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씨는 조총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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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4.07.19 11:52
최근연재일 :
2024.08.1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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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0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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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승총과 수석총, 매치락과 플린트락

DUMMY

일어선 희선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소녀 우매하지만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두 대감께서 조금만 참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허허, 규수께서는 또 어떤 아름다운 이야기를 해주시려고?”


제프리 밀러는 이때가 되어서야 희선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후 밀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저 소녀가 왜 여기서 나오나. 저기 있는 아가씨들은 이 나라 프린스의 결혼 후보자라 들었는데. 저기 있는 소녀는 화약과 망치와 날붙이의 정령이 아니었나.


흡, 숨을 한번 삼킨 희선이 말을 시작했다.


“수석(燧石-부싯돌)총이라 불리는 플린트락 머스킷도 만능은 아닙니다. 수석총을 방포하려면 부싯돌이 장착된 공이가 접시 덮개를 열면서 동시에 불까지 붙일 만한 강한 힘을 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뭐, 뭐라고 하시었소?”


방 안 전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도제조가 물었다.


“조금만 자세히 설명을 해 보시겠소?”


“수석총을 방포하려 방아쇠를 당기면 용수철이 수석을 물고 있는 공이를 앞으로 엄청 세게 밀며 이렇게...요런 식으로.... 긁어서 불꽃을 만들며 화약접시를 때리는 것입니다. 화승총의 판형 용수철은 기본적인 복원력만 있으면 되지만 수석총은 훨씬 더 강한 힘이 필요합니다. 수석총을 우리 것으로 만드려면 용수철 제조에 힘을 쓰셔야 할 것입니다.”


양손으로 공이와 화약접시 덮개 모양까지 흉내내어 가며 희선이 열심히 설명했다.


“용수철이야 황동이나 철로 우리가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소?”


“쉽지 않습니다, 제가 만들어 봤....어어어, 어쨌든 어렵습니다. 그리고..”


희선이 발 너머로 밀러를 슬쩍 쳐다보며 웃어주었다. 밀러도 마주 보며 억지로 웃어주다가 인상을 구겼다.


“수석총이 비오는 날 발사된다는 건 헛소문입니다. 수석총도 비오는 날에는 격발되지 않습니다.”


“규수는 그런 걸 다 어찌 아시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잡다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말씀을 아직 안 드렸습니다.”


“가장 중요한?”


“설마, 수석을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시겠지요? 우리 땅에서는 수석총에 쓸만한 수석을 찾기가 힘듭니다. 흑요석이나 황철석 같은 걸 사용해야 하는데 조선 땅에는 희귀합니다. 비싸기도 하고. 수석을 충분히 확보 못 하고 도입하신다면 비싼 조총을 작대기나 창대로 쓰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한 호흡 쉰 후 그녀는 말을 이었다.


“아니면, 수석 값으로 장난치는 영국에 질질 끌려다니던가 말입니다.”


방 안에 침묵이 흘렀고, 김규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잘 참더니 쟤 또 왜 저래. 이거 예판께 보고해야 하나 고민이 깊어졌다.


“저기, 규수는 누구시오?”


조심스레 들어온 질문에 아차 싶은 생각이 든 희선이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피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 소녀가 높으신 분들 앞에서 실언을 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려 힘드니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희선이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허둥지둥 뛰어나갔고 얼금이가 뒤를 따랐다.


병조참판과 도제조는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도 수석총을 몇 번 보고 방포 시험도 해 보았지만 작동 원리 같은 건 잘 몰랐다. 제작와 관리에 있어서의 맹점이라든가 수석 문제 등등은 더더욱 몰랐다. 물론 실무를 맡은 기술자들은 알고 있겠지만, 결정에 영향을 미칠 이들이 새로운 총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건 문제였다.


다른 모두도 수군거리고 있었다. 김규원만 쓴웃음을 짓고 있었을 뿐이다.



그 짧은 순간에도 한과를 손에 쥐고 따라나온 얼금이가 희선에게 물었다.


“애기씨 왜 또 그러셨대요?”


정확히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나랏일 이야기하는데 우리 애기씨가 끼어들어 뭔가 훈계를 한 것 같았다. 희선의 몸종으로 온 지 아직 몇 달 안 되긴 했지만, 희선은 틀린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얼금이가 보기에 희선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기도 했다.


