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주를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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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제
작품등록일 :
2024.08.1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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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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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혼(一魂)

DUMMY

첫번째로 뇌옥에 갇히는 영광은 나의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저 질문은 뭐지.

네 녀석이야말로 첫날부터 누굴 죽였다는 건가.


“어이. 왜 대답을 하지 않는거지?”


녀석을 상대해 줄 생각은 없었다.

하루는 길고도 짧은 시간이다.

한참 성장해야 할 꼬맹이인 내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버티기에는 길지만,

이곳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찾아내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벙어리인가? 너는 몇등급 녀석이지?”


코 끝을 벽에 밀착시키고 손가락 끝으로 섬세하게 뇌옥의 벽면을 더듬었다. 하지만 내가 갇힌 공간 자체가 워낙 협소한 터라 생각보다 금방 수색이 끝나버렸다.


아쉽게도 이 안에는 없다.

아무래도 뇌옥 전체를 모두 둘러봐야할 것 같다.


“이봐. 말동무를 좀 하자고. 같이 이곳에 갇힌 처지에. 심심하지 않아?”


먼저 갇혀있던 녀석이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녀석의 존재가 신경쓰였지만 어차피 이 어둠 속에서 나를 보지는 못할 터. 옷 틈 사이에 끼워놨던 도구들을 꺼내들었다. 나무패 귀퉁이를 떼어내 만든 작은 나무조각과 임풍 교두의 단검에 붙어있던 작은 철제장식.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작업을 시작했다. 오른손이 편치않아 속도가 더뎠다. 이전 같았으면 순식간에 끝났을 일에 꽤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찰칵. 작은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미세한 소리지만 혹시 녀석이 들었을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또 다른 꼬마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마지막으로 대화를 시도한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지쳐서 잠들어버린 것일지도.


가만히 창살을 열고 나와 뇌옥 통로를 거닐었다.

조용한 발걸음은 살수의 기본 덕목.

이곳 저곳을 헤집고 다녀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저쪽 끝에 갇혀있는 녀석의 새근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어둡고 축축한 극한의 환경에서만 자라는 이끼, 습태(濕苔).

대부분의 이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지만, 지금 나에게는 꼭 필요한 물건이다.


그다지 넓지 않은 뇌옥이지만 손 끝의 감각에만 의존해 전체를 살피는 데에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루하고 끈질긴 수색 끝에···


‘....!’


마침내 내가 찾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까슬까슬하고 서늘한 감촉. 미세한 박하향기.

내가 찾던 습태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 위치가 하필 또 다른 꼬마가 갇혀있던 동굴의 앞이다.

벽 틈새의 이끼를 손톱으로 살살 긁어내고 있는데,


불쑥.


창살 너머 튀어나온 손이 나의 발목을 붙잡았다.


“너, 뭐야?”



#



꼬마치고 손아귀 힘이 대단하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텐데 내 발목을 정확하게 잡아챈 것도 놀라운 일이다.


“너, 뭐야? 어떻게 빠져나왔지?”


녀석의 손을 걷어차거나 도구로 찌르는 방법이 있겠지만, 소란이 일어나게되면 내가 창살을 뚫고 빠져나온 것을 들키게 된다. 애써 마련한 도구들을 빼앗기거나 교관들의 의심을 사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냥 문을 미니까 열렸다. 제대로 안닫혔던 것 같아”


“이제야 입을 여시는군”


여전히 내 발목을 움켜쥔 녀석이 흥 코웃음을 쳤다.


“이것 열어봐라. 나도 나가고 싶다”


“말했잖아. 나도 열쇠가 있어서 나온게 아니야. 그냥 미니까 열렸다니까?”


“그럼 나도 문 여는 것을 도와줘”


녀석이 창살을 붙잡고 힘을 썼다.

녀석이 여전히 내 옷깃을 꼭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그를 도와 창살을 밀고 당기는 시늉을 했다.

한참동안 헛힘만 쓴 녀석이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이곳은 너무 좁고 답답하단 말야. 네놈은 운도 좋군”


말없이 다시 돌아가려는데 녀석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딜 가려는 거야?”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지”


“...왜 굳이?”


“문이 열려있길래 잠깐 몸을 풀었을 뿐이야. 내가 복도에 나와있는 것을 보면 교관들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이미 나와있잖아? 다시 돌아가면 뭐가 달라지나?”


“얌전히 들어가서 문 닫고 있으면 눈치 못채겠지”


“가지 마라. 나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하자”


“이야기는 저기서도 할 수 있어”


“거짓말. 네 자리로 돌아가고 나면 또 내 말에 대꾸도 안할거잖아?”


정확하다.


