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씨는 조총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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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4.07.19 11:52
최근연재일 :
2024.08.1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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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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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힘과 마법 (6)

DUMMY

구봉이가 다가서자, 태빙턴은 왼주먹을 곧게 뻗어 구봉이의 얼굴을 빠르게 두 번 때렸다. 금방 구봉이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구봉이가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 태빙턴의 얼굴을 노려보았으나 그는 왼손으로 가볍게 흘려버리고는 오른주먹을 곧게 뻗어 구봉이의 얼굴을 강하게 가격했다. 태빙턴의 오른주먹은 구봉이의 왼쪽 광대뼈 아래의 피부를 찢고는 귀 옆으로 지나갔다. 구봉이의 얼굴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구봉이의 주먹 한번, 이어 반격하는 태빙턴의 주먹 세 번으로 태빙턴은 상대에 대한 파악을 끝낼 수가 있었다. 그는 금방 알게 되었다. 눈 앞의 이 어린 조선인은 힘으로나 기술로나 태빙턴과 비교할 수 없이 약하다는 것을. 그 다음은 농락과 악의에 찬 즐거움, 거기에 따르는 잔혹함만이 남을 뿐이었다.


구봉이는 생전 처음 보는 움직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태빙턴은 뒤꿈치를 살짝 드는 듯 떼어 전후좌우로 발을 놀렸다. 어깨는 위아래로 들썩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가며 구봉이의 얼굴과 턱, 명치를 약하지만 빠르게 때려댔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구봉이는 정신이 아찔하고 가슴과 배가 아파왔다.


태빙턴의 움직임은 정교하고 숙련되어 있었으며 동작마다 정확성과 속도가 느껴졌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구봉이에게 태빙턴이 왼팔을 크게 휘둘렀다. 구봉이는 간신히 이를 피했지만, 다음 오른팔의 공격이 구봉이의 왼쪽 옆구리를 강타했다.


“허억....”


구봉이의 숨이 턱 막혔다. 갈비뼈가 부러진건지 아니면 너무 아파서 그런건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센 상대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생각해보니 구봉이는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싸워본 적이 없었다.


구봉이는 여러 걸음 뒤로 물러섰다. 태빙턴은 얼굴에 웃음을 띄고서는 앞으로 다가오지는 않고 있었다. 구봉이가 고개를 돌려 희선을 바라보았다. 희선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되었으니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그때, 피에 젖은 희선의 왼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구봉이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그 후로 2,3분이 지났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이미 구봉이의 얼굴은 부어올라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을 지경이었고, 얼굴이 찢어져 피가 여기저기 흘렀다.


마지막으로 구봉이는 덤벼들어 달라붙은 다음 그를 쓰러뜨려 볼 생각이었다. 구봉이가 팔을 뻗자 태빙턴은 슬쩍 피하며 그의 팔을 잡아챘다. 구봉이는 그 순간, 몸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태빙턴은 그를 무자비하게 땅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등과 허리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구봉이는 몸을 돌려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다리에 더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일어서려다 다시 무릎을 꿇고 앞으로 쓰러질 뻔한 그는 팔꿈치로 몸을 받치며 상체를 가까스로 지지했다. 양 무릎과 양 팔꿈치로 겨우 몸을 지탱한 그는, 힘들게 한 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 항복이요. 더는 못 하겠소. 졌소.”


심판인 메인 소령이 고개를 돌려 태빙턴을 보았다.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으나 항복한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태빙턴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왔다. 태빙턴이 구봉이에게 걸어가는 것에 이상함을 느낀 희선이 경기장 밖에서 소리를 질렀다.


“He surrendered! He gave up! Stop, Stop! He quit, He quit!”


포기한다, 항복했다는 영어 표현을 아는 대로 다 쓰며 희선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구봉이 앞까지 걸어간 태빙턴은 땅바닥에 절하듯 몸을 지탱하고 있는 구봉이의 머리를 있는 힘을 다해 걷어찼다.


-퍼걱.


묘한 소리와 함께 구봉이의 머리가 덜컥 흔들렸고, 그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곧바로 희선과 민화가 시합장으로 뛰어나갔다.


메인이 태빙턴을 붙잡으며 말했다.


[중령님, 항복한 듯이 보였는데 왜 그러셨습니까?]


태빙턴이 뭐가 문제냐는 듯 대답했다.


[글쎄, 내 눈에는 아직 싸우겠다는 걸로 보였는데. 내가 조선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희선은 구봉이 앞으로 뛰어갔다.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 사이, 민화가 태빙턴 앞으로 달려와 영어로 말했다.


[그는 항복했소. 분명히 안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제 동료가 영어로 크게 외쳤습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태빙턴이 양손을 좌우로 벌리며 태연히 말했다.


[그가 하는 말은 내가 알아들을 수가 없소. 난 조선어 모릅니다. 거기에 저 아가씨가 외치는 영어는 발음이 이상해서 내가 잘 못 알아들었습니다. 문제 있습니까? 레이디 잉글리쉬도 프렌치 같아서 잘 못 알아듣겠습니다.]


“이...이.... 이 나쁜 놈들아! 못된 놈들아!”


그녀는 분노했지만, 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민화는 손희선처럼 욕을 시원하게 할 줄 몰랐다.


구봉이는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희선이 그를 애타게 불렀다.


“구봉아, 구봉아!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의원 없어요? 영국인이든 조선인이든 누가 좀 도와줘요!”


밖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축 늘어진 구봉이를 사람들이 조심스레 들고 나갔다. 희선은 겁이 나 울면서 같이 나갔다. 민화는 태빙턴과 메인을 노려보다가 등을 돌려 희선을 따라갔다.



