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씨는 조총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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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4.07.19 11:52
최근연재일 :
2024.08.1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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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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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지같은 영국음식

DUMMY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후보들이 자수하는 동안 나가 있던 왕실의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앉았다.


“자,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한번 볼까요?”


조성신의 수는 모란이었다. 연습 꽤나 하고 왔는지 깔끔한 솜씨로 누가봐도 커다란 모란이오, 할 정도로 괜찮은 자수였다.


황덕여도 수를 내보였다. 그것을 본 중전이 물었다.


“이건 무슨 꽃입니까? 잘 모르겠군요.”


“벼꽃입니다. 벼꽃은 비록 소박하고 잘 보이지 않으나, 천하의 큰 근본이 되는 꽃입니다. 주상전하의 은덕이 크지만 최근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늘어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올해는 풍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수를 놓아 보았습니다.”


다소곳이 앉은 채 옆을 보던 희선이 살짝 혀를 찼다.


‘쯧쯧, 의도는 좋았지만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 봐, 분위기 이상해졌잖아. 쟤는 이상한 무리수를 하나씩 두네.’


싸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중전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하하, 뜻이 좋습니다. 그럼 손가 규수의 수를 볼까요? 푸훗~”


희선의 것을 집어든 중전이 참지 못하고 뿜고야 말았다. 발 뒤에서 주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무엇이기에 중전께서 그리 웃고 계시오? 이리 한번 가져와 보시오.”


중전이 희선의 수를 발 뒤로 전달했다. 그걸 받아든 주상도 터졌다.


“허허, 과인이 살면서 온갖 자수 작품들을 다 보았으나, 이렇게 독..크큿, 독특한 것은 처음이오. 손가 규수가 수 놓은 것은 새..인가?”


머리를 조아리며 희선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살...”


놀리려는 것이 분명한 말투로 주상이 희선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사람의 손....인가? 거북이 같은 것도 아닌 것 같고.”


“아닙니다. 살, 살구꽃입니다. 제가 자란 마을에 많아서 한번 수놓아 보았습...”


희선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누가 봐도 그건 꽃이 아니었다.


부끄럽습니다, 송구하옵니다란 말도 이럴 때 쓸만한 말은 아니었다. 희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겨우겨우 웃음을 참던 중전이 민화의 수를 들어 올려서 살펴보았다. 역시 모란 한송이, 원앙 한 쌍이 있었다. 시간이 아주 짧았음에도 비교적 촘촘하게 놓여진 수와 아름답게 배열된 색상은 가히 작품이었다. 무리수를 둔 덕여와, 그저 괜찮은 정도였던 성신의 자수는 가히 가져다 댈 수도 없었다.


이후 시(詩), 서(書)등에 대한 간단한 문답과 일상적인 이야기로 인성을 파악하려는 대화 시간 등이 지나갔다. 희선은 중전과 주상의 자수 평 이후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자수 이후의 과정은 무난무난하게 잘 치렀다.


오후의 문답을 끝으로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예년 같았으면 재간택 일정은 이것으로 끝이 났을 터인데, 올해부터는 다음날 아침까지 궐 내에 머무르다 나가게 되었다. 왜 남게 되는지, 어떤 시험을 또 할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자리를 파하기 전 주상의 한마디가 있었다.


“다들 고생하셨소이다. 네 분은 가히 조선 최고의 규수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과인은 오늘 꽤 즐거웠습니다. 특히, 손가의 규수는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오. 아까 제선왕 이야기도 그렇고....살구꽃도 그렇고.”


주상전하의 한마디에 희선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오전의 일도 주상전하께서 기억하고 계셨단 말인가. 아버님, 불효한 이 딸을 죽여주십시오. 집안 망신도 이런 망신이 있을 수가. 가자, 한강물은 오늘 많이 차가울까.


“뭐, 어찌 되었든 다들 고생하셨소. 내 오늘 저녁에 영길리 공사와 주둔군 병참관과 함께 저녁을 하기로 하였는데, 간택 후보자 네 분 같이하면 어떻겠소?”