“내 말동무를 해주지 않으면 네 녀석이 마음대로 돌아다녔다는 것을 교관에게 일러바치겠어. 그럼 네 녀석은 최소 하루정도는 더 있어야 할 지도 모르지. 아무리 그들의 실수라 하더라도”


이미 습태도 충분히 확보했겠다, 이곳에 갇혀있는 기간이 길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녀석의 앞에 주저앉았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거지?”


“그냥. 아무거나. 앞으로 일주일이나 이곳에 갇혀 있어야 한단 말이야. 혼자 있으면 너무 심심하다고”


“나는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딱 일 각 정도만 네 상대가 되어주지”


“너무 짧은데?”


“싫으면 말고. 그냥 고자질해라. 하루 정도 더 있지 뭐”


“좋아. 일 각”


합의에 도달하자 녀석이 나의 옷깃을 놓아주었다.


“몇 살이지?”


“열두 살”


“나는 열네 살. 내가 형이로군. 형님이라 불러라”


“사실은 열네 살이다”


“거짓말. 네놈 목소리가 열두 살일 수가 없어. 아마 열두 살이라는 것도 뻥일지도 모르겠군”


처음부터 느낀 거지만 감이 굉장히 좋은 녀석이었다.


“너는 뭐 때문에 갇혔어? 하루만 있으면 된다는 걸 보니 누굴 죽인 것은 아닌가보군”


나 자신에 대해서 미주알 고주알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녀석이 관심있어 할 만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듯한 주제로 되려 질문했다.


“너는? 정말 사람을 죽였나?”


“죽였지”


“어쩌다가?”


“녀석이 나에게 시비를 걸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들로 우리 엄마를 모욕했지. 그래서 죽였다”


가족을 건드리는 것은 인정이지.

한번도 가져본 적은 없지만.


그런데 녀석이 낄낄낄 웃더니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했다.


“사실은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것일까.


“교관에게 둘러대느라 댄 핑계일 뿐, 사실 그런 거창한 모욕같은 것은 없었어. 물론 어느 정도 시비를 걸긴 했지만 죽일 정도는 당연히 아니었지”


“이곳 천마신교라는 곳이 어디까지 나를 내버려두나 시험해 본 거야. 역시나 내 짐작이 맞더군. 고작해야 일주일 뇌옥에 갇히는 것이 전부라니”


“여긴 참 나에게 딱 맞는 곳이야. 어차피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언젠가 잡혀서 죽었겠지? 그런데 여긴 밥도 공짜로 먹여주고, 무공도 가르쳐주고, 살인을 해도 내버려두고···”


“나는 깨달았지. 이곳에서는 내가 조금만 더 쎄지면, 살인을 마음대로 저지르더라도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겠구나”


미친 놈이구나.


“왜 그런걸 나에게 이야기하지? 네가 거짓말했다는 것을 교관에게 일러바치면 어쩌려고?”


“그럼 내 두번째 살인이 네가 되겠지”


중원 각지에서 버려지거나 떠도는 아이들을 모아놓았으니 개중 거친 아이들이 섞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곳에서 훈련을 받다보면 실제로 다른 아이들을 불구로 만들거나 죽이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하지만 이 녀석같이 완전히 미쳐버린 - 그것도 피에 미친 녀석은 드문 일이었다.

갑작스레 무언가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고향이 귀주 쪽인가?”


“...어떻게 알았지?”


녀석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붕- 손을 휘젓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나는 창살로부터 한발자국 떨어진 다음이었다.


“그쪽 지방에서 온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 너랑 비슷한 사투리를 쓰더군”


정확히는 전생에서 만났지.

성인이 되었을 때의 너를 말이야.


살귀, 일혼(一魂)


내가 한때 몸담고 있던 살혼대의 선배이다.

너무 악명이 높아 이례적으로 별칭까지 붙었다.


암혼동에서 워낙 살인을 많이 저지른 탓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찍 살혼대로 옮겨졌다고 들었다. 살인 능력만큼은 독보적이었지만 살기가 너무 짙어 오히려 중요한 임무에서는 번번히 배제되었다.

그것에 불만을 품고 상관까지 살해.


수십명을 죽이며 도주하던 그를 결국 찾아내고 숨을 끊어낸 것은,

바로 전생의 나다.


“그러고보니 나에 대해서만 떠들었던 것 같군. 너는 누구지? 몇등급이고, 어느 지역에서 왔지?”


내내 어린아이 같던 녀석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일각. 지났다”


“앉아”


대꾸하지 않고 걸어가자 녀석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리와! 돌아오라고!”


창살 안에 갇혀있는 녀석으로서는 더이상 나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습태도 충분히 확보했겠다, 조그마한 동굴로 돌아가 다시 문을 닫고 몸을 뉘였다.


그가 현재 몇등급인지, 몇번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살인까지 저지른 녀석이니, 나가서 몇군데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녀석 정도면 일등급으로 분류되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녀석이 몇마디 말을 중얼거렸지만 신경쓰지 않고 눈을 감았다.

