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씨는 조총장인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판타지

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4.07.19 11:52
최근연재일 :
2024.08.15 13:09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943
추천수 :
31
글자수 :
144,572

작성
24.07.24 16:12
조회
39
추천
1
글자
12쪽

야공 손희선

DUMMY

“저기, 좀 먼 나라에서 배웠어. 내가 살던 곳에서는 가르쳐 줬거든.”


이런 혜안을 기르게 해 주는 곳이 있다니. 희선도 거기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영국이 우리에게도 그....갈...라치기 라는 걸 할까요?”


“쉽지는 않겠지. 조선은 문화나 관습, 민족이 다 같아서 그런 방식은 어려워. 같은 사피엔이니 네안더를 써먹지도 못할 테고. 그래도, 뭐든 방법을 만들 수야 있겠지. 갈라치기는 원래 밑도 끝도 없이 나누는 거거든.”


희선은 숨이 턱 막혔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데 그런 사악하고 교묘한 방법을 사용할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팔복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 조선은 뺏어갈 자원도 별로 없고, 나라에 돈도 별로 없어. 뭐 뜯어갈 게 있어야 그런 짓을 하지. 내가 보기엔 아직 영국도 그럴 여유가 별로 없는 것 같고. 간만 보고 있나 봐. 아님 명을 뜯어먹을 때 필요한 전초기지 쯤으로 보거나.”


“그렇군요.”


물끄러미 희선을 보던 팔복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 세계는 사피엔들이 지배하는 게 맞지?”


생각지도 못한 걸 이야기해주더니, 또 누구나 아는 걸 묻는다. 이 사람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네, 그런 셈이죠.”


“네안더만의 나라는 없나?”


“옛날에 바이킹이라고 해서 유럽에서 여러 나라를 침략하기도 한 네안더의 나라인지 집단인지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지금은...”


“없다?”


“제가 알기로는 그래요.”


“왜 그렇지? 왜 네안더들이 사실상 지배당하고 있는 거지? 내가 보기에는 지능도 비슷한 것 같고, 네안더들이 완력도 사피엔보다 약간 더 센 것 같던데.”


“왜....그럴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희선은 정말 잘 몰랐다. 왜 그럴까. 막연히 사피엔이 나으니까 그렇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깨어있는 사람이라 여겼는데, 사피엔과 네안더도 평등하다 여겼는데, 결국 그녀도 사피엔이 네안더보다 더 우월해서 세상을 지배한다 생각했다. 그게 원래 세상의 이치인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보기엔 세상이 우스웠다. 사람들은 멍청했다. 저 밖에 넓은 세계가 있고, 신문물이 있다. 길쌈이나 하고, 아이나 키우는 조선의 여인들이 한심했다. 자신은 똑똑하고 많이 배웠으며, 조선의 답답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개척자가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희선 자신도 고정관념에 갇혀있는, 사대부가의 팔자 좋은 소녀일 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진짜 모르겠어요. 난, 내가 똑똑하다고,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팔복님과 이야기해보니 아무것도 모르네요.”


얼굴이 벌개진 희선을 보고 팔복이 화들짝 놀랐다.


“안 어울리게 왜 이래? 내가 여기 와서 대화해 본 사람 중에 제일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이 넌데? 나 열여덟 살 때랑 비교해보면 넌 현자다 현자.”


“몇 살이신데요?”


“나 서른다섯인데.”


허언이라 생각했다. 스물 네다섯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만.”


“믿거나 말거나. 내가 젊어 보이는 게 아니라 여기 사람들이 너무 빨리 늙어서 그래. 일을 많이 해서 근가, 볕을 많이 쬐서 근가....쩝. 암튼 넌 똑똑하고 박식하니까, 슬퍼하지 마. 오늘 대화는 여기까지.”


“조금만 더 이야기할 수 없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다 됐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면 뵐 수 있을까요?”


