑이 사이에 남았다. 내 허리만한 허벅지를 가진 페드로는 안그래도 넓은 어깨를 펴며 위세를 들어냈다. 골격이 재편성되기라도 하는 것 처럼 뚜두둑 소리가 울렸다.


"선수는 양보하겠습니다."


울대를 울리는 낮은 그로울링에 실린 목소리.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 목소리에 주저 앉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저것 니아가 배려해 준 덕에 내게는 고양이가 하악질 하는 정도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나는 화답했다.


"나야 땡큐지!"


오른쪽 어깨로 양 손을 올려 해머를 들어올리 듯 몸을 감싸는 마나를 뽑아올렸다. 겨울의 한기가 몸으로 밀려들며 마나가 야구방망이로 형상해 되었음을 느껴졌다. 오전에 만났던 그 감기 호랑이에게만큼 효과가 있을까? 상대의 덩치를 보니 다소 의문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이 곳은 마법의 세상. 내 의지가 실현되는 곳이다. 될 거야. 아니, 분명히 된다. 한방으로 정리해주겠어.


"으아아앗!"


처음에 와서 봤던 대검 사용자였던 플랑의 큰 내딪기를 상상하며 강력한 디딤발을 딪었다. 까득, 하며 설게 쌓인 눈이 다져졌다. 부우욱, 찬 공기가 얼어붙기라도 하는 듯이 거칠게 찢어지고 허리가 세차게 돌아 나갔다.


홈런!


밖에서라면 확신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 나는 홈런처럼 저만치 날아가는 상대를 그렸다.


퍽!


어라? 들리는 소리도, 보이는 광경도 사뭇 달랐다. 왜 하늘이 보이는.....?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지만 생각을 이어갈 새도 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자신을 자각하고서 금새 상황이 이해갔다. 페드로는 그저 귀찮다는 듯이 팔을 휘저었을 뿐이었지만, 나는 그 힘에 밀려 나뒹굴고 있었다. 허겁지겁 일어서서 자세를 잡는 나를 보며 페드로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뭡니까? 던전의 마스터가 왜 타격을 하는 겁니까? 몸풀기같은겁니까? 선수를 양보하겠다고 했는데, 기회를 버리는 겁니까?"


아, 뭔가 잘못됐다. 나는 급히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준비운동 삼아 어깨랑 허리를 푼다는 게 범위가 좀 컸어요. 정말요, 진심이요!"

"응? 아 뭐 그렇습니까? 하긴, 방금까지 누워있었으니까 그렇겠죠. 먼저 와서 몸을 푼 입장에서 마스터님을 배려하지 못했군요. 죄송합니다."


살짝 으르렁거리던 페드로는 멋쩍게 인상을 펴더니 몇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자, 충분히 몸을 푸시죠."


나는 서둘러 국민체조를 시작했다. 팔부터 돌리고, 다리, 어깨, 목을 풀며 생긱했다.


어떡하지? 감기 호랑이하고는 전혀 다르잖아?


나는 허리를 돌리며 니아를 곁눈질했지만 그녀는 과일 말린 것을 주워먹으며 느긋하게 내게 손을 흔들 뿐이었다. 구경났냐!


뜀뛰기를 시작했다. 어떡하지? 머리 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날아다녔지만, 어느 것 하나 붙잡을 수 없었다. 그 수많은 선택지에서 도출되는 결과에 어느 하나 차이가 없었으니.


나는 오르락 내리락하며 숨을 고른 후 결심했다.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그야말로 난생 처음으로, 국민체조 2절을 시작했다.


"어,뭐야? 다시 하는 겁니까?"


페드로가 예상한 질문을 해왔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거 원래 2회 1세트라서. 둘,둘, 셋,넷!"

"아, 그렇군요. 자꾸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아, 그 가슴 펴는 동작 다음은 옆구리 늘리는 동작이었는데요."

"아, 다섯, 여섯, 일곱, 여덟! 한 번 더 하죠, 뭐! 하나, 둘, 셋, 넷!"


국민 체조를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했던 적이 있었던가? 난 이게 이렇게 힘든 줄도 몰랐다. 군대에서도 거의 '2절은 생략한다', 고 했던 것 같은데. 하더라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지 뭐 이렇게 목숨걸고 각 잡은 적이 있었나?


그래도 속절없이 체조는 끝이 다가왔다. 숨고르기를 하머 커다랗게 팔을 오르내리는 사이 나도 모르게 마음에 결심이 섰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마나를 잘 다루고 못 다루고의 문제가 아니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니아는 내 쪽은 보고 있지도 않다. 어딜 보고있는 거야? 아니, 신경 좀 써달라고. 내 가이드 역 아니었냐? 언제는 자기만 믿으라더니, 정말 믿을 사람 하나도 없구만.


