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씨는 조총장인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4.07.19 11:52
최근연재일 :
2024.08.15 13:09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968
추천수 :
31
글자수 :
144,572

작성
24.07.26 16:06
조회
33
추천
2
글자
11쪽

입궐(入闕)

DUMMY

희선은 생전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늘 사고를 치고, 헤헤거리며, 도망다니고, 잘못했습니다를 반복했던 그녀였지만, 손병도의 눈앞에서 싫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되었다. 금혼령도 떨어졌고, 형식적인 초간택 서른 명 명단도 나왔다. 이미 대충 내정이 되어 있고, 네 명에게 재간택 단자를 내리게 될 것이다. 그중 하나가 너다, 희선아.”


정면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던 희선이 말했다.


“아버지, 저는 궁에 들어갈 생각도, 세자빈이 될 생각도 없습니다. 싫습니다.”


희선은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손병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희선아, 너는 이 아비를 천하의 병신으로 보느냐?”


평소 험한 말을 잘 하지 않는 손병도의 성향을 아는 희선은 깜짝 놀랐다.


“네? 아, 아닙니다, 아버지.”


“난 널 누구보다도 잘 안다. 얼굴도 소문이 날 정도로 곱고, 잘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의외로 착하고.”


“의외로요?”


“어험. 아비가 말하는 중이지 않느냐.”


“네, 아버지.”


“누구보다도 총명하고 호기심이 많고, 격식 차리는 것이나 답답한 것 싫어하는 네가 세자빈이 되고 싶어할 것으로 내가 생각했겠느냐?”


“그.....아닙니까, 아버지?”


손병도는 살짝 미쳐있지만 똑똑하고 이쁘고 착하며 사랑스러운 딸을 쳐다보았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사고가 좀 굳어있는 자신과 현모양처 그 자체인 처 민씨 사이에서 어떻게 이런 딸이 나왔는지 늘 의문스러웠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는 미소지으며 직설을 던졌다.


“넌 깍두기니라.”


“네?”


“북인들의 세자빈 간택 잔치에 넌 그냥 들러리인 것이다. 알겠느냐?”


눈치 빠르기론 둘째라면 서러울 희선이 이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아, 재간택, 삼간택 중에 어차피 탈락할 것이니 대충해라, 이 말씀인 것입니까?”


“반만 맞다, 희선아. 조용히 있다가 궁에서 나오면 된다.”


“조용히....라 하심은?”


“어차피 네가 세자빈으로 간택될 리 없을 테니까 제발 미친 짓만 하지 말란 말이다, 희선아.”


“아.”



그 뒤로 희선은 궁 안에서 조심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에 대해 한참 설교를 들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 슬슬 지쳐갈 무렵, 희선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영국군이 개풍 대장간을 빼앗으려 한다는 걸 혹시 알고 계십니까?”


“아니, 그건 몰랐구나.”


“공조와 예조의 공문서와 같이 영국군 장교가 오늘 왔었습니다.”


희선은 오늘 일에 대해 소상히 말했다. 표정이 굳은 손병도가 입을 열었다.


“한성과 개성, 삼남 지역 몇 군데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네가 들락거리던 개풍 대장간도 엮여 있는 줄은 몰랐다.”


“외교나 국제적 협상 같은 것은 예조에서 담당하는 것 아닙니까?”


“원칙이야 그렇지. 하지만 예조에서는 국내의 예(禮), 사신이나 공사(公使) 접대 등을 위주로 한다. 영국군과 병기에 관련된 일은 병조나 공조, 아니 의정부(議政府)정도까지 가야 제대로 논의가 된단다. 영국과 관련된 일에서 내가 무언가 해 볼 수가 없단다. 미안하게 되었구나.”


“하면, 이대로 눈뜨고 그냥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내가 한번 알아는 보겠다. 대신.”


“네.”


“제발 세자빈 간택과 관련해서 조용히 지나갈 수 있게 해다오.”


“알겠습니다, 아버지.”


손병도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너도 내 정치적 입지가 얼마나 불안한지는 잘 알고 있겠지? 특히나 왕실과 관련된 일에서 조그만 흠이라도 잡히면 우리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정말로 조심해야 한다. 알겠느냐.”


희선도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이번엔 정말로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그럼 다섯 살때부터 어제까지의 명심하겠습니다는 뭐였느냐.”


“이만 말씀을 끝내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알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허허, 내 딸이지만 넌 참...허허.”


부녀가 마주보며 활짝 웃었다.



**



다음날, 다시 대장간에 간 희선이 웅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뺨 다친 데는 괜찮은가? 밤새 아프거나 열나지는 않았고?”


“그 정도로 많이 찢어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애기씨가 잘 치료해주신 것도 있고.”