주위에 배석한 상궁과 내관들, 중전까지도 깜짝 놀랐다.


“전하, 그런 전례는 없었습니다. 영길리 공사와 식사를 하는 곳에 세자빈 간택 후보자들과 동석을 하시다니요.”


“그러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소이까. 예조측에서 말씀해 보시오.”


예조참판이 읍하며 대답했다.


“전례가 없긴 하옵니다. 하지만, 불가하다는 근거도 없으니 오늘은 전하의 뜻대로 하시옵고 추후 논의를 해보아도 될 듯하옵니다.”


“그럼 오늘은 그렇게 진행을 합시다. 영국측에도 그렇게 통보를 해주시오.”


“네, 전하.”


주상이 퇴실한 후, 다들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어떤 의중인지 다들 알 수가 없었다.



영국공사 제임스 브룩스는 갑자기 인원이 많아진 저녁 만찬에 살짝 당황했다. 오늘 저녁에 조선의 병조와 공조 측에 조차지(租借地-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빌려 쓰는 땅)를 늘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예정에도 없었던 조선의 국왕과 세자빈 후보들의 참석에 난감한 느낌이었다. 분위기 상 심각한 이야기를 하기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저녁만찬에 참석하게 됐다. 영국의 요리사가 재료를 공수해와 조선의 왕실을 접대한다, 라는 것이 오늘의 계획이었는데, 인원이 늘어나는 바람에 영국측 요리 담당들만 죽어나게 됐다.


주상과 중전, 영국의 브룩스 공사와 부인, 주둔 병참장교 밀러, 공조 판서와 병조 참판이 같이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네 명의 규수가 추가로 참석하게 되었다.


얼떨떨한 네 후보는 안내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희선이 옆에 앉은 민화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아까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이야기라도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희선 님이 자리를 비웠을 때는 양 이야기와 총 이야기 밖에 나온 게 없습니다.”


양.....총......젠장.


“영국식 식사법 좀 아십니까? 조심해야 할 거라도?”


“나이프와 포크는 써 보셨습니까?”


“네. 써본 적은 있습니다.”


“그럼 특별히 주의하실 건 없습니다. 음식을 덜어와서 먹어야 한다는 것과 소리를 크게 내면 안 된다는 것 정도?”


“특별한 것은 없군요.”


“나머지 세세한 것이야 그네들의 예법이니 우리가 알 바입니까?”


생각 외로 과격한 민화의 발언에 희선은 약간 놀랐다.


“그건 그렇군요.”


그때 문이 열리고 주상과 중전이 들어와 상석에 앉고 식사가 시작됐다.


먼저 에피타이저로 삶은 달걀을 고기로 싸서 가볍게 튀긴 스카치 에그라는 것과 뭔지도 모를 고기국이 나왔다. 스카치 에그는 실온에서 식힌 달걀이라 기름맛이 나고 퍽퍽하기만 했다.


국인지 스프인지는 타락와 옥수수의 맛이 나는 특이한 것이었다. 이건 희선의 입맛에도 맞았다. 고소하면서도 감칠맛이 났다. 내용물은 꿩인지 오리인지 거위인지 헷갈렸다. 희선은 입안에 들어간 것이 쑥인지 미나리인지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미각의 소유자였으므로 알 수가 없었다.


민화가 스푼을 내려놓고 말했다.


“오리고기로 만든 스튜로군요. 정말 맛있습니다.”


조성신이 그 특유의 거만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잉글랜드의 국 요리는 스프라고 합니다. 습이라고 발음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요. 선진국의 문화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좀 공부를 하고 이야기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한마디 한마디 밉살스러운 그 말을 정민화가 그 반짝반짝하는 얼굴에 빛나는 웃음을 더하며 뭉개주었다.


“이 정도로 건더기가 많은 국은 스튜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건더기가 적은 국물 요리를 스프라고 하지요. 딱 정해진 규칙은 아니니 성신 님이 말씀하신 것도 아주 틀린 건 아닙니다.”