그래, 눈 딱감고 한대 제대로 맞는 척 하고 끝내지 뭐. 마나로 충분히 막을 쌓으면 죽진 않을것 같은데. 내가 너무 시간을 끌어서인지 페드로마저도 내게 등을 돌리고 딴 곳을 보고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내가 몰래 급습하면 어쩌려고? 응? 지금 제대로 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슬쩍 생각만 했을 뿐인데, 정말 살짝 의문을 가졌던 것 뿐인데, 마치 내 마음을 잘 알았다는 듯이 손에 묵직한 마나 몽둥이의 기운이 느껴지고 날 선 차가운 공기가 살 속으로 파고 들었다. 기분적으로 지금까지 손에 쥐어졌던 몽둥이 중에 가장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 아니, 죽이기라도 하란거냐고! 안돼! 안돼! 돌아가! 마나 패딩으로 돌아가라고!


"팀장님!"

"으악! 아냐! 아냐! 그럴 생각 없다고!"


순식간에 마나가 흩어졌다. 내가 갑자기 큰소리를 내는 바람에 페드로마저도 나를 돌아봤다. 상당히 화가 난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냐! 아니라고! 몰래 칠 생각은 없...없었어요!"


나는 허둥대며 손을 휘저었고,


"자꾸 뭐라는 거에요!"


날 듯이 다가 온 니아가 등짝에 스매싱을 날렸다. 마나가 흩어져서 그런지, 날이 추워서 그런지 더 없이 매운 맛이 느껴졌다.


"그리즐리 부족이 찾아왔어요."

"그리즐리? 뭐? 왜? 나 때문인가?"


푄 그름의 가디언 4 부족 중, 가장 강력한 부족으로 생각되던 그리즐리. 백호족 이후에 찾아 볼 생각이었는데, 먼저 알고 찾아 온 걸까? 나름대로 서열 1위인데 자신들을 먼저 찾지 않아서 화라도 났나? 그냥 거리 순으로 접근한 것 뿐인데. 그러고보니 순간 이동했는데 거리 순이 꼭 중요했나 싶기도 하네.


"글쎄요, 그건 아닐 것 같은데. 그 만한 시간은 없었어요. 원래 백호족과 교류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요."


니아는 칸의 부인인 웅녀를 슬쩍 보며 말했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족장의 부인이 그리즐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 전쟁 속에서 튼 전우애라고 하기도 애매하잖아? 거기다 다른 백호족들의 분위기와는 달리 그녀의 표정은 온화했다. 아, 혹시 전쟁 중 잡혀와서 강제로 결혼 당했나? 아니 그런 것 치고는 너무 자유롭게 있는 것 같은데. 그럼 뭐지? 백호족의 분위기를 보면 그리즐리가 사돈댁 방문하는 사절로 보이진 않았다. 아까부터 모두의 살기 비슷한 흉흉한 기운이 공터를, 부족 마을 전체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이 기세를 뚫고 들어 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 칸! 잘 있었어? 환영 인사라도 하려고 다 나와 있는거야?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와하하하하."


들어왔다!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시덥잖은 대사를 나열하며 선두에 선 곰이, 짙은 회색 털을 날리며 불쑥 들어왔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이를 제지하는 이도 아무도 없었고 뒤를 이어 나머지 곰들이 따라 들어와서 3열 종대의 전투 진형 같은 대열로 섰다. 백호족은 족장인 칸을 중심으로 나와 페드로의 경기장을 형성한 인원들이 갈라서는 바람에 익숙한 학익진 같은 모습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전쟁 직전의 분위기.


"례-스퓌. 공기도 찬데, 먼 곳까지 걸음하셨군요."

"아이, 뭐. 고원에 사는 이들이 이 정도를 추위라고 할 게 되나? 아, 그러고보니 그런 호랑이가 하나 있었던 것 같긴 하네. 어딨나, 약골은?"

"어른이 되려고 문을 나섰습니다."

"그래? 어른이 되는데 용연향이 그렇게 필요한가?"

"........."


순간 칸의 대답이 멎었다. 주위 분위기가 한층 더 냉각되고 추워졌다. 그러고보니 나 마나가 흩어졌었지? 나는 냉큼 집중해서 마나 패딩을 둘렀다. 패딩을 입고 나서야 깨달은 흐르는 코도 냉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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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챕터 2. 가디언 선발 (1) 24.08.07 22 1 21쪽
5 챕터 1. 이세계 던전에 취업했습니다.(5) +1 24.08.06 27 1 17쪽
4 챕터 1. 이세계 던전에 취업했습니다.(4) 24.08.05 30 2 17쪽
3 챕터 1. 이세계 던전에 취업했습니다.(3) +1 24.08.04 33 2 20쪽
2 챕터 1. 이세계 던전에 취업했습니다.(2) 24.08.04 47 2 22쪽
1 챕터 1. 이세계 던전에 취업했습니다.(1) 24.08.04 64 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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