“어제 만들어 놓은 이것은 검수해 보았는가. 쓸만하던가.”


옆에 있던 총열을 집어들어 내부를 들여다보고 툭툭 두들기던 웅수가 말했다.


“애기씨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만드신 분이 평을 해 보시지요.”


총열을 받아들어 곧기와 강도, 표면상태를 보던 희선이 빙그레 웃었다.


“총열 내부만 조금 손질하면.....아주 좋아.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빈말이 아니라, 완벽합니다. 그간 여기서 만든 총열 중에 최고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 솜씨를 썩히기는 너무 아깝습니다.'


웅수는 꾹 참았다. 안 될 일이었다.


“오호호, 내가 또 한다면 하거든. 나 정말 잘나지 않았나? 으핫핫핫~”


“그렇고말고요, 애기씨.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러지 말고, 예전처럼 ‘잘나긴요, 아직 멀었습니다. 그리고 화적떼처럼 흉악하게 웃지 마십시오, 애기씨.’ 이렇게 말해 줄 수 없겠나?”


웅수의 목소리까지 흉내 내어 가며 희선이 분위기를 돌려보려 했다.


“애기씨, 이 천한 놈 좀 봐주십시오. 요즘 분위기가 네안더들에게 너무 안 좋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한숨을 한번 내쉰 희선이 대답했다.


“휴우, 그래야만 하겠다면, 알겠네. 그리고 아버지께도 영국군 문제 말씀드려 보았는데, 쉽지는 않을 것 같아. 요즘 영국인들이 마음 먹고 힘을 쓰면, 조선땅에서 막을 자가 있겠는가.”


“아이구, 어쩌자고 대감마님께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닙니다요, 소인이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도 한번 알아보겠다고는 하셨으니, 조금 지켜는 보세나.”


“알겠습니다, 애기씨.”


“그리고, 나 당분간 대장간에 못 올 것 같아.”


“어디 멀리 가십니까? 또 한성으로?”


희선은 세자빈 간택 관련한 일을 말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웅수의 걱정스런 표정을 보니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하나쯤 말해주고 싶어졌다.


“음, 한성으로 가긴 가는데, 내가 세자빈 후보에 들었다네. 빈 간택문제로 한동안 입궐을 해야하네.”


웅수에게 한 이야기였는데 놀라는 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다.


“네에에에~?”


외석과 구봉이를 비롯한 대장간 인원들이 네댓명 서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었다.


“세, 세상에 애기씨가 세자빈이요?”


“우와, 우와 정말요?”


놀라게 해주려는 의도로 한 이야기였지만, 다들 너무 놀라 희선은 도리어 약간 당황했다.


“아니, 세자빈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후보에만...”


“우와, 그럼 나중에 중전마마가 되시는 겁니까?”


“아니 애기씨가 세자빈이 되시다니, 세상이 어찌 되려고...”


“온 조선을 불과 망치와 욕설로 뒤덮으시려나.”


- 깡!


호들갑 떠는 녀석들을 보고 웅수가 망치로 모루를 치는 소리였다. 다들 즐거운 것은 알겠으나, 예전처럼 격의 없이 대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쳇, 재미없어, 라고 생각하며 희선이 말했다.


“아닐세. 그냥 세자빈 간택 후보에 들었을 뿐이야. 그리고 아마 다른 규수가 세자빈이 될 걸세. 유력한 사람이 이미 있고, 아니더라도, 왕실의 높으신 분들도 눈이 있으시면 나를 뽑겠는가?”


다들 눈으로 웃고 있었다. 희선도 웃었다.


“금방 돌아올거야. 그간 잘들 지내시게. 야장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평소처럼 잘 계시게나. 그리고 구봉이 너, 넌 지금 좀 봐야겠다.”


겁먹은 구봉이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왜 그러십니까, 애기씨?”


“왜긴 왜야. 물 담금질 연습했어? 따라와.”


“아, 아니. 애기씨 지금은 제가 할 일이...”


“할 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리와.”


귀를 잡힌 구봉이가 희선에게 질질 끌려갔다. 곧이어 대장간 내에 구봉이의 곡소리가 울려퍼졌다.



**



며칠 후, 조정에 가례도감(嘉禮都監)이 설치되었고, 서른 명 처녀들의 사주단자가 제출되었다. 사주단자에는 처자의 생년월일과 부친부터 4대조까지의 이름과 직함이 다 기록되어 있다.


형식적인 초간택 서른 명의 심사가 끝나고 정해진 수순으로 네 명의 규수가 입궐을 하게 되었다.


규수들의 옷은 다홍치마, 노란색의 저고리와 초록색 견마기(예복용 덧저고리)를 입도록 되어 있었다. 다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입궐하는 것이 관례였다. 아래위로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 희선은 턱을 괴고 멍하니 있었다.


