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씨는 조총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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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빨간돌고래
작품등록일 :
2024.07.19 11:52
최근연재일 :
2024.08.1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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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7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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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지색(傾國之色)

DUMMY

희선이 대기장으로 들어섰다. 두 명의 후보가 그녀보다 먼저 도착해 앉아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씨 집안의 덕여입니다.”


황덕여. 우의정 황희천 대감의 조카이다. 돌아가신 조부가 영의정까지 지냈던 황수관 대감. 안경을 낀 모습이 조금 특이했다. 그래서 그런지 약간 책벌레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받은 큰 인상은 좀 다른 것이었다.


‘박색(薄色)이구나. 안경을 써서 그리 보이나? 재(才)와 덕(德)에 장점이 있는 아가씨인가. 아니면 이 처자도 나처럼 들러리인가.’


속으로 다른 처자 얼굴 평가를 하며 희선이 일어서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예조판서 손병도 대감의 삼녀, 손희선이라 합니다. 재주도 없고, 덕도 많이 부족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둘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희선이 인사하자, 다른 한 규수가 서지도 않은 채로 말했다.


“반갑습니다. 이판 조경서 대감의 장녀, 조성신이라 합니다. 다들 정정당당히 잘들 해봅시다.”


조성신. 손병도의 말에 따르면 엄청나게 힘 있는 조씨집안의 거두(巨頭), 이조판서 조경서의 딸이자, 대비전의 의중이자, 가장 강력한 내정자이다.


예쁘장한 얼굴에 거침없는 말투, 165cm는 되어 보이는 꽤나 큰 키, 힘 있는 목소리, 약간 들어올린 턱과 살짝 내려까는 듯한 눈초리. 옆에 시립(侍立-양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살짝 굽혀 대기하는 자세)하듯 서 있는 두 몸종의 굳은 자세까지 보니 어떤 성품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희선은 옆에 서 있는 얼금이를 보았다. 시립은 고사하고 정전(正殿) 천장의 무늬들 구경하면서 코를 파고 있었다. 희선과 눈이 마주치자 얼금이는 뭐 필요하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희선은 그냥 씩 웃어주었다. 그래, 그게 얼금이 네 매력이지, 라는 눈빛과 함께.


“깨갱~”


조성신의 뒤에서 뜬금없이 개 소리가 났다. 조성신이 뒤를 돌아보더니 개를 안고 있던 몸종의 뺨을 때렸다.


“이 년이, 우리 찰스를 조심히 안고 있으랬더니 뭐하는 짓이야.”


화가 난 얼굴로 개를 받아든 조성신이 말했다.


“영길리에서 들여온 오터하운드라고 개입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찰스라고 합니다. 조선의 개와는 차원이 다른 훌륭한 품종이지요.”


어쩌라고. 그런데 궐 내에 개를 데리고 들어와도 되는 것인가, 왜 내 앞길엔 어딜 가도 저런 인간들이 하나씩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희선이 하는 찰나.


“물론 대비전에 이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없겠지요. 하지만 이조판서이신 우리 아버님께서 여기와 저희의 숙소에는 이 찰스를 데리고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묻지도 않은 걸 주절주절 이야기하던 성신은 황덕여의 옆에 서 있는 빨간머리 몸종 하나를 보았다.


“허, 네안더를 궐 내에 데리고 들어오시다니요, 그게 무슨 경우입니까?”


황덕여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맞섰다.


“네안더 차별을 금지하는 국법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법이 그렇다 한들, 예(禮)에 맞지 않다는 말입니다. 주상전하께서 계시는 궁 안에 네안더라니요.”


이미 희선은 손바닥에 참을 인(忍)자를 이미 열 번쯤 쓰고 있었다.


눈앞에 엄히 당부하시던 아버지 손병도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머릿속으론 이미 오만가지 말이 다 지나갔다. 죽고 싶냐, 니 개새끼도 들어왔는데 네안더가 왜 못 들어오냐, 너도 내 박치기맛을 한번 보고 싶으냐, 등등.


