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씨는 조총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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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4.07.19 11:52
최근연재일 :
2024.08.1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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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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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힘과 마법 (5)

DUMMY

대니 도슨이 형체가 잡힌 글라디우스를 들고 기름통 앞으로 다가갔다. 담금질을 할 때가 된 것이다. 그가 검을 기름통 안에 넣자 위로 불꽃이 올라왔다. 그가 검을 꺼내어 들자 검에 묻은 기름에 불이 붙어 마치 불의 검처럼 보였다.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피식 웃으며 그 모습을 보던 희선이 민화에게 말했다.


“우리도 슬슬 담금질 해야겠다. 민화야, 내가 이거 마무리하는 동안 옆에 진흙 보이지? 물통에 잔뜩 넣고 저어서 섞어줘.”


“알았어. 얼마나 넣어?”


“물이 아주 탁하게 보일 정도면 돼.”


아주 미묘하게 휜 듯한 검신이 거슬려 집게로 검을 누르고 바른 희선은 검을 들고 물통 앞으로 갔다. 구봉이가 벌떡 일어났다. 희선에게 혼났던 날, 감탄해 마지 않았던 희선의 물담금질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조선은 기름이 귀한 나라다. 담금질에 최고로 치는 고래 기름은 고사하고 채종유, 대두유 등의 기름도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은 물 담금질 기술을 연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장점도 있었다. 물은 비열이 커 금속이 급속히 수축하기 때문에 경도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여차하면 다 깨져 버리는 게 문제긴 했지만.


그녀가 물통 앞으로 가자, 상대인 도슨도 고개를 내어 쳐다보았고, 밀러 중령도 일어났다. 그들이 유난 떠는 것이 아니라, 영국인의 입장에서는 물담금질 자체를 보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점토와 돌가루 숯 등을 섞어 물에 갠 뒤 날 외의 다른 부분에 바르고 담금질을 하는 게 안전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시간이 없다. 희선은 자신의 손을 믿기로 했다. 그녀는 검을 수면에 조심스레 가져다 대었다.


- 치이이이익.....


물이 끓는 소리와 함께 검날 부분이 식으며 색이 검게 변했다. 희선은 검날 부분을 수면에 대어 미끄러뜨리기 시작했다. 검이 물 위를 나아가는 배처럼, 백조처럼 수면 위를 오갔다. 이어 그녀는 검의 옆면 부분만 아주 살짝 물에 잠기게 한 채 검을 살랑살랑 흔들기 시작했다.


담금질을 하는 그녀의 몸짓이 더없이 우아해 보였다. 불의 시험을 재미 없어 하던 사람들도,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도, 맥주잔을 들고 쉴새 없이 들이키던 영국인들도 모두 그녀의 팔 움직임에 집중했다.


치익치익, 소리를 내며 검날부가 강해져 갔다. 두세 번 반복한 후, 그녀는 검신을 뒤집어 반대쪽 날도 담금질을 했다. 글라디우스의 양날 부분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검신의 가운데 부분은 어두운 붉은 빛을 하고 있었다. 이제 기름통에 넣을 차례였다.


집중되는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녀는 검신을 솔로 털어 대충 정리한 후 기름통 앞으로 갔다. 생각할 것도,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천지신명께 빌며 희선은 검신을 통째로 기름통에 담갔다. 역시 불꽃이 솟아 오르고 검에 불이 붙었다. 불에 타오르는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든 그녀는 불붙은 기름을 털어내고 검을 닦았다.


시간이 없었다. 밀러를 흘긋 쳐다본 희선은 밀러가 말한 검은 액체 앞에 섰다. 이게 뭘 하는 건지, 왜 담그라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밀러를 믿느냐 마느냐 정도의 문제였다. 그녀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검을 조금씩 아래로 내려 액체 속에 완전히 잠기게 했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긴장감과 피로감, 초조함과 나른함 등의 상반되는 상태와 손의 통증이 뒤섞여 희선은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무섭고 가슴이 뛰는데 잠이 왔다.



**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검을 제출하십시오.”


희선과 도슨이 글라디우스를 밀러에게 내놓았다. 도슨은 두 손으로 정중히 내려놓았지만, 희선은 오른손만으로 들어서 놓았다. 건방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그녀는 왼손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밀러가 그런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눈이 마주친 도슨마저도 그녀에게 두건을 벗어들며 경의를 표했다.


도슨은 승패가 어찌 되든 마음속으로는 이미 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츠 철을 처음 다루었을 때, 도슨은 접철단조로 철괴를 만들지도 못하고 실패했었다. 그녀는 철괴를 만들고 단조를 했고, 글라디우스를 완성하지 않았는가.