**



마지막 불상사로 인해 영국 승리를 알리는 주최측의 공지와 함께 FMM은 서둘러 끝이 나고 말았다. 원래는 승자를 축하하고 패자를 위로하는 작은 파티와 함께 술도 한잔씩 나누고 이야기하는 순서가 있었으나, 사람이 크게 상해 실려나가는 바람에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버렸다.


주둔군 기지 안에서는 부사령관 존 그래함이 고든 태빙턴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야, 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러잖아도 여론이 안 좋은데 그 소년이 죽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엉? 니가 책임질 수 있어?”


“장군님, 힘의 시험에서 가끔 생길 수 있는 사고지 않습니까. 전 그가 항복한 줄 몰랐습니다.”


“이 썩어빠진 놈, 네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네놈은 벌써 영창에 처넣었어, 알아?”


“죄송합니다, 장군님. 그런데 정말 실수였습니다.”


“실수, 실수?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가 팔을 들어 내젓고 있는 조선인의 머리를 네가 고의적으로 차는 걸 봤어. 모두가! 그걸 어떻게 실수라고 우겨 볼 셈이냐, 엉?”


“아닙니다. 전 정말 몰랐습니다.”


“꼴도 보기 싫다, 당장 꺼져! 근신하고 있어. 영 밖으로 나와서 사람들 눈에 띄지 마, 특히 조선인들 눈에는 절대로. 알겠어?”


“알겠습니다, 장군님.”


고든 태빙턴은 경례를 마친 후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날 밤, 밤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구봉이는 새벽녘에 숨을 거두었다. 열여덟, 덩치 크고 힘은 셌지만 착하고 마음 여렸던, 청년도 미처 되지 못한 소년은 그렇게 세상과 작별하고 말았다.



그렇게 불, 힘과 마법은 호기롭게 시작했다가 사람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영국군 측은 사고-라고 그들은 주장했다-에 대한 사과를 했다. 자신들은 잔혹한 침략자가 아니며, 평화로운 대결에서 사람이 죽은 것이 유감이라 했다.


조선의 의견도 여러 가지였다. 영국군의 무도함을 욕하는 사람, 애초에 되지도 않을 싸움을 건 조선인의 어리석음을 자조적으로 한탄하는 사람, 그래도 어린 애들이 열심히 싸운 건 칭찬해주어야 한다는 사람 등 의견도 많이 갈렸다.


영국측으로서는 최악의 결과였다. 조선의 땅과 시설들을 여기저기서 빌리듯 빼앗으려 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버렸고, 조선인들은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대결을 그것도 젊다 못해 어린 이들과 해서 그들 방식으로 이겨버렸고, 그 와중에 조선인이 한명 사망해 버렸다. 그들의 입장에선 뭔가에 홀리듯 FMM을 하게 됐고 얻은 것 하나 없이 여론만 안 좋아지게 된 셈이었다.


이틀 후, 영국군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안타까운 사고였고, 절대로 고의가 아니었다고 했다. 아울러 그들이 2:1로 승리했음에도 개풍 대장간을 조차하거나 매입하지는 않을 예정이라고 했다. 대장간에 관련해서는 온전히 조선측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했다. 다만, 그 사과 성명이 온전히 조선 백성들에게 전달이 될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



가노 출신에다 딱히 다른 가족도 없는 구봉이의 장례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개성 유수부 측에서는 상여도 제공하고 장례를 지원하여 떠들썩하게 하고 싶은 듯했지만, 의도가 뻔히 보여 개풍 대장간과 희선은 반대했다. 장례는 그들의 바람대로 조용히 치러지게 되었다.


바퀴에 관을 얹어 끌 수 있는 유거(柳車)하나에 정성껏 염을 한 시신을 싣고 가 양지바른 곳에 묻고 조그마한 비석 하나만 세웠다.


개풍 대장간 사람들과 손병도의 집에서 구봉이와 가까웠던 사람 몇, 그리고 희선과 규원만 참석했다. 정민화는 정말 오고 싶어했으나 세자빈 삼간택에 뽑혀 곧 입궐해야 할 규수가 타인의 장례에 참석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집안사람들에게 끌려가듯 한성으로 떠났다.


희선이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구봉이의 이름이 적힌 비석을 바라보다 규원에게 말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요?”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그날 저녁 자리에서 입을 닫고 있었다면, 그 개 같은 대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내가 불의 시험에서 이겼다면, 아니, 내가 애초에 대장간 같은 곳에 들락거리지 않았다면 구봉이는 건강하게 잘 살아있겠죠?”


“아니다, 희선아. 넌 대장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그런 대결을 네가 제안한 것도 아니고, 두 번째 대결에선 그들의 함정에 빠졌을 뿐이야. 그리고, 사람이 상하고 죽을 줄은 누구도 몰랐잖느냐. 네 잘못이 아니다. 이번 일은 그냥 사고였다.”


“이번 일은 지가 똑똑한 줄 아는 건방진 양반님네 계집의 객기에 휘말려 젊은 청년 하나가 죽은 거, 그거 아닙니까?”


“그만해라, 희선아.”


뒤에 서 있던 야장 웅수가 희선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도 애기씨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애기씨는 진심이셨고,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신 것, 여기 있는 사람은 다 압니다.”


“미안, 미안해요, 야장. 그리고, 이제, 이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희선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양손을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을 울었다. 웅수는 자리를 피했고, 규원이 희선의 옆에 앉아 하늘만 바라보며 같이 있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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