“아니, 당분간 여긴 못 올 것 같아.”


“어디 멀리 가십니까?”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해야 할 일이 좀 많아서 말이야. 그런데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쉽습니다. 더 듣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희선양, 안녕.”


희선은 정체도 모를 사내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도인 같기도 하고 기인 같기도 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강팔복님. 꼭 다시 봤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진짜 이름이 뭔가요?”


“또 볼 수 있을 거야, 희선양. 내가 고향으로 못 갈 가능성이 매우매우 크거든. 이름은 다음에 만나면 가르쳐 줄게.”


팔복은 강한 햇볕에 얼굴을 찌푸리며 천천히 걸어서 사라져갔다.




**




다음날, 개풍 대장간.


야장 웅수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갑자기 대장간을 내놓으라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영국군 보병대 중령인 고든 태빙턴이 승마 채찍을 오른손에 들고 말했다. 아직 젊고 인성이 좋지 못한 이였으나, 아버지를 잘 만난 덕에 고속 승진을 한 군인이었다.


[갑자기가 아니지. 우리 잉글랜드군이 1년 전부터 계속 이야기하지 않았나. 여길 우리가 좀 써야 하겠다고.]


예조에서 따라 나온 듯한 역관이 땀을 뻘뻘 흘리며 통변을 하고 있었다.


“여기 나으리께서, 1년간 기한을 주었다고 하시네.”


“1년전에 두 번, 그럴 수도 있다고 지나가듯 말한 것이 어찌 기한을 준 것입니까. 또 설사 그렇다고 팔천환밖에 안 되는 돈을 내놓고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여기서 일하는 인원만 해도 열다섯이 넘습니다.”


태빙턴 소령은 채찍을 왼손바닥에 툭툭 쳤다.


[계속 이야기를 해야 하나? 어차피 통보는 했고, 조선측이랑 이야기가 다 된 것이니, 난 이만 이 덥고 냄새나는 곳에서 나가야겠군. 기한은 두달이다.]


“태빙턴 나리께서 알렸으니 됐다고 하시네. 두 달 안에 비워 달라고 하시네.”


돌아서 나가려는 태빙턴의 앞을 웅수가 막아섰다.


“잠깐만요, 나리. 제 이야길 좀 들어보십시오!”


- 쫙!


태빙턴이 들고 있던 승마 채찍으로 웅수의 뺨을 후려쳤다. 웅수의 뺨이 찢어지며 붉은 피가 흩날렸다. 주위의 모두가 깜짝 놀랐다.


[더러운 네안더 놈이 어디서 감히 잉글랜드군 장교의 앞을 가로막는 거야? 한번만 더 내 앞을 막으면 그땐 이 피스톨로 쏘아버리겠다.]


오른쪽 허리춤의 휠락 피스톨을 만지며 태빙턴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태빙턴이 총에다 손을 가져다 대자 겁먹은 웅수는 주춤주춤 옆으로 비켜났다. 그 앞으로 태빙턴이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역관이 우물쭈물 말했다.


“아, 영국군 앞을 막으면 안된다 하시는군. 어쨌든 두달이네, 두달이야.”


역관이 태빙턴의 뒤를 따라 졸졸졸 뛰어갔다.


“야장, 괜찮소?”


“웅수 아재요, 피가 많이 납니다.”


주위에 서 있던 대장간 사람들과 네안더 야공 외석이가 웅수의 옆으로 몰려왔다. 털썩 주저앉은 웅수를 사람들이 일으켜 세우는데 대장간 안으로 희선이 들어왔다.


“와, 저 영국군 누구에요? 왜 저렇게 살기등등하지? 누구 하나 잡으러 나왔나.”


“애기씨 오셨습니까.”


“애기씨 어서오십시오.”


희선을 보고 다들 평소보다 훨씬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웅수가 희선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대해야 한다고 주의를 준 때문이었다.