“두 분 다 고생하셨습니다. 진심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밀러의 진심 어린 인사에 도슨과 희선 모두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자리에 돌아온 희선이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민화가 옆에서 부축하여 앉혔다.


“좀 앉아있어. 서서 기다릴 필요 없잖아.”


“너무 단단해. 너무 단단해. 안 되는데.”


넋나간 사람처럼 희선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뭐가 말이야. 네가 만든 검이?”


“그래. 너무 단단해. 줄로 밀어봤는데 아예 안 긁혀, 날도 거의 깎아내듯이 세웠어.”


“검이 단단하면 좋은 거 아니야?”


“아냐, 안 그래. 저 정도로 단단하면....아니야, 우츠 철이 워낙 경도가 높아서 그런 거겠지. 애초에 처음 만져보는 철이라 잘된 건지,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어.”


“넌 잘 했을 거야. 희선아, 네가 그때 했던 말 돌려줄게.”


“무슨 말?”


“함께 싸워서 영광이었어. 내가 죽을 때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날이라면 오늘을 꼽을 것 같아.”


“이 분위기에서 갑자기 뭔 소리야. 넣어 둬.”



밀러가 두 사람의 글라디우스를 잡아서 휘둘러 보았다. 세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완성한 것 치고는 굉장히 훌륭했다. 그리 무겁지도 않았고, 날도 잘 세운 편이었다.


외형은 희선의 것이 훨씬 나았다. 도슨의 글라디우스는 아주 미세하게 옆으로 휘어 있었다. 희선의 것은 곧고 두께도 적당했다. 놀랍게도 다마스커스 강의 물결무늬가 희선의 글라디우스에도 예쁘게 나타나 있었다.


두 검을 손가락으로 튕겨 소리를 들어본 밀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시험용 철판 앞으로 걸어갔다.


-푸욱.


도슨의 검이 얇은 동판을 뚫고 나아갔다. 위아래로 움직여 철판의 손상부위를 늘려보았다. 동판이 위아래로 찢기며 무난하게 움직였다.


희선의 검도 동판을 뚫었다. 두께가 도슨보다 더 얇고 가벼워 찢는 힘이 훨씬 덜 들었다.


절삭력은 희선의 것이 압도적으로 좋았다. 검신 자체가 얇고 날이 단단해 슥 갖다 대기만 하는 것으로도 가죽이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도슨의 검은 좀 더 힘을 주어야 했고, 잘린 단면도 조금 거칠었다.


희선의 검이 훨씬 예리하게 소가죽을 자르자 오오, 하는 소리가 객석에서 터져나왔다.


마지막, 대나무에 내리쳐 유연성과 강도를 보는 시험이었다.


밀러가 도슨의 검을 묶어놓은 대나무 더미에 내리쳤다. 떵, 떵,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대나무에 검흔이 남았다. 애초에 자를 각오로 내리친 것은 아니었기에 잘리진 않았지만, 힘을 다해 치면 자르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밀러가 희선의 검을 들었다. 다시 한번 검신을 만져본 그는 희선을 쳐다보았다. 희선이 본 밀러의 표정이 불안해 보였다.


“단단해, 너무 단단했는데...”


희선은 여전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밀러 중령이 대나무에 희선의 검을 내리쳤다.


- 티이이잉!


작은 종이 울리는 듯한 맑은 소리가 나며, 희선의 검이 두 동강 났다. 잘려져 나간 검의 앞부분이 바닥에 떨어졌고, 산산조각이 났다. 검이 폭발하듯 깨져버린 것이다.


밀러는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받아들고 두들겨 보았을 때 경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검의 외형이나 휘어짐 등은 조선측의 검이 좋았습니다. 날이 단단하고 예리해서 베는 능력도 충분히 훌륭했습니다. 우츠 스틸은 불기운이 많고 단단한 철입니다. 가열하고 식히고 단조하는 모든 과정이 일반 철보다는 더 높은 온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철이라 실수를 한 듯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민화가 소리쳤다.


“익숙하지 않다고? 실수라고요? 아예 말도 안 되는 주제를 내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 소리를 들었는지 아니었는지, 밀러는 말을 이었다.


“조선측도 최선을 다해주었지만, 검이 깨져 버렸으므로,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을 듯합니다. 불의 시험은 영국군의 승리입니다.”


희선은 고개를 숙이고 아픈 왼손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희선의 화려한 단조 망치질과 담금질 손놀림을 보고 승리를 기대했던 조선측의 객석에서 야유와 함께 비난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어. 머리 땋은 양반집 처녀가 무슨 대장장이야?”