애기씨는 욕설이나 험한 말도 한번도 한 적 없었다. 얼금이는 희선이 욕이라는 걸 아예 모르는 귀하게 자란 순진한 아가씨인 줄 알았다.



얼마전 별 생각 없이 희선의 몸종으로 따라간 중매 자리였다. 거기서 희선은 중매 상대인 부승지 댁 도련님에게 노비인 얼금이도 생전 처음 듣는 쌍욕을 퍼부었다. 부승지 댁 도련님이 노비나 소작농들은 개돼지처럼 다루어야 말을 잘 듣는다는 이야기를 한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얼금이의 아버지는 평생 손병도 대감의 노비로 집안일을 봐오며 험한 일들을 해오고 험한 말들을 해왔다. 하지만 그날, 곱디고운 애기씨는 얼금이의 아버지보다 더 욕설을 능숙하게 했다.


종효 아재가 얼금이의 귀를 막아 주었다. 넌 아직 어려서 이런 험한 욕설 들으면 안된다면서. 그때 알았다. 애기씨는 욕의 달인이라는 것을. 그냥 몸종인 자신에게나 소작농에게나, 집안의 가노들에게 하지 않는 것 뿐이었다.


애기씨는 얼금이를 단 한번도 때리거나 가두거나 한 적 없었다. 얼금이가 희선의 비단치마를 들고 달려오다 넘어져 찢어버렸을 때였다. 큰일났다며 울먹이는 얼금이에게 희선은 괜찮다고, 다치지 않았냐며 달래주었다.


얼금이는 애기씨가 자신이나 다른 가노들에게 손 한번 들지 않는 꽃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 타인에게 손을 대기에 마음이 너무 약한 고운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꽃 같은 애기씨가 좌찬성 댁 도련님의 얼굴을 머리로 받아서 쌍코피를 터뜨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모습은 다행히 보지 못했다.


어쨌거나 얼금이는 꽃 같기도 하고 야수 같기도 한 애기씨가 정말 좋았다.


“모르겠다, 얼금아. 내가 진짜 좀 미쳐있는 건가.”


“총 이야기 하시는 것 같던데, 영길리 총이 좋으면 그걸 쓰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래, 니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 그래도, 물건을 살 땐 사더라도 그 물건이 어떤 물건인지, 그걸 사면 눈탱이를 쳐맞을지 아닐지 알고 사야 하지 않을까?”


“눈탱이요?”


희선이 얼금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말이 헛나왔다. 바가지, 바가지 쓰지 말자고.”


그때 불쑥, 제프리 밀러가 옆에서 나타났다.


“오우, 미스 손. 아니, 레이디 손? 노블 패밀리라고 해서 거짓말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장차 퀸이 될 분이시라니.”


“그냥 희선양이라 불러요. 레이디 손은 또 뭐야. 그리고, 퀸 못 돼요. 저~기 더 좋은 집 레이디들이 될 거에요”


얼금이는 수염이 덥수룩한 영국 사피엔을 보고 대번에 겁을 먹었다. 자주 보아오던 네안더들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얼금이는 희선의 치맛자락을 꼭 쥐고 희선의 뒤로 숨었다. 얼금이가 귀여워서 희선은 웃었다.


‘야, 아무리 무서워도 니가 내 뒤에 숨으면 안 되는 거 아니냐.’


“희선양, 우리 싸업 방해하면 안돼요. 왜 그래요.”


“적당히 하세요. 우리가 바본줄 알아요? 어디서 쓰다 남은 쓰레기를 넘기려고 해요?”


“쓰레기 아닙니다. 좋은 총입니다. 매치락, 홰, 호, 화승총보다 많이 좋은 총입니다.”


“그만하세요. 저한테는 좀 솔직해도 돼요. 그것보다, 개풍 대장간 왜 뺏으려고 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밀러 씨가 그럴 줄은 몰랐네요.”


“내 마음 아니에요. 보스들 그렇게 시켰어요. 나는 같이 공부하자, 좋다 그랬는데, 보스들 조선 안 좋다, 조선 안 배운다 그랬어요.”