“다들 안녕하....어? 야장 아재, 얼굴에 피가 나요! 어떻게 된 거에요?”


“조금 전에 좀 맞아서 찢어졌습니다.”


“어디 봐요. 많이 찢어졌는데?”


그 와중에도 웅수는 벌떡 일어나 희선에게 깊숙이 굽혀 인사를 했다.


“애기씨 험한 꼴 보여서 죄송합니다.”


“웅수 아재, 얼굴 돌려 봐요, 많이 다쳤어요.”


“애기씨, 말씀 낮추십시오. 천한 놈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닥쳐욧! 여기서 제일 독한 소주하고, 응, 휘어진 바늘 제가 갖다 둔 게 있어요. 진흙통 뒤에 있을 겁니다. 가느다란 낚시바늘 같은 거 갖고 와요, 어서! 그리고 명주실이랑 아주 깨끗한 천도.”


“네, 네?”


“소.주.랑. 바.늘. 빨.리.”


희선의 서늘한 눈빛과 단호한 말투에 몇몇이 노루처럼 뛰어갔다.



잠시 후.


“대충 됐네요. 길 건너 의원에 가봤자 이만큼 꿰매지도 못할 거에요. 흉은 좀 남겠네요.”


가위로 명주실을 자르며 희선이 말했다. 지켜보던 야공 외석이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애기씨. 어디 찢어진 걸 이 정도로 잘 꿰매는 건 처음 봤습니다. 도대체 애기씨는 무얼 어디까지 배우신 겁니까? 솔직히, 망치질도 담금질도, 단조(鍛造)실력도 저보다 나을 겁니다. 근력이 좀 없으셔서 그렇지. 그런데 의술까지, 허.”


웅수가 외석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애기씨 곡침 바느질은 먼저 간 우리 마누라한테 배운 거야. 옛날에 나 여기저기 찢어지고 다쳤을 때 우리 마누라가 치료해줬거든. 그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그때 열심히 보고 배우시더니 나중에는 대장간 사람들 요만큼만 다쳐도 바늘을 들고 달려오시더라고, 허허.”


희선이 외석을 보고 살짝 웃었다.


“의술은 전혀 몰라요. 그냥 찢어지면 꿰매는 것 정도만 알죠.”


“혹시 무예와 검술까지 밝으신 것 아닙니까? 소림 18반 이런것도?”


무술가 흉내를 내며 희선에게 말하는 외석이를 보고 웅수가 나무랐다.


“이놈아, 애기씨에게 함부로 농하지 말라고 말했었지.”


“아니, 저...”


괜찮다고, 이전처럼 대해 달라고 말하려던 희선은 웅수의 단호한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집으로 가게, 웅수 야장. 한 며칠간 얼굴에 물이 닿게 해선 안 되네. 땀도 많이 흘려선 안 되고.”


“안 됩니다, 애기씨. 내일 저녁까지 화승총 총열을 세 개 만들어야 합니다.”


“그거야 여기 외석 야공도 있고, 다른 일꾼들에게 시켜서 만들게. 오늘은 일해선 안 되네.”


“주문 제작품입니다. 비싼 물건입니다요. 제가 해야 합니다.”


허리 양쪽에 손을 얹은 희선이 허리를 숙이며 웅수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어떤 물건이기에 그러는가?”


“제프리 밀러 중령에게 주문받은 총열입니다. 다른 녀석들은 물론이고 외석이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물건입니다.”


제프리 밀러는 벽란도에 주둔중인 영국군 병참장교였다. 그 스스로가 기술자이기도 했고, 그래서인지 개풍 대장간에도 자주 드나들며 웅수나 희선과도 꽤 잘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그게 뭐냐고 묻지 않는가. 곤장을 맞고 싶은가.”


이 망할 애기씨는 어제 강상죄를 들먹인 보복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반상의 지엄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허허 외통수네, 하고 웅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구즈마키식 총열입니다.”