“팔자 좋은 어린아이가 쇠 가지고 소꿉장난 좀 해본 걸로 영국인과 대결을 무슨 대결을 해. 에유..쯔쯔.”


“세상이 만만한 거지, 제대로 된 무기나 한 번 만들어 봤겄어? 저, 저 칼 한방에 깨지는 거 봐. 호미라도 한번 만들어 보고나 나오지.”


그 소리에 화가 난 민화가 사람들을 보고 소리치려 했다. 희선이 민화의 어깨를 잡았다.


“뭐라고 하게. 우츠강으로 다마스커스 식 글라디우스를 만드는 것은 얘한테는 처음이니 지랄들 하지 마시오, 라고 하게? 그만둬, 민화야. 나 괜찮아. 사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 팔자 좋은 사대부가 계집의 취미이자 장난.”


“그래도, 이건,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


“괜찮아, 고마워.”


하지만 구봉이가 소리지르는 건 미쳐 막지 못했다.


“그만들 하세요! 이게 얼마나 힘든 건디요! 우리들도 처음보는 쇠라니까요! 이씨, 뭐 알아요?”


되돌아오는 소리들이 고울 리 없었다.


“저 쓸개빠진 놈, 모시는 고관대작 댁 애기씨라도 되는 모양이지.”


“꼴에 저희 주인님이라고 편들어주는 거 봐라.”



자리를 정리하고 힘의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희선은 눈물을 계속 참았다. 영국인들이 밉기도 하고, 사람들의 비난이 억울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대장간 사람이나 민화에게 미안하기도 해서였다. 강한 척, 똑똑한 척 해 왔지만 그녀는 고작 18세의 소녀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하고 울음을 삼키는 희선을 보고 구봉이가 말했다.


“애기씨가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조금 전 저 저거, 저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저랑 대장간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러니까 애기씨, 울지 마십쇼. 저, 이 구봉이가 한번 시원하게 싸워보겠습니다.”


“울기는 누가 울어. 무리하지 마. 다치면 안 된다. 나한테 망치질 제대로 배워야지?”


“걱정마십시오, 애기씨.”


광장 가운데 선이 그어지고 자그마한 말뚝이 박혔다. 말뚝에 끈들이 묶여 네모난 공간이 생겼다. 말뚝에 연결된 끈들로 인해 싸우는 사람은 경기장 밖으로 물러나기 힘든 구조였다.


고든 태빙턴과 구봉이가 앞으로 나섰다. 태빙턴은 얇은 면직물로 된 옷과 영국군들의 운동복으로 보이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키는 180cm가 넘는 거구였고, 팔과 다리도 보통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구봉이도 키 크고 덩치 좋고 힘 좋다고는 하지만 키도 173~4cm 정도에다, 힘도 동네 씨름판 수준이었을 뿐, 태빙턴과 비교할 정도는 못 되었다.


고든 태빙턴이 내려까는 듯한 눈빛으로 구봉이를 쳐다보았다면, 구봉이는 긴장감과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태빙턴을 올려다보았다.


힘의 시험 심판으로 배정된 개성 주둔군 무술 교관 루퍼트 메인 소령이 그들의 가운데에 섰다. 역관이 그의 말을 통변했다.


“깨물거나, 눈을 찌르면 안 된다고 하시네. 낭심을 공격해도 안되고. 항복하거나 기절하면 끝이라 하시는구만.”


“다른 건 없습니까?”


잔뜩 긴장한 구봉이의 말에 역관이 대답했다.


“글쌔,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 잘 모르네. 어쨌든 방금 하신 말은 그게 다일세.”


역관이 내려가고, 루퍼트 메인이 손을 들었다 내리며 시작을 알렸다. 구봉이는 양 팔을 벌리며 앞으로 나아갔고, 태빙턴은 주먹을 쥐고 양 주먹을 자신의 턱과 가슴 근처에 대고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심판인 메인 소령은 두 사람의 싸움이 성립되기 힘들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태빙턴의 성품을 아는 그는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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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총은 요술 부리는 막대기 24.08.06 22 2 11쪽
16 얼금이와 감실이와 흰돌이 24.08.04 22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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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지같은 영국음식 24.07.31 29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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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경국지색(傾國之色) 24.07.27 31 1 12쪽
8 입궐(入闕) 24.07.26 33 2 11쪽
7 총열과 세자빈 24.07.25 40 2 14쪽
6 야공 손희선 24.07.24 40 1 12쪽
5 갈라치기 24.07.23 44 2 12쪽
4 개풍 대장간 24.07.22 50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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