“애기씨, 가마 오랜만이시죠?”


종효가 무료해 할 희선을 위해 말을 걸었다.


“언제 타봤는지 기억도 안 나요. 이걸 왜 타는지 모르겠어요. 가마꾼 힘만 들지, 느리지, 아래위로 흔들려서 엉덩이는 불편하지, 아오 진짜.”


“그래도 이제 남들은 평생 한 번도 못 보는 궁궐 내를 구경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요. 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을까요?”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래도 나랏님이 계신 궁궐이니 특별한 것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군기시(軍器寺-조선의 병기, 기치, 집물 따위의 제조를 맡은 관청) 구경 같은 거 할 수 있으려나요.”


종효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애기씨, 아시다시피 군기시는 궐 내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 노야소(爐冶所-궁 내 왕실 대장간 겸 작업장)라도?”


“저는 애기씨 농담 좋아했었는데, 오늘은 농이 그닥입니다.”


“저도 긴장해서 그래요.”


“문 앞에 다 왔습니다. 잠시 내리셔야 합니다.”


궐문 앞에 솥뚜껑이 놓여 있었다. 사주단자를 낸 처녀들은 솥뚜껑 꼭지를 밟고 지나가는 것이 관습이었다. 다다닷 달려서 꼭지를 밟고 멀리뛰기를 해볼까 잠시 고민한 희선은,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얌전히 솥뚜껑을 밟은 후 다시 가마에 올랐다.


잠시 가마를 타고 이동한 후보들은 대비전으로 가기 전 잠시 대기를 해야 했다. 가마꾼들은 이제 가마를 들고 돌아가야 했다. 종효가 희선에게 인사를 했다.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씨. 정말 얼금이 하나만 있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른 이를 좀 보낼까요?”


“괜찮아요, 괜찮아. 애도 아니고 뭐 시중들 사람을 주렁주렁 달고 가요?”


“분위기가 그게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다른 규수들은 기본적으로 서너 명, 사람이 많이 따르는 가마는 열 명 가까이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유모에 몸종 둘셋, 심지어 얼굴 화장과 옷치장을 해줄 수모(手母)가 둘씩이나 따라가는 가마도 있었다.


“아휴, 나야 뭐 후닥닥 탈락하고 집으로 갈 텐데요 뭐. 괜찮아요.”


“잘 지내고 돌아오십시오. 곧 다시 뵙겠습니다.”


“종효 아재도 나 떨어질 거라 생각하고 있네요?”


대답없이 종효는 씩 웃었다. 그리고 다른 가마꾼들과 함께 가마를 들고 나갔다. 누구보다도 희선을 잘 아는 종효는 걱정이 되었다. 물론 희선이 다른 세자빈 후보들에게 주눅들고 겁내고 슬퍼할까봐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애기씨는 조총장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제목변경 공지 24.07.24 30 0 -
27 시집가는 날 (2) + @ 24.08.15 17 1 17쪽
26 시집 가는 날 (1) 24.08.14 16 0 12쪽
25 벽란도의 노을(완결) + 후기 24.08.13 17 1 9쪽
24 불, 힘과 마법 (6) 24.08.13 21 1 11쪽
23 불, 힘과 마법 (5) 24.08.12 18 1 12쪽
22 불, 힘과 마법 (4) 24.08.11 17 1 11쪽
21 불, 힘과 마법 (3) 24.08.10 18 0 11쪽
20 불, 힘과 마법 (2) 24.08.09 20 0 13쪽
19 불, 힘과 마법 (1) 24.08.08 22 1 12쪽
18 게임의 법칙 24.08.07 21 1 11쪽
17 총은 요술 부리는 막대기 24.08.06 22 2 11쪽
16 얼금이와 감실이와 흰돌이 24.08.04 22 2 11쪽
15 집으로 24.08.03 24 2 11쪽
14 그깟 대장간 24.08.02 26 1 13쪽
13 네안더의 전통에 네안더는 없다 24.08.01 31 1 13쪽
12 그지같은 영국음식 24.07.31 29 1 11쪽
11 화승총과 수석총, 매치락과 플린트락 24.07.30 35 2 11쪽
10 소와 양 24.07.28 31 2 13쪽
9 경국지색(傾國之色) 24.07.27 32 1 12쪽
» 입궐(入闕) 24.07.26 34 2 11쪽
7 총열과 세자빈 24.07.25 40 2 14쪽
6 야공 손희선 24.07.24 40 1 12쪽
5 갈라치기 24.07.23 44 2 12쪽
4 개풍 대장간 24.07.22 51 0 15쪽
3 몰래카메라 청년 24.07.19 69 0 14쪽
2 빨간 원숭이 24.07.19 120 2 13쪽
1 프롤로그 24.07.19 130 1 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