하지만 그녀는 해냈다. 싸우는 거 싫어요, 무서워요, 하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앉아만 있었다.


조성신과 황덕여의 입싸움이 심해지려 할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두 분 좀 바쁘시군요. 저는 한성부판윤 정윤구 대감의 차녀 정민화입니다.”


희선은 사람의 얼굴 뒤에 후광이라는 게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다들 똑같이 입은 다홍치마와 황색 저고리, 녹색 덧저고리는 정민화의 옆에선 다 회색으로 보였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를 태어난 지 18년 만에 알게 된 희선이었다.


‘우와, 저런 얼굴이 바로 미인이구나, 선녀로구나. 나한테 예쁘다는 말을 해준 사람들한테 저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


그녀는 그래도 내 얼굴 정도면 어딜 가도 빠지지 않지, 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나 정도면 괜찮죠, 예쁘죠 같은 시덥잖은 소리는 이제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아야겠다.’


정민화의 얼굴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 건 희선만이 아니었다. 막 싸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던 황덕여와 조성신도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싸움이 딱 끝나버리고 침묵이 이어졌으니까.


그야말로 대충격과 거기에 이은 적막이 시작된 그때, 싸우려다가 말문이 막혀 버린 둘을 대신해 희선이 나섰다.


“반갑습니다, 민화 님. 어서 오십시오. 저는 손희선입니다.”


예전에는 미혼의 처자들끼리 낭자, 아씨등을 부르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들어서는 그냥 이름 뒤에 님, 씨 등을 붙여 호칭하는 게 좀 더 일반적이었다.


“처음 뵙습니다. 조경서 대감의 딸, 조성신입니다.”


“황씨 집안의 황덕여입니다.”


싸우려던 둘도 어벙벙한 얼굴로 정민화에게 인사를 했다.


‘쟤들도 놀랐네, 놀랐어.’


뭔가 재미있어질 것 같은 느낌에 희선은 히죽 웃었다.



잠시 대기하는 중에도 정민화의 수모 두 사람은 쉬지 않았다. 옷 매무새를 고치고, 얼굴에 한 옅은 화장을 조금씩 손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더 빛나는 듯 했다.


“애기씨, 화장을 좀 해야 할까요?”


뭔가 분한지 얼금이가 희선에게 건의했다.


“음, 그랬으면 좋겠는데, 할 줄 아니?”


“아니오, 애기씨가 하셔야지요.”


“나도 화장할 줄 모르는데.”


“죄송합니다, 애기씨. 애기씨도 분칠만 조금 하면 저 아씨만큼은....”


“얼금아, 그만해. 날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셈이냐.”


희선이 열세살 얼금이와 투닥거리는 동안, 성신이 그새를 못 참고 아리따운 선녀에게 한마디 했다.


“민화 님은 외모 단장에만 너무 신경을 쓰시는 것 아닙니까?”


별 표정의 변화 없이 민화가 대답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무릇 세자빈이 되려고 하면 지, 덕, 체가 다 갖추어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수모를 둘이나 데리고 와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도 옷 매무새를 단장하고 화장을 고치고 있지 않으십니까.”


“아,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가 꽤 빈한(貧寒)한 집안에서 자라 이런 호사를 제대로 누려보지 못해 그렇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자수성가하여 겨우 부판윤이 되셨는데 제가 빈 간택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원 없이 한번 열심히 해보라 하여 이렇게 열심히 하는 중입니다. 보기 불편하셨다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요약하자면 우리 집은 넷 중 가장 별볼일 없는 가문인데, 여기에 총력을 다해보겠다, 뭐 이런 말인가. 조성신이 거의 확실하다고 했던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린 희선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아버지도 정민화의 얼굴을 보시지는 못하셨군요. 보셨으면 확신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조선 초기에는, 명문이긴 하나 실제로 부와 권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집안의 규수를 세자빈으로 뽑는 경우가 많았다. 외척의 득세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적인 고려와, 권력가들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며, 세자빈 간택은 점점 힘 있는 집안들의 정쟁 도구가 되어갔다.