요리의 요 자도 모르는 희선은 감탄했다. 민화는 영국 요리에 관심이 많은가? 어떻게 저런 걸 알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뒤, 머핀과 크럼펫, 커틀릿이 나왔다. 머핀과 크럼펫은 애초에 쌀 문화권 사람들에게 별로였고, 밀가루와 달걀을 묻힌 얇게 저민 돼지고기에 빵가루를 묻혀 튀긴 커틀릿은 바삭하고 따뜻했지만 역시 그냥 그런 맛이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피클헤링이었다. 정체 모를 비린내 나는 생선을 삭힌 것이었는데, 그야말로 끔찍했다.


“음, 어, 어우 이런 썅.”


“네?”


옆자리의 민화가 귀를 의심하며 반응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욕쟁이 희선이었지만 음식을 먹다가 욕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코끝의 비린내를 느끼면서도 피클헤링을 한입 베어 문 희선은 이걸 어디다 뱉으면 남들 눈에 띄지 않을까 고민했다. 누구라도 한 명만 뱉으면 따라 뱉으려 했지만 괜찮은지 참는 건지 다들 씹고 있었다.


“청어를 절인 것입니까?”


민화의 질문에 공사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잉글랜드와 북해의 사람들이 즐겨 먹는 것이지요. 좀 비리긴 하지만 깊은 맛이 있습니다.”


희선은 인생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피클헤링을 씹어 삼켰다.


‘맛이 두 번만 깊었다간 평생 코랑 혀가 마비되겠다. 썩을.’


좌중의 분위기를 보니 조선인들은 다들 반응이 별로였다.


그 와중에 조성신은 꾹 참고 잘 넘기는 듯했다. 초롱초롱한 과장된 눈빛을 하면서 먹고 있었다. 성신은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잉글랜드의 문화와 관습을 영접하는 중이었다.


‘쟤도 참 특이하구만.’


좋아하는 것처럼 맛없는 음식을 꾸역꾸역 먹는 성신을 보니 재미있었다. 황덕여는 표정이 묘한 것이 역시나 먹는 게 고역인 것 같았다.


이어 김이 나는 커다란 검은 덩어리가 나왔다. 해기스였다. 해기스는 소격란(蘇格蘭-스코틀랜드)의 음식이었다. 양이나 염소의 심장, 허파, 간 같은 것들을 다져 여러 곡물과 피와 향신료 조금을 위장에 넣고 삶은 요리다. 여러모로 조선의 순대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병참관 제프리 밀러가 굳이 또 서툰 조선어로 또박또박 말했다.


“내 고향 스코틀랜드 음식입니다. 맥주 있으면 좋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조선에 좋은 맥주 없습니다. 그래도 먹읍시다. 안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맛있을 수도 있습니다. 즐그, 즐겨 주세요.”


밀러의 괴상한 조선어에 희선은 표정을 찡그렸다.


‘그냥 영어로 말하지. 저 아저씨는 이상하게 조선어를 하고 싶어 한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는데.’


해기스를 한 입 먹어본 성신이 밀러에게 말했다.


“소격란은 잉글랜드의 북쪽 지방이지요? 얼마 전부터 잉글랜드의 여왕님을 모시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영광이시겠습니다. 조선도 소격란처럼 잉글랜드와 좀 더 가까이 지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잉글랜드인 공사 브룩스는 이마에 손을 가져가 땀을 닦았고, 희선은 속으로 웃음을 지으며 해기스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맛도 순대 비슷해서 그나마 영국 음식 중에는 편하게 먹을 만 했다.


‘잘한다, 잘해. 밀러 중령 거품 좀 물겠는데. 쟤는 왜 지 혀로 지 발등을 찍는 거지? 그리 좋아해 마지않는 영국을 공부하려면 좀 제대로 하든지 말이야.’


성신의 말을 거의 다 알아들은 밀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고향을 떠나 수천 km를 와서 생판 낯선 나라의 소녀에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어버린 것이다. 그의 표정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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