“뭐래는 거야. 같이 쓰면서 기술 공유도 좀 하고 연구도 하자 그랬는데, 상관들이 조선에서 배울 게 뭐가 있어? 그냥 뺏어, 그랬다는 말이에요?”


“그래요, 그래요. 나도 마음 안 좋아요. 아쉬워요.”


“어우, 진짜. 당신들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네?”


“홀 월드(whole world) 사람들 다 우리 별로 안 좋아해요. 어쩔 수 없어요.”


턱에 한방 날릴까 희선이 고민하던 차에, 멀리서 상궁 한 명이 외쳤다. 시간이 되어 찾으러 나온 모양이었다.


“손가 규수님, 손희선 님. 이제 돌아오십시오. 오후 면접 시작합니다.”


“네, 갑니다~ 밀러 씨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이대로 못 넘어가요.”



대기실로 들어가자,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귀여운 양 사건 이후 경멸과 조소의 표정만을 보내던 조성신마저 저거 정체가 뭐야, 라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다들 기다리셨습니까?”


미소를 띄던 상궁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지금 가시면 되겠습니다.”



오후에는 시, 서, 화, 예(藝) 등을 가볍게 보는 일정이었다.


“세자빈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이 하나둘이 아니긴 하나, 오늘 모든 것을 다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자수를 가볍게 한번 해볼까 합니다.”


희선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시나 한번 외워보라 할 줄 알았는데, 자수라니. 마지막으로 자수를 해 본 것이 언제였더라. 영국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 마이. 갓.


“딱 정해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꽃이나 사람, 동물을 수(繡)해 보십시오. 다들 많이 하시는 화조(花鳥)를 해도 좋습니다.”


제공받은 도구들을 들고 다들 조신하게 앉아 수를 놓기 시작했다. 시작한 지 5분이 넘게 지났는데도 좌우를 살피고만 있는 건 희선 뿐이었다. 저 어디선가 김규원의 키득키득거리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아, 저 인간이 진짜.


뭐라도 하는 척 해야겠다 싶었는데 희선은 시작매듭 만드는 법도 생각이 안 났다. 옆을 보니 정민화가 선녀 같은 모습으로 수를 놓고 있었다.


“저기, 민화님.”


“네, 왜 그러십니까.”


“제 바늘에 시작매듭 좀 매어주십시오.”


“제가 매어놓은 게 있으니 제걸 쓰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요기 점수(點繡)를 놓고 구부려서 이음수를 놓는 건 어떻게 해야합니까?”


속삭이듯 희선이 물었다. 그래 봐야 조용한 방 안에서 거의 다 들렸을 것이다. 그건 희선이 노린 바였다. 자수 하나 제대로 못 놓는 모자란 처자를 돕는 절세미인. 그림이 나오지 않는가. 어차피 자신은 망한 거, 민화를 밀어주겠다는 심산이었다. 어차피 조성신에게 물어보았어도 아주 친절히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모두가 지켜보는 이 자리에서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정민화도 웬 떡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 속셈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화는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바늘 끝으로 앞쪽 땀을 살짝 들어서, 실의 아래쪽으로 바늘이 들어가게 해 줍니다. 그리고, 연결부위를 젖혀......”


약간의 시간을 들여 희선에게 설명을 해준 민화는 곱게 한번 웃어주고는 아리따운 자태로 다시 자신의 수를 놓기 시작했다. 왕실의 사람들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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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총은 요술 부리는 막대기 24.08.06 21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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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깟 대장간 24.08.02 26 1 13쪽
13 네안더의 전통에 네안더는 없다 24.08.01 31 1 13쪽
12 그지같은 영국음식 24.07.31 29 1 11쪽
» 화승총과 수석총, 매치락과 플린트락 24.07.30 35 2 11쪽
10 소와 양 24.07.28 31 2 13쪽
9 경국지색(傾國之色) 24.07.27 31 1 12쪽
8 입궐(入闕) 24.07.26 33 2 11쪽
7 총열과 세자빈 24.07.25 40 2 14쪽
6 야공 손희선 24.07.24 40 1 12쪽
5 갈라치기 24.07.23 44 2 12쪽
4 개풍 대장간 24.07.22 50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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