이번에도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조성신이 세자빈이 될 터였다, 아마도.



잠깐의 대기 후, 대비전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제 곧 면접을 보게 될 것이었다. 궁 내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며 걷는 중에, 옆에서 누가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이야, 콧물이나 줄줄 흘리고 다니더니 이렇게 가짜로라도 얌전한 척을 하니 처녀티가 좀 나는구나.”


김규원이었다. 어릴 때부터 손병도의 집을 들락거렸기에, 그가 희선을 아주 잘 아는 만큼 희선도 그를 잘 알았다. 희선은 김규원의 모지리 시절도 훤히 알고 있었다. 손병도에게 혼나고 훌쩍거리는 규원의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어이구, 예조 참의 아저씨, 관복 입고 계신 모습을 보니 손톱만큼은 의젓해 보이십니다.”


“어허, 스승님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규원은 예전에 희선에게 글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훗, 궁에 들어온 김에 ‘스승님’의 과거에 대해 소문을 다 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런 무서운 곳에서 그런 막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란다.”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그런데 아버님은 안 보이시네요? 빈 간택은 예조가 주로 관장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네가 후보로 들어와 있으니 조심스러운 것 아니겠냐. 아마 만날 일은 없을 거다.”


“그렇군요.”


빙긋 웃던 김규원이 주먹을 꼭 쥐어보이며 말했다.


“사고치지 말고, 조심히, 조용히, 잘해.”


“알겠습니다.”


희선은 스스로가 이렇게나 주위 사람들에게 믿음을 못 주는 사람이었던가, 하고 반성을 약간 하게 됐다.



대비전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비전 앞에 도착하자 여러 상궁과 나인들이 네 후보를 둘러싸고 옷매무새나 머리, 장신구 등을 점검했다. 모두 같은 것인지,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살폈다. 한 상궁이 희선을 보고 말했다.


“여기 규수님은 화장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화장을 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까? 그건 몰랐습니다.”


“괜찮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나이 지긋한 상궁 한 명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자, 화장도구를 손에 든 상궁 셋이 후다닥 뛰어왔다. 한 4~5분 지났을까. 처음의 그 상궁이 거울을 희선에게 주었다.


“보기에 괜찮으십니까?”


잠시 손을 댄 것 만으로도 인상이 확 달라보이고 원래 꽤 미인인 희선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들은 장인이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이런 것에 너무 무지한지라.”


“아닙니다, 규수님이야말로 저희들같은....헉? 분칠장이들.....에게 보람....있는 얼굴이십니다.....”


상궁이 희선과 이야기를 하다 민화의 얼굴을 쳐다본 것이다. 그 상궁은 민화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희선에게 계속 말을 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희선이 인사를 마무리했다.


“네. 참 고오~맙습니다. 쯥.”



문 앞에서 잠시 기다리던 넷은 상궁들의 안내에 따라 입장을 하게 되었다.


들어가면 자리가 넷 있을 것이고 후보들은 가운데 자리에 앉고 싶어들 했다.


‘난 첫 번째나 네 번째로 들어가겠군.’


희선이 그렇게 생각하는 중에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졌다. 셋 다 2, 3번으로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특히 성신과 덕여는 민화를 어떻게든 4번으로 밀어내고 싶어했다.


희선이 나섰다.


“제가 네 번째로 들어가겠습니다.”


성신이 톡 쏘듯 말했다.


“그렇다면 민화 님이 1번, 덕여 님이 2번, 제가 세 번째로 들어가겠습니다.”


정민화 바로 다음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러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당연히 황덕여가 반대했다.


“왜 그렇게 입장해야 합니까? 제가 세 번째가 되겠습니다.”


‘아이고, 모르겠다. 니들 맘대로 해라.’


희선이 그런 생각을 하며 귀를 후비는 순간에, 대비전 상궁이 강력하고도 단호하게 정리했다.


“황가 규수, 조가 규수, 정가 규수, 손가 규수의 순서대로 입장하시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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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국지색(傾國之色) 24.07.27 32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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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풍 대장간 24.07.22 51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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