옆에서 듣던 메꾼과 풀무꾼들이 서로 쳐다보며 수근거렸다. 그들도 잘 모르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희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되물었다.


“보강고리를 사용해서 만들 작정인가?”


“그렇습니다.”


“그런 걸 영국군에게 만들어주어도 되겠는가.”


“밀러는 보강고리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가 제게 조언을 해 준 적도 있습니다.”


흐음, 하고 고개를 기울인 희선이 웅수에게 말했다.


“오늘은 집에 가 있게. 그건 내가 만들겠네.”


“애기씨, 망치 안 드신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그건 제가 직접 해야 합니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희선이 말했다.


“허면 야장, 묻겠네. 자네는 넉달 전 나와 만들어 본 후 만든 적이 있는가?”


“총열은 많이 만들었지요.”


“보강고리를 사용한 구즈마키 총열은 언제 만들었는가.”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웅수가 말했다.


“애기씨와 같이 완성해 본 후로는 만든 적 없습니다.”


“그럼 자네와 내가 다를 게 무엇인가. 집에 가게. 그러지 않으면 우리 집안 가노들을 다 불러서 여길 쑥대밭으로 만들겠네.”


“그래도..”


“그래도는 뭐가 그래도야. 잊었는가, 내가 개풍 대장간의 야공임을.”


틀린 말은 아니다. 2년전 공조에서 대장간 인원 조사 나왔을 때, 희선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서 제출해버렸다. 무슨 미친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공조에서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고 명단을 들고 가 버린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사대부가의 여식이, 그것도 예조판서의 딸이 천한 것들이 득시글거리는, 그것도 네안더가 야장인 대장간의 야공이었다 한다면 그대로 대장간이 폐쇄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웅수는 지금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쨌든, 더 이상의 반항은 의미가 없다. 웅수가 다친 볼을 만지며 힘없이 말했다.


“잘 부탁합니다, 애기씨.”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애기씨는 조총장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제목변경 공지 24.07.24 30 0 -
27 시집가는 날 (2) + @ 24.08.15 16 1 17쪽
26 시집 가는 날 (1) 24.08.14 15 0 12쪽
25 벽란도의 노을(완결) + 후기 24.08.13 16 1 9쪽
24 불, 힘과 마법 (6) 24.08.13 20 1 11쪽
23 불, 힘과 마법 (5) 24.08.12 17 1 12쪽
22 불, 힘과 마법 (4) 24.08.11 16 1 11쪽
21 불, 힘과 마법 (3) 24.08.10 17 0 11쪽
20 불, 힘과 마법 (2) 24.08.09 19 0 13쪽
19 불, 힘과 마법 (1) 24.08.08 21 1 12쪽
18 게임의 법칙 24.08.07 20 1 11쪽
17 총은 요술 부리는 막대기 24.08.06 21 2 11쪽
16 얼금이와 감실이와 흰돌이 24.08.04 21 2 11쪽
15 집으로 24.08.03 23 2 11쪽
14 그깟 대장간 24.08.02 25 1 13쪽
13 네안더의 전통에 네안더는 없다 24.08.01 30 1 13쪽
12 그지같은 영국음식 24.07.31 28 1 11쪽
11 화승총과 수석총, 매치락과 플린트락 24.07.30 34 2 11쪽
10 소와 양 24.07.28 30 2 13쪽
9 경국지색(傾國之色) 24.07.27 31 1 12쪽
8 입궐(入闕) 24.07.26 33 2 11쪽
7 총열과 세자빈 24.07.25 40 2 14쪽
» 야공 손희선 24.07.24 40 1 12쪽
5 갈라치기 24.07.23 43 2 12쪽
4 개풍 대장간 24.07.22 50 0 15쪽
3 몰래카메라 청년 24.07.19 69 0 14쪽
2 빨간 원숭이 24.07.19 119 2 13쪽
1 프롤로그 24.07.19 128 1 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