전생에서 직접 죽였던 이를 마주하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홍옥을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


그때는 그저 임무의 하나였을 뿐이니까.

감정 따위는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와라”


교관이 태평하게 자고 있던 나를 깨웠다.

배가 고픈 것을 빼면 여러모로 수확이 있었던 뇌옥 체험이었다.


교관을 따라 뇌옥을 빠져나갈 때, 갑작스레 일혼이 말했다.


“재미있군. 문이 열려있던 게 아니었어”


“응?”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교관이 얼굴을 찌푸렸다.

성큼성큼 그가 갇혀있는 동굴 앞으로 다가간 교관이 탕탕 창살을 두드렸다.


“쓸데없는 말 하지말고 얌전히 있어! 넌 아직 한참 남았다”


일혼이 입을 다물었다.


기관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돌이 닫히기 전에,

녀석이 외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너, 기다려. 내가 언젠가 찾아가겠다”


다른 녀석이면 몰라도, 저 미치광이 살인마가 그런 말을 하니 꽤나 으슬으슬했다.



#



“저 빌어먹을 자식이···”


교관이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때마침 쾅. 육중한 소리와 함께 기관문이 닫혔다.


잠시 다시 문을 열까 고민하던 교관이 결국 등을 돌렸다.


“저 녀석과 쓸데없이 시비가 붙었던 건 아니겠지?”


“저는 별 말 안했습니다. 혼자서 주저리 말이 많던데요”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저 녀석은···”


교관이 말꼬리를 흐렸다.

아마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녀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아도 그가 나를 찾아오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되는 일이었다.

살인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심지어 즐기기까지 하는 녀석이다.

전생에서 벌어진 일을 돌이켜보더라도 두번째, 세번째 살인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고, 그 목표 중에 내가 새로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문을 땄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나, 나의 위치를 정확하게 잡아내는 것만 보아도 그의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쉽지 않은 상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오라.

와봐라.

너에게 죽을 정도라면 회귀를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돌아왔구나!”


널빤지 숙소에 발을 들이자 같은 조 아이들이 나를 반겼다.

같이 싸우고도 나만 쏙 처벌을 받은 것에 대하여 미안한 눈치였다.

애초에 나 때문에 싸움이 시작된 것을.

아직 무르고 어린 아이들이다.

나의 편을 들어 같이 싸워준 것도 그렇고.


“뇌옥은 어때? 정말 교관들 말처럼 무시무시한 곳이던가?”


“정말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줘? 물도?”


재잘대는 아이들에게 훠훠 손을 저어보이며 자리에 누웠다.

누추한 숙소지만 그래도 습기와 어둠 가득한 뇌옥보다는 백배 낫다.


“무시무시한 곳은 아니고, 쫄쫄 굶기는 것은 맞다”


“으아···”


“그나저나, 나 출소했는데 먹을 것도 안 남겨놨나? 저녁밥은?”


공중을 헤메던 아이들의 눈이 조장인 덩치에게로 향했다.

잔뜩 기죽은 덩치 조장이 우물쭈물하다가 답했다.


“우리도 못먹었어. 사실···”


제길.


이어진 녀석들의 설명을 듣다보니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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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천무관 +2 24.09.14 603 22 14쪽
36 졸업 +2 24.09.13 618 22 14쪽
35 삼년 뒤 +2 24.09.12 694 24 14쪽
34 떠나는 순간 +2 24.09.11 737 21 14쪽
33 취조 +2 24.09.10 726 21 13쪽
32 군사(軍師) +2 24.09.09 742 21 13쪽
31 사도(司徒) +3 24.09.08 827 17 13쪽
30 내가 그렇게 정했다. +3 24.09.07 881 23 15쪽
29 약속 +2 24.09.06 906 20 12쪽
28 예감 +3 24.09.05 929 15 14쪽
27 발단 +2 24.09.04 950 15 13쪽
26 시비 +3 24.09.03 943 20 14쪽
25 알 수 없는 일 +2 24.09.02 952 24 14쪽
24 환희 +3 24.09.01 1,007 20 12쪽
23 증명 +3 24.08.31 990 19 13쪽
22 질주 +2 24.08.30 988 20 12쪽
21 평가 +2 24.08.29 1,010 21 14쪽
20 씨앗 +3 24.08.28 1,027 20 13쪽
19 실험 +3 24.08.27 1,032 19 14쪽
18 자령화 +2 24.08.26 1,009 20 13쪽
17 수색 +3 24.08.25 1,017 18 14쪽
16 목표 +3 24.08.24 1,024 20 14쪽
15 두번째 만남 +3 24.08.23 1,065 18 12쪽
14 살인 +3 24.08.22 1,054 21 15쪽
13 사백이십삼, 사백이십사 +3 24.08.21 1,084 19 13쪽
12 마화단(魔火丹) +2 24.08